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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0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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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전 팬소설) 메이플스토리: 황야의 메아리 5화![]() ![]() 메이플스토리: 황야의 메아리 5화 1장 귀환의 꿈 (5) 엘미나는 샤모스를 두고 온 것이 마음이 괴로웠다.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첫째로 누군가는 하인즈의 옆을 지켜야 했다. 일 년 만에 돌아온 샤모스는 하인즈와 해후의 시간을 가질 것이었고, 그 사이 장로가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 샤모스는, 스스로는 몰랐겠지만, 잠시 하인즈의 간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둘째로 샤모스가 하인즈의 연구실에 온다면 어떤 감정적 동요를 겪을지, 그로 인해 어떤 돌발 행동을 벌일지 예측할 수 없었다. 물론 그녀가 믿는 샤모스는 연구실을 조용히 둘러보다 떠나겠지만, 다른 요정들이 그렇게 믿어줄 거라고 기대해선 안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샤모스를 데리고 오기 싫었다. 샤모스를 하인즈 곁에 두라고, 그렇게 두 ‘인간’을 한 장소에 묶어두라고 주장한 사람은 엘미나였다. 인간을 끔찍이 싫어하는 아르웬이 아니었다. 장로도 아니었다. 그러니 엘미나의 마음이 괴로운 것은 어느 정도 자초한 결과였다. 연구실은 요정 숲의 어느 한 거목, 두꺼운 나무껍질에 난 구멍 안에 숨겨져 있었다. 거목의 표면은 깍지 낀 손가락들처럼 굴곡이 심하고 무늬가 거칠었다. 여러 그루의 나무가 서로를 붙잡고 빨아들여 하나의 나무가 된 것 같았다. 줄기가 여러 결로 갈라졌다 모이는 지점에 검게 뚫린 눈 같은 구멍이 있었다. 평범한 나무라면 새나 벌레가 집으로 삼기 좋은 공간이겠지만, 요정 숲의 거목은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작은 마을을 지을 수 있다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엘미나는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장로 휴노, 아르웬, 로웬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숲의 모든 거목은 안쪽에 빈 공간이 있었다. 오르비스 탑처럼 가운데 기둥 역할을 하는 속줄기가 있고 속줄기와 나무껍질 사이에는 무질서하게 뻗은 속가지들이 자라나 있었다. 하지만 오르비스 탑과 달리, 요정 숲의 거목은 안쪽이 전혀 어둡지 않았다. 오르비스 탑이 인간의 마법으로 건설되었다면 요정 숲은 고대의 신비가 이룩한 작품이었다. 생명으로 충만한 빛이 먼 옛날 나무의 묘목을 자라냈고 이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게 했다. 자연스럽지 않은, 그렇기에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원시림의 나무들은, 그 신비로운 손길이 한참 전에 사라진 지금까지도 빛과 생명의 노래를 기억했다. 거목 안쪽의 속가지에서, 속가지 위에 자라난 온갖 희귀한 식물들이 봉오리와 열매에서, 반딧불이 같은 빛의 입자가 나와 안쪽 공간을 환하게 밝혔다. 눈이 내리는 풍경과도 닮아 있었다. 요정들은 지상과 마을을 오갈 때 거목의 빈 공간을 지나다녔다. 그들은 이런 공간을 나무 통로라 불렀다. 숲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요정의 마을은 오래된 마법으로 숨겨져 있어서, 어떤 나무 통로를 어떤 순서로 지나가야 하는지는 그들만이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모든 나무 통로가 요정들의 길로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하인즈의 연구실은 요정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나무 통로에 숨겨져 있었다. 그래서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네 요정은 속가지를 밟으며 아래로 향했다. 끈적한 물기가 배어나오는 속가지가 네 요정의 발소리를 삼켰다. 