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뜨거운 게시판~

찬물이나 부어줘야겠다는 ^^*

 

카를5세 (Karl Ⅴ,카를로스1세, 1500~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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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였으며, 1516년부터 1556년 퇴위할때까지 스페인을 다스립니다.

보통 카를 5세로 자주 언급되지만,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 (Carlos Ⅰ) 으로 불립니다.

 

당시 서유럽을 이끌었던 왕조들 -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왕국, 부르고뉴 공국, 오스트리아 - 의 상속자로서

그는 중유럽, 서유럽, 남유럽과 아메리카, 필리핀의 식민지까지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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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6년 퇴위를 결정한 카를5세는 스페인의 통치권을 아들인 펠리페2세에게 양도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통치권은

남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양도합니다. 오랜 통치와 전쟁에 지친 카를 5세는 퇴위전부터 신경쇠약 기색을

보였고, 스페인의 유스테 수도원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 1558년에 사망합니다.

 

펠리페 2세 (Felipe Ⅱ de Hbsburgo, 1527 ~ 15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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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는 15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의 딸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나고,

1556년에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영토를 물려받습니다. 아라곤 왕국을 비롯한 전국각지에 총독을 파견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공고히하였고, 1561년에 수도를 바야돌리드에서 마드리드로 옮깁니다. "서류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열심히 정무에만 전념하였고, 그가 만들어낸 서류 결제 체제는 당시 유럽에서도 선진적이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본가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개신교와 타협하자

"나는 이단의 통치자가 되어 하느님의 가호와 신앙에 손상을 입히느니 차라리 국가와 함께 목숨을 버리겠다."

라고 말할 정도로 스스로 로마 가톨릭의 맹주를 자처하며 가톨릭을 통한 국가통합을 이상으로 추구합니다.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에 개입하여 가톨릭을 지원하였고, 네덜란드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1579년에 네덜란드

남부(앤트워프 주변, 현재의 벨기에)를 독립전쟁에서 이탈시켜 가톨릭교회의 세력을 유지시킵니다.

 

1580년에는 조카인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포르투갈을 병합합니다.

이로써 남아메리카, 필리핀, 네덜란드, 밀라노 공국, 부르고뉴 공국(이상 카스티야 왕국령), 사르데나 섬,

시칠리아 섬, 나폴리 왕국(이상 아라곤 왕국령), 아프리카 남서부, 인도 서해안, 말라카, 보르네오섬(이상 포르투갈

왕국령) 등 광대한 영토를 손에넣어 "해가 지지않는 제국"이라 불리는 스페인 역사상 최전성기를 맞습니다.

 

 

 

 

레판토 해전

 

지중해를 제압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가 키프로스 섬을 빼앗자, 1571년 10월 7일 교황 비오 5세는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하는 베네치아,제노바,에스파냐의 연합함대로 이오니아해 파트라스만의

투르크 함대를 공격하게 합니다.

 

신성동맹의 함대는 206척의 갤리선과 6척의 갈레아스로 구성되어 있었고,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인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를 맡습니다.  109척의 갤리선과 6척의 갈레아스선은 베네치아의

함선이었고, 80척의 갤리선은 스페인과 그 속령인 나폴리, 시칠리아가 담당했습니다. 12척의 토스카나

갤리선은 로마 교황청에 용병으로 고용되었으며, 3척의 갤리선은 제노바, 몰타, 사보이가 담당하였고,

일부 개인 소유의 갤리선도 참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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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크리스트교 함대는 12920명의 선원과 28000명의 병사가 출전합니다. 잘 훈련된 스페인 정규 병사는

10000 명 정도의 규모였고, 7천명의 독일 용병과, 6천명의 이탈리아 용병, 5천명의 베네치아 병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오스만 갤리선은 13000명의 선원과 34000명의 전투원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해적

쿨룩 베이와 우르지 알리의 보조를 받는 알리 파샤는 222척의 전투용 갤리선과 56척의 소형 갤리오트선을

지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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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파샤)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오스만 군은 갤리어스가 수송용 상선이라고 잘못 판단했고, 갈레아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는 끔찍한 결과로 나타났으며, 6척의 갈레아스선에게 70척의 오스만 갤리선들이

침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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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기함은 세번의 백병전 끝에 신성동맹군에 의해 제압되고 알리 파샤의 머리가 효수됩니다.

오스만 함대는 210척의 함선을 잃었는데, 이중 117척의 갤리선과 10척의 소형 갤리오트선은 신성동맹 함대에

편입됩니다. 신성동맹은 약 7500명의 병사, 선원 노잡이가 전사하였으나 많은 크리스트교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군의 사상자는 25000명에 달하고, 3500명이 포로로 잡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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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해전

(제5차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의 일부)

 
날짜 :  1571년 10월 7일
장소 :  이오니아 해 파트라스 만
결과 :  신성동맹의 결정적 승리

교전국

신성 동맹: 오스만 제국
스페인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령
제노바 공화국
사보이 공국
몰타 기사단

지휘관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알리 파샤
무하마드 사울라크
울루지 알리

병력

206척 갤리선, 230척 갤리선,
6척 갈레아스선 56척 갤리오트선,
총합계 대포 1,815문 총 합계 대포 750문

피해 상황

전사 및 부상 8,000명 전사 및 부상 혹은 포로 15,000명,,
12척 갤리선 상실 137척 나포
  50척 침몰
  10,000명 그리스도인 갤리노예 해방

 

 

서구 역사가들은 레판토 해전을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 이래로 가장 결정적인 해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신성동맹 내부의 불안때문에 이익을 극대화하는데는 실패합니다. 오스만 군은

곧 그들의 해군을 복구하고, 베네치아의 갈레아스선을 복제합니다. 베네치아는 키프로스에 대한 오스만의 점유를

인정하는 조약을 맺습니다. 그러나 레판토 해전 이후 오스만 함대는 크리스트교 함대와의 교전을 최대한 회피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지중해에서 오스만의 우위를 끝맺게 됩니다. 또한 이 전투의 지휘를 맡고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하였던 스페인의 위상을 한층 높여주는 계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