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4일. 그 날의 경기는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스프링 결승을 향해 가던 SKT T1과 CJ 엔투스는 플레이오프 2라운드라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팬들과 전문가들은 SKT T1의 우세를 예상했으나 실제 경기는 매우 다르게 흘러갔다. CJ 엔투스는 앞선 1, 2 세트에 SKT T1을 상대로 완승을 하며, 승리에 단 1승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반전은 3세트부터 시작됐다. SKT는 당시 폼이 좋지 못하다고 평가받는 ‘벵기’ 배성웅을 기용해 한 세트를 만회하는 데 성공한다. 이어 4세트에는 리그 오브 레전드 경기 사상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손꼽히는 혈전을 벌였고, ‘마린’ 장경환이 끝난 경기를 살려내는 기지를 발휘한 끝에 승리를 거둔다. CJ 엔투스는 잇따른 패배를 이겨내지 못하고 5세트, 허무하게 패배한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자리에서 CJ 엔투스 팬들은 모두 하나 같이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수들은 죄를 지은 사람들처럼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 지 몰라 했다. CJ 엔투스는 그 경기를 기점으로 하락세를 걸었고, 많던 팬들과 함께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당시 패배에 대해 가장 많은 비난을 들었던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손대영 코치였다. ‘앰비션’ 강찬용, ‘매드라이프’ 홍민기, ‘샤이’ 박상면 등 당대 내로라하는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한 팀이었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해왔다.


주로 코치진의 무능함에 대한 지적이 많았다. 중요한 경기에서 밴픽이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 선수들을 관리하지 못한 책임 등이 거론됐고, CJ 엔투스의 코치진들은 결국 팀들 떠나게 된다. 손대영 코치 역시 오랫동안 함께한 팀, CJ 엔투스를 떠나 중국으로 향하게 된다.




“여기가 내 코치 생활에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한국에서는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죠. 저는 제가 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2부 리그든 어디든 가려고 했어요. 그렇게 처음 연결된 곳이 EDG 였어요. 그런데 당시 사장님께서 ‘나는 아직 너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2부 리그부터 해봐라’하고 하셨고, 그렇게 EDE(후 IMAY)에 코치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됐죠.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고민 탓에 머리를 잡으면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죠. 500원짜리 동전만큼 탈모가 생기기도 하고.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정말 못 돌아갈 것 같아요.”


낯선 땅 중국에서의 코치 생활은 쉽지 않았다. 식생활부터 연습 환경, 코치를 대하는 선수들의 태도, 언어, 중국식 밴픽과 경기 운영까지. 손대영 감독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이 모든 것들에 적응해야만 했다. 리그가 시작되고 EDE를 내리 3연패를 했다. 손대영 감독은 더 미래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내가 중국을 잘 몰랐던 것 같기도 해요. 내가 한국인 코치라서 중국인 선수들이 코치에 대해 존중을 해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없었죠. 그리고 선수들이 너무 게임을 못 했어요. 제가 생각했던 그림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밴픽도 한국식 밴픽을 가져오면 이길 거로 생각했는데, 이게 중국에 전혀 맞지 않더군요.


리그가 시작하고 연달아 3연패를 하고 나서 사장님이 날 부르셨어요. 짐을 싸고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사장실에 들어갔죠. 그런데 사장님이 내게 묻더군요. 어떻게 하면 팀 성적이 좋아질 수 있겠냐고. 그래서 팀의 모든 권한을 달라고 했어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우리 팀은 1부 리그에 진출할 수 있다고 말했죠.



솔직히 말하면,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정말 자신이 있던 게 아니라, 다시 이런 모습으로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 자신에 대해 너무 실망할 것 같았어요. 한국에서 능력이 없다고 중국으로 갔는데, 중국에서도 다시 능력이 없어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거잖아요. 그게 너무 창피했어요.


한 시즌, 딱 한 시즌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자는 생각에 모든 권한을 달라고 했습니다. 선수들도 내가 원하는 대로 컨트롤 할 수 있게 부탁했죠. 사장님이 알았다며 그때 모든 권한을 내게 위임했고, 본격적으로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어요.


한국식 밴픽은 실수를 안 하고 운영을 잘해서 스노우볼을 굴리면 끝도 없이 굴러가는 조합을 선호해요. 그런데 중국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실수를 많이 하거든요. 그래서 실수를 하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조합을 줘야 해요. 선수들이 잘하지 못하는 챔피언 픽을 연습하게 하고, 경기 VOD를 보여주면서 게임의 운영을 알려줬어요. 이런 방식으로 해라!


그때부터 선수들이 이기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소름이 막 돋았죠. ‘아! 이 친구들은 이렇게 해야 먹히는구나!’ 더 솔직히 말하면, 그 방식밖에 할 게 없었어요. 우리가 라인전을 잘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라인 전을 이기는 픽을 주면 10분 만에 게임이 터졌거든요. 그래서 라인전은 반반씩 하더라도, 조합 상성이 좋아서 넥서스만 막으면 이길 수 있게 챔피언을 쥐여줬어요.”



▲ IMAY와 함께 극적으로 2016년 롤드컵에 진출한 손대영 감독


손대영 감독은 소속팀 EDE를 2부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25승 5패. 첫 세 번의 패배 이후에는 8연승 후 1패, 16연승 후에 1패를 했을 뿐이다. 손대영 감독의 신화는 그곳이 출발점이었다. 다음 시즌에는 2부 리거였던 자신의 팀 IMAY(전 EDE)를 월드 챔피언십으로 이끌고 16강 진출이라는 성적을 거둔다.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현재는 LCK의 그리핀이 가장 이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손대영 감독은 2017시즌까지 IMAY와 함께 했다.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이 겹치면서 팀 운영은 엉망이 되었지만, 손대영 감독은 자신의 팀을 다시 한번 포스트 시즌까지 올려놓는다. 많은 중국 분석가들은 흔들리는 IMAY가 다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데에는 손대영 감독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평가했다.