나선형 계단처럼 비스듬히 기운 속가지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거목 안쪽 공간을 채웠다. 속가지에 뿌리 내려 자란 식물들에 요정들의 몸이 스쳤다. 반짝이는 포자가 참은 숨 내뱉듯 터져나오며 요정들이 지나간 자리를 비췄다. “저쪽이오.” 휴노가 지팡이를 들어 가리켰다. 난삽하게 뻗고 휘어진 속가지들이 통로 구석에 공처럼 뭉쳐 있었다. 속기둥에 달라붙어 있는 생김새가 요정들의 집을 닮았다. 입구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 겨우 몸을 비집고 들어갈 법한 틈이 상처처럼 나 있었다. 그 주위로 검게 눌어붙은 흔적이 남았다. 폭발의 흔적이었다. 휴노가 말했다. “하인즈가 연구실을 통째로 봉인하려 했던 흔적이오. 실패했지만 말이오.” “입구를 틀어막으려 했군요.” 엘미나가 말했다. “주문이 잘못됐다지 뭐예요.” 아르웬이 말했다. “덕분에 그 소리를 듣고 우리가 연구실을 발견할 수 있었죠. 안 그랬으면 지금까지도 여기서 추악한 짓을 이어갔을 테고요.”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어요.” 로웬이 말했다. “하인즈 말이에요.” 네 요정은 한 명씩 연구실로 들어갔다. 작은 방 하나 크기의 연구실은 나무 책상 하나와 구석에 어지럽게 쌓인 종이 문서들, 숲에서 채집한 것 같은 약초와 잡초들이 전부였다. 바닥에 지푸라기가 쌓여 있었다. 짧게 끊어진 끈도 많았다. 붉은 실, 노란 실이 보였다. 바닥에 있는 건 뭐냐고 엘미나가 묻자 로웬이 답했다. “하인즈가 실험 도구를 만들 때 쓴 재료들이에요.” “실험 도구 자체는 여기 없는 거군요.” 엘미나가 말했다. “전부 수거했어요. 마법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어요.” 로웬이 말했다. “전부?” 아르웬이 말을 끼어들었다. 비아냥거리는 투가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로웬이 고개를 숙였다. 아르웬이 그런 로웬을 팔짱 낀 자세로 노려보았다. 장로는 지팡이를 들고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엘미나가 물었다. “전부 수거한 게 아닌가요?” 아르웬이 팔짱을 풀었다. 등 뒤의 날개가 몸풀기하듯 두어 번 가볍게 펄럭였다. “하인즈는 실험 도구를 아주 많이 만들었어요. 우리가 처음 발견했을 땐 바닥이 그 불길한 물건들로 덮여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좁고 허술한 곳에서 하인즈가 물건 간수를 잘했을 것 같나요, 엘미나?” “연구실 밖에서도 발견됐군요.” 엘미나가 말했다. “그것까지 수거했어요.” 로웬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지상까지 내려가서 찾아봤어요. 서너 개 떨어져 있었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루팡이 가져갔을 거라는 생각은 못하나요, 로웬?” 아르웬이 따지듯 물었다. 루팡은 요정 숲에 출몰하는 원숭이들을 가리켰다. 영리한 원숭이들이고, 조잡하게나마 마법도 구사할 줄 알았다. 요정이나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드물지만, 호기심이 많아 물건을 훔치는 일이 간혹 있었다. 아르웬의 목소리가 커졌다. “실험 도구 한 개라도 루팡이 주워갔다면, 맙소사, 난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아요. 인간 하나 때문에 숲이 치유할 수 없는 악에 노출된다니! 솔직한 나의 생각을 말해볼까요? 하인즈는 우리에게 자기 죄가 들킬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루팡들이 실험 도구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연구실을 봉인하려던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몇 개를 루팡들에게 잃어버렸으니까요!” 로웬의 날개가 센 바람을 맞은 것처럼 흔들렸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려 연구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르웬이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처음부터 인간은 들여오는 게 아니었다고 나는 줄기차게 말했죠! 우린 죽지 않는 운명을 타고났으니, 평생 인간을 향한 미움과 숲이 언제 시들까 하는 불안을 품고 살아야겠네요!” “아니오.” 장로가 말했다. 아르웬은 입을 다물고 장로를 보았다. 