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사 : 기어박스 소프트웨어 ⊙장르 : 온라인 FPS
⊙플랫폼 :
PS4, PC, XBOX ONE ⊙발매일 : 2016년 2월


콘솔 및 PC 게임업계는 일종의 유행을 탄다. 국내 게이머들 사이에는 서방 게임업계가 참신한 시도와 고집이 뒤섞인, 게임업계의 파라다이스로 알려져 있곤 하지만, 사실 꼭 그렇지도 않다. 그 동네도 사람 사는 동네다 보니 유행을 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다른 시선에서 보면, 이렇게 물결처럼 일어나는 유행의 발현은 업계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많은 희생자의 출현을 예고하는 일이기도 하다. 유행을 따른다는 것은 그만큼 빠르게 게이머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고, 스테레오타입의 게임들이 즐비하므로 참고자료로 삼을 작품들도 많다. 하지만 그만큼 다양한 작품들과 경쟁하게 되고, 끝내는 많아야 두셋 정도의 작품을 제외하면 전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다. 만들기 쉬운 만큼 성공하기도 어렵다는 거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유행이 승자를 가릴 준비를 하고 있다. AOS에서 한발 더 나아가, 슈터 개념을 섞은 장르. '팀 포트리스2'에 '캐릭터성'을 더 강하게 부여하면서 탄생한 이 장르는 블리자드의 '오버워치'를 필두로 서구권 게임시장의 차세대 주자로 나서고 있다. '자이겐틱', '배틀크라이', '팔라딘' 등 비슷한 작품들이 속속들이 런칭을 앞둔 상황. 오랜 기간 FPS를 제작해 온 '기어박스' 역시 이 진창 싸움에 뛰어들었으니, 그들이 내세운 작품이 바로 '배틀본'이다.

특유의 독특한 유머 감각과 만화 풍 그래픽의 조합. '보더랜드' 시리즈로 FPS의 내공을 다진 기어박스가 내세운 선수인 '배틀본'. 특이한 점은 '온라인'이라는 환경에서 완성될 수 있는 이 장르에 '싱글 플레이'를 끼워 넣음으로써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걸리는 게 너무 많다. 슬슬 추워지는 날씨 속 서울에서 진행된 '배틀본'의 싱글 플레이 체험회. 직접 이를 판단해 볼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다양한 캐릭터', 그런데 그게 오히려...

이번 체험회에서 플레이한 빌드는 싱글 플레이만 가능한 빌드. 온라인 플레이가 주력이 될 게임임에도 싱글 플레이만 가능하다는 말에 조금 아쉬웠지만, 어디까지나 '맛보기'의 차원인 만큼 불만 없이 게임으로 들어갔다. 패드 매니아인 나로서는 패드가 연결되어 있어 굉장히 기뻤지만, 플레이 3분만에 조용히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았다. 아무래도 패드 플레이를 펼치기엔 조작감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싱가폴에서 날아온 직원이 '첫 게임이니까 원거리 캐릭터를 하세요! 그럼 곧 적응하실 겁니다.'라고 충고했지만, 청개구리처럼 칼잡이를 고르고 게임 시작. '알고리즘'이라는 이름의 이 켐페인은 모종의 우주 시설을 점거한 'ISIC'라는 로봇에게서 다시 제어권을 찾아오는 내용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하는 것도 아니고, 한글화가 이뤄진 빌드도 아니었기 때문에(추후 한글화가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만세!) 스토리 파악은 일단 뒷전. FPS인데 칼을 쓰는 캐릭터를 하다 보니 화면이 살짝 이질적이지만, 적응은 어렵지 않았다.

▲ 그러니까 이 녀석을 했는데 적은 다 총을 쏜다

조작은 매우 단순했다. 주 공격과 보조 공격, 그리고 2개의 액티브 스킬과 하나의 궁극기가 전부. AOS와 FPS를 섞는 구조의 게임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매우매우 통상적인 시스템이다. 전투를 벌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레벨업을 하고, 레벨업을 할 때마다 '헬릭스 시스템('나선'이라는 뜻으로, DNA 나선을 닮아 있다)'을 통해 두 가지 업그레이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업그레이드의 분기를 통해 플레이 성향에 차별화를 꾀한 것 역시 특별하지 않으나 이미 검증되어 있는 시스템이니 크게 말할 필요가 없다.

