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07년. 기분이 산뜻했다. 기자가 무려 12년 동안 씌어 있던 학생의 굴레를 벗고, 대학생이라는 또 다른 짐을 짊어질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난 07학번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내가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얼마나 즐기게 될지를...

2004년 말,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이하 WoW)가 한국에 상륙했을 때 난 망설임 없이 인생의 많은 부분을 WoW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제 고등학교에 진학해 본격적인 미래설계를 시작할 찰나 벌어진 인생의 실수라 할 수 있겠다.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난 당시 성적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고, 아버지가 나보다 더 빨리 시험 성적을 알아내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신지라 게임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었다. 60레벨 만레벨을 찍는데 무려 10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인생의 첫 번째 목표였던 대학 진학을 성공적으로 끝낸 지금, 그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었다. 몸이 달아올랐다. '기다려라 아제로스, 이몸이 금방 가서 평정해주마...' 그렇게 클라이언트를 켰다.

▲ 오...추억돋는다...


그렇게 2007년, 북미보다 2주정도 늦은 2월 2일 국내에 적용된 WoW의 첫 번째 확장팩 '불타는 성전'.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WoW의 모든 확장팩을 플레이한 기자에게는 가장 의미가 깊은 확장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대 인던 전문 탱커라는 쩌리같은 타이틀만 확보했던 오리지날때와는 다르게 많은 시간을 게임에 쏟을 수 있었다. 입대, 복학, 취직이라는 싸이클 동안은 비교적 가볍게 게임을 즐길 수밖에 없었지만, 불타는 성전 시기만큼은 내 모든 것을 바칠 기세로 게임에 임했으니 말이다.(때문에 성적과 아이템을 등가교환했다.)

WoW 10주년 기획 6부작 기획기사 제2부. 1부는 팩트의 나열이 중심이 되었지만, 2부의 화자는 나다. 지금부터 천천히 풀어내 보겠다. 이 글은 내 WoW인생 가장 큰 임팩트를 던져주었던 '불타는 성전'에 대한 회고록이자, 당시 나와 함께 게임을 즐겼을 수많은 게이머들에게 바치는 추억의 결정이다.

▲ 준비는 되셨습니까?



촌스럽지만 멋진 이름 불타는 군단. 신기한게 참 많도다...


불타는 성전은 굉장히 재미있는 콘텐츠들을 대거 갖추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나는 탈것. 줄여서 날탈이라 불리는 새로운 컨셉의 탈것들이었다. 비록 아웃랜드라는 한정적인 공간 안에서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낙사할때나 느끼던 비행의 쾌감은 확실히 끝내줬다.

물론 빠른 비행을 위해서는 5천 골드라는 돈을 투자해야 했고, 1백 골드가 아쉽던 그 당시엔 엄청난 부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럼 뭐 어떤가? 난 기계공학을 배운 선진 오크였고, 갖은 노력 끝에 비행기를 만들어 타는 데 성공한 얼리어답터였다.

▲ 얼리어답터의 상징이었던 비행기


한 가지 더 큰 이슈를 꼽자면, 새로운 종족의 등장이었다. 기존의 설정과 대비해보면 조금은 뜬금없는 출현이긴 했지만, 듬직한 어깨와 매력적인 꼬리를 가진 얼라이언스의 신 종족 드레나이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종족. 꼽등이와 괴물들만 존재하던 호드에 내려진 인구의 은총이자, 호드 최초의 미형 캐릭터 '블러드엘프'는 등장과 함께 엄청난 인기를 불러일으키며 WoW의 인구비를 얼라이언스: 호드: 블러드엘프 = 1:1:1로 만들어놓는 기염을 토했다.

물론 수염이 더부룩하고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인물들이 블러드엘프 여성 캐릭터를 키우는 불쾌한 상상을 불러일으켜 '더러운 브레리'라는 말도 듣긴 했지만, 블러드엘프의 절대 인구수는 엄청났고, 이는 얼라이언스의 상대적 강세였던 WoW의 무게추를 순식간에 호드 쪽으로 올려놓을 만했다.

▲ 인구비 파괴의 주범 더러운 부레리


그리고 마지막! 새로운 큰 지역인 '아웃랜드'의 등장이었다. 솔직히 아제로스도 굉장히 넓은 편이었고, 다 돌아다니려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더 넓은 지역을 원하던 유저들에게 있어 아웃랜드는 말 그대로 꿈과 희망의 땅이었다. 일단 날아다닐 수 있으니 돌아다니기도 편하겠다, 곳곳에 매력적인 보스 몬스터들로 가득하겠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차후 더 기술하도록 하겠다.