장로가 말을 이었다. “하인즈의 실험 도구가 숲 어딘가로 옮겨졌다면, 마지막 하나까지 찾아내겠다는 다짐을 품고 살아야 할 거요, 아르웬.” 눈을 부릅 뜨고 장로를 노려보던 아르웬이 곧 연구실을 걸어 나갔다. 로웬의 말소리가 작게 들렸지만 뭐라고 하는지 엘미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휴노가 엘미나에게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그의 넓은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일주일동안 말을 달려온 엘미나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실험 도구가 무엇인지는 아직 못 봤지만.” 엘미나가 입을 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 물건이 가장 중요한 것 같군요. 왜 저를 연구실까지 데려오셨나요, 장로님?” 하인즈의 연구실이 발견된 것은 한 달 전이라고, 로웬은 숲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해주었다. 휴노가 추방 결정을 엘미나의 복귀 이전까지 미루었다는 것 역시 말해주었다. 엘미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할 수 없었다. 흑마법에 손을 댄 것은 용납 못할 금기이고, 장로 혼자 추방 여부를 결정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하인즈는 당연히 추방되어야 했다. 휴노가 엘미나를 실험실까지 데려올 이유도 없었다. 특별히 중요해 보이는 것이 없었고, 연구실을 더 살펴본다 해서 하인즈의 추방 여부가 바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휴노가 그녀를 데려왔다는 건,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는 뜻이었다. 엘미나는 그 뜻이 짐작되지 않았다. “그렇소. 여기 특별한 것은 없어 보이지만.” 휴노가 말했다. “여길 보시오.” 그는 벽을 향해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지팡이 끝 수정에서 뻗어난 빛줄기가 실험실 벽을 밝혔다. 거목의 속가지가 빈틈없이 얽힌 연구실 벽에는 군데군데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잘 그린 마법진은 아니었다. 원은 울퉁불퉁했고 그 안에 그려진 문양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낙서 같았다. “필사본은 마법 도서관에 있소.” 휴노가 말했다. “우선 직접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소. 하인즈의 처분에 큰 영향을 끼칠 점이니 말이오.” “이 마법진이 무엇을 나타내고 있느냐에 따라.” 엘미나가 물었다. “하인즈의 죄가 다르게 판단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대라면 알아볼 수 있소.” 엘미나는 벽에 그려진 마법진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암호를 해독하는 것과 비슷해서, 피로 때문에 집중력이 온전치 않은 그녀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일부는 엘미나가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흑마법 주문을 암시하고 있었다. 생명의 본질을 왜곡하고 파괴하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는 오만과 증오가 그림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하인즈가 결국 흑마법에 심취했다니. 일 년 사이에. 그것도 샤모스가 자리를 비운 일 년 사이에. 샤모스가 얼마나 하인즈를 보고 싶어 했는데. 이 숲에 같이 있는 유일한 인간이 하인즈였는데. 그녀는 다른 마법진을 살폈다. 실험실 벽에 그려진 것 중 가장 크고 복잡한 마법진이었다. 열 개의 원이 특정한 규칙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세 개의 세로줄을 밑바탕으로 삼은 마법진에는 가운뎃줄에 네 개의 원, 양옆 줄에 각각 세 개의 원이 놓였다. 가운뎃줄에는 이질적인 도형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맨 밑의 원에서 출발하여 맨 위의 원까지 닿는, 길고 구불구불한 선 하나였다. “이건.” 엘미나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휴노는 지팡이의 불빛을 더 키웠다. 