▲ 성장 분기는 이런 식으로

문제는 '싱글 플레이'라는 콘텐츠 자체가 다양한 캐릭터하고 썩 어울리는 요소가 아니라는 거다. 배틀본은 기본적으로 온라인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게임이고, 그만큼 다양한 캐릭터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캐릭터 하나하나는 굉장히 단순하고, 심플하게 만들어져 있다. 복잡한 성장 곡선을 가진다든가, 스킬이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캐릭터 하나가 가지는 플레이 타입은 상당히 일관적이며, 그 캐릭터의 개성에 맞춘 전술을 사용하게 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내 캐릭터인 '레스'는 세 개의 검을 사용하는 검사다 보니 대부분의 공격이 근접 공격이다. 무기를 바꾸거나 할 수는 없으니 시작부터 끝까지 칼을 휘둘러야 하는데 이게 혼자 플레이하다 보니 상당히 질린다.

'FPS'의 틀을 가지고 있지만, 'AOS'의 시스템을 가져왔다는 것은 각 캐릭터마다 각각 맡은 '역할'이 있다는 뜻이다. 가령 '레스'는 빠르게 달려들이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주력 딜러지만, 맷집이 약하기 때문에 집중 포화에 금방 녹아버린다. 버섯돌이 '미코'의 경우 힐링이 가능하지만 공격 능력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 캐릭터 하나로 모든 상황을 대처하려다 보니 난감하기 짝이 없다

때문에 각 역할군의 캐릭터들이 서로를 보완하면서 재미를 느껴야 하는게 팀 게임인데, 혼자 하는 콘텐츠를 만들어 두었으니 그 재미가 100% 살아나지 않았다. '콜오브듀티' 시리즈에서 갓 전장에 나온 신병이 헬기의 기관총도 쏘고 미사일도 쏘고 저격도 하는, 초인 만능 병사인 이유는 게임 내에서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주려 했기 때문이다. 배틀본의 싱글 플레이 자체는 여러 모로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마치 비빔밥에서 고사리 나물만 따로 빼서 먹는 기분이랄까?


▲ 개그 센스는 여전하다



'보더랜드'의 내공은 그대로, 캐릭터 전환 기능이 있었다면…

그럼에도 '배틀본'의 싱글 플레이 '기본'은 훌륭했다. 얼핏 복잡한 듯 보이나 어렵지 않게 길을 찾을 수 있는 레벨 디자인이나, 지루해질 만 하면 튀어나오는 중간 보스 등 기어박스만의 노하우가 절절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쉬운 건 더는 강력한 상대를 처치해도 총을 떨구지 않는다는 점이었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보더랜드' 시리즈는 시니컬한 블랙 유머와 FPS로서의 재미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물량의 총기를 파밍하는 재미가 주력 콘텐츠였던데 반해 배틀본은 전투 그 자체가 콘텐츠이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었다.

타격감은 분명히 좋았다. 검으로 벤다기보다는 몽둥이로 두들기는 느낌이었지만, 상대들이 기계로 만들어진 로봇 군단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칼로 적을 썽둥썽둥 썰어대고, 충격파와 검기로 로봇들을 도륙 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신이 난다. 적들이 가득 나오는 부분에서 탄막을 피해 가며 돌진해 칼부림하는 쾌감 자체는 너무나도 훌륭하다. 칼이라곤 검도 수업 받을 때 외엔 쥐어 본 적도 없지만, 진짜 내가 칼을 든 느낌이다.

▲ 기본 타격감은 상당히 훌륭한 편

하지만 이 역시, 금방 지겨워진다. 스테이지 하나라곤 하지만 꽤 긴 호흡을 갖고 있기 때문에 플레이 시간은 약 20-30분. 그동안 두 개의 스킬과 궁극기, 그리고 기본 공격과 보조 공격만으로 모든 것을 해먹어야 한다. 물론 플레이 가능한 스테이지가 하나일 뿐이지, 상용화 빌드에서는 모든 스테이지를 그렇게 해야 할 거다. 아이 지겨워.

가장 큰 문제는, 상술한 대로 내 캐릭터가 모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레스'는 다수의 자코몹이나 중간 보스 등을 처리하는 데는 탁월한 성능을 보여주었다. 기본적으로 공격력이 높아 돌진해서 쓱쓱 그어버리면 다들 고철이 되어 있으니 신이 난다. 문제는 스테이지의 최종 보스였다. 벌레 형태를 띤 스테이지 최종 보스는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덩치를 갖고 있었는데, 칼로 공격하려니 공격 가능한 영역이 한정적인데다, 최종 보스이니만큼 맷집도 엄청나게 높았다. 사실상 노데스 플레이는 불가능할 지경.

