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웅의 군단' OST '레테']


"정말 좋아합니다"

약속 장소에서 만나자마자 제가 꺼낸 말입니다. 뜬금없는 고백 같았던 이 말은 물론 음악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얼마 전 이색적인 영상이 화제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2월 출시된 모바일 MMORPG '영웅의 군단' OST를 독일의 유명 주립 교향악단이 실연한 것이지요. 마침 음원 사이트에 OST 음반이 올라와 있어 한 바퀴를 들었습니다. 멈추지 못하고 두 번째 바퀴를 듣게 됩니다. 놀라웠습니다. '왜 iOS에는 아직 이게 없는 거야'라면서 울분을 터트리고 싶을 정도로.

유저 반응 역시 '언빌리버블'로 요약됩니다. 그 까다롭다는 멜론 유저 평점에서 '영웅의 군단' OST는, 3월 28일 현재까지 5.0 만점을 달리고 있습니다. "게임 OST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퀄리티", "게임을 하다가 음악에 빠졌다" 등의 극찬이 눈에 들어옵니다.

전작 '삼국지를 품다'의 OST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아쉽게도 인터뷰를 하지 못했지요. 이번 기회까지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엔도어즈 본사로 달려가 김달우 사운드팀장을 만났습니다. 음악에 입문한 계기부터 힘든 작업 과정, 국내 게임음악계, 그리고 베일에 싸인 보컬 'Linsey Park'의 정체까지. 이야기는 쉬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영웅의 군단' OST 음원 페이지(멜론)



"첫 시작은, 시에 음악을 붙여보는 일이었어요"


▲ 엔도어즈 김달우 사운드 팀장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간단한 경력 소개부터 부탁드릴게요.

처음에는 음악과 상관 없는 길을 가고 있었어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죠. 마침 졸업할 때쯤 선배들이 한창 게임회사를 차리고 있었어요. 함께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죽 오게 됐네요. 그전에는 SM엔터테인먼트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고요. '군주'부터 참여해서 '아틀란티카'까지는 절반 정도의 비중이었고, '삼국지를 품다'와 '영웅의 군단'의 전체 사운드를 담당했습니다.


공대 출신에서 음악으로 뛰어든 경력이 흥미로운데요. 음악 작업에는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거죠?

중학교 때부터 음악하는 걸 좋아했어요. 당시 라디오방송에 '모자이크'라는 팀이 있었어요. 청취자들이 음악을 보내주면 편곡해주는 프로그램인데, 이걸 참 많이 들었어요. 시 쓰는 것도 좋아했지만, 아무래도 인기가 없죠. 시에 음악을 붙여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작곡을 시작하게 됐어요. 성경의 시편도 고리타분한 옛 시에 음악을 붙여 전파하는 데 쓰였잖아요. 음악에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웅의 군단' OST를 만든 엔도어즈 사운드 팀의 규모나 면면도 궁금한데요.

내부 인력은 많지 않아요. 저 이외에 소개할 사람은 일단 '민부기' 사운드 인터그레이터가 있겠네요. 사운드 엔진이 복잡해져서 디자이너들이 같이 신경쓰기 어렵거든요. 음악적인 부분을 기술적으로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나머지 두 명은 음향 관련된 사운드 디자인을 맡고 있고요. 저는 작곡과 편곡 외에 전체 사운드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상주하는 인원은 넷이고, 외부 인력이 150명 정도입니다.


150명이요? 굉장히 많네요.

일단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사람만 열 명 정도 되고,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악기 연주자와 코디네이터, 엔지니어 합하면 그 정도 숫자가 나와요. 다만 회사에 전부 있기에는 공간이나 비용 면에서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외부에서 작업을 돕고 있습니다.


게임 음향을 제대로 창조하려면 정말 어렵다고 들었는데요.

사운드 디자이너라면 일반적으로 에디터에 가깝죠. 하지만 우리 회사는 진짜 소리를 창조하는 작업을 합니다. 필요한 음향이 없다면 직접 녹음하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오기도 해요.


최근 두 게임(삼국지를 품다, 영웅의 군단)의 곡을 듣다 보면 보컬을 맡은 'Lindsey Park'이라는 분에게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아무런 정보도 찾을 수 없거든요.