마법진이 선명하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마법진을 아래서부터 종단(縱斷)하는 검은 곡선. 몸체에는 마법진에 사용되는 문자들이 빼곡히 덮여 있었다. 정지된 그림에 엘미나의 동요하는 마음이 뒤섞이면서, 마법진의 곡선은 문자를 비늘처럼 입은 뱀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뱀이 맞았다. 열 개의 원을 밑에서부터 타고 오르는 검은 뱀. 금기의 지식을 입에 문 뱀이었다. “‘엘븐의 책’을 펼친 건가요?” 엘미나의 물음에 장로는 한참 뒤 대답했다. “우리가 결정할 것은 하인즈를 추방하느냐 아니냐가 아니오.” “죽이느냐 아니냐를 결정해야겠죠.” 엘미나가 말했다. 마법 도서관 1층 원탁에 요정들이 모여 앉았다. 장로 휴노, 로웬, 아르웬, 엘미나, 그리고 마르가 있었다. 엘미나는 하인즈의 마법진이 필사된 문서들을 한 장씩 읽고 있었다. 문서에는 각 마법진의 의미를 해석한 짧은 글도 적혀 있었다. 휴노가 적은 글이었다. 장로의 해석과 엘미나의 해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깊게 탐구하면 해석의 차이가 나타나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엘미나는 새 문서를 집어들 때마다 요정들의 얼굴을 살폈다. 로웬은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숙인 채였다. 아르웬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다는 듯 자세를 여러 번 고쳐 앉았다. 장로는 눈을 감은 채 허리를 곧게 펴고 있었다. 원탁의 의자에 앉은 이후로, 장로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장로의 오른쪽, 그리고 엘미나의 왼쪽에 앉은 마르는 아까부터 시선을 엘미나에게 고정했다. 마르의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날개와 함께 살랑거렸다. 도서관 창문으로 불어드는 바람이 없음에도. 엘미나가 마지막 문서를 내려놓았다. 장로가 그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마르, 가져와 주겠소?” 마르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그녀가 원탁의 방을 나간 사이, 엘미나는 마법 도서관을 밝히는 거대한 크리스탈을 향해 고개 들었다. 크리스탈은 일 년 전과 다름없이 빛났다. 실프 요정들의 지식과 역사의 보고인 엘리니아 마법 도서관은 요정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거목이 손가락이라면 도서관은 반지라고 할 수 있었다. 거목을 둥글게 감싼 마법 도서관은 각 층고가 5미터가 넘는 3층 건물이었고, 도서관 밑바닥을 지탱하는 굵고 우락부락한 겉가지들에 의지해 만 년 넘게 자리를 지켜왔다. 1층에는 요정들이 중요한 결정이나 회의를 하는 원탁의 방이 있었다. 나머지 공간은 전부 서재였다. 2층에는 마법 실험 도구나 책으로 묶이지 않은 문서들이 보관되었다. 장로가 마법진을 필사한 문서들도 2층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3층에는 아주 오래되었고 또 중요한 물건들, 삼만 년 요정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들이 보관되었다. 마법 도서관의 천장은 3층에만 있었다. 1층에서 3층 난간을, 3층에서 1층 원탁을 볼 수 있는 개방된 구조였다. 도서관 중앙을 관통하는 거목은 통째로 건물의 기둥이었다. 도서관 1층이 끝나는 지점에서 거목은 줄기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점점 가늘어졌고, 그 사이로 육각 기둥 모양의 크리스탈을 휘감고 있었다. 10미터 높이의 크리스탈은 굵기도 거목과 거의 같아서, 거목의 중간을 잘라낸 자리에 크리스탈을 끼워넣은 것 같았다. 최초의 마법사인 엘븐은 이 나무를 ‘빛의 나무’라고 불렀었다. 엘븐이 살았던 고대부터 변함 없이 빛나온 크리스탈은 지금도 도서관 내부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르가 원탁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작은 나무 상자를 들고 있었다. 발소리 없이 가볍게 걸어오는 마르의 동작은, 도서관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적막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녀가 원탁 위에 상자를 놓았다. 