▲ 미지의 지역(이었던) 아웃랜드


그 외에도 불타는 성전은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확장팩이었다. 매력적인 보스들과 본격적인 레이드의 대두, 그리고 발전된 기념의 PVP 콘텐츠까지. 대략적인 설명은 끝났다. 이제 불타는 성전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조금은 주관적일 수 있는 관점에서 제대로 한번 추억을 팔아볼 시간이다.



레이드는 더이상 컴퓨터와의 싸움이 아니었다.


사실 난 오리지날 시절 제대로 레이드를 즐기지 못했다. 왜냐고 묻는다면 고등학생이었으니까... 당연한 거다. 내가 게임을 굉장히 좋아하긴 했지만, 자주적인 삶을 살기 이전에도 내 맘대로 게임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내가 같이 하자고 꼬셨던 친구는 빠르게 1차 수시에 합격해 공대 메인 주술사로 쑨을 잡으러 다녔지만, 1차 수시 따위와 연이 없었던 난 수능을 준비하며 상상원정대만 보낼 수밖에.

그래서 화산심장부와 검은날개둥지를 겉햝기식으로 다닐 수밖에 없었지만, 제대로 된 레이드에 대한 갈망은 존재했다. 그리고 그 욕망의 꽃이 핀 것이 바로 불타는 성전이었다. 물론 시작은 쉽지 않았다. 일단은 5인 던전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상위 던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영웅 난이도 던전을 클리어해야 했고, 영웅 난이도 던전을 가기 위해서는 고도의 평판 작업이 필요했다.

▲ 평작의 세계에 온것을 환영하오 갓만렙이여


그 영웅 난이도 던전이 쉬운가 하면 그도 아니었다. '으스러진 손의 전당'이나 '알카트라즈', '어둠의 미궁'같은 고난이도 5인 던전들은 숙련된 유저들이 아닐 경우 공략 자체가 힘들었다. 당시 레이드 중심 유저들의 성장 곡선은 다음과 같았다.

영웅 던전을 통한 충분한 파밍 -> 카라잔을 공략해 보라돌이로 변신 -> 마그테리돈, 그룰을 사냥해 적절한 스펙을 겸비 -> 정규 공격대에 가입해 불뱀 제단, 폭풍의 요새 등 하위 단계 25인 레이드 공략 -> 하이잘 산, 검은 사원까지 공략.

▲ 이쯤되면 하이잘 문을 두드려볼 참


그야말로 장대한 길이었다. 숫자로 나타나는 단계의 진척은 없었지만, 레이드 유저들 개개인은 본인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했는지 알고 있었고,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꾸준히 게임을 즐겼다. 물론 초반부터 준비되지 않은 플레이어들이 상위급 레이드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진입 장벽 자체는 오리지날 시절보다 많이 완화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레이드 유저들이 열광했던 것은 불타는 성전의 보스들이 엄청나게 매력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배신자 '일리단 스톰레이지', 나가 여군주 '레이디 바쉬', 그리고 블러드엘프 왕자 '켈타스 선스트라이더'. 워크래프트3를 플레이했던 유저들이라면 잊을 수가 없는 이름이다.

▲ 만년동안...솔로였다...


나름 잘해보려 했지만 죄다 엇나가고 연애 한 번 못해본 채 만년을 갇혀있던 슬픈 캐릭터이지만, 그 멋만큼은 워크래프트 세계관에서도 전무후무한 '일리단'. 인트로 영상에서 니들은 아직 준비가 안되었다며 충분히 준비하고 오라는 배려심 강한 그 남자는 불타는 성전의 종반을 장식하며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불뱀 제단에서 온갖 어패류들과 싸워가며 바쉬를 쓰러트리고, 폭풍우 요새에서 불사조 알라르를 잠재우고 켈타스 선스트라이더를 쓰러트린다, 이후 시간 여행을 거쳐 하이잘 산에서 아키몬드를 잠재우고 마침내 일리단 스톰레이지와 칼을 맞대는 그 순간까지, 게이머들은 워크래프트에서 보던 그 인물들과 직접 대면한다는 그 자체로 큰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이들은 최선을 다해 유저들을 만족시켜 주었다. 덤으로 완제품 전설급 아이템인 '아지노스의 전투검'은 수많은 전사와 돚거...아니 도적 유저들에게 로망이 되어주었고 말이다.

