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리 말기~대격변 초반을 깔짝하다 게임을 접고 최근 6년만에 복귀했다.  

찰흙그래픽과 x구린 타격감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지만, 불성 이후 네번의 확장팩을 거치면서 상당히 깔끔해진 파티클과, 수십개의 신규 지역들의 풍경을 보며 퀘스트를 하자니 복귀유저인 나에겐 와우란 게임이 익숙하면서도 격세지감이란 생각이 든다. 

불타는 성전 시절의 유저 편의 인터페이스는 너무나도 열악했었다. 당시의 유저 편의성이 땅이라면. 지금은 우주 저 너머의 안드로메다 정도의 차이랄까? 그만큼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초기의 와우는 무척이나 끔찍하였고, 확장팩을 몇차례 건너뛴 나에겐 그 차이점이 더 확연이 느껴졌다. 인터페이스는 점점 더 유저편의적으로 바뀌고, 컨텐츠는 많아졌지만 지금의 나에게 불타는 성전이란 확장팩이 더 기억에 남고, 현재와 비교하게 되는 이유는 단지 추억이기 때문이였을까? 아무튼 쿨타임 꽤나 돌았는데 추억팔이좀 해도 될까요?

 

  

 

1. 첫 번째 확장팩과 폭발적인 인구증가

 

워크래프트를 안했어도 일리단과 아서스는 안다. 라 말할 정도로 당시 피시방은 카오스의 대중화, 시도때도 없이 들려오는 파오캐 소음테러등 워3 유즈맵의 보편화로 와우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블리자드라는 회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었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출시는 반복 노가다가 전부였던 당시의 양산형 게임들을 사뿐히 즈려밟고 MMORPG의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울온아재들 피꺼솟^^). 게이머의 본능이 꽃필 시기인 10대 후반~20대 게이머층을 순식간에 흡수하여 PC방을 가면 지금의 롤이 그러하듯, 과장이 아니라 삼할이 넘는 사람들이 와우를 하고 있었다.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보기엔 너무나 당연하지만

 

신종족 블러드엘프와 드레나이, 새로운 대륙, 바쉬 켈타스 일리단,

하늘을 나는 탈것, 주술사와 바퀴의 트레이드, 낙스풀셋이 똥템이 되는 기적같은 리셋!

 

아 얼마나 신선하고 충격적인가!

인구역전 현상을 불러일으킨 블러드엘프의 출현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유저들의 가슴을 끓어올리게 만들었고, 오리 레이드를 순식간에 휴지조각으로 만든 61녹템의 위엄과 날탈의 출현. 기존의 관념들을 깨버리는 충격적인 첫번째 확장팩 불타는 성전에 국내, 해외를 막론하고 전 세계가 관심을 쏟았고, 트레일러의 블엘 누나의 활약(?)에 힘입어 신규유저 역시 폭발적으로 들어왔다. 

 

 

 


<지금봐도 명짤>

 


추억팔이 떡밥이 몇년이 흐른 시점에도 쿨타임 돌때마다 나오는 근본적인 원인은 불타는 성전 이라는 확장팩이 시리즈중 가장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나와 같은 게임을 했었고 그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인구 자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인원으론 리즈시절을 찍은 리분보다 불성이 더 지겹게 회자되는 이유? 

리치왕의 분노에 비해 불성의 시스템적 부분과 밸런스는 모든 면에서 끔찍할 정도로 불편하고 갑갑했었다. 물론 '더 힘들었다' 정도로 기억이 남는다는 주장을 하고싶은건 아니지만, 군대에서 조가튼 선임만 기억나고 잘해주고 무난한 선임은 이름조차 떠올리기 어렵듯 힘들었던 기억이 더 오랫동안 남는다는 사실. 그것과 별개로 '플레이포럼' 이라는 사이트의 존재를 들고 싶다.

 

 

 

2. 게임보다 더 재밌던 커뮤니티질


 



<아카이브로 본 플포. 왜 망했지?>


 

현재 대한민국 no.1 게임사이트가 된 인벤과 비교할수도 없을 정도로 당시 플레이포럼은 말 그대로 '흥했었다'.

와우를 잠깐 쉬어도 플포(와갤)는 못 끊겠다란 말이 나올 정도로, 위에 말했듯 10~20대의 코어게이머들이 한 사이트에 결집된데다, 30개가 넘는 서버에서 하루를 고사하고 굵직 굵직한 사건들이 매일 몇 건씩 터져나오니 어찌 재미없을리 있겠는가? 골팟의 태동으로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올 수 있는 온갖 병크들이 매일 수 없이 쏟아졌고 닌자, 여왕벌사건, 공대갈등. 헥헥. 말하기도 벅차다. 지금 인벤에서 간간히 터지는 사사게 역대급 사건들이 매일 실시간으로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놀랍게도 지금의 사건 사고 게시판이라는 이슈를 종합할 수 있는 게시판이 플포에게는 없었고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각각의 섭게에서 일어났다. 

