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그레이드 시스템이 마치 절대악이라는 전제에서 그 시스템을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측을 불의와 부당함에 눈감는 사람인것처럼 묘사하는 분의 댓글을 봤습니다. 나치에 눈감았던 소시민의 이야기를 가져와서 말이죠.


아닙니다.
그레이드 선택제를 반대한다고 하여 불의와 타협한다거나 부당함에 침묵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공유하며 상대방의 제대로된 논리와 설명을 듣기 위해 목소리를 낸 것이지 그냥 내버려두라고, 침묵하라고 말하는게 결코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 이익만을 위해 소리치고 요구하는 모습을 두고 진정한 참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치학에서 왜 참여민주주의의 다음단계로 숙의(熟議 : 심사숙고하는)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지 아십니까? 참여의 완성은 내 얘기만 고집하고 다수의 전횡으로 결론짓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입장을 듣고 심사숙고하여 깊이 있는 논의와 협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입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여 그 입장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모두를 위한 결론인지 깊이있는 토론의 과정을 통해 도출해나가는 것이 진정한 참여입니다. 나만 행동하는 것이고 너희는 침묵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행동하는 양심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의 전제는 올바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고 제대로된 반박도 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내 주장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로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어제 새벽 인벤 자유게시판에 욕먹을 각오를 하고 그레이드 선택제를 반대한다는 글을 썼던 것은 제가 예상하는 상황들에 대해 제대로 된 토론을 나누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에 몇몇분들은 제 논리에 대해 합리적인 지적을 하시고 저와 이야길 주고받으셨지만 몇몇분들은 그런 것 없이 단순히 다수의 입장이 이러하고 이게 우리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식으로 몰아붙이고 계십니다.


제 글의 논지는 거시적으로 그리고 미래지향적으로 바라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조회수가 1000을 바라보는 현재까지도 그 부분에 대한 충분한 반박은 없었습니다. 제 예상이 틀렸을 것이라고 납득되게 주장하는 분은 아직 없었습니다. 그 예상에 동의를 한다면 최소한 다른 쟁점으로라도 납득이 되게 설명을 해야할텐데 그 역시 없었습니다. 막연하게 랜덤그레이드는 게임사의 이익을 위한것이고 도박이고 불의다 라는 주장만 있었습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랜덤그레이드는 도박성이 있고 게임사의 수익을 위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곧 불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게임산업 시장은 현재 확률형아이템 소위 뽑기가 판을 치는 상황입니다. 국회에서조차 확률형아이템의 확률을 공개하는 형태로 규제하자는 얘기가 있을 뿐 확률형 아이템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앞서 어떤분이 말씀하신대로 더이상 정액제로는 게임사가 충분한 수익을 내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20년전에는 리니지, 바람의나라 등 몇개의 게임에 수많은 유저가 몰려있는 구조였습니다. 리니지는 수십개의 서버가 존재하며 서버당 동시접속자가 4천명에 이르는 정도였구요. 그럴때는 정액제로도 수익을 충분히 낼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유저들을 위한 적절한 피드백을 운영진이 활발하게 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후 게임산업발전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많은 게임이 개발, 출시되었고 그 덕에 유저들은 오픈베타까지만 즐기다가 유료화가 되면 새로 오픈하는 게임으로 넘어가는 식의 흐름이 생겨났습니다. 


대항해시대온라인 역시 그 과정을 겪었습니다.
유료화과정에서 많은 유저가 비싼 정액비를 이유로 이탈했습니다. 물론 와우와 비교할 때 만원정도 더 비쌌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리니지와는 같은 수준의 정액비였습니다. 결국 액수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는 당시 게이머들의 게임을 대하는 행태 때문이었죠.(이게 문제라고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과도기적 모습일테니까요) 거기다 상대적으로 현재보다 당시 게이머들의 평균연령이 더 어렸고 주머니사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도 그런 행태들을 보인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런 상황때문에 많은 새로 출시한 게임들이 빠르게 쇠퇴기를 맞았습니다. 대항해시대도 그랬구요.


이런 상황을 타계시켜 준 것이 확률형 아이템입니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이 2009년 다시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 것도 부분유료화, 즉 뽑기 덕분이었습니다. 랜덤그레이드도 그런 뽑기, 소위 도박성 컨텐츠의 일환입니다. 모두들 도박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없앨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제 대부분의 게임은 뽑기형태의 확률형 아이템이 없으면 제대로된 수익조차 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거기다 10년전보다 과금력이 커진 게이머들 역시 시간보다 돈으로 게임 내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올리고자 하는 경향이 생겨났구요. 같은 시간을 써서 게임을 하느니 그 시간만큼 일을 해서 번 돈을 게임에 쓰려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쓴 돈만큼의 희소가치 있는 아이템을 획득함으로써 만족을 하게 되는 식이 된 것이죠.


저도 물론 이런 상황이 결코 달갑지 않습니다.
결코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중학교시절 밤새가며 리니지를 하던 추억처럼 시간과 노력을 투입한 만큼 결과물을 얻는 시스템이 가장 공정해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이런 흐름은 당연한거야 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현실과 다른 모습을 꿈꾸며 플레이하는 게임에서까지 현실 속 스트레스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자연스러운 변화 과정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만 바라보며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변해버린 현실을 지나치게 도외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게임사들이 확률형 아이템에 수익을 의존하는 구조가 결코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이 구조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바뀌는 것이 맞고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작금의 상황에서 유저들이 자신의 개별적 이익만을 위해 부분유료화는 없어져야 하고 뽑기는 잘못됐으며 랜덤그레이드는 도박이니 없어져야 된다고 말하는건 너무 현실을 모르는 것 아닐까요? 현재 구조에 문제가 있으므로 과거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변화해 온 역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게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근본적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형태의 정착입니다.
게임사가 마음대로 확률을 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경우라면 확률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게임운영자가 버그성 아이템을 만들어서 유출시킨다거나 게임머니나 아이템을 복사해서 몰래 판매하는 행위를 한다면 이를 적발하고 신고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여기서 더 나아가 게임사 수익구조나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유저들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패치등을 요구하여 더 많은 유저들이 상대적으로 과금구조의 장벽을 덜 느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공정한 게임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우리가 요구하고 목소리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짧게 쓰려고 시작한 글이 길어졌네요. 어제 새벽, 장문의 글을 쓰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