▲ 싱글플레이의 장점은 코옵을 미친듯이 하고 싶게 만든다는 거다

레벨 디자인 자체가 곳곳에 엄폐물이 있어 원거리 히트 앤드 런 공격을 유도하게끔 되어 있지만, 내 캐릭터는 그런 것 못한다. 10초에 한 번 정도 쓸 수 있는 검기로 공격을 하자니 다 깨면 내일이 올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빈틈을 노려 달려든 후 최대한 피해를 주고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코인 러시'를 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 숫자가 정해져 있으니 이조차도 큰 피해를 주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눈물이 난다. 하다못해 권총이라도 한 자루 줬으면 좋으련만.

아마 '서브 웨폰'의 개념을 넣었거나, 캐릭터 전환 기능을 도입했다면 훨씬 플레이가 쾌적했을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세 명 정도의 캐릭터를 동시에 골라(진영이 같아야 한다거나 하는 패널티가 있다 해도) 필요에 따라 바꿔가며 플레이할 수 있었다면 지루함도 덜고 상황에 따른 대처도 훨씬 수월해졌을 것 같다. 아니 두 명만 되어도…. 칼잡이 하나로 미션을 전부 깨려 하다 보니 아무리 내가 스페이스 소드마스터라 해도 죽어날 수밖에 없다. 적이 약한 것도 아니고.

▲ 친구와 함께라면 참 좋을 텐데

끝내 여유 목숨을 남기고 클리어하긴 했지만, 기관총에 벌집이 되어 쓰러지던 내 캐릭터를 되돌아보니 마음이 아프다. 전장에 나가는데 권총 한 자루도 없이 나가는 게 말이 되나. 아무리 칼이 세도 그렇지.



기본은 좋지만 제한된 콘텐츠, '주력'은 무리

'배틀본'의 싱글 플레이는 분명히 나쁘지 않았다. FPS로서 갖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도 충분했고, 개발사가 개발사이니만큼, 딱히 모자람이 없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문제는 이 '싱글 플레이'라는 콘텐츠가 어디까지나 '배틀본'이라는 게임의 주력이 아니라는 점이다.

슈팅 게임 내에서 스토리의 무의미성을 이야기했던 '존 카맥'의 발언은 내러티브가 게임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 시대가 오면서 자연스럽게 사장되었다. 하지만 인스턴트성 플레이가 주력이 되는 '온라인 아레나물'에서 또다시 이 '스토리라인'은 크게 의미 없는 콘텐츠가 되어버렸다. 거의 모든 게임은 저마다 각각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MMORPG와 같이 스토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임이라면 모를까, 한판 한판이 중요한 온라인 게임에서 스토리는 그저 게임을 조금 더 맛깔나게 꾸며주는 양념 정도에 불과하다.

▲ 캐릭터 위주의 대전형 게임들이 대세가 되며 내러티브는 다시 양념이 되었다

그런 만큼 '배틀본'의 싱글 플레이는 다소 이질적인 콘텐츠라 할 수 있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게임에 자신들의 개발 퍼포먼스를 뽐내기 위해 집어넣은 느낌이라 해야 할까? 온라인 대전과 코옵 플레이가 주력이 될 게임에서 혼자 하는 콘텐츠가 게임 입문 시 적응을 위한 단계 이상의 어떤 의미가 되어 줄지 짐작하기 어렵다. 캐릭터별 숙련도가 존재한다면 육성용 정도로 더 쓰일까?

어쩌면 정식 발매 이후, 이 글 자체가 크게 의미 없어지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 '배틀본'이 다른 FPS+AOS 게임들과 가지는 차별화된 매력으로 강력한 싱글 플레이 기능을 내세울 수도 있고, 또 그게 제대로 먹혀들어 게임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제나 그랬듯 게임에 대한 선 평가는 틀릴 수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내 눈이 모자라 가늠하지 못했을 뿐, 내 예상이 틀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심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 싱글 플레이 덕에 '갓 게임'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듯 '배틀본'의 싱글 플레이 콘텐츠는 잘 만들었을지언정, 게임의 주력 콘텐츠가 되기엔 모자란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게임이 정식 발매되는 내년 초 전까지, 기어박스가 이 콘텐츠를 어떻게 손보느냐에 따라 이 첫인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을 것 같다. 멀티 플레이와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콘텐츠, 혼자 해도 충분히 매력적인 게임으로서 '배틀본'이 게이머들에게 인상을 남길 수 있다면, 언젠가 지금 쓴 이 리뷰를 다시 보면서 미소를 짓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