곧이어 뚜껑을 열고 안에 든 물건을 꺼냈다. 한 손에 잡히는 작은 지푸라기 인형이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달린, 사람을 본땄지만 만듦새가 조잡한 물건. 지푸라기 인형의 관절부에 붉고 노란 실이 묶여 있었다. 연구실 바닥에 쌓여 있던 지푸라기를 엘미나는 떠올렸다. “잡아요.” 마르가 인형을 건네며 말했다. 엘미나는 얼떨결에 인형을 받았다. 꺼슬한 촉각만이 신경 쓰였다. 지푸라기 몸에 마법진이 그려진 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다른 힘이 감지되지도 않았다. “당연해요.” 마르가 말했다. “뭐가 당연하다는 거죠?” 엘미나가 물었다. 마르가 대답했다. “인형에 깃든 주문은 하인즈가 연구실을 봉인하려다가 폭발이 났을 때 손상됐어요. 하인즈가 인형으로 뭘 하려 했는지를 알려면 주문자가 따로 주문을 걸어줘야 해요.” 엘미나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인형을 마르에게 건네려던 순간, 오른손에 낀 반지가 희미한 빛을 내는 것이 보였다. 마르가 웃음소리를 흘렸다. “반지는 주문을 알아보는군요.” 인형을 받은 마르가 원탁 위에 똑바로 인형을 세워놓았다. 인형은 두 발로 서 있었다. 눈을 감은 마르가 천천히 주문을 외웠다. 그녀는 두 손을 인형 쪽으로 뻗었고, 열 손가락이 각각의 문양을 허공에 그렸다. 아까 본 마법진과 같았다. 열 개의 원, 세 개의 줄. 마르가 검지 하나를 뻗어, 맨 밑에서 위로 구불구불 올라가는 선을 그렸다. 검은 뱀의 곡선이었다. 인형이 오른발을 뻗었다. 동시에 왼손을 앞으로, 오른손을 뒤로 했다. 곧이어 오른발을 뻗었다. 왼손을 뒤로, 오른손을 앞으로 했다. 인형이 걷고 있었다. 순간 크리스탈의 빛이 조금 약해진 것 같다고 엘미나는 생각했다. 로웬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르웬이 미간을 찌푸렸다. 장로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마르는 멈추지 않고 주문을 외웠다. 엘미나는 자신의 생각이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도서관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인형이 계속 걸었다. 도서관 천장과 바닥과 벽에서 검은 얼룩이 지네 다리처럼 기어올랐다. 저녁 어스름의 빛이 창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불길한 진동이 바닥에서 느껴졌다. 인형이 계속 걸었다. 원탁에 앉은 요정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탈이 내뿜은 빛줄기가 가뭄의 작물처럼 아래로 휘어졌다. 그러다 도서관을 삼켜드는 어둠에 소리 없이 스러졌다. 인형이 계속 걸었다. 원탁 가운데서 시커먼 그림자가 부풀기 시작했다. 곧 먹물처럼 뿜어져 요정들의 형체를 집어삼켰다. 마르의 주문이 계속되었다. 도서관의 천장이 가라앉았다. 층계가 녹아내렸다. 크리스탈이 원탁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엘미나는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입안에 엉겨 붙은 어둠만이 침묵을 내질렀다. 인형이 계속 걸었다. “그만!” 장로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어둠을 찢었다. 크리스탈이 변함 없이 빛났다. 인형이 원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로웬이 눈을 닦아냈다. 아르웬은 손가락으로 인형을 집어 마르에게 던졌다. 마르가 인형을 상자에 넣으며 말했다. “연구실 벽의 마법진들을 참고했어요. 하인즈에게 주문을 복원하라고 맡길 순 없으니까요. 그대가 돌아오기 전까지 장로님과 제가 복원하려 했고 어제 겨우 성공했어요. 워낙 어려운 주문이니까요.” 엘미나는 대답할 힘이 없었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인형에 담긴 흑마법 주문이 온몸의 힘을 빨아간 느낌이었다. “엘미나.” 장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미나는 자신의 오른손을 확인했다. 반지가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장로가 말했다. “방금 인형은 마르가 조종해서 움직인 것이 아니오. 인형의 의지였소. 스스로 걸었고, 어둠으로 이 공간을 집어삼키려 했소. 마르의 주문은 인형 자신이 잊고 있던 의지를 일깨운 것에 불과하오.” 