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구(何求) 김시현(1883~1966) 독립지사의 이야기입니다.

아래는 제미나이로 찾아본 생애입니다.

하구(何求) 김시현(1883~1966) 독립지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의열단의 핵심 단원으로서 치열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맞서 암살을 시도했던 비운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입니다. [1, 2]
그의 생애는 크게 일제강점기의 '항일 투쟁기'와 해방 이후의 '반독재 투쟁기'로 나뉩니다.

1. 출생과 독립운동의 투신
  • 안동 출신과 만학의 유학: 1883년 경상북도 안동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29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며 신지식을 섭렵했습니다. [1, 2]
  • 3·1 운동과 탈옥: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경북 상주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헌병대에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옥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습니다. [1]
2. 의열단 활동과 '황옥 경부 폭탄 사건' (영화 《밀정》의 실제 모델)
  • 의열단 가입: 만주 길림으로 이동한 그는 약산 김원봉을 만나 항일 비밀결사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했습니다. 김원봉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핵심 간부로 활약했습니다. [1, 2, 3]
  • 황옥 경부 사건 (1923년):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제 통치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중국에서 폭탄과 화약을 대량으로 확보해 국내로 반입하려 했습니다. 이때 종로경찰서의 경부(경찰 간부)이자 의열단 유관 인물이었던 황옥과 공모하여 전개한 이 거사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대표적인 무장 투쟁으로, 훗날 영화 《밀정》의 핵심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1, 2, 3]
  • 독특한 아호 '하구(何求)': 이 사건으로 체포된 그는 일제의 가혹한 고문 속에서도 기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혀를 깨물었습니다. 당시 일본 검사가 빈정거리며 *"도대체 무엇을 구하려 지독하게 버티느냐, 차라리 호를 '무엇을 구하랴'라는 뜻의 하구(何求)로 하라"*고 조롱하자, 본래 학우(鶴右)였던 아호를 진짜 하구로 바꿔버렸습니다. [1, 2]
  • 끊임없는 옥고: 10년이 넘는 수감 생활 후 출옥하자마자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생도 모집책(독립시인 이육사를 1기생으로 입교시킴)으로 활동하다 또다시 체포되는 등, 광복 전까지 총 4번에 걸쳐 15년에 달하는 혹독한 옥고를 치렀습니다. [1, 2]
3. 해방 이후와 '이승만 저격 미수 사건'
  • 제도권 정치 진입: 해방 후 고향 안동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했습니다.
  • 이승만 암살 시도 (1952년):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부산 임시수도 시절,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고 독재 체제를 굳히기 위해 발췌개헌을 단행하자 이에 극도의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는 의열단 동지인 유시태와 공모하여 6·25 2주년 기념식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저격을 시도했으나, 권총이 불발하면서 미수에 그쳤습니다.
  • 감형과 4·19 혁명으로의 석방: 이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과도정부에 의해 국사범 제1호로 석방되었습니다. 석방 직후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동 주민들의 압도적인 신임을 받아 다시 한번 국회의원에 재선되었습니다. [1, 2, 3, 4, 5]
4. 서거와 역사적 평가
  • 1966년 1월 3일, 평생을 항일과 반독재에 바쳤던 그는 향년 83세를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배우자 역시 호수돈여학교 시절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유명 독립운동가 권애라 지사입니다.)
  • 서훈 탈락의 논란: 일제강점기 행적만 보면 명백한 최고 등급의 독립유공자 대상이지만, 해방 이후 국가 수반(이승만)을 암살하려 했다는 '헌정 질서 파괴' 혐의가 걸림돌이 되어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정부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 이에 대해 "일제 치하의 치열한 공적과 해방 후 독재 저항은 분리해서 인정해야 한다"는 재조명 요구와 "어떠한 경우든 대통령 암살 미수범에게 서훈을 줄 수 없다"는 보수적 평가가 여전히 엇갈리고 있는 비운의 인물입니다

쇼츠와 생애를 보고 난 다음 느낀 점은
"이 모든 원인이 인적청산이 재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극단적일 수는 있으나, 저 당시의 상황에서는 분명 인적청산이 안되었고
친일 부역자들이 독재에 또다시 부역한것은 사실일테니깐요.

그러니 독립 운동을 하신분들이 저렇게 행동하실만 하다고 공감도 했고요.
단적인 예로.. 광복 후, 악질 친일 경찰이었던 노덕술이 버젖히 활보하는 것을 보고 
대성 통곡한 약산 김원봉 선생의 일화가 떠오를 정도였네요.

요즘 흘러가는 모양새가 실용주의를 이유 삼아 인적청산을 무력화하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습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