ㅡ콰득

케인의 끝이 날뛰던 괴물의 심장을 관통했다. 유기물을 꿰뚫는 감각보단 여기까지 오며 숱하게 상대했던 무기물을 부순 느낌이 더 강했다. 팬텀은 불쾌한 손맛을 털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치명상을 입혔다지만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상대는 이미 반쯤 기계화된 무언가다. 심장을 부순 정도로는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파직, 파지직!

꿰뚫린 심장을 중심으로 격렬한 스파크가 튀겼다. 한차례, 강력한 에너지 폭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스킬을 써서 간신히 몸을 지킨 팬텀이 인상을 찡그리며 자세를 가다듬은 순간.

"당, 신..."

블랙 헤븐에 진입한 이후 듣던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아닌,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세가 무너진 스우가 잔해 위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며 팬텀은 들고있던 케인을 살짝 밑으로 내렸다.

"제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더이상 싸울 힘도 없어보이고."

"큭... 그렇, 군요. 당신... 말대로... 입니다. 설마, 같은 인간한테... 두 번이나 죽을 줄은... 하아, 몰랐군요."

누전된 전류가 전신에서 스파크를 튀기는 모습은 자못 기괴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도 팬텀은 코웃음 쳤다.

"아리아가 지키고자 했던 세계에 위협이 된다면 두 번이든 세 번이든 못 죽일 것도 없지. 그래. 더 할 말이라도 있나?"

"큭, 어지간히도... 미움받고 있군요... 당신이라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처음에야, 이해하지 못했죠. 어째서 나약한 인간 하나가... 죽었다고 그렇게까지 분노하는지. 하지만 제 손으로 오르카를 죽일 뻔 하고나니, 쿨럭, 알겠더군요. 어째서 당신이 그렇게 저에게 집착했는지."

감정이 말소된 인형이 된 다음에야 인간의 감정에 공감했다는 말인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는, 고맙다고 해야겠군요. 비록 제가 겔리메르를 쓰러뜨릴 순 없지만, 당신은 그를 쓰러뜨릴테니."

큭큭, 하고 웃는 스우의 말에 팬텀은 기분이 나빠져서 대꾸했다.

"...네 복수를 대신 해줄 생각은 없는데."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쿨럭. 결국 당신은 아리아 여제가 지키고자 했던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을테니까."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 말대로, 자신은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겔리메르를 쓰러뜨릴 테니까. 타인의, 그것도 원수의 복수에 이용된다는 감정은 상당히 기분 나쁜 것이었다. 그게 자신이 원래 하려고 했던 행동이었어도. 불쾌해진 팬텀은 대화를 끊기 위해 주제를 돌렸다.

"유언은 끝인가?"

"...한 가지."

"뭐지?"

"아리아 여제를 죽인건... 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뭐?"

그 짧은 말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약간 필요할 정도로 말도 안돼는 개소리였다. 그가 여제를 죽이는 것은 오르카의 꿈 속에서 그가 직접 본 장면이었다. 거기엔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아니면 아닌거지 아닐지도 모른다는건 무슨 개소리인가?

"아리아 여제를 실제로 죽인건 분명, 저입니다. 하지만, 아리아 여제를 대면한 순간... 저는 눈 앞의 인간을 죽이라는, 대항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누군가의 의지를 느꼈습니다."

쿨럭,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낸 스우가 말을 마저 이었다.

"제가 분명 인간을 괴롭히는걸 좋아한다지만, 쿨럭, 개인적 취미 때문에 임무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리아 여제와의 회담은 계획된 일이었고,저는 분명, 회담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리아 여제를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검은 마법사는 질책하지 않았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고 기침을 하며 되묻는 스우의 말에 팬텀이 침묵을 유지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대항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누군가의 의지라는건 개소리라치고, 회담을 파토낸 스우에 대한 어떤 질책도 없었다? 회담의 파토 자체가 목적인게 아닌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있을 무렵, 폐허 너머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스우?"

"오르카..."

"스우, 스우!"

한쌍의 백금발을 휘날리며, 오르카는 잔해 위로 쓰러진 스우를 향해 뛰어갔다.

"괜찮은거야, 스우?!"

"미안... 해. 대화할 시간 정도밖에."

"아니야, 아직 안늦었어! 정령으로 돌아가자, 우리! 그러면 스우도 살 수 있어!"

"...그러네. 아직, 방법이 남아 있어... 하지만..."

오르카의 제안에 스우는 말끝을 흐리면서 아직 자리에 남아있던 팬텀을 바라봤다. 그제야 오르카의 눈도 팬텀을 향해 돌아갔다. 그가 과연 그들이 정령으로 돌아가는 것을 얌전히 지켜보기만 할 것인가? 파르르 떨리는 두 쌍의 눈동자를 마주한 팬텀은 고민했다. 아리아의 원수가 살아날 방도가 존재했다. 조금 전까지야 곧 죽을 놈이니 상관이 없었지만 이렇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긴 고민을 마친 팬텀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죽을 때까지 평생 내 눈에 띄지 마. 그리고 어떤 위험에서든지 이 세계를 지켜. 마지막으로 너희같은 것들도 용서한 아리아에게 평생 감사하며 살아. 이걸 약속할 수 있다면 눈감아주지."