사실 제가 나서서 밝힐 생각은 없었는데, 제 부인입니다. 가수를 할 생각은 없지만 노래하는 걸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개발비를 최대한 아끼다 보니 집에서 데모 버전을 녹음해 가져왔거든요. 유명가수를 붙이기 전에 가이드 녹음을 하는 것처럼. 그런데 "오, 이대로도 좋다" 하는 반응이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 버전으로 작업을 해서 지금의 곡이 나오게 됐죠.


힘을 합쳐서 하나의 노래를 완성하는 부부라니, 부럽네요!

많이들 부러워하세요. 그런데 현실은... 운전면허도 가족한테는 배우지 말라잖아요(웃음). 작업이 편하지만은 않았어요. 처음 곡이 나왔을 때 공식 카페에서는 보컬의 정체에 대해 손담비니 태연이니 하는 추측이 많더라고요.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리자면, 그저 'Lindsey Park'입니다.

▲ 엔도어즈 사내 카페 전경




"게임개발은 '마라톤'... 이제 내 길 완주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 생겨요"


독일 주립 교향악단이 4년 전에 '영웅의 군단' OST를 실연한 영상이 뒤늦게 화제가 되었더라고요. 이미 한참 전에 곡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 같은데요.

네, 곡 작업 순서가 게임 출시와 반대였어요. 오히려 '영웅의 군단' 곡들이 '삼품'보다 일찍 만들어졌지요.


어떻게 기획하게 된 건가요?

목소리가 들어간 음악을 제작했을 때 그전과 굉장히 다른 반응이 쏟아졌어요. 의견 통계를 분석해보니, 다들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그리웠던 것 같아요. 그동안 전형적인 미디 사운드 배경음악을 위주로 작업했는데, 여기서 탈피했더니 전혀 다른 차원의 가능성을 발견했거든요. 대중 반응에서도 희망이 보였고요. 사람 향기가 있는. 매번 완벽할 수 없는 사람의 이미지가 녹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생각했지요. '우리 곡을 사람이 연주해서 녹음해보자'고. 그래서 실행해 옮겼고, 결과물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전세계에 있는 수많은 교향악단 중에 섭외 대상을 정하기 쉽지 않았겠어요.

보통 이런 작업을 마음먹게 되면 세 군데 지역 교향악단을 고려하게 됩니다. 미국, 동유럽, 유럽이죠. 스타일이 서로 달라요. 미국 쪽은 헐리우드 식 영웅적인 음악이 특징이에요. 동유럽의 연주는 차갑고 건조하고 메마른, 모노 톤의 감성이 녹아 있어요. 우리나라 영화 스타일과 특히 잘 맞죠.

한편 '영웅의 군단'은 화려한 비주얼이 큰 특징이거든요. 그래서 심포니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의 주립 교향악단을 섭외하게 됐죠. 여러 오케스르라 색깔을 들어보고 신중하게 결정했습니다.


연주 영상을 찍을 때는 직접 다녀오셨나요?

필요 인력만 다녀왔는데, 실황 녹화마저도 우리가 함부로 관여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코디네이터가 영상을 따로 받아오게 됐어요.


영상 보기 : "모바일 게임도 가능하다" '영웅의군단' OST 오케스트라 연주 영상 공개


이런 시도를 통해 2010년 10월 19일, 독일 현지에서 70여 명 규모의 독일 주립 교향악단 ‘Staatskapelle Halle’가 ‘영웅의 군단’ OST 중 ‘로마’라는 곡을 실연했습니다. 4년 뒤 지금에야 한 개발자의 SNS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고, '영웅의 군단' 음악에 호감을 가진 팬들의 입소문을 거치면서 빠르게 퍼져나갔지요.

