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에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났다. 슬슬 이곳의 문화에 적응하고 있음을 느낀다. 항상 친절한 현지인들과 건물이 그리 높지 않아 맑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환경, 그리고 나름 분주하게 움직이는 차량과 오토바이까지 말이다. 딱 한 가지, 호텔 조식으로 나오는 달걀 프라이가 반숙이라는 점은 적응하기 힘들다.

현재 자카르타와 팔렘방에서는 2018 아시안게임이 한창 진행 중이다. 경기가 열리는 현장에서는 종목에 상관없이 선수들의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며 열띤 응원을 펼치는 관객들도 존재한다고 들었다.

e스포츠 경기가 열리는 마하카 스퀘어도 다른 곳들과 다르지 않았다. 현장을 찾은 관객들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 혹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을 향해 목청이 터져라 응원을 보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2일 차에 내가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부터 소개하겠다.


당신, 대한민국 대표팀?
현지 스태프를 대한민국 대표팀으로 착각했던 일


현장에는 정말 많은 수의 스태프가 분주하게 일하고 있다. 경기장 입구와 출구를 지키는 인원들 뿐만 아니라 무대를 오가며 상황을 체크하는 사람들, 심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까지. 이들 역시 아시안게임 e스포츠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쳐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했다.

점심식사를 받을 수 있는 장소가 1일 차와 달라져서 애를 먹었는데 현지 스태프 중에 한 명이 자신을 따라오라며 꽤 먼 곳까지 길안내를 해주었다.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스태프라서 대화를 하진 못했지만, 다행히 '땡큐'라는 나의 감사 인사는 알아듣고 밝은 미소와 함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경기가 진행되기 직전에 메인 스테이지에서 펼쳐졌던 경기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무대 옆에서 대기하고 있을 대한민국 대표 선수단의 모습도 찍고 응원의 말도 건낼 겸 그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 멀리 '페이커' 이상혁으로 보이는 얼굴이 보였다. 몸에는 대한민국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 어두운 곳에서 문득 바라보면 헷갈린다. 정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페이커'도 아니었고, 대한민국 대표 선수단의 일원도 아니었다. 그는 현지 스태프였다. 발길을 돌리면서 내가 왜 그 사람을 '페이커'와 헷갈렸는지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러다가 문득 현지 스태프 유니폼과 대한민국 대표팀 유니폼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어두컴컴한 경기장 내부에서, 그리고 멀리서 육안으로만 확인하기엔 두 유니폼의 색깔이나 디자인이 너무 비슷했다. 그 후로도 종종 나는 현지 스태프와 대한민국 대표 선수단을 헷갈리며 애꿎은 경기장 조명 탓을 했다.


매너 좋은 '피넛'
그리고 예상보다 뜨거웠던 클래시로얄 현장


거의 모든 스포츠 종목에서는 경기 시작 전 혹은 종료 직후에 양 팀의 선수들이 서로의 플레이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인사와 악수를 나눈다. 라이엇게임즈 주관으로 진행되는 LoL 월드 챔피언십이나 MSI, 리프트 라이벌즈는 물론 LoL 올스타전에서도 이러한 악수 문화가 정착된 지 오래다. 밴픽 단계가 끝나면 양 팀의 코치진이 무대 중앙으로 향해 서로 악수를 하는 장면도 유명하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경기 종료 직후에 승리한 팀이 패배한 팀 쪽으로 향해 서로 악수를 건내며 승리에 대한 축하와 패배에 대한 위로를 전했다. 그런 문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입장에서 참 보기 좋은 장면이었다.

그들이 악수를 나누는 장면을 이번 기행기에 담기 위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찍힌 사진을 확인하다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 순간 '피넛'이 발에 뭔가 걸려 넘어지는 줄 알았다.

내가 셔터를 누를 때 '피넛' 한왕호가 상대 선수들 중 한 명과 악수를 나눌 때였는데, '피넛'의 자세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의 허리는 약 80도 정도 굽어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순간 '피넛'이 악수를 하려다가 발에 뭔가 걸려서 넘어지는 줄 알았다.

그래도 '피넛'이 무대에서 정말로 넘어지거나 휘청거리진 않았으니 분명 다른 상황이었을 것이다. 결국, 난 그 장면이 매너 좋은 '피넛'의 모습이라고 결론지었다. 상대 선수 쪽으로 뻗어있는 공손한 두 손, 꺾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강력하게 굽힌 허리의 각도 등 그의 모습 자체가 '매너'라는 단어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었다.

지난 1일 차 기행기에 언급하고 싶었지만 담지 못했던 일화가 있다. LoL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마하카 스퀘어에서는 1일 차에 클래시로얄 경기도 함께 진행됐다. 심지어 LoL 1일 차 일정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클래시로얄 선수들의 경기가 메인 스테이지 자리를 꿰차기도 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다. 국내에서는 클래시로얄 e스포츠가 아직 저변을 크게 확장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관객석을 바라보자 왜 클래시로얄 대회가 메인 스테이지를 차지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많은 관객들이 메인 스테이지에서 중계되는 클래시로얄 대회 화면을 지켜보면서 열띤 응원과 함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클래시로얄의 인기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LoL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는 현장의 관심과 응원. 왜 클래시로얄이 이번 아시안게임 e스포츠 종목으로 당당하게 선택됐는지 알 수 있게 해준 경험이었다. 또한, 대회 결과 인도네시아의 16살 소년이 아시안게임 e스포츠 클래시로얄 부문에서 자신의 모국에 금메달을 안겨주기도 했다.