"약속할게! 약속할 테니까!"

오르카는 다급하게 외치며 스우를 끌어안았다. 이제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거면 됐겠지, 아리아.'

살풋 미소짓는 아리아의 모습이 보인 듯 했다. 그래. 이거면 된거다. 복수는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 라고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아리아가 살아있었다면 이 선택을 칭찬했으리라. 아리아는 그들을 용서했으니까.

물론 저 둘의 꼴을 오래 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

[큭, 코어 폭주때문에 끊겼던 통신이 겨우 복구됐군.]

느닷없이 허공에 거대한 대머리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 있는 누구도 저 대머리에게 좋은 감정을 가진 자가 없었다.

[뭐야? 뭐하는거냐, 스우! 넌 나의 인형이다! 어서 다시 일어나 싸우지 못해?]

"닥쳐, 이 대머리! 스우는 네 인형이 아니야! 내 소중한 쌍둥이라고!"

[시끄럽다! 에에잇! 말을 듣지 않는 인형에겐 벌이다!]

"크윽...!"

"꺄악!"

파지직! 하고 스우의 몸에서 튀기던 스파크가 한층 더 격렬해졌다. 격렬한 스파크에 스우와 그를 붙잡고 있던 오르카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뭐야, 동력원 부분이 완전히 파괴됐잖아? 코어의 폭주는 그 탓인가? 폭주때문에 제어 스위치도 말을 안듣고...]

혼자 중얼거리던 겔리메르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인형으로선 더이상 못 써먹겠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에잇!]

꾹, 하고 화면 너머로 수상해보이는 버튼을 눌렀다. 순식간에 거대한 에너지가 스우의 몸에 집속됐다. 절대로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에너지의 집약에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스우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오르카를 팬텀쪽으로 강제로 밀쳤고, 팬텀이 반사적으로 오르카를 받아든 뒤 무적 스킬을 발동한 순간.

콰광!

아까의 폭주와 맞먹는 에너지 폭발이 주변을 다시금 휩쓸었다. 잔해를 모조리 갈아버린 폭발은 한참이 지나서야 멎었다. 폭발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겔리메르의 홀로그램과 완전히 쓰러진 스우의 육체만이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스우우우우우우우우!"

품 안에 있던 오르카가 달려나가는 장면을 팬텀은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딱히, 이런 결말에 대해 동정하거나 하진 않는다. 말 그대로... 업보였다. 아니, 오히려 여지껏 저질러왔던 일들에 비하면 꽤나 편안한 최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결말은 아니었다. 갱생의 여지는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용서한 것은 아니나, 어쨌건 팬텀은 아리아의 의지를 존중해 저들을 원한의 굴레에서 해방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 직후에 미치광이 과학자 하나의 손에 파탄나는 결말이라니. 이럴거면 차라리 다시 한 번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는 것이 납득갈만한 결말이었다.

[질긴놈들! 아직도 살아있나! 남은 에너지를 몽땅 끌어모아 자폭시켰는데도 살아남다니!]

다시금 홀로그램에서 팬텀에게 아직 할 일이 남았음을 상기시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얼굴을 보니 스우의 복수에 이용된다는 찝찝한 감정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원수의 복수고 뭐고, 그냥 저녀석은 존재 자체가 메이플 월드에 해가 되는 녀석이었다.

"..."

찝찝한 결말을 맞은 둘을 잠시 어깨너머로 흘끗 본 팬텀은,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서서히 사라지는 하얀 마법사의 육체를 보며 팬텀은 여지껏 답을 들을 일이 없을거라 생각한 질문을 던졌다.

"잠깐, 마지막으로 묻지. 아리아가 죽은 날, 스우에게 개입한 것은 너였나?"

"...예. 맞습니다. 당신은 저를 해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미래를 살펴봐도 당신이 여기까지 도달하기는 커녕, 영웅으로 합류하는 미래는 없었습니다. 단 하나. 여제 아리아가 군단장의 손에 죽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너...!"

끓어오르는 분노에 말문이 턱 막혔다. 동시에 자책감이 들었다. 아리아가 죽은 이유는 자신이 대적자이고 그녀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서로 알지 못했다면, 그랬다면 아리아가 죽을 일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하얀 마법사의 말이 이어졌다.

"스우와 오르카에게 접근한 것도 그때문입니다. 그들의 육체를 만들때, 의도적으로 가학적인 성향을 극대화했습니다. 필요할 때,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문제는 스우가 너무 성실해서 결국 제가 재차 개입할 수밖에 없었죠."

오르카의 기억을 엿봤을 때가 떠올랐다. 분명 정령이었을 당시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영역에 접근하는 인간을 놀래키는 정도의 장난만 치는 존재였다. 그런 정령들이 어째서 그리도 잔혹하게 변했는가. 그 진상이 지금에서야 밝혀졌다.