정성에 박수를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습니다. 또한 궁금했습니다. 개발 초창기라 언제쯤 바깥에 공개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시기. 피땀 흘려 만든 음악이 해외 유력 교향악단의 손을 통해 들려오는 기분은 어떨까요. 그 느낌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막상 음원을 받아보기 전까지도 걱정이 더 컸죠. 돈을 이렇게 들여서 하는데 과연 제대로 나올지, 수정할 일 생기면 어쩌지... 하지만 처음 이 제안을 냈을 때, 다들 반기는 분위기였어요. 모두가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거든요. 개발PD 등의 절대적 지지를 받기도 했고요. 쉽게 내릴 결정은 아니었지만, 막상 실행하고 결과물이 나오니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했다는 점에서 뿌듯했습니다.


'삼품'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해 '영웅의 군단'에서 제대로 폭발했다는 느낌인데, 실감이 나나요?

게임개발은 마라톤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개발 기간부터가 그렇죠. '영웅의 군단' 개발 기간이 4년이라고 외부에 말했지만 실제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온 후 기획을 시작한 기간을 합치면 6년에 가깝거든요. 그동안 자기가 만든 콘텐츠가 외부에 개방되지 않고 안에서 계속 수정되는데, 누구든 불안해질 수밖에 없어요. 이게 잘 되어 가는 것인지 계속 자기 의심이 생기거든요.

마라톤을 보면 가장 힘겨운 중후반에 관중들이 열렬히 응원을 해주잖아요. 게임에서는 유저들의 반응이 그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제대로 길을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더 힘을 얻는, 이정표 같은 존재죠. 기분 좋은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껴요. 작업할 때는 언제나 완주가 목적이었어요. 더 유명해져서 음원 사이트를 쉽쓰는 것보다, 이제 내 페이스를 제대로 알고 뛸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최적의 음향을 만들고 싶어서, 공항 활주로를 찾아가 테스트를 하기도"


일반 유저들은 사운드 팀이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는지 잘 모르거든요. 살짝 공개한다면?

게임개발에서의 사운드 작업 비중은 프리프로덕션(레코딩 작업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작업) 단계가 제일 깁니다. 기획을 먼저 들어가서 어떤 노래를 만들지 결정하고, 실제 제작에 들어가죠. 저작권 관련된 소리 작업을 진행하고 홍보에 들어가는데, 제작 단계는 3개월쯤 걸려요. 그 이전에 콘셉트를 잡고 작곡, 편곡, 보컬, 작사, 연주 섭외라는 긴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모바일 음향 작업은 온라인게임과 또 다를 것 같은데요.

이제 스마트폰 개발이 기본이 되다 보니, 어떻게 하면 최악의 상황에서 소리가 들릴지 연구하게 됩니다. 프로토타입이 나오면 스마트폰을 들고 지하철 역이나 공항 활주로를 직접 찾아가요. 진짜 시끄러운 환경에서도 원하는 소리가 어느 정도 나오면 괜찮은 거죠. 그런 곳이 모바일게임 환경이니까요.

그 다음에는 오히려 소리를 다 끄고 플레이를 해요. 플레이어 입장에서 '어, 소리가 듣고 싶어지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야 하거든요. 그런 생각을 어떻게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그래픽팀과 자주 이야기했어요. 대미지 숫자만 크게 띄워서 될 일이 아니라 아니라 임펙트가 더해져야 소리가 궁금해지거든요.

PC 기반 게임에서의 음악 작업이 현실을 흉내내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었다면, 모바일게임의 그것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시스템 제약 때문에 구색을 전부 갖추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현실을 반영할수 없다면 오히려 현실을 압도시켜버리자' 라는 생각으로 진행했어요. 스마트폰 가청 주파수가 생각보다 넓게, 쓸모 없는 범위까지 퍼져 있어요. 전화는 사람 목소리만 들으면 되니까 주파수가 작은데, 음악을 폰으로 재생하면 넓은 영역이 날아가는 거죠.


[▲ '삼국지를 품다' 출시 당시, OST 녹음과 드라마 제작 과정 소개 영상]



이 부분에서 다른 질문이 생겼습니다. 모바일게임은 분명 주된 흐름이 되었지만, 개발하는 입장에서 여러 제약을 감수할 수밖에 없지요. 특히 사운드 관련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온라인과 음질 자체가 다르고, 기술적인 문제도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이런 고민을 가장 많이 했을 법한 사람은 역시 사운드를 직접 다뤄본 이들이 아닐까요.