엘미나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왜 휴노가 연구실을 먼저 보여줬는지, 거기 있던 마법진을 일일이 옮겨 그렸는지 알 수 있었다. 하인즈는 단순히 흑마법에 손을 댄 것이 아니었다. 하인즈는 자기 위치에서 절대로 알아낼 수 없는 지식을 마법 연구에 적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생명 근원의 지식, 태초에 여신들이 어떻게 세계와 생명들을 만들었는지에 관한 지식이었다. 그 지식은 오직 단 하나의 책에만 적혀 있고, 책은 요정들에 의해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다. 엘리니아 마법 도서관 3층 구석, 장로마저도 출입할 수 없는 작고 어두운 방에. 엘미나가 입을 열었다. “봉인을 건드렸군요, 하인즈가.” “오해에요, 엘미나.” 로웬이 말을 끼어들었다. 엘미나가 고개 돌렸다. 로웬은 충혈된 눈으로 엘미나의 시선을 받았다. “하인즈는 도서관 3층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 그랬다면 흔적이 남았겠지만 아무 흔적도 없어요. 게다가 하인즈가 어떻게, 요정인 우리조차 접근할 수 없는 책을 펼쳐 읽으려 했겠어요?” “하인즈는 뭐라고 해명했죠?” 엘미나가 물었다. “그러지 않았다고 했어요. 자기는 엘븐의 책을 펼칠 생각도 없고, 설령 품었다 해도 책에 걸린 봉인을 풀 방법이 없다고요. 인형의 주문은 그 책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라고 했어요.” 아르웬이 앙칼지게 말했다. “하인즈가 엘븐의 책을 읽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그 책의 지식을 알아내고는 실험에 적용했다는 거죠. 엘미나, 인형이 움직이는 걸 봤잖아요. 한 발을 디딜 때마다 어둠이 벌레떼처럼 몰려들었다고요. 생명의 본질은 빛이지만, 그 인형은 어둠을 자기 본질로 삼고 있었어요.” 엘미나가 말했다. “생명의 본질에 관한 내용은 요정들에게만 전수되어 왔죠. 우리는 인간에게 그 지식을 허락한 적이 없어요.” “엘미나!” 로웬이 눈물을 터뜨렸다. 원탁에 몸을 숙인 그녀는 흐느끼며 말을 쏟았다. “하인즈를 죽이지 마요. 내가 키웠어요. 아기 때부터, 걷지도 못하고 말을 못하던 그 아이를 내가 여기까지 데려왔어요. 나를 죽여요. 내가 금단의 지식을 하인즈에게 가르쳤다 생각하고 나를 죽여요······.” 장로가 의자를 밀고 일어나 로웬의 뒤에 섰다. 로웬을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던 장로는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귓속말로 흐느낌을 가라앉힌 장로는 그녀를 원탁의 방 밖으로 내보냈다. 문이 닫혔다. 로웬의 울음소리가 벽을 긁었다. 의자에 도로 앉은 장로가 말했다. “하인즈는 생명 근원의 영역에 도전하는 마법을 연구했소. 이를 달성하기 위해, 요정끼리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는 금단의 지식을 적극 활용했소. 어떤 경로로 지식을 습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소. 하지만 우리는 진실을 알기 위해 원탁에 모인 것이 아니소. 우리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 모였소.” 말을 마친 장로가 엘미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엘미나가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로웬의 말대로, 봉인을 풀어 책을 읽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무엇보다 하인즈는 그 책을 펼쳤을 때 살아남기 어려웠을 테죠. 엘븐의 책에는 강력한 주문이 실려 있으니까요.” 장로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우리가 하인즈를 추방한다면, 숲을 떠난 하인즈에게 우리는 더 이상 간섭할 수 없소. 최악의 경우, 하인즈가 생명 근원의 지식을 세계 곳곳에 퍼트릴 수도 있소. 또한 책의 존재가 온 세상에 알려질 수 있소.” 엘미나가 오른손을 살폈다. 반지는 빛을 내지 않고 있었다. “죽여요.” 아르웬이 말했다. “처음부터 인간을 숲에 들여선 안 됐어요. 로웬의 억지와 장로님의 자비로움만 아니었다면 이번 같은 일은 없었을 거예요.” 장로가 말했다. “로웬은 죽여선 안 된다고 말했소.” “장로님은 어떻습니까?” 엘미나가 물었다. 