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본인의 집컴은 노글픽카드 다.

그래도 영시라든가 고고학이라든가 농사는 충분히 채팅하며 와우를 돌릴수 있는 사양이다.

하지만 레이드를 돌릴땐 어김없이 블루스크린이 떠버리니 어쩔수 없이 피방을 가야하는 귀찮음은 있다.

다행히 축복받은 수성구의 신매, 사월 쪽이라 PC방의 수는 매우 쾌적한 편이다.

그저 주변에 학교가 10개라는게 문제일뿐.




# 첫 트라이. (12시 40분~55분)

토요일 1시 팟을 예약하고 그날이 되어 평소처럼 12시 40분에 집앞 피방에 도착.

자리가 풀이다. 요즘 초글링들에게 점심이란 개념 주입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빈자리가 많다. 역시 점심때라 밥사러 갔나보다. ㅉㅉ 시켜먹으면 될것을.

하지만 유난히 빈자리가 많다. 도대체 초중딩들 30명이서 어딜 간걸까..

일단 기다려본다. 3분, 5분, 10분.

느낌이 이상하다. 이건 분명 평상시와는 다른 서늘함이다.

왜이렇게 조용하지? 뭐가 이렇게 어수선하지?

PC방의 변비는 그 어느때보다 강함을 어필했고 난 자리를 뜨기로 한다.





# 세턴드 임팩트 그리고 파멸. (1시 정각~8분)

공장에게 문자보고를 마친 나는 이동네 유일한 기계식 키보드를 쓰는 피방으로 가기위해 강을 건너 사월역으로 달려갔다.

초글링 두마리가 계단으로 내려왔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곳의 좌석수 130은 나에겐 충분한 안정제였다.

문을 열자 카운터에 있던 질럿 1부대는 나에게 안녕을 고했고

현실을 인정할 수 없던 나의 물음에 알바녀는 날 리신취급하였다.

필멸자의 절망같은 기분을 느낀 나는 공장에게 문자를 보내며 도로 건너 PC방으로 이동해본다. 

컴퓨터가 너무 고물이라 안가긴 했지만 그래도 급한 약엔 개똥이 아니겠는가.

..
......

왜..
문이 열리지 않는거니... 왜 안은 깜깜한거니.. 제발 A4용지에 임대 두글자만 적지 말라고..





# 눈앞에서 경험한 바빌론의 멸망. (1시 8분~27분)

지도 하나를 우선 투척해보겠다.


시지 광장이라는 곳으로, 지방도시 어디에서나 흔히 느껴볼 수 있는 전형적인 소박한 지역의 지도인데

이 지도 안에 얼마나 많은 pc방이 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음 덥구나. 유난히도 오늘은 자전거가 많이 보이는걸?"

버스 2정거장 거리 뿐이었지만 다급함을 어필하기 위해 굳이 지하철로 이동한 나는 두번째 음료수를 마시며

대구 특유의 따스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

뭔가 이상하다.

가는 족족 풀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에 땀이 많아진 나와 그걸 바라보는 카운터의 초글링, 중질럿들과

그 두쪽을 바라보며 힘없이 대기표를 작성하던 알바녀와 입이 귀에 걸린 사장과

축구게임이 켜져있는 빈자리들이 모인 그 공간은

더이상 내가 알던 PC방들이 아니었다.

도심 수로의 개척과 상업의 발달로 공중정원까지 지었었던 바빌론 왕국은 거짓말처럼 침략당하며 불타버렸고

난 하염없이 도롯가에서 팔을 휘저으며 택시를 불렀다.





# 대항해시대, 하지만 그마저 별다를건 없던 웨스턴 블루. (1시 30분~ 2시 13분)

이동할때마다 공장에게 문자를 보내지만 이전에 '다른인원들도 동일하다'는 동료의 비보를 답장으로 전해들은것 말곤

영 소식이 없다. 차라리 대타를 구해 출발하였기를.. 그리하여 날 이 지옥에서 구제해주길..

내가 택시에서 내린 곳은 수성시장이라는 곳이다. 그렇다. 나는 지름 약12.8km의 수성구 끝에서 끝으로 이동했다.