2018년 스프링 시즌을 앞두고 손대영은 RNG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중국 최고의 명문 게임단 중 하나로 분류되는 RNG, 그리고 IMAY를 통해 그 능력을 입증한 손대영 감독의 만남이었기에 중국 팬들은 많은 기대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기대로 끝나지 않았다.



▲ 2018년 1월, 손대영은 RNG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IMAY에서 활동하던 후반에는 팀 성적이 나오지 않았어요. 당시에는 계약 문제나 팀의 재정상의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이게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저는 끝까지 IMAY와 함께 하고 싶었지만, 팀이 저와의 재계약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인정받지 못할 바에는 팀을 나오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RNG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RNG는 내가 2부 리그에 있었을 때부터 함께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왔어요. IMAY에서 나와 함께 하던 파이어 폭스 코치가 RNG 감독으로 부임할 때에도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내가 IMAY의 감독직을 그만뒀을 때도 RNG는 나를 찾아왔어요.


다른 팀도 내게 제의를 많이 했었고,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한 팀도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성적이 잘 나올 수 있는 팀에 가고 싶었고, 그중에 RNG가 가장 좋은 성적을 낼 만한 팀이었죠.


RNG는 IMAY와 엄청난 차이가 있는 팀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어요. 다만, RNG 선수들이 프라이드가 좀 세다는 생각은 있었어요. 그런 부분에서 팀플레이를 가르치기 힘들었네요. IMAY 선수들은 ‘우리는 어떻게든 힘을 합쳐야 이긴다’는 생각으로 경기를 했거든요. 하지만 RNG는 ‘우리는 5분이면 경기를 끝낼 수 있다’라는 마인드로 경기에 임하죠.


RNG의 경기 스타일은 ‘하트’ 이관형 코치의 영향이 많이 커요. 관형이는 큰 틀을 그리는 데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고, 저는 여기에 특별히 내 색깔을 넣으려고 하지 않고 있어요. 특별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직접 관형이에게 이야기하는 편이고요. 관형이에게 고마운 건 항상 무대에 오르기 전에 저에게 모든 것을 상의한다는 거예요. 단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모두 그랬어요.


선수들의 능력이 워낙 뛰어나서 가능한 부분이기도 해요. 저희가 스케치만 그려도 아이들이 이를 완성하거든요. 나쁘게 말하면 다른 게 안되니까,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요. 모든 팀마다 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거를 포지션 변화와 같은 전략으로 메워가는 거죠.”




RNG는 손대영 감독을 영입한 뒤로, 최고의 전성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2018년 스프링 시즌 우승은 중국 최고 스타 ‘우지’에게 생에 첫 트로피를 안겨준 일이었다. 2018 MSI 우승은 중국에서도 EDG만이 유일하게 해낸 큰 업적이기도 하다. 그밖에 데마시아 컵 우승과 리프트 라이벌즈 우승. RNG는 2018년 세계 제일의 LoL 프로게임단에 가장 근접해 있는 팀이다.


“저는 우승을 많이 해본 감독은 아닙니다. CJ에 있을 때도 그랬고, IMAY는 더더욱 그랬죠. 성적만 잘 내자는 생각만 해왔기에 우승이라는 타이틀이 너무 가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RNG를 선택한 거고, 계속 우승을 하고 있으니 너무 기쁘고 좋지요.


하지만 딱 우승한 그 날만 기뻐하고 있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롤드컵이니까요. 중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RNG의 지금까지의 행보에 몇 점을 주겠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저는 20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우승은 딱 20점이에요. 여기서 섬머 시즌에 우승한다면 10점을 더 줄 수 있어요. 그리고 롤드컵에 우승한다면, 남은 70점을 모두 줄 수 있을 거 같아요.”


중국으로 떠난 지 3년. 그 시간 동안 손대영은 중국에서 최고의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손대영 감독은 이번  월드 챔피언십에서 RNG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고 있다. 실패를 경험했던 한국, 그리고 최고가 되어 다시 돌아가게 될지 모를 한국. 그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국에 돌아가는 것에 대해 딱히 내가 거둔 성공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은 없어요. 그때 욕을 먹던 내가 이렇게 성공했다는. 그런 마음? 있어 보이나요(웃음).


한국에서 경기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지역이라면 시차에 적응하는데, 음식에 적응하는 데 많이 힘들 었을 거에요. 저는 이번이 RNG가 우승하기 정말 좋은 기회이고, 계속 그런 운들이 맞물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것들이 다 우리가 우승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생각이에요.


지금 중국에서는 RNG를 향한 기대가 정말 높아요. 누구도 우리가 지는 걸 상상하고 있지 않아요. 그런 부분이 많이 부담되긴 해요. 한국팀을 상대로 이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요. 많은 팀이 상향 평준화되었고, 이제는 어느 팀 하나도 만만하고 쉬운 팀이 없어요.


하지만 지금은 또한, 전 세계가 비슷해지고 있는 단계에요. 항상 이야기 나오던 ‘갭 이즈 클로징’. 제 생각에는 이제 1~2년이면 갭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질 거로 생각해요. 그만큼 다른 나라들이 빠르게 발전하고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있어요.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내가 이 정도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그 무대가 롤드컵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