예를 들면 어떤 섭에서 사건이 터지면 전파원들을 통해 각 서버로 소식이 전파되었는데, 이에 힘입어 모든서버 유저들이 버스터 콜 마냥 실시간으로 해당서버로 밀려 들어와 굿잔치를 벌이는걸 성지순례라 하였고 관습화 되었다. 사건이 터졌다 하면 순식간에 해당 섭게 글페이지가 순식간에 3~4개씩 넘어갈 정도로 리젠도 쩔었고, 섭게 하나하나가 커뮤니티를 이룰정도로 인구가 많았었다. 당시 한개의 서버에 '한명씩' 관리자를 배치했었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는가?

 

게다가 플포와 라이벌 구도를 잡고 있던 와갤의 습격도 만만 찮았는데, 당시 디시는 현재 일베와 같이 싫어하는 사람들은 질색했지만 지금도 유명한 자칭 와갤러(ㅐㅐㅋㄷ)의 먼나라 아제로스 만화. 비매너유저 용개를 팬덤으로 끌어올린 와갤문화. 와갤요리 등등 유머소스의 교류 로, 현재 벌레소리를 들을정도로 극혐인 일베와는 다르게 디시는 다소 순화된 포지션을 잡고 있었고 와갤 역시 당시 디시 수도로 황금기를 맞이 했었다.






<일반1 불타는게시판 서버 게시판. 글 리젠ㄷㄷ>


 

 

그 외의 커뮤니티로

 

커뮤니티는 플포 

팬아트는 와우메카 

애드온은 섬게이트

and 와우인벤

 

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각각의 커뮤니티들도 뚜렷한 성격들을 가지고 있었다.

 

와우메카는 국민애드온인 '하늘아리', 애드온 디스크의 시초인 '하늘누리'와

DOTAE. 지금은 웹툰작가인 썅또끼. 간지폭풍으로 유명한 초보닥돌 만화 등 '팬아트' 로 아이덴티디를 굳혔지만 만년 콩라인이였고, 

애드온의 성지인 섬게이트와 와우인벤...이 있었다.

사실 인벤은 불성때 정말 쭈구리였다. 그나마 깔끔한 '퀘스트툴' 때문에 간신히 입지를 유지할 뿐, 각각 게시판들은 다른 커뮤니티에 밀렸었다. 

마치 계귀상인 앞에만 사람이 북적이는 언더시티를 보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와갤, 플포가 망하고 인벤이 살아남다니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몇 년동안 쌓여왔던 수 많은 글들과 추억들을 통째로 터뜨려 버린 플레이포럼이 아직도 야속하기만 하다.


물론 플포가 없던 사사게를 만들고, 기사의 품질을 높여 유입을 늘리고

플포가 망할 때 플포의 이전 디자인 레이아웃을 고대로 살리는등의 친이주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메카가 망할 때 팬아트 작가들을 빠르게 포섭하고, 자체 애드온과 디스크를 만드는 등의 

시대의 요구를 정확하게 판단한 점과 준비성은 대단한 부분이지만 그건 다른면의 이야기고.

지금도 이 하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와우인벤은 리즈시절 와우플포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 

 

 



 

    <로데론의 폐허의 마지막 모습>

   

 

 

 

2. 불성의 컨텐츠가 많았다..? - X 

   컨텐츠 소모 속도가 느렸다 - O

 

 

리분 말기부터 대격변에선 전 캐릭을 공격대 던전에 다 귀속시켜도 할것이 없을정도로 지루했지만, 불성때 캐릭 하나만 돌리기도 어려웠던 이유는? 일퀘, 영던, 10인 레이드. 날탈. 모두 불성부터 시작되었고 컨텐츠 수는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각각의 방향들이 각각 뚜렷했고, 소요 시간이 길었기에 여러가지를 취하려면 하루가 모자를 정도였다.

 

레이드 진입장벽이야 다 알다시피 일던-영던-t4(카라잔,그룰마그)-t5(불뱀,폭요)-t6(검사,하이잘) 순으로 '무조건' 절차를 밟아야 했다.