▲ 화제의 무기 아지노스, 그리고 사슴벌레 룩


불타는 성전 최 후반기에 등장한 '킬제덴' 역시 임팩트가 강한 보스였다. 물론 일리단에 비하면 조금 임팩트가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 천둥왕이나 쌍둥이 황제에 비하면 굉장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보스의 존재감뿐이랴? 불타는 성전에 이르러 레이드는 또 다른 특이성을 갖게 되었다. 기존의 레이드들이 적당한 무빙과 탱딜힐의 삼위일체를 요구했다면, 불타는 성전의 레이드 보스들은 나름대로 복잡한 공략법을 요구했다. 마그테리돈처럼 5명의 유저가 같은 시간에 큐브를 클릭해 일시적으로 추방을 해야 한다거나, 켈타스 선스트라이더처럼 특정한 아이템을 주워 강력한 공격을 방어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따라 레이드는 더 복잡한 택틱을 요구했고, 그만큼 더 재미있어졌지만, 다른 부작용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로 '공대 내부의 적'이 그것이었다. 공대 내부의 적이라고 말하면 누구나 알 것이다. WoW는 '20%의 법칙(20%가 80%의 결과를 만들고, 나머지 80%가 20%의 결과를 만든다.)'에 제대로 적용받는 예 중 하나라 볼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강력한 공격을 퍼붓는 레이드 보스보다 해야 할 것 놓치는 한 명의 공격대원이 더 큰 파문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았다.

▲ 역적과 아군을 나누는 경계선


예로 들 것도 많다. 카라잔의 보스 중 하나인 아란의 망령에서 불고리가 걸린 채로 이동해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공대원이라든지 폭풍우 요새의 보스인 솔라리안의 스킬을 맞고 어리둥절 있다가 공대원을 싸그리 전멸시키는 공대원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택틱이 복잡해졌기에 생겨난 어쩔 수 없는 일들이긴 하지만, 이는 상위 레이드의 진입 장벽을 높이는데 한몫을 했다. 그쯤 들어 활성화된 막공에서 인원을 가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고 말이다.

불타는 성전의 레이드 콘텐츠는 다음 확장팩인 리치왕의 분노가 나오기 전까지 꾸준히 추가되었다. 더는 깔 것이 없으면 까기 시작한다는 대표적인 호구인 '트롤'을 소재로 한 줄아만이 추가되어 애꿎은 줄진이 죽어났고, 후반부에 추가된 태양샘 고원에서는 킬제덴까지 출현해 반신욕을 하며 유저들을 상대했다.

▲ 혼돈...! 파괴...! 망..ㄱ♡!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었지만, 확실히 불타는 성전에 이르러 PVE 콘텐츠는 명확한 기준을 만들어냈고, 다음 확장팩인 리치왕의 분노에 이르기까지 PVE시대의 황금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없잖아 존재했다. 그때까지도 대다수의 유저들에게 레이드는 존재는 하되 볼 수 없는 상상속의 콘텐츠였고, 이는 차후 레이드 난이도가 차차 낮아질 때 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PVE만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주요 콘텐츠 중 하나인 'PVP'도 못잖은 발전을 이룩한 것이 바로 불타는 성전이었으니까.



전사입니다. 2:2 하실 회복 드루이드 찾습니다.


WoW의 두 주류 콘텐츠 중 하나인 'PVP'. 오리지날 당시 PVP에 관련된 추억을 꼽자면 단연 필드 전투였다. 퀘스트 동선이 겹치던 '힐스브래드 구릉지'나 '가시덤불 골짜기'는 언제나 해골로 가득했다. 빨간색은 일단 치고 보는 전투민족 한국인의 특성 상 필드 전투는 심심찮게 벌어졌고, 초창기 PVP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이 틈바구니에서 염증을 느낀 유저들이 게임을 떠난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말이다.