장로는 넓은 이마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원탁의 방 바깥에서 로웬이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로웬이 이 자리에 없으므로.” 장로가 말했다. “로웬의 입장에서, 또는 하인즈의 입장에서 짧게 한 마디 하겠소.” “죄인을 변호하시는 건가요?” 아르웬이 빈정거렸다. 장로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하인즈는 그 책······, 최초의 마법사 엘븐께서 저술하신 책을 알지 못하오. 책의 내용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오. 책이 요정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모른다는 뜻이오. 엘븐의 책에는 세상이 만들어지고 우리 요정들이 태어난 모든 순간이 기록되어 있소. 동시에 우리 요정이 어떤 운명을 맞을 것인지도 함께 기록되어 있소.” “샤모스도 알지 못하죠.” 마르가 작게 말했다. 엘미나는 일부러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장로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하인즈가 인형에 심어놓은 주문은 엘븐의 책을 읽어보지 않고도 만들 수 있소. 마법 도서관에는 엘븐의 책의 문장을 인용한 책들이 많이 있고, 그 인용문을 모두 참고한다면 불완전하게나마 엘븐의 지식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말하자면 하인즈는 엘븐의 책을 읽지 않고도 엘븐의 지식에 접근했소. 왕성한 호기심과 성실함이 하인즈가 죽을 이유가 될 수 있는지 우리는 고민해야 하오.” “아무튼 접근했습니다.” 엘미나가 말했다. 먼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아르웬은 엘미나를 슬쩍 보고는 입을 닫았다. “난 로웬과 하인즈의 입장에서 말했을 따름이오.” 장로가 말했다. 엘미나가 말을 받았다. “호기심과 성실함이 죄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은 틀렸습니다. 하인즈의 죄는 생명 근원을 파헤치려던 의도 그 자체입니다. 하인즈는 평생을 우리 숲에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와 운명은 모를지라도, 우리의 규칙만은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인즈는 규칙을 어기고 부정한 생명체를 만들었습니다. 그 아이가 어디까지 알아냈든 간에 살려두어선 안 됩니다.” “죽여도 됩니다.” 마르가 말했다. 엘미나와 장로, 아르웬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르는 허공을 보는 것 같지만 원탁에 앉은 세 요정을 한눈에 아우르는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하인즈가 금기를 어긴 건 사실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숲에 들인 행위의 필연적인 결과라면 그를 죽여도 됩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이오?” 장로가 물었다. “샤모스도 죽여야 합니다.” 마르가 대답했다. 엘미나가 의자를 밀치고 일어섰다. 뒤로 넘어간 의자가 마룻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지금······.” 엘미나가 떨리는 턱에 힘을 주며 말했다. “뱉은 말에 책임져야 할 거예요, 마르.” 마르는 엘미나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자기가 한 말의 경중을 모르겠다는 순진한 태도였다. 마르가 말했다. “샤모스는 오르비스에서 일 년을 수학(修學)했죠, 엘미나. 님프 요정들의 공중 도시에서 그들이 이만 년 동안 축적한 지식을 일 년 만에 흡수했다고 들었습니다. 로웬이 알려주었죠.” “그게 어쨌다는 거죠, 마르?” 엘미나는 마르의 대답을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 “님프 요정들도 샤모스에게 모든 지식을 알려주지 않았을 겁니다. 지혜의 여신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말이죠. 하지만 샤모스가 그걸 모르고 있을까요. 오르비스가 어떤 문제에 처했고 님프 요정들이 어떤 운명에 도전했는가를 샤모스는 어떻게든 알아냈을 겁니다. 엘미나, 그대도 알지 않습니까. 샤모스가 얼마나 천재적인지를요.” “마르.” 