돈이 많던 경험이 있던 이 단계를 한번에 뛰어넘을 방법은 전무했다. 영던 입장자체가 해당 던전의 평판 '각각' 매우 우호였고, 카라잔 입장퀘도 '영던' 네임드를 잡아야 되고, 그 가야되는 곳이 지금도 치가 떨리는 으스. 신록. 검늪. 알카에 상위 던전을 돌기 위해선 전 단계 보스를 잡아야 하는 것이 시스템적으로 굳어져 있었다. 업적 시스템이 없었지만 당시 해당 던전의 입장 가능 여부 자체가 자격이 되는 셈이였다.

 

 

(1) 영던

 

그리고 그 영던 하나를 돌기 위해선 글들이 쏟아지는 파티창에서 2~30분동안 사람을 구해야했다. 사람이 넘치고 넘치던 시기에 왜 그렇게 기다렸는가? 메즈가 없으면 진행이 어려웠던 게임 시스템 덕분에 메즈클이 아니면 지인 없이는 정말 손만 빨아야 했고, 항상 특정 클래스를 찾는 4/5 파티가 많았기에 일부 클래스에게는 입장 자체가 그림의 떡이였다. 탱을 구한다던가. 메카나르에서 흑마를 구한다던가(추방메즈+악마정배) 말이다. 메즈클인 도,법,냥은 영던 자체는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으나 레이드로 넘어가면 입장이 역전이 되는데.. 그 얘기는 뒤로하고

 

 

으스러진 손의 전당.

검은 늪. 알카트라즈. 신록의 정원.

 

으이구 또 얘기하려니 이미 썩어 문드러지도록 재탕한 소재니 짧게 정리하겠다. 영던 하나를 도는 것도 시간이 기본 단위 였다. 

지금이야 북+남부신던 올클도 2시간내로 끊는다지만 그나마 난이도도 쉽고 가장 짧았던 증기저장소, 메카나르도 거진 1시간은 잡아야 했었고, 당시 신록영던은 2시간 끊으면 적당히 했네 라 말할정도로 인식이 지금과 상이했다. 

지금 시던으로 돌면 아무것도 아닌 던전들이 이렇게 시간을 잡아먹었던 이유로는 당시 던전 일반 몹의 평타가 비상식적으로 강했고, 영던에서의 전멸 원인 95%가 어그로 때문일 정도로 시스템적 문제가 컸다. 메즈가 풀리거나 힐 어그로가 튀어 탱커가 아차하는 순간 1초만에 썰려버리는 상황이 가장 많았고, 힐 어그로가 튈만큼 탱커클래스도 무지막지하게 피가 빠졌기에 예측힐은 힐러의 기본 소양이였다. 이러한 연유로 영던에서 박휘는 초초초 귀족이였는데 딜,힐러의 어그로를 낮추던 축복과 판금을 껴서 타클보다 '몇초를' 더 버틸수 있다는 점이 강점으로 초 귀족으로 추앙받았다. 메즈 하나의 존재로 난이도가 갈리는 시스템이였기에, 메즈가 없는 클래스(정,고,암,드루)는 그야말로 인던 '면역' 이였다. 들어가기 힘든게 아니라 정말로 면역 말이다(눈물) 

 

보통 탱커가 투척무기를 던지는 순간 0.5초후 변,현혹,얼덫등이 순차적으로 탁 탁 탁 들어갔다. 메즈딜러들은 자기가 맡은 대상을 주시로 잡고 풀릴때마다 칼메즈를 해야했다. 탱커 제외 클래스가 한 대만 맞으면 파티가 휘청거렸기에 칼같은 관리가 필수였었고 으스영던이 악명이 자자했던 이유는 몹 패턴이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한 링크에 몹이 많아 있는 메즈를 동원해도 손이 모자라, 전탱이 피아노를 치고 나머지는 어그로, 칼메즈를 하며 타임어택에 쫒기며 빠르게 점사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별양. 네모덫. 도적님 엑스 절하면 시작할게요>

 

 


(2) 휘장 시스템

 

그리고 휘장시스템도 플레이 타임을 늘이는데 한몫했는데, 영던이나 공격대 던전에서 네임드당 한 두개씩 주던 '정의의 휘장'의 도입으로, 일일영던 퀘스트와 함께 레게건 라이트 유저건 파밍을 위해서는 꼬박 꼬박 영던을 돌아야 했다. 높은 난이도와 시간이 소모되는 영던에서 얻을 수 있는 휘장은 영던 일퀘 를 깨도 3~5개 남짓이였고, 영던 별 난이도 차이로 거르는 곳들도 있었기에 라이트 유저는 일주일에 에픽장비 한부위 사기도 시간이 빠듯했다. 이 휘장시스템 덕에 카라잔이라는 길고도 지겨운 던전이 불성 끝 무렵까지 명맥이 유지 되는 이유기도 했다.