▲ 죽음의 고장 힐스브래드 구릉지


하지만 불타는 성전에 들어 이러한 필드 전투는 상당 부분 줄어들었다. 유저들의 레벨대가 전체적으로 상승했고, 나는 탈것의 등장으로 주 무대가 되어버린 아웃랜드의 필드 PVP는 상당히 국지적이고, 소규모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전투종족들은 항상 새로운 적을 찾아다녔고, 블리자드는 두 가지 방편을 통해 유저들의 전투 욕구를 만족시켜주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전장의 확대였다. 기존의 세 전장인 '알터렉 산맥', '아라시 고원', 전쟁노래 협곡'에 이은 네 번째 전쟁인 '폭풍의 눈'이 추가되었고, 깃발 뺏기(CTF)를 베이스로 하는 '전쟁노래 협곡'과 거점 점령 룰의 '아라시 고원'을 적절히 섞어 좋은 호응을 얻어냈다.

▲ 깃발과 거점을 모두 신경써야 하는 신규 전장 '폭풍의눈'


추가로 블리자드는 아웃랜드의 필드 곳곳에 필드 PVP를 장려하는 장치를 만들어 두었다. 지옥불 반도의 세 요새와 테로카르 숲의 아킨둔, 그리고 나그란드의 할라야 등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필드 PVP는 유저들의 자연스러운 분쟁을 유도한 것이지만, 사실 전장에 비해서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차후에는 얼라이언스와 호드가 시간을 정해두고 이득을 챙기는 쪽으로 변질되어버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와 함께 PVP의 주력 콘텐츠로 떠오른 또 하나의 요소가 바로 '투기장'이다. 2:2, 3:3, 5:5로 팀을 짜 평점을 쌓는 형태로 만들어진 투기장은 자신의 컨트롤에 자신이 있는 유저들을 유혹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네임드들이 탄생했다.

▲ 대충 요로코롬 생겼다


반면 오리지날 시기에 활동하던 필드의 영웅들과 괴수 플레이어들은 상대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불타는 성전과 함께 새로 등장한 '전투 정보실' 때문인데, 유저들은 전투 정보실을 통해 타 유저의 특성과 아이템 세팅을 살펴볼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연구를 통해 PVP에 최적화된 트리를 개발했던 일부 네임드 유저들은 밑천을 모두 털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네임드들은 쏟아져 나왔다. 오리지날 시절부터, 아니 다른 게임을 하던 시절부터 인기를 누리던 DrakeDog, 이른바 용개도 불타는 성전 시절 맹활약을 보였고, 냉혹검 타우렌 전사였던 최민소나 법사의 신으로 불리던 오렌지마멀레이드, 그리고 영고생착의 종말을 부르짖다가 지금은 2층에서 방송중인 드루이드 리히터까지... 초창기 PVP네임드들의 등장은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일면을 보는 듯했다. 당시 아직 어리던 인벤 역시 '네임드 토너먼트'를 진행해 PVP네임드들의 1:1 장면을 방송한 바가 있다.

▲ 참 인상깊던 그사람


투기장은 매우 심플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팀을 짜서 신청하면, 몇 개의 투기장 중 랜덤한 곳에서 전투를 치르게 되고, 이 전투 결과에 따라 평점이 정해지는 구조였다. 당연히 PVP에 자신 있는 유저들은 고평점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이 와중 PVP에서의 캐릭터 간 밸런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불타는 성전의 PVP 밸런스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더럽다고까지 표현되곤 했던 그 시절의 흑마법사. 이른바 '영고생착'이라고 불리던 영혼의 고리와 생명력 착취의 보너스는 천옷을 입고 있던 흑마법사를 불사신으로 만들어냈다. 돌진과 봉쇄 외 뚜렷한 접근기가 없었던 전사는 온갖 메즈기를 무릅쓰고 한 방만 때려보자며 뚜벅뚜벅 전진하는 멧돼지가 따로 없었고, 주술사는 그 시절에도 건들지도, 건드려지지도 않는 간디였다.

▲ 솔직히 진짜 사기급으로 세긴 했다


투기장이 열리고 소수의 PVP가 활성화되면서 어느 정도 조합 벨런스가 잡히긴 했지만 여전히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멧돼지같았던 전사는 회복 드루이드의 힐이 함께하자 멈출 수 없는 폭주기관차가 되어 그간 쌓여있던 분노를 폭발시켰고, 얼음창이란 무기를 손에 쥔 마법사는 장르를 3인칭 액션 슈터로 바꾸는 만행을 저질렀다.