"어쩔 수 없었다... 라는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분노할 자격이 있..."

퍽! 하고 팬텀의 주먹이 사라져가는 하얀 마법사의 얼굴에 꽂혔다. 얼얼하게 부어오른 뺨을 매만지는 하얀 마법사를 보며 팬텀은 말을 내뱉었다.

"고작, 고작 그딴 일 때문에 아리아는...! 내가 겨우 대적자라서...!"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내뱉던 말을 멈췄다. 자신이 대적자이기 때문에 아리아는 하얀 마법사에 의해 정해진 운명에 따라 죽어버렸다. 그리고 하얀 마법사는 그런 정해진 운명을 타파하고자 이런 일을 벌였다고 한다. 지독한 모순이다. 하얀 마법사는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에게 정해진 운명을 강요한 것이었다.

"...너는 지금껏 내가 본것들 중에 최고로 쓰레기야."

내뱉는 팬텀의 말에 하얀 마법사는 쓰게 웃으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당신에게도, 아리아 여제에게도. 제 계획을 위해 희생된 모든 이들에게도. 하지만 부디 그 분노를 잊지 말아주세요."

희미해져가는 하얀 마법사의 목소리가 에르다의 흐름 속에 아련히 울려퍼졌다.

ㅡ운명을 훔칠 괴도여.



"...가는건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지려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팬텀은 괜스레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인물은 흘끗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이유도 없이 오래 있을만한 곳은 아니잖아? 죽일듯이 노려보는 사람들도 많고."

주변을 돌아본 오르카는 "무서워라."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찡그리는 사람들이 몇명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녀가 만든 조직인 블랙윙에 마을이 점거당했던 레지스탕스들이 그러했고,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영웅들- 루미너스나 메르세데스, 은월은 오르카가 자행했던 만행을 뻔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이유야 어쨌든 오르카가 검은 마법사 토벌에 지대한 공을 세운것은 사실이고, 지금 이 자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팬텀이 별다른 말을 않기에 다들 입을 다물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팬텀은 하얀 마법사에게 진실을 들은 다음부터 오르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대적자'가 아니었다면, 이녀석은 아직도 육체를 가지지 못한 어둠의 정령이고 그저 어두운 숲 어딘가에서 자신의 쌍둥이와 함께 인간에게 장난이나 치며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오르카와 스우가 그와 마찬가지로 운명에 희롱당한 희생자이며, 심지어 그들의 잔혹성이 검은 마법사에 의해 의도적으로 심어진 것이라고 해도, 동정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그것만으로 커버하기엔 너무나 큰 잘못을 벌여왔다.

"...뭐, 약속은 잘 지키고 있군. 하나는 말이야."

"뭐? 아, 그거... 뭐어, 본의는 아니지만 그렇게 됐네. 앞으로도 잘 지킬지는 모르겠지만."

"지키라고. 울며불며 지키겠다고 약속했잖아? 구와르가 그러던데. 스우 없이 힘을 쓰느라 수명을 꽤 많이 깎아먹었다고. 남은 삶이라도 무사히 보내고 싶으면 잘 지켜야지."

"기껏 도와주러 왔던 정령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힐라가 만든 미궁에서 안나오고는 못배기게 빌빌거리고 있던게 누구였더라?"

잠시 서로를 노려보던 둘은 동시에 등을 돌렸다.

"사고치고 다니지 마라."

"하? 오르카를 뭘로보는거야?"

"뭘로 보긴. 전 군단장이지. 널 못믿는데 이것만한 이유가 있나?"

"그건..."

오르카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망설이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게 됐어."

"...뭐라고?"

오르카의 입에서 나올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 한 말에 팬텀의 고개가 돌아갔다. 오르카의 말에 놀란건 팬텀만이 아니었다. 경악이 주변을 감쌌다. 대체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나 귀를 의심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사과하고있는거야. 오르카가 한 일들에 대해서."

"...검은 마법사랑 싸우다 머리라도 다친거냐?"

"비꼬지 마. 오르카도 이런거 안어울린다는 자각은 하고 있거든? 그냥, 스우가 죽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던것 뿐이야."

오르카는 우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진심으로 사과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우가 죽고 나서 생각이 많았다는 점은 사실같았다.

"하여튼, 사고치고 다니지는 않을거야. 의도는 어쨌든, 오르카의 손으로 구한 세계라고 생각하니까 나름 애착도 생기더라고. 몸을 얻기 전처럼 장난정도는 치고다닐지도 모르겠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금 자리를 떠나는 오르카의 뒷모습에 대고, 팬텀은 말을 던졌다.

"...잘해줬어."

그 말에 오르카는 뒤를 흘끗 돌아보며 대답했다.

"...너도 나름, 뭐, 수고했어."

둥실, 하고 오르카의 몸이 떠올랐다. 하늘 위로 날아오른 오르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팬텀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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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너고랑 뭐이악은 지금 다시봐도 웃음벨이네. 스너고까지는 어떻게 비슷하게 넣어보겠는데 뭐이악은 도저히 쓸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