장로가 흥분을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근거 없이 말을 지어내지 마시오.” “요정이 애써 숨기려는 지식을 읽어내고, 그 지식의 공백을 채우고자 금기를 넘을 가능성은, 제 생각엔 하인즈보다 샤모스에게서 더 많이 엿보입니다. 그것은 샤모스의 죄가 아닙니다. 샤모스는 너무나 뛰어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인즈를 죽인다면 샤모스 역시 죽여야 합니다.” 마르는 한 손을 들었다. 그녀의 검지 손가락이 허공에 좌우로 휘어지는 선을 그렸다. 엘미나가 마르의 뺨을 쳤다. 각주: 1) 원작에서 로웬을 통해 진행 가능한 퀘스트 〈요정 로웬과 저주받은 인형〉를 통해 하인즈가 “한때 절대로 손대서는 안 되는 흑마술에 심취했던 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좀비루팡의 몬스터북 에피소드에서도 “엘리니아의 대마법사 하인즈도 한 때는 잘못된 길에 빠져든 적이 있다. 위대한 마법사가 어둠의 마법에 심취한 것만큼 위험한 것이 있을까? 흑마술로 만들어진 저주받은 인형은 루팡의 손에 들어가 좀비루팡으로 재탄생했다”라고 설명됩니다. 본작에서 하인즈가 흑마법을 연구했고 엘리니아 숲에 연구실이 숨겨져 있으며, 지푸라기로 만든 인형이 실험 도구로 발견되었다는 설명은 원작의 이러한 내용에 근거합니다. 다만 하인즈가 흑마법에 손을 댔던 “한때”, “젊은 시절”(퀘스트 〈악령의 숲〉)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원작에서 설명되지 않습니다. 2) 원작에서 로웬은 “대마법사이신 하인즈님을 보좌하는 요정”으로 설명됩니다. 대부분의 요정은 인간을 싫어하며 특히 아르웬은 퀘스트 〈악령의 숲〉에서 “오래 전 하인즈가 어둠의 마법에 손을 뻗은 적”이 있음을 언급하며 하인즈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그런 와중에 하인즈를 보좌하면서도 그의 죄를 인정하는 로웬의 성격은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4번 각주의 내용을 종합하여, 본작에서는 로웬이 어린 하인즈를 거둬 키우고 마법도 가르친 인물로 설정되었습니다. 3) 본편에 등장하는 하인즈의 연구실은 퀘스트 〈요정 로웬과 저주받은 인형〉에서 로웬이 “하인즈님은 저주받은 인형을 아무도 모르는 깊은 곳에 봉인하”였다고 말한 것에 근거합니다. 원작에서는 ‘연구실’이 명시되지 않으며, 본편에서처럼 봉인에 실패하였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4) 세간에서는 하인즈가 아기 때 엘리니아 숲에 버려졌고 이를 발견한 요정들이 거두었다는 말이 나돕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원작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엘린숲의 NPC 페르젠이 하인즈를 언급한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역시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원작에서 하인즈의 출신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세간의 소문은 ‘어째서 인간인 하인즈가 엘리니아 숲에서 대마법사이자 장로에 오를 수 있었는가?’라는 의문에 원작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샤모스의 경우와 구별되는 서사를 부여해 줍니다. 따라서 본작에서는 하인즈가 아기 때 엘리니아 숲에 버려졌고 로웬이 하인즈를 거뒀다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5) 루팡의 몬스터북 에피소드에서는 “엘리니아 숲의 마법력에 영향을 받아, 무의식 중에 마력이 담긴 공격을 하곤 한다”라고 설명됩니다. 6) 엘븐은 가이드북 『메이플스토리 퍼펙트 가이드 16』(시공사, 2003)에서 엘리니아의 배경 설정을 설명하는 “가장 상단으로 가보면 대 마법사 엘븐의 자손들이 만든 마법사 길드(마법 도서관)가 있다”라는 문장에서 단 한 번 언급됩니다. 해당 문장에서 드러난 정보를 제외하면, 본작의 엘븐에 관한 배경 설정은 모두 창작입니다. 7) 생명에 관한 마법이 금기라는 본편의 설명은 파티퀘스트 〈호브 제왕의 부활〉 관련 퀘스트에서 NPC 로베이라가 “ 생명 근원에 대한 도전. 그것은 절대로 용납받을 수 없는 잘못이야”라고 말한 것, 퀘스트 〈요정 로웬과 저주받은 인형〉에서 로웬이 “이 세계에서 생명에 대한 마법은 금지되어 있다”고 말한 것에 근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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