현장 찾은 각국 응원단
이곳의 열기도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마하카 스퀘어에는 현지 팬들보다는 중국 관람객이 많았다.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점 때문인지 e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경기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중국 팬들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왔다.

LPL 아나운서를 맡고 있는 '캔디스' 유 수앙도 경기장을 찾았다. 첫 날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2일 차에도 현장을 찾은 모습을 보고 그녀가 '캔디스'임을 알게 됐다. '캔디스'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셀카봉'에 연결한 채 이곳 저곳을 누비면서 경기장 분위기를 알리고 있었다.

▲ '뿌우'

평소 LPL을 취재하는 중국 기자들과 친분이 있는지 '캔디스'는 아시안게임 e스포츠 미디어 룸에도 종종 합류했다. 기자들과 함께 삼삼오오 모여 중국 대표팀의 경기를 보면서 '짜요!'를 외치기도 했다. 아쉽게도 중국어를 아예 할 줄 몰라 그녀와의 인터뷰를 진행하진 못했지만, 그녀의 e스포츠 사랑을 옆에서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캔디스' 뿐만 아니라 경기장 내부에는 중국 응원단이 많았다. 그들은 중국 대표팀의 경기가 메인 스테이지 화면에 중계되면 큰 소리로 함성을 보냈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기억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소위 '비매너 응원'은 없었다. 상대 팀에 대한 야유도, 중국 대표팀을 위기에 빠뜨릴 만한 상대의 매복 전략을 소리쳐서 알리려는 시도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중국에도 e스포츠가 스포츠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그들의 응원 문화 역시 점점 성숙해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응원전 하면 빠지지 않는 것이 또 우리나라 아니겠는가. 아시안게임 LoL 경기장에도 대한민국 응원단이 함께 했다. 한국게임산업협회 회원 게임사들이 대규모 현지 응원단을 꾸려 그 누구보다 열심히 대한민국 대표팀을 응원했다. 각자 준비한 응원도구와 대형 태극기를 들고 선수들이 활약할 때마다 환호성을 아끼지 않았다.

꼭 단체를 이뤄 응원을 오지 않으면 또 어떠한가. 2일 차 일정 내내 유독 눈에 띄는 관객이 있었다. 그는 2층 관객석에 자리를 잡고 함께 온 동료들과 함께 큰 소리로 '대~한민국!'을 연호했다. 이미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을 만큼 힘겨워 보였지만, 그의 응원에 대한 열정은 거친 목소리와 함께 현장에 그대로 전달됐다. 대한민국 대표팀과 중국 대표팀의 8강 경기 중계 화면도 그 관객을 잡아줬을 정도였다. 그 누구보다 엄청난 응원을 보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내 카메라에도 담을 수 있었다. 딱 한 사람만 등장하는 사진이지만, 그 어떤 사진보다 멋있고 웅장해보였다.


경기장을 누비면서 관객석을 지켜보던 나는 놀라운 현장을 목격했다. OGN에서 제작한 SKT T1 선수들 관련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페이커'의 할머니를 발견한 것이었다. 현지에서 선수단을 챙기고 있는 한국e스포츠협회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페이커'의 할머니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10명 정도 현장을 찾았다고 했다.

'페이커'의 가족들이 자리를 잡은 곳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은 채 달려갔다. 종종 프로게이머의 가족들이 LCK 경기장을 방문해 응원을 보낸 적은 있었지만, 먼 타지까지 찾아온 걸 처음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관객석에는 아직 '페이커'의 할머니와 아버지 등 몇 명만 앉아있었다. '페이커'의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그들의 모습 역시 카메라에 담았다. 국가대표 프로게이머를 손자 혹은 아들로 둔 가족들의 사랑에 훈훈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놀랐던 사실은 '페이커' 가족들의 LoL 이해도였다. 그들은 사우디아라비아전 2세트 밴픽 단계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1픽으로 진을 뽑자마자 "혹시 이번에는 SKT T1 우승 스킨 조합인가?" 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이라와 리 신, 잭스까지 등장하자 "맞네, 그 조합이네"라고 외치기도 했다. '페이커'의 가족들 중 누군가는 "옆에서 (이)상혁이한테 '제드, 제드' 거리고 있어"라며 크게 웃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경기 중에 '피넛'의 리 신과 '페이커'의 신드라가 크게 활약하자 "'피넛'이 '나도 있다!' 라고 외치는 것 같네", "우리 상혁이 스킬 정확하게 쓰는 것 좀 봐" 라며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무리 프로게이머의 가족이라고 해도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깊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들으면서 또 한 번 가족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자카르타 현지 취재 : 박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