 

 

 



<초승달과 귀걸이. 명품 ㅇㅈ? ㅇ ㅇㅈ~>

 


 

(3) 일일퀘스트와 애증의 좆골새

 

지금이야 너무도 당연해진 공중 탈것이지만, 불성 당시 빠른새를 타는건 그야말로 부의 상징, 현질의 증표였다.

당시 일반적으로 유저가 만렙을 찍을 때 즈음에 딱 좆골새(느린새)를 탈 돈이 모이거나 남았었고, (약 천골) 돈을 벌려면 남은 퀘스트를 깨거나 전문 기술의 힘을 빌려야 했다. 하지만 채집은 빠새 유저들의 독점으로 꿈도 못꾸고, 인던에서 나오는 약초나 광석들도 같은 전문기술 유저와의 경쟁이 있어, 가위바위보 승부를 이겨야만 채집권을 얻을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기에 빠새를 목표로 한다면 일일 퀘스트를 꼬박꼬박 하면서 남아있는 아웃랜드 전역의 퀘스트를 모두 마치는게 기본적인 코스였다. 아웃랜드의 퀘스트를 다 깬다 해도 약 3,000골정도가 모였고. 다하면 뭐 별 수가 있나. 계속 일퀘나 해야지^^

 

지금와서 생각하면 참 더러운게, 일일 퀘스트 숫자가 많은 편은 아니였지만 하루에 소화하려면 기본적으로 시간 단위를 써야 했다. 

왜냐? 일일 퀘스트가 아웃랜드 전역에 사방 팔방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퀘스트는 칼날산맥에 있는 오그릴라와 테로카드 숲의 하늘경비대 였고, 샤트라스에선 아웃랜드 전역에 떠 있는 황천증기 수집이나 지옥불반도, 나그란드 후미진 구석으로 보내는 퀘를 주었다. 쉽게 말해서 현재 타나안 일퀘 5개를 아웃랜드 전역에 갈기갈기 찢어놨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걸 대다수가 그 느려빠진 좆골새를 타면서 경쟁을 벌였으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토나오는 그 짓을 왜 했냐고? 물론 돈이 벌리니까!  

불성때는 지금처럼 골드체계가 무너진 상황이 아니였고, 일퀘를 하던, 막공을 가던, 약초를 사서 비약 물약을 비비던,

하루종일 약초만 뜯으러 날라다녀도 충분히 시간을 투자한 만큼 골드를 벌 수 있었던 점이 지금과 달랐다.

서버 통합도 안되었고, 얼라+호드 통합 경매장도 아니였지만 단순히 물약을 사서 20개 들입 주사기로 만드는 작업만 해도 차액을 기대할 정도로 경매장이 활성화 되어 광석과 약초는 올리는 순간 순식간에 팔려나가는 시기였다. 

 

 

(4) PVP

 

전장은 심플하게 노래방, 아라시, 이 둘을 적절히 짬뽕한 폭눈, 알터렉 밖에 없었지만 구관이 명관이라고 꾸준히 사랑을 받았으며,

알터렉은 중앙쌈을 하지않고 수장목을 따는데 최적화된 룰방이 성행했고, 명점도 쏠쏠했기에 알방을 돌아 템을 맞춰(속칭 알투사) 전장을 도는것도 쏠쏠했다. 지금의 아쉬란과 비슷했다. 개똥같은 중첩따윈 없었다는 것 정도? 

 

알투사는 PVE에서 천대 받았던 것도, 사람수도 적었다는 것도 지금과 같지만 

그래도 가장 큰 차이점은 전체적인 인구수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많았다는 것.

인벤 투기장대회, 버츈, 레인타임, 용개, 미내기, 오마멀 등 PVP스타들의 볼거리와

warcraftmovie에서 유저들의 눈을 즐겁게 했던 pvp동영상이 범람했던 시기였던 점 이랄까.

 

근데 이 부분은 솔직히 추억보정 맞는것 같다. 

투기장이고 전장이고 냉법 여고생이 씹어먹는 밸런스 똥망 컨텐츠는 여전했음ㅎ 




 

 <세기의 대결>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와요일이 시작되면 가야 할 공격대도 많았고, 일퀘를 하던, 앵벌을 하던, 전장을 하던, 채집지역을 돌아다니던, 무얼해도 시간단위로 계획을 잡아야 했었기에 여러가지를 하려면 시간이 부족했었다. 뭘 하나 하려해도 시간은 금방 지나가고, 그래서 더 재밌게 느껴졌던 걸까?





2편은 '레이드의 벽' 을 주제로 써볼까 하는데 추억팔이글 지겨울까봐 걱정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