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가 자신이 쓰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너무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딱딱하지 않아서 오히려 고급스러운 필체가 책 위에 그려졌고 그 글자들은 글쓴이의 격식에 알맞게 자리를 잡고는 웅장한 문장을 이루었다.
 세상의 번영, 몰락, 죽음, 희망, 행복, 사랑 등을 모두 담은 이 책의 문단은 이제 마지막 문장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글쓴이는 차마 쓸 수 없었다.  마치 뜻대로 안 이루어져서 모든 것이 틀어지는 것을 보기 일보 직전의 표정으로 그는 자신의 책을 쳐다보았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금빛 금속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구조물 너머로 끊임 없는 심연이 보였다. 별들이 자신의 자리를 잡아 빛을 내고 세상을 밝게 비추는 이 황홀한 광경은 그에겐 너무 익숙한, 아니 너무 나도 당연한 배경이었다.

그는 고운 손으로 이마를 되짚으며 잠시 생각에 빠졌고 이내 혼자서 무언가를 깨달은 듯 저 오르페우스 별들을 너머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빛이 있으라."

그는 다시 글을 쓰기 위해 잉크를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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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바다, 파푸니카 근해

우마르의 선박은 마치 조각 된 벽돌과도 같았다.  파도를 가르는 다른 종족의 배들과는 다르게 마치 거대한 건축물의 일부분이 바다에 떠다니는 것과도 같았다. 큼직하고 웅장한 조각상에 돛을 달고 그 양옆에 달린 커다란 원기둥 형태의 엔진을 상상해보라, 욘 에서 건조 된 배들은 전부 그런 식이었다.
 남들이 보면 저게 어떻게 떠다니는지 신기해 하지만 한 편으로는 우마르 본인들의 걸작품이자 그들의 단단하고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 상징 그 자체이기도 했다.

 세 척의 배가 파도의 비명소리를 헤쳐가며 우마르를 가득 실은 채 항해 중이었고 페데리코는 그 중 기함인 무쇠선에 탑승 한 상태였다. 갑판은 다르게 필수 인원을 제외하곤 모두 함장실에 모여 커다란 금속 테이블에 둘러서 있었다. 그들 모두 자신의 망치 손잡이를 꾹 쥐거나 쓰다듬으며 쏟아지는 긴장감을 겨우 버텨내고 있었으며 페데리코는 그 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을 다시 상기했다.

'인간이 두려워하고 있으면 별거 아닌 일이고 케냐인이 두려워하면 이해 못 할 일이 일어난다.
요즈족이 두려워하고 있으면 황당한 일이 일어나고 실린들이 두려워 하면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마지막 사실을 머릿속에서 다시 상기했다.

'우마르가 두려워하고 있으면 모두가 두려워해야 한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대담한 종족들이다.'

"아주 지랄맞을 상황이야."

목에서 돌덩이를 굴리는 듯한 목소리가 선실내에 퍼졌다. 함장이자 가장 거대한 수염을 지닌 자, 폴크투르였다. 그가 정성스럽게 땋은 수염을 꿈틀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악마들이 섬 북부 전체를 장악했고 남은 건 여기, 얕은 바닷길이야. 그리고 우리가 가진건 망치질 좀 하는데 이 임무에 자원한 정신나간 놈들이지."

다른 우마르 지휘관이 물었다.

"이봐 함장, 이 병력으로 막을 순 있는거 맞아? 그 쪽 자경단장도 목이 잘렸다면서? 그 섬은 끝난거나 다름 없어, 여기 인간 말 듣지 말고 그냥 돌아가서 후일을..."

그 우마르의 말에 폴크투르의 수염이 그를 향했다. 눈가를 모두 덮은 눈썹 밑으로 보이는 그의 분노 어린 눈빛은 더이상 말하지 말고 닥치라고 암묵적으로 지시 중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우마르 지휘관의 멋쩍은 헛기침을 이끌어냈다.

"페데리코라고 했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거야?"

페데리코가 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살 임무다. 이 쪽 말이 맞아. 정상적인 지휘라면 배를 돌렸겠지만...난 결사 반대야. 피난민들이 쏟아지고 있어. 현장을 겪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파푸니카 다음은 베른이 될 지 욘이 될 지 로웬이 될 지 아무도 몰라. 더군다나 그 곳 지도자는 아직 살아 있다면..."


또 다른 우마르가 끼어들었다.

"세이크리아 그 인간들은 왜 안 오는 건데?"

페데리코는 참담한 심정을 겨우 억누르며 답할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같은 생각, 같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나도 본국의 사정에 진심으로 유감을 표하는 바다. 대체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 나도 본국에서 몇 년을 떨어져 있었으니깐, 곧 정보원이 답을 가져 올 꺼다."

"살아남기나 하라고 흰둥이"

"그러지, 벽돌"

"그만!"

함장의 소리침에 모두가 멋쩍은 긴장감을 보여야 했다. 그는 계속 이마를 쓰다듬었다. 머릿속에서 모든 승리 시나리오와 패배 시나리오에 관해 주사위를 굴리며 시뮬레이션을 그려보았다.

"정상적인 지휘..."

페데리코가 답했다.
"당신의 뜻대로, 함장"
 
잠깐의 침묵, 아주 잠깐이지만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던 그 침묵이 그의 생각을 바로잡았다. 함장은 수신기에 입을 갖다 댄 채 나머지 두 함선에 자신의 뜻을 알렸다.

"여긴 함장 폴크투르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작전을 변경한다. 수복 작전은 취소다. 반복한다. 수복 작전은 취소다."

페데리코는 이해는 하지만 참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함장은 그를 한 번 쓱 쳐다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 작전은 이제 구출 작전이다. 먼저 내린 놈들이 몸뚱이로 벽을 치고 나머지는 피난민을 우리 배로 대피시켜! 최대한 많은 피난민들을 구출해라!, 이의 있으면 입 닥치고있어!"

말을 마친 함장의 수염이 다시 페데리코를 향했다. 

"넌 가서 그쪽 족장을 확보해, 니 말에 우린 모든 걸 건다. 죽어도 상관 안하는데 그 꼬맹이 같은 여자애는 무조건 데리고 와!"

그의 말에 페데리코의 얼굴엔 얕은 미소가 지어졌다. 고마움, 미안함, 감동, 두려움 모든 게 그려져있는 그림 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명령대로."

폴크투르의 수염 또한 정중이 고개를 숙이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고 이내 단단한 돌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힘껏 외쳤다. 

"모든 선원들은 무기랑 갑옷 챙겨! 일들해야지!"

파도는 점점 거세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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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해머의 엔드타임(한 게임의 세계관의 종말을 다룬 스토리)을 로아식으로 풀어보면 어떨까 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목표로 구상중이며 스토리는 파푸니카를 시작으로 해볼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