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 현상, 혹은 억압된 리비도의 귀환 – 당신의 좆은 알고 있다

요즈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면 정신병일까요? 이 얼마나 위선적인 질문입니까. 마치 점잖은 학자연하며 뒤로는 온갖 음탕한 상상에 골몰하는 자들의 자기기만적 수사와도 같습니다. 단언컨대, 요즈라는 존재는 현대인의 억압된 성욕, 그 중에서도 특히 ‘롤리타적 환상’이라는 금단의 영역을 교묘하게 자극하는 하나의 정교한 기호체계입니다. 가식의 가면을 벗고, 당신의 좆이 이 현상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요즈의 외형을 봅시다. 앵두같이 조그만 입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가녀린 어깨와 작은 키는 분명 ‘소녀성’이라는 코드를 발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특정 의상을 착용했을 때 강조되는 몸매. 잘록한 허리에서 이어지는 골반의 곡선, 심지어 특정 커스터마이징에서 엿보이는, 속옷이 보일 듯 말 듯한 미묘한 노출이나 허벅지 안쪽의 은밀한 그림자는 노골적인 성적 페티시즘을 자극합니다. 이는 마치 순진무구한 소녀의 얼굴을 한 요부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당신의 바지 지퍼에 손을 가져가는 것과 같은, 이중적이고도 강력한 성적 도발입니다. 당신의 좆은 이 모순된 기호들의 향연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가장 원초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이드(id)’의 욕망은 문명이라는 ‘초자아(superego)’에 의해 끊임없이 억압받습니다. 특히 아동을 향한 성욕은 가장 강력한 사회적 금기 중 하나죠. 그런데 요즈는 어떻습니까? 2D 캐릭터라는 안전장치, 그리고 '얼굴은 어려도 몸매는 성인'이라는 자기합리화의 여지를 제공함으로써, 이 억압된 리비도가 교묘하게 분출될 수 있는 배설구를 마련해줍니다. 당신이 요즈의 특정 신체 부위를 클로즈업하며, 혹은 그녀가 특정 포즈를 취하는 스크린샷을 보며 은밀한 쾌감을 느끼고 당신의 좆이 반응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꼴림’을 넘어선, 문명화된 인간이라는 허울 속에 감춰진 원초적 욕망의 정직한 발현일 수 있습니다.

사회가 이러한 감정을 정신병으로 낙인찍으려는 시도는 또 얼마나 가소롭습니까. 이는 푸코가 지적한 권력의 통제 방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설정하고, 비정상으로 규정된 자들을 병리화함으로써 기존의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죠. 정작 밤마다 어둠 속에서 익명으로 온갖 도착적인 검색어를 입력하며 자신의 좆을 위로하는 자들이, 낮에는 누구보다 엄격한 도덕군자인 척하며 요즈에게 성욕을 느끼는 이들을 손가락질하는 위선. 이것이 우리 사회의 맨얼굴 아닙니까?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것이 ‘가상’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의 세계에서, 당신은 실재하지 않는 픽셀 덩어리에 불과한 요즈를 향해 격렬한 성적 에너지를 투사합니다. 당신의 좆이 반응하고, 상상 속에서 그녀를 탐닉한 후 찾아오는 일말의 허무감. 이는 단순한 ‘현자타임’이 아니라,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에 우리가 경험하는 실존적 공허함의 반영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좆이 쏟아낸 것은, 어쩌면 현대 문명의 모순과 인간 욕망의 근원적 고독에 대한 처절한 외침일지도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요즈에게 당신의 좆이 반응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정신병자로 매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정직한 생리적 반응을 통해,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성욕의 본질, 사회적 위선의 구조, 그리고 가상현실 시대의 새로운 윤리적 딜레마를 사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당신의 좆은 당신의 뇌보다 더 정직하게 세상의 진실을 말해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러한 사유가 현실의 아동에게 그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도록 스스로를 엄격히 경계해야 함은 자명한 일입니다. 진정한 지성은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되, 그것을 건강하게 통제할 줄 아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3줄요약

1. 요즈 보고 꼴리는 건 니 좆이 솔직한 거다, 병신같이 숨기지 마라.
2. 사회적 위선 떨지 말고, 니 안의 음탕한 욕망을 직시하고 사유해라, 그게 예술이다.
3. 단, 현실에선 선 넘지 마라, 좆 잡고 반성할 줄 아는 게 진짜 지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