모바일게임에서 사운드의 미래,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온라인게임에 대한 그리움은 없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 물어보자 김달우 팀장은 담담히 "시대를 거스를 수는 없으니까요" 라고 답했습니다.



물론 아쉬운 점은 있지요. 가장 큰 난관은 역시 용량과의 싸움이에요. 제한된 공간에서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합니다. 50메가만 넘어가면 와이파이 없이는 다운로드부터 불가능하잖아요.

우리 욕심만 내서 사운드만 200메가가 되면 퀄리티만 좋아질 뿐 막상 유저들이 게임을 즐길 기회가 날아갈 수 있어요. 유저들의 데이터 요금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요. 초기 데이터가 커지면 호기롭게 게임을 받았다가 로딩이 길어서 접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웅의 군단' OST가 음원 사이트에 올라간 일은 의미가 깊다고 생각하는데요. '삼품' OST 역시 등록되어 있지만, 순수 모바일게임으로서는 사실상 이번이 최초니까요.

프로토타입이 출시 환경과 가까워졌을 때 유저의 첫 로딩 시간을 재봤어요. 10분 정도 나왔어요. 상당히 길죠?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일반 가요를 두 번 반복하는 정도의 시간이거든요. 이러면 짧게 느껴집니다. 보컬곡을 앞에 넣은 것은 설치기간을 짧게 느끼는 효과가 있었어요. 10분이라는 시간 동안 게임 안에서 레벨링하는 것만이 최선의 가치는 아니라는 거죠.

OST를 발매하자고 했을 때 사업부에서 걱정도 있었어요. 게임 안에서 나오는 음악을 유료로 풀면 반발이 크지 않을까 싶었어요.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콘첸츠고, 150명이라는 사람들의 피눈물이 섞여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정말로 울어버린 분도 있었어요. 이 노력이 정당한 크레딧으로 어딘가에 들어 있길 원했습니다.

요즘은 시디를 잘 사지 않죠. 콘텐츠로서 음악이 소장에서 소비 용도로 바뀌었어요. 작은 스마트폰 안에 몇천 곡이 들어 있고, 기분에 따라 한 곡씩 소비하는 형태지요. 여기에 긍정적인 요소도 많습니다. 콘텐츠 자체를 자기 주변에 배치할 수 있다는 의미예요. 배경음악으로 걸거나 벨소리로 삼는 일이 대표적이지요. 음악이 부가 콘텐츠로 확장되는 겁니다.

게임 역시 단순 플레이에서 벗어나서 현실 세계에 맞닿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지요. '영웅의 군단' OST 음원은 그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어려운 시절에도 명곡 많았는데... 좋은 감성의 게임음악이 필요해요"


'영웅의 군단'은 앞으로 많은 업데이트를 거칠 텐데, 새로운 음악도 준비되어 있나요?

발매한 15곡 외에 40곡이 더 준비되어 있습니다. 개발 상황에 따라 유저들은 못 듣고 버려질 곡도 있을 거예요. 최근 공개된 시즌2 티저 영상에 나온 음악이 새로운 곡 중 하나입니다.


40곡이나! 그중 혹시 보컬곡도 추가되나요?

아직 준비한 보컬곡은 없어요. 하지만 유저들의 갈증이 크다는 걸 이번에 확인했습니다. 보컬 비중을 조금씩 늘릴까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콘셉트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토이(TOY)'처럼 옴니버스 형태의 객원보컬 방식인데요. 이건 향후 업데이트에 따라 판이 너무 커져버릴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Lindsey Park이 정규앨범을 낸다는 느낌으로 죽 갈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객원식으로 한두 명 낄 수 있는 방식이죠.

[▲ '영웅의 군단' 2.0 업데이트 티저 영상, 새로운 곡 중 하나를 확인할 수 있다]


국내 게임계 주류가 PC에서 온라인으로 넘어가고, 이제 모바일까지 오면서 기승전결을 표현하는 게임음악의 역할이 축소되었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국내 게임음악계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요.

총대를 매는 질문이라 난감하긴 하네요. 게임음악의 제약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상황에서도 명곡은 많았습니다.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만 생각해도 이해가 되실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음악이 자꾸 소심한 위치로 빠지려는 것 같아요.