큰 사거리가 있는 지역으로 특이점은 이 사거리의 코너마다 PC방이 있어 개인적으론 수성피씨시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나와 나의 한 지인만이 아는 히든 포인트다.

이곳으로 자리를 잡은 이유는 멀리 꽤 큰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곤 있으나

여전히 초글링들의 수가 타지역에 비해 적기 때문.

그렇다! 문제점을 파악했으니 이젠 피해가는 방법만 찾으면 되는 것이었다!!!

기쁜 마음에 거침없이 첫 문을 열었고

난 이 대구의 모든 부랑자들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엔 이세상 모든 비관이 가득했고 황망한 마음은 날 사거리 횡단보도로 내몰았다.

언젠가 몽골이라는 곳에 여행을 가보고 싶었는데 고비사막같던 그 사거리 덕분에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게 되었다.

땀과 눈물이 와이퍼처럼 요동치던 그때 내 눈에 두 아이가 보였다.

내가 횡당보도를 지날때마다 스쳐지나가던 그 하이에나같던 아이들을 본 덕에

5번째 포인트 진입 시간을 택시 잡는 용도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 창조경제에 걸맞는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지옥을 탈출하라. (2시 15분~3시 20분)

이건 아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택시 이동중에 사태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한 나는

노글픽컴으로 블루스크린과 싸워보겠다는 오기를 접고 대학가로 향했다.

이 지옥같은 경제적 불황과 취업난 속에서 그깟 하찮은 피파이벤트 따위가 대학생들을 현혹할리 만무했고

나의 예상은 바로 적중했다.

그곳 두번째 포인트조차 좀비들에게 일부 점령당한 상태였지만 분명 몇자리가 비어보였다.

24번으로 갔다. 오아시스처럼 차가운 메탈 전원버튼이 눌러졌고

아무리 기다려도 부팅이 되지 않는다. 알바에게 물어보니 고장났단다.

그럼 바로 등뒤에 있는 37번의 모니터에 붙은 수리라는 종이의 의미를 따지고 싶었으나

시간은 저스트 골드이기에 관뒀다.

순간, 뒤에 한 일행들이 올라오는 계단 소리가 들렸다.

다급했다.

82번. 그래. 저기다. 저 안락한 곳이야 말로 날 구제해 줄 자리다.

의자를 땡겼고 전원버튼에 손을 올린 순간 83번의 녀석이 나에게 자리 변경을 요청했다.

응격+고자왕+기공손마부를 땡긴 상태에서 사형선고를 그놈의 정수리에 기가드릴마냥 꽂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누르고 62번으로 향했다.

이번엔 다 좋다. 부팅도 되고 태클도 없다. 의자도 좋고 스피커도 되고 모니터도 되고

키보드도 높낮이 조절 똑딱이는 사라지고 없지만 불만을 가지기엔 내 손목은 유연했다.

단 하나,

마우스가 없다.

이 많은 피방 손님들에게 혼자서 유린당하고 있는 불쌍한 피방 알바를 겨우 찾아내 마우스를 요구했고

자신과 상대방중 누가 더 불쌍한 놈인지 판단하길 포기한 녀석은 고장난 피씨의 마우스를 떼어내 62번에 연결해줬다.

그렇게 나의 PC방 레이드는 14트만에 안식을 얻게 되었다.




후기.


4포인트로 가는 택시 안에서 공장님께서 연락이 오셨지만 11하드까진 잡고 있겠다고 말씀하셨고 저도 최대한 찾아볼테니

대타 있으면 구하시라 권유드렸지만 그분은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셨고 난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다행히 접속을 하여 말코 앞에는 당도하였지만 5넴과 7넴에서 주사위를 굴릴 기회를 잃어버렸고

말코힐 1등을 달성함과 동시에 분노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난 집에서 나올때 5만원을 가지고 나왔었고 접속을 하고 1분뒤 수중에 있는 돈을 세보니 3만 7천원이 남아 있었다.

레이드가 끝난후 계산된 피씨방의 요금은 정확히 2천 7백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