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마르탱은 요란하게 도착했다. 몸만 와도 반겨줄 로자라일이건만,
수레 한가득 짐을 싣고 온 것이다.

 

"무얼 이렇게 많이 가져왔나?"

 

"하하, 어짜피 배에 타면 몇 년 간은 집에 돌아오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돈이 될만한
것들은 죄다 긁어 왔죠!"

 

로자레일의 배는 기껏해야 소형 캐러벨이기도 하고, 세나콘 왕국에 가져다가 팔 설탕과 사탕수수도
실려 있기에, 수레 가득 담겨 있는 마르탱의 짐을 다 실을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배가 작아 다 실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어허, 선장! 이런 물건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네! 배 처음 타나? 하하!"

 

로자레일이 근심에 차서 말하자, 말론이 끼어든다.

 

"마르탱이라고 했나? 우선 타게나. 지금 바람이 딱 좋아, 얼른 타게나!"

 

검지에 침을 발라 선선히 부는 미풍을 다시 한번 확인한 말론이 마르탱을 재촉한다.
그 바람에 마르탱은 짐을 실어다준 하인들에게 이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둘러 배에 오른다.

 

"자자, 이 물건들은 항해용품이니, 선장실로 옮기고! 저 것들은 짐칸에 넣어두게!"

 

말론이 일사분란하게 마르탱의 화물을 정리시킨다. 로자레일이 선장이지만,
아직은 말론의 장악력이 더 높아 보인다. 마르탱은 그 모습을 보고 대충 배의 분위기를 파악
할 수 있었다. 전 날 밤에 술을 마시며 들은 말도 있어서, 자신이 처신을 어떻게 해야할지 감을
잡은 것이다.

 

"좋아, 손님들 방에 사탕수수 몇상자씩 넣어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거야!"

 

말론이 손님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은 물론 벤쿠르마가 잡아온 포로들이었다. 2칸의 선원실 중의
한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수가 4명 밖에 뿐이고, 그 중의 한명은 어린아이였기에 그 곳에도
화물을 실을 생각을 한 것이다.

 

"선장, 출항 준비가 모두 갖추어졌네."

 

"알겠습니다. 출항한다! 모두 각자 위치로!"

 

말론이 로자레일에게 보고하자, 로자레일이 크게 외친다.

 

"어느새 출항이군요!"

 

마르탱이 로자레일의 곁으로 다가와 말한다.

 

"하하, 벌써 꿈이 반쯤은 이루어 진것 같습니다. 승선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장님!"

 

마르탱이 거수경례를 하며 말한다.

 

"이 배에 오른 것을 환영하네, 그리고 나야 말로 감사하네."

 

로자레일도 거수경례로 인사를 받는다. 서로 마주보는 그들의 시선이 끈끈하다.

 

"이거 이거, 자네들 너무 뜨거운 것 아닌가? 하하하!"

 

말론의 짖궂은 농담에 선원들이 모두 '와하하' 웃어 버린다. 바람을 받아 배에 속력이 붙자
어느새 5명의 선원들 뿐만 아니라, 선원실 청소나 식사준비와 같은 궂은 일을 돕던 포로들도
모두 갑판에 나와 로자레일과 마르탱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마르탱을 소개하기 위해
말론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새로운 선원을 소개하겠다. 해군학교를 졸업한 재원으로, 보아륀 항에서 승선한 마르탱이다."

 

"마르탱입니다. 특기는 조타술과 검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전직 해적 출신인 선원들은 이런 식의 소개가 낯설었다. 하지만 일단은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면서
열렬히 환영하였다. 선장의 추천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보아륀 항에서 감독관을 역임한 것을
보고 한가닥 하는 인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견습선원부터 시작해야겠지만, 마르탱의 경험이 적지 않은 만큼 그의 특기를 살려서
조타수를 맡기도록 하겠다. 마르탱 조타수 앞으로 기대하겠다!"

 

"옛,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원들이 한번 더 환호한다. 이번에는 말론도 박수를 치며 크게 기뻐한다. 형식적이나마 간략하게
진행한 신입선원 소개였지만, 처음 승선한 선원이 걸출한 인물인 것을 보고 선장을 더욱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르탱 조타수, 환영하네. 난 말론이라고 하네."

 

마르텡이 선원들과 인사를 주고 받으며 통성명을 하자, 로자레일의 옆에서 흐뭇해 하고 있던 말론도
얼른 마르텡에게 다가가 인사한다.

 

"아, 잘부탁드립니다. 하하!"

