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왕징기
2021-11-1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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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불에서 태어난 자 -15- 전쟁 선언불에서 태어난 자 -15- <전쟁 선언> 차원문을 통해 돌아온 아스타르는 볼카트를 찾았다. “볼카트. 둠플랜을 가동해라.” 볼카트는 기다렸다는 듯 작은 손으로 경례를 했다. 그 말은 아스타르가 둠플랜을 가동할 수 있냐고 물었던 순간부터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는 흥얼거리면서 큼직한 단추를 눌렀다. 지옥마력이 요동치면서 킬제데른의 대지가 뒤흔들렸다. 방대한 지옥마력이 차원문으로 흘러 들어갔다. 둠플랜이 가동되면 그 어떤 행성도 파멸이란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티탄의 성소도 다르지 않았다. 아스타르는 판테온의 권좌가 지옥불꽃에 휩싸이면서 소멸하는 모습을 사령관들과 함께 감상했다. 군단의 사령관들은 모두 탄성을 내지르며 환호했다. 아스타르는 그들에게 이 기쁨을 마음껏 느끼도록 허락했다. 전쟁을 앞둔 악마들이 즐길 여흥으로 이보다 멋진 광경은 없을 것이니까. 이제 살게라스마저 사라졌다. 군단을 지배했던 과거의 유물은 모두 망각의 길로 떠나보냈다. 오직 살게라스가 남긴 유산만 남았고, 그 유산은 고스란히 아스타르의 몫이 되었다. 이는 아스타르가 그토록 갈망했던 전쟁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는 고위 악마들을 모두 킬제데른으로 소집했다.
“아스타르님. 모두 기다리고 있어요.” 치르테는 아스타르의 거처에 들어오더니 언제나 그렇듯 아스타르의 옆에 들러붙었다. 아스타르는 그녀의 손길을 즐겼다. 그는 미소를 짓더니 치르테의 머리칼을 만졌다. “저들을 기다리게 만들어도 되겠느냐?” “글쎄요. 그건 주인님의 뜻대로 할 일 아닐까요?” 치르테는 속삭이더니 아스타르의 귓가에 바람을 불었다. 아스타르는 이 야릇한 느낌을 즐겼다. 전쟁을 선언하기에 앞서 그녀를 취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는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 하지만 하메라가 들어왔다. “아스타르님. 때가 되었습니다. 군단은 아스타르님의 선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이런. 치르테. 아무래도 군단을 더 기다리게 만들면 안 되겠구나.” 아스타르가 너스레를 떨자 치르테는 하메라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하메라는 상관도 안 한다는 듯 아스타르의 명을 기다렸다. 그 누구보다도 아스타르 자신이 더 고대해왔던 순간이었다. 그는 치르테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하메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메라는 고개를 숙이더니 뒤돌아서 먼저 나섰다.
군단의 모든 고위 악마들은 아스타르가 오길 기다렸다. 그들은 총사령관이 어떤 선포를 할지 기대했다. 내전은 종식되었고, 군단의 지휘권은 오로지 아스타르만의 것이었다. 새로운 주인이 성전을 재개할 것이란 건 말단 악마들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 선포되길 모두가 원했다. 아스타르는 자신을 기다리던 모든 이들 앞에 섰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힘? 살육? 정복? 파멸? 그것이 어떤 가면을 썼더라도 한가지로 정의할 수 있었다. 욕망. 아스타르는 악마의 욕망이 얼마나 강한 동기가 되는지 알았다. 그는 악마들의 눈에서 욕망을 읽었다. 내전 동안 뒤로 미뤘던 진정한 욕망을 표출시켜줄 때가 되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의 형제자매들아. 내가 너희 앞에 설 수 있는 영광을 안게 되어 참으로 기쁘구나. 우리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수치를 감내해야만 했었다. 나는 이 내전을 우리의 패배라고 부른다. 패배. 우리는 오랜 세월 살게라스의 검으로서 수많은 세계를 정복하고 징벌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필멸자에게 패배하면서 지도부를 상실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다니. 이게 패배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말하겠느냐? 이보다 더 큰 수치가 있었다면 이 자리에서 이야기해도 좋다. 누구 이야기해볼 자가 있느냐?” 악마들은 씁쓸함을 느끼며 모두 침묵했다. 예상했던 바다. “난 너희에게 고백하고 싶구나. 난 이 패배가 좋았다. 우리 안에 자리 잡은 기생충들이 무엇인지 밝혀내고 박멸했기 때문이다. 그 중 첫 번째는 우리를 결정적인 순간에 패배로 이끈 나스레짐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충실한 동지인 척했지만 실상 다른 뜻을 품은 이단자들이었다. 타락의 씨앗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모든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고 우리만의 세상을 이루겠다는 것이 우리의 대의였다. 하지만 놈들은 그런 대의를 거슬렀다. 난 놈들의 음모를 밝혀내고 너희 앞에서 선언했었다. 나스레짐이 어디에 있든, 놈들의 주인이 어떤 일을 꾸미든 반드시 찾아내서 티콘드리우스와 같은 운명을 선사하겠다고.” “고통! 파멸! 망각!” 모든 악마가 일제히 외쳤다. 악마들의 외침 때문인지 킬제데른의 지옥마력이 더욱 요동쳤다. “두 번째는 우리의 마음속에 깃든 자만이었다. 자만심은 필멸자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도록 만들었고, 우리를 더욱 나태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우리의 형제자매들에게 칼을 휘두르도록 만들었지. 