음악은 그 자체로 감상 가치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차를 운전하다가 그 자리에서 게임음악을 떼놓고 들어도 노래가 좋다는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지금은 너무 뒷배경이 되었고, "그래픽과 시나리오에 방해되면 안 돼!" 식이죠. 게임과 음악은 하나로 묶여서 '토털 엔터테인먼트'로 가야 해요. 음악이 뒤쪽으로 빠지니 밋밋해질 수밖에 없죠.

486컴퓨터 시절보다 시스템 제약에서 용이하고 음악 제작 환경도 편해졌는데, 사운드만 좋아졌을 뿐 감성이 훌륭한 음악들은 보기 힘들어졌어요. 기술적으로 접근하더라도, 그 주체는 감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최근 나오는 모바일 신작 중 음악에 신경 쓴 게임이 꽤 보이는데요. 앞으로의 추세가 될 수 있을까요.

확답은 못 하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작업 방식에 대해 생각했으면 하는 점은 하나 있어요. 게임을 가장 잘 아는 건 개발진이거든요. 그런데 외부 작곡가를 들여와서 "우리 음악을 누구누구가 만들었습니다" 라고 홍보하는 사례가 많아요. 물론 음악적으로 훌륭하신 분들이죠. 하지만 길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시나리오를 오래 고민하는 내부 작곡가의 감성을 키워주는 쪽이 옳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원론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게임에서 음악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역할은 '동기화'가 아닐까요. 전혀 다른 세상의 분리된 영역들이 음악의 개입을 통해 서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연인이 헤어지는 순간을 실제로 근처에서 보면 그렇게 애틋하진 않아요. 그런데 그 모습을 누군가 촬영하고 거기에 음악을 입히면,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게 되죠. 그게 대중적인 코드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대중적 코드라는 것은 결국 감성과 같이 있습니다. 이별 장면과 함께 음악을 들으면서 누군가는 울기도 하고, 다른 누구는 "나도 저랬지" 하면서 추억에 잠기기도 하지요. 이런 힘을 가진 음악이 게임 안에 들어가면서 다른 세계의 이야기에 공감을 주는 거예요. '영웅의 군단' 역시 스토리라인만 나열되면 휙 읽고 지나갔을 것이 타이틀곡 '레떼'를 통해 몰입을 주었고요. 그것을 동기화라고 합니다.

사실 음악은 시간 예술이거든요. 사진은 한눈에 바로 들어오지만,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콘텐츠를 경험할 수 없는 게 음악의 특징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그 시간을 투자하기 힘든 현대인을 위해 남는 시간에 음악을 배치하는 것이 중요해요. 인트로 영상에 같이 음악을 깔아주면서 동기화가 생겨나는 것처럼 말이지요.

▲ 왼쪽부터 엄경진 대리(사운드 디자이너), 김달우 팀장(사운드팀 총괄), 안용재 사원(사운드 디자이너), 민부기 대리 (사운드 인테그레이터)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한강 굴다리에서 '레테' 가사를 썼어요"


국내 보컬 중 그 누구라도 골라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럼 사실 제가 불러보고 싶은데...


......

네, 남자는 메리트가 없긴 하죠. 스토리텔러로 유명한 이소라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박인희 같은 가수와 일해보고 싶어요.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진 연륜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자 보컬 중에서는 윤종신, 김도향 같은 스타일이 생각나네요.


특히 영감을 얻은 드라마는 무엇인가요?

'영웅의 군단' OST는 '왕좌의 게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드라마 '워킹 데드'의 살 썩는 소리 등의 효과음에서도 도움을 받았고요. 다큐멘터리보다는 판타지 드라마가 큰 도움이 되죠. 5번 트랙 '로마(Rome)'는 로마를 가고 싶다는 환상이 만들어낸 음악이고요. 그런데, 실제로 다녀왔으면 머리가 복잡해서 더 못 썼을 것 같어요. '이게 정말 내가 본 로마에 어울리는 음악인가'를 두고 계속 고민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이유로 배경 답사를 심도 있게 하진 않아요. 편견에 사로잡혀서 음악에 제약을 받을 수 있어서죠. '레페' 역시 가사를 한강 굴다리 밑에서 썼어요. 예전에 사귀던 여친과 헤어지고 써놓은 일기가 모티프였지요.