다만 PVE에 멋진 공대원과 공대 내부의 적이 있듯, PVP에도 명암이 존재했다. 투기장 시즌3이 열릴 즈음 해서 블리자드는 지난 시즌인 1시즌 아이템을 명예 점수만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변경했다. 이는 투기장에 입성하지 못했으나, 전장은 자주 즐기는 유저들에게 투기장에 입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와중, 40대40으로 치러지는 전장인 알터렉 전장에서 오로지 명예 점수만을 얻기 위해 빠르게 달리기를 하는 유저층이 존재했고, 이들을 게이머들은 알터렉 전장 + 검투사라는 뜻으로 '알투사'라는 용어로 지칭했다. 사실 대다수의 전장 유저들은 선량한 유저들이었기에, 남들에게 큰 피해는 주지 않았지만, 오로지 아이템만을 위해 고의로 잠수를 탄다거나, 달리기만을 반복하는 알방 라이더들은 곱지 못한 시선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 전장의 문이 열리면 시작되는 레이스 그들의 이름은 알방라이더


'알투사'라는 용어는 투기장에 입문하지 않고 1시즌 아이템을 가진 이들을 부르는 폭넓은 용어로도 쓰이곤 했지만, 좁게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면서도 그걸 자각하지 못하는 일부 유저층을 이르는 용어로도 쓰였다.



불타는 성전, 워크래프트 트릴로지의 정점을 찍어내다.


사실 못다 한 얘기가 더 많다. 기자이기 이전에, 나 역시 불타는 성전 당시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던 하드 게이머였다. 당연히 즐거운 일도, 슬픈 일도 많았다. 황천의 비룡을 타기 위해 고된 평작을 하며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고, 끝까지 나오지 않는 탱킹용 도검 '왕의 수호자'를 패스하고 '파도의 철퇴'를 득하기도 했다.

알투사들과 싸우고, 공대 내부의 적들과 마찰도 빚었지만, 그러면서도 공대 내 유일한 딜스왑 전사였기에 레이드 시작과 동시에 어그로 폭주로 인한 사망으로 남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다. 이젠 다 지나간 추억이고,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이지만, 그로 인해 망해버린 성적과 바뀐 인생과 견주어 봐도 딱히 아쉬움이 없을 정도로 즐거운 나날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려는 것은 불타는 성전에 대한 전체적인 감상과 다음 확장팩을 기다렸을 때의 마음이다.

불타는 성전은 스토리 상으로 볼 때 '워크래프트3'에서 풀어놓은 이야기의 정점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켈타스와 일리단, 그리고 말퓨리온과 마이에브 등, 워크래프트3에 등장한 많은 영웅을 실제로 보았으며, 그들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워크래프트3를 인상 깊게 플레이한 유저들에게는 가히 축복과 같은 확장팩이 아닐 수 없었다.

시스템적인 면에서 볼 때의 불타는 성전은 모든 면에서 골고루 발전을 이룬 '상승'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비행기의 비행 과정은 5단계로 구분된다. 이륙 - 상승 - 순항 - 하강 - 착륙의 5단계다. 오리지날 당시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멋진 이륙을 해냈다. 하지만 분명 아쉬운 점은 존재했다. 불타는 성전은 이를 훌륭히 다듬었고, 기존의 콘텐츠들을 보다 풍부하고, 대중적으로 만들어낸 확장팩이었다.

▲ '완성'은 아니지만, '발전'은 충분히 보여주었던 시기


이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불타는 성전이 완벽했다면, 이후의 확장팩들이 수정될 부분은 없을 테니 말이다. 아까 말한 '상승'은 아직 순항의 단계로 나아가기 전이다. 새롭고 세련된 시스템과 오리지날 당시의 초창기 모습이 공존한 시기. 그렇기에 유저들은 오리지날만큼 불편하지 않은 상태로 플레이했음에도, 오리지날과 함께 추억을 팔 수 있는 시기로 불타는 성전을 꼽는 걸지도 모르겠다.

불타는 성전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거대한 폭풍이 밀려오고 있었다. 워크래프트3에서 벌려놓은 이야기를 모두 마무리 지은 확장팩이자, 범우주적 패륜아인 '아서스 메네실'의 몰락을 담은 확장팩 '리치왕의 분노'. 다음 주 목요일, 인벤팀과 함께 한 번 더 추억을 되새김질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 또 하나의 물결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