형제자매의 도움 없이도 성전을 완수할 수 있다는 자만은 내전을 더 치열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우리 옆을 지켰어야 했던 형제자매들이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마음속에 깃든 이 자만심은 과거의 유물로서 사라져야만 한다. 자만심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패배만 맛볼 뿐이다. 그래서 난 너희에게 바란다. 놈들이 우리의 적수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가 일치단결하지 못한다면 놈들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승리할 수 있다. 형제자매들아. 내 뜻에 따르겠느냐?” 악마들은 자신들의 무기 끝으로 땅을 두드려서 화답했다. 아스타르는 그 소리가 흡족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지막은 우리 안에 자리 잡은 패배자의 마음가짐이다. 살게라스가 없고, 두 악마군주들이 없고, 이전보다 세력이 약화 된 우리가 불타는 성전이란 대의를 이어나갈 수 있겠냐고 의심하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패배자들은 언제나 패배할 수 있는 이유만을 찾는다. 그들은 필연적인 승리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용감할 수 있지만 불확실한 전쟁에서는 스스로 패잔병이 되는 길만을 택한다. 내가 너희에게 묻고 싶다. 너희는 패잔병인가? 아니면 군단인가?” “군단! 군단! 군단!” 악마들은 패잔병이란 말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더 크게 외쳤다. 에레다르 군주 중 하나인 자락서스까지 얼굴에 핏줄을 세우며 외치고 있었다. 아스타르는 손을 들었다. “그렇다. 우리는 패잔병이 아닌 군단이다. 비록 우리의 강대한 지도자들이 사라졌고, 이전보다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난 여전히 전 우주에서 군단이 최강이라고 자부한다. 놈들에게 맞이한 패배는 우리 안에 자리 잡은 기생충들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그 기생충들을 하나하나 찾아내면서 극복해냈다. 강력한 지도자들은 사라졌어도 영민한 지도자들이 새롭게 그 자리를 계승했다. 우리의 세력은 약해졌어도 더 정예화된 병력이 한마음으로 뭉쳤다. 이런 우리가 과연 이전보다 더 쇠락했을까? 그래서 난 너희를 믿는다. 너희가 그 어느 때의 군단보다 최고라는 것을.”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환호를 아껴둘 필요가 있었다. 진정으로 환호해야 할 순간은 지금이 아니었다. 아스타르는 다시 한번 손을 들어 그들을 침묵시켰다. “최고의 검이 무언가를 베어내어야만 가치를 입증하듯 군단도 최고임을 증명하려면 해야 할 일이 있다. 형제자매들아. 나의 믿음을 증명해주겠느냐? 난 너희에게 새로운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예전처럼 너희가 잘해왔던 일을 계속 잘해주기만을 바란다. 수많은 세계를 정복하고, 가치 없는 자들을 잿더미로 만들고, 우리와 뜻을 함께할 유능한 자들을 찾아내서 동포로 맞이하는 일 말이다. 그래. 우리가 그토록 갈망해왔던 일을 이제 시작할 생각이다.” “전쟁!” 벨리스라가 가장 먼저 외쳤다. 그녀의 외침이 끝나자 더 큰 소리로 모두 일제히 외쳤다. “전쟁! 전쟁! 전쟁!” 전쟁. 이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가? 아스타르는 이 달콤한 소리로 한껏 귀를 즐겼다. 모두가 기다려온 말이 아니겠는가? 군단을 군단답게 만드는 것은 오직 전쟁뿐이었다. 내전이 종식되고, 체계를 세우고 전쟁을 준비했으니 이제 시작할 때가 되었다. 그는 두 손을 하늘 위로 뻗었다. 그의 손짓에 맞춰 새로운 지옥함선들이 차원도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볼카트의 새로운 도안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더 발전된 차원도약 기술과 강력한 포가 탑재된 함선이었다. 이 신형 함선들이 바로 군단을 드레노어와 아제로스로 이끌 것이다. 이제 선포를 끝낼 때가 왔다. 그토록 갈망하던 전쟁을 선언하기 위해 얼마나 기다렸던가? 아스타르는 킬제덴이 짓던 미소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형제자매들아. 모두가 그토록 원했던 일을 시작하자! 우리에게 패배를 안겼다고 믿고서 우리를 잊은 놈들에게 복수를 안기자! 우리가 그들의 악몽이었음을 다시 깨닫게 해주자! 그리고 우리가 만물의 최후라는 걸 보여주자! 이제 전쟁을 시작하자!” “갈타크 아스타르! 갈타크 아스타르! 갈타크 아스타르!” 미소를 지은 채 아스타르는 환호하는 악마들 중 자신의 충복들을 훑어봤다. 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던 아주운도 그 어느 순간보다 환희에 찬 것처럼 보였다. 하메라는 빛의 몰락을 하늘 위로 뻗은 채 연신 외치고 있었다. 치르테는 아스타르를 향해 응큼한 눈짓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아스타르가 거처로 돌아갈 때 따라올 생각인 것 같았다. 그는 오늘만큼은 허락할 생각이었다. 아스타르는 이크툰을 기리기 위해 세워둔 도끼를 보았다. 이크툰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가장 열렬히 전쟁 선언을 반기지 않았을까? 그는 이번 전쟁에서 수확한 피로 이크툰을 애도하기로 다짐했다. 곧 드레노어와 아제로스의 모든 이가 알게 될 것이다. 군단이 돌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불에서 태어난 자가 왔음을 깨닫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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