이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쓴 가사를 부인의 보컬로......

음... 이 인터뷰는 못 보게 해야겠네요 ^^;;

▲ 메인 화면부터 귀를 사로잡는 음악이 중요하다고


OST를 듣다 보면 스토리에 비중을 많이 두는 것 같아요.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도 꼽을 수 있을까요?

히사이시 조, 한스 짐머, 존 윌리엄스, 칸노 요코 등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보컬곡은 아무래도 가요 쪽에서 찾을 수 있겠는데, 유희열이 아닐까 싶네요. 저와 감성이 많이 닮아 있어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선배님이기도 하고요.


유재하 대회 출신이셨군요!

네, 1999년에 나가서 11회 은상을 수상했습니다. '바다'라는 곡이었어요. 매년 10명씩 수상자가 나오다 보니 그쪽 뮤지션들을 다방면에서 만날 수 있더라고요. 최근 유명해진 스윗소로우(16회 대상)와도 조금 친분이 있고요. 아, '검은사막' 작곡가 류휘만 씨(10회 은상)도 같은 대회 출신이에요. 'Croove'라는 닉네임으로 더 유명한 분이죠.


게임음악에 관심이 많은 분들을 위해 '영웅의 군단' 이외 OST를 좀 추천해주신다면?

'삼국지를 품다'?(웃음) 영화 OST는 존 윌리엄스가 작곡한 '스타워즈'가 아직도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광활한 우주에서 펼쳐지는 음악이 정말 뛰어난데, 잘 들어보면 굉장히 구슬프기까지 해요.

게임 쪽은 '모던워페어 2'를 추천합니다, 한스 짐머가 참여한 작품이죠. 인터렉티브 뮤직 개념을 이때 처음 봤습니다. 게임 상황에 따라서 리듬이 들어왔다가 빠지는 기법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게임에 대한 편견, 음악으로 깨는 '선구자'가 되고 싶습니다"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더 나아가고 싶은 욕심도 있을 것 같아요.

아마 모든 창작자들이 평생 해결해야 할 부분 아닐까요. 게이머들은 지금 과도기적 시점에 섰다고 생각해요. PC 플랫폼에서 '게임음악이 이런 거다' 라고 자리를 잡을 때쯤 모바일로 인해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5년 전 아이폰 3GS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모바일로 지금과 같은 게임들을 할 것이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거든요.

첫 출발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이런 상황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 만든 음악을 주변에 들려주면 "이게 게임 OST라고?" 하면서 쉽사리 믿지 않아요. 게임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습니다. 왜 게임음악이 좋으면 안 되고, 또 가요풍이면 안 되는지. 그 대답을 들려주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게임음악을 만들고 싶은 지망생 분들에게 조언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드라마 '파스타'에서 공효진(유경 역)이 항상 새로운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거든요. 그걸 보고 이선균(현욱 역)이 "모방 없는 창조는 오만이야!" 라고 일침을 날려요. 그 말이 와닿았어요.

지금껏 만난 수많은 음악인들의 공통 특징이 있어요. 밤낮 없이 음악을 합니다. 저만 해도 1년에 100곡 정도, 그리고 어떤 기타리스트는 1년에 2천 곡 이상을 카피하기도 해요. 잘 하는 사람의 곡을 따라하고 연습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자기 색깔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무시하고 방에 틀어박혀 작업하면 그때부터 아집이 생기게 돼요.

옛날에는 그런 단독 작업을 미덕처럼 여겨졌는데, 지금은 사람을 쉽게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시대거든요. 음악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기법과 생각을 공유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기술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 관계를 넓히는 것이 정말 도움이 됩니다.

두 번째는 가장 중요한 건데, 자기 자신의 감성이 풍부해야 합니다. 저는 게임음악을 만들 때 게임에서 영감을 받은 적이 거의 없어요.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소리가 들어간 미디어'라면 가리지 말고 접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