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 19로 연일 정신 없는 요즘이다. 한국에서 1월 20일 첫 확진자가 나온 지 벌써 두 달이나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외출 시에는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고, 개학이나 개강 연기, 재택근무나 출퇴근 시간 조정 등의 조치와 함께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최근 국내 일일 확진자 수가 두 자릿수로 떨어지며 차츰 바이러스가 감소하는 추세인 듯 보였으나 소규모 집단 감염이 이어지며 19일 일일 확진자 수가 다시 3자리로 증가했다. 물론 확진자 수가 급증하던 초기보다는 상황이 호전된 것 같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세계적으로 코로나 사태는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WHO는 1월 30일 홍콩독감과 신종플루에 이어 3번째 팬데믹(Pandemic)을 선언했다.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등 유럽 주요 국가에서는 높은 발병률과 사망률을 보이고 있으며, 중동의 이란과 최근에는 미국에서까지 확진자와 사망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하기 위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그 일환으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의 '오염된 피' 사건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오염된 피 사건은 2005년 9월 13일 와우 북미 서버에서 발생한 게임 내 집단 전염병 창궐 사태다. 사건은 '줄구룹' 레이드 던전의 마지막 우두머리인 혈신 학카르가 사용하는 '오염된 피'라는 기술에서 시작됐다.

학카르의 오염된 피는 캐릭터에게 200 이상의 지속 피해를 입는 디버프를 걸고 주변의 플레이어에게 이를 전염시켰다. 오염된 피는 던전 내부에서만 영향을 주는 디버프였기 때문에 던전 밖으로 나가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사냥꾼의 펫이 오염된 피에 걸린 채로 소환 해제한 뒤 던전 밖에서 다시 펫을 소환하면 디버프가 사라지지 않고 사냥꾼과 펫 모두에게 걸려 있는 문제가 발생했다.

▲ 줄구룹 학카르의 오염된 피가 최초 감염자인 사냥꾼과 펫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야생동물에만 존재하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염되기 시작한 것처럼 줄구룹 던전 내부에서만 있어야 할 오염된 피가 던전 밖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최초 감염자인 사냥꾼과 펫은 대도시 등에서 주변 플레이어에게 급속도로 오염된 피를 전파했다. 이때 NPC도 오염된 피에 감염됐는데 NPC는 비전투 시 자동으로 생명력을 회복하기 때문에 죽지 않는 보균자가 되어 '슈퍼 전파자' 역할을 했다.

오염된 피에 걸린 플레이어가 다른 대도시로 이동해 다시 그곳의 NPC가 슈퍼 보균자가 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2차, 3차 감염을 막을 수 없었다. 디버프 제거 방법이 없었기에 오염된 피에 걸린 플레이어가 죽고 부활해도 다시 걸려 무차별적으로 퍼져나갔고 도시마다 시체가 쌓여갔다. 사태 파악을 위해 호출된 게임 매니저(GM)까지 감염되면서 심각성을 깨달은 블리자드는 결국 서버를 리셋 시켜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으로 오염된 피 사건을 해결했다.

▲ 오염된 피로 죽은 캐릭터의 시체가 쌓여가는 참혹한 모습


오염된 피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가 취한 다양한 행동은 현실 사회에서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우리의 모습을 보여줬다. 실제로 코로나 발병 후 생긴 여러 사건과 비슷한 점이 많다.

캐릭터의 생명력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힐러는 오염된 피에 걸린 플레이어를 치유했고, 대도시에서는 감염자를 격리하기도 했으며, 스스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이동해 격리된 채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도 있었다. 더 많은 희생자를 막기 위해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이 도시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안전한 구역으로 유도하는 민병대도 생겨났다. 이런 와중에도 그럴듯한 물약을 백신이라고 속여 팔거나, '나만 당할 순 없다'는 심보로 일부러 도시를 옮겨가며 오염된 피를 전파하는 '트롤링' 행위가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 사태 후 의료진의 헌신적인 치료와 감염자 격리 등 조치가 취해졌지만, 트롤링도 많았다. 유튜브 조회 수를 올리기 위해 우한을 다녀왔다며 확진자 코스프레를 하기도 했고, 확진자인 척 연기한 뒤 추격전을 펼치는 쇼를 벌이기도 했으며, 마스크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매점 매석해 이윤을 남기는 사람도 있었다. 확진자가 의료 관계자에게 침을 뱉거나, 자가 격리 대상자가 이를 무시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기도 했다.

당시 언론과 의료계는 오염된 피 사건에서 게임 속 사람들의 행동에 주목했다. BBC 뉴스나 의학 저널에 '전염병 확산의 예시'로 소개했고, 미국 질병 통제 예방 센터는 연구 목적으로 블리자드에 통계 데이터를 요청하기도 했다. 구글 학술검색에 등록된 논문만 약 156개가 넘을 뿐 아니라 최초의 의학 학술지인 란셋(The LANCET)에 게재되는 등 실제 전염병 연구에도 기여했다.

▲ 의학 학술지 LANCET에 오염된 피 관련 논문이 게재된 모습


그리고 15년이 지난 오늘날, 코로나 사태를 연구하는데 와우의 오염된 피를 다룬 논문이 주요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2007년 '실제 사회에서 발생한 전염병 사태의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가상 게임 세계의 잠재성(The untapped potential of virtual game worlds to shed light on real world epidemics)'이라는 논문의 공동 저자인 Eric Lofgren과 Nina Fefferman은 영국 게임 매체 PC GAMER와의 인터뷰를 통해 코로나로 오염된 피 사건이 재조명되고 있다고 밝혔다.

Eric은 "공공 건강과 관련해 긴급사태가 벌어졌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인지하고 있는 것은 대응법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며 "바이러스는 존재할 뿐이고 인간의 반응과 행동에 의해 얼마나 빠르게 전파되는지가 결정된다"고 말했다. "오염된 피 사건으로 사람들의 다양한 면모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오염된 피는 게임 속 세상에만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생명에 아무 위협이 되지 않지만 코로나 19는 아직 정확한 사망률을 파악하기 어려워 위험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또한, 게임에서는 재미로 오염된 피를 전파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비판에 대해 "일부러 전염병을 퍼뜨리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지금은 건강해도 전염병에 걸릴 수 있는 누군가가 자신도 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일부러 병을 퍼뜨리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강조했다.

▲ 논문의 공동 저자 Eric Lofgren(좌)와 Nina Fefferman(우)


게임 속 캐릭터의 죽음과 현실에서의 죽음은 그 무게가 차원이 다르다. 게임은 리셋 기능을 통해 한번 엎어진 물도 다시 담을 수 있지만, 현실에서 쏟아진 물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코로나에 대한 과도한 공포는 지양해야 하지만 사회 구성원 모두가 심각성을 인지하고 현명하게 행동해야만 더 많은 죽음을 막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