 

마르탱과 선원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인사를 마칠때쯤 로라제일은 그날 밤에 자리를 마련할 것을
약속하며 선원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각자 제자리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로자레일은 마르탱과
말론과 함께 선장실로 들어갔다. 선장실에는 반쯤 책이 꽂혀있는 책꽂이와 테이블이 전부였다.
벤쿠르마가 해적질을 한 시절에는 블레야 제도의 근해만 항해를 하였기에 항해도구도 변변찮았다.
아스트롤라베와 구식 지도가 전부였다.
테이블 위에는 마르텡이 가져온 물건 중에 로자레일이 쓸만한 것들이 들어있는 상자가 올려져있었다.
마르탱이 가져온 것은 몇 가지 항해도구와 술, 그리고 서적이었다. 항해도구는 필수적인
항해도구들로 한눈에도 배에 있던 것들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고급품이었다.
술은 마르탱의 단골 주점에서 받은 것 외에도, 고급 술이 2 병씩 담겨있는 상자 10개가 더 있었다.
서적들은 유명 제독들의 항해일지 필사본과 대륙 각지의 지리와 특색을 담은 지리서들이었다.

 

"마르탱 자네가 가져온 물건만으로도 배가 꽉 차버리는군."

 

상자 안에 벨벳으로 감싸서 정돈되어 있는 항해도구들을 하나 하나 세심히 관찰하던 로자레일이
그 중에 육분의를 테이블에 내려 놓으며 말한다.

"하하, 마음에 드십니까?"

 

"이런 고급품을...."

 

말론도 육분의는 처음보는지 다가와 육분의를 들어올려본다.

 

"이게 뭔가?"

 

"측량을 할 수 있는 도구 입니다. 직각기보다 고도의 도구이지요,
물론 아스트롤라베보다는 훨씬 더..."

 

언뜻 보기에 로자레일은 근심에 차있는 듯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탱이 가져온 물품의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일반인은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제가 보아륀의 항구 감독관이었지 않습니까? 돈만 있다면야 그정도 군용품은 쉽게 구할 수
있지요. 앞으로도 블레야 제도 내에서는 어떤 물건이든 구할 수 있습니다."

 

마르탱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한다. 말론은 그런 마르탱을 대단하게 여겼다. 로자레일도 일견
말론과 같은 모습이지만,속으로는 미심쩍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르탱의 직위와 성격이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했기에 마르탱의 말을 믿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사실 마르탱조차 믿지 못한다면
로자레일은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심리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일지도 몰랐다.

 

"혹시 최신 지도도 있나?"

 

"물론입니다."

 

마르탱이 상자를 뒤적거리더니, [멕파이어 제독 일지]라고 적혀있는 책을 꺼내들더니 책의 가죽커버를
벗기자 접혀있는 종이가 나왔다. 종이를 펴보니 대륙과 바다에 대한 상세 지도였다.
특히 블레야 제도 일대와 자렐린왕국과 키젤왕국의 해안도시 및 비용 공국, 키젤령 비용에 대해서는
매우 상세하게 적혀있는 지도였다. 해류와 계절풍 및 특산물 위주로 그려져 있었는데, 로자레일이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군사용 지도가 아닌, 상업용 지도였다.
 
"대단하군!"

 

지도를 들여다 보던 말론이 탄성을 내뱉는다. 이런 고급 정보가 담긴 지도는 대상인들이나 가지고
있는 특별한 지도였기 때문이다. 로자레일이 보기에도 눈이 번쩍 뜨일만큼 고급지도였다.

 

"멋진 지도야!"

 

"블레야 제도에 자주오는 상단에 알고보니 밀수선이 교묘히 숨겨져 있더군요. 그 배를
처벌하는 과정에서 우연치않게 이 책이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로자레일은 마르탱이 왜 감독관 자리를 박차고 배를 타려고 했는지 알것 같았다. 이 정도 준비라면
정말 운이 닿지 않는 이상, 큰 돈도 벌고 그 돈으로 무장선단을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르탱의 아버님은 이러한 것들을 눈치채시고 유품으로 마르탱이 지금 착용하고 있는
장갑을 남겨두셨을 터이다.

 

"이 정도 준비라면 자네 스스로 선단을 조직해도 됬을 텐데...?"

 

"하하, 그럴 생각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박차고 나갈 계기가 필요했죠.
물론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선배님 밑에 있을 생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날 까지는 선배님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마르탱이 눈을 빛내며 말한다.

 

"좋아, 자네가 배를 내릴 때까지 실컷 부려먹어 주지!"

 

"기대하겠습니다. 하하하!"

 

마르탱과 로자레일이 손을 맞잡고 웃는다.
그날 밤 선원들과 함께 술자리를 마련한 로자레일은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즐겁게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일을 몇 번이나 겪었기에, 쉽사리 사람을 믿을 수 없었고 태도도 소극적으로
변한 로자레일이었지만, 오랜만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고, 앞으로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두 가지 사실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