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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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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죽탱은 개인주의야 (3)"한 마리의 맹수와도 같았소." "맹수와 같다뇨. 저는 맹수랍니다. 일종의- 파생형태긴 하지만." 기계공의 정원, 막 스파크플럭스를 쓰러뜨린 참이었다. 폭탄 하나 새는 일 없었고, 대다수의 경우 고양이가 폭탄을 전담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의 실력이 보이는 미터기 이상이라는 걸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반쯤 얼어붙은 기계공 옆에 잠시 엉덩이를 붙인 사트 씨는, 그러나 지금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파티가 모였을 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또 다른 어픽스가 고개를 든다. 특히 폭군 작업장은 고산병을 앓게 하는 마력이 있어서 파티원들은 네임드전이 지속될수록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증상을 겪곤 한다. 이번에 가장 크게 '중탈병'을 앓는 사람은 사트 씨가 처음부터 주시잡아놨던 힐사제였다. "나 안 가." 힐사제가 꽃밭 위에 드러눕는다. 쐐기돌 소진까지 시간은 아직 넘치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힐사제는 중탈만을 외치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토라질대로 토라진 얼굴을 보여주기 싫은 것인지 파티원들이 있는 방향 반대로 고개까지 돌려버렸다. 숱한 경험이 그녀의 감정상태를 알려준다. 시클이고 나발이고 감정이 소진되어 버렸다. 기둥 뒤쪽에 숨어서 기다란 손가락을 베베 꼬며 침울해 있는 예쁘냥 씨가 보였다. 사트 씨는 나서는 성격이 못되기에 중재보다는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는 쪽이다. 무슨 일이신가용, 그녀가 폭발물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툭툭 건드려보면서 고양이가 묻는다. 그 질문만 기다렸던 것인지 벌떡 일어나 앉아 꽉 매였던 속내를 털어놓는다. "아니, 18단씩이나 오면서 공략도 모르는 게 맞아요?" "......죄송합니다......" 기둥 뒤에서 슬쩍 걸어나와 땀난 손을 비비는 예쁘냥 씨는 힐사제에게 눈도 맞추질 못했다. 사트 씨는 턱을 굈다. 원거리 딜러는 포지션 특성상 시야가 넓을 수밖에 없다. 정면에서 날아오는 근거리대상 즉사 패턴을 피할 필요도 없거니와, 무빙에 제약이 많지 않아 자신이 자리 잡는 대로 어디서든 딜링이 가능하다. 어글이 튀어도 거리가 멀기 때문에 대처할 시간은 충분하다. 머리가 돌아가 평타를 맞고 죽었다, 는 상황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위험하거나 피해야 하는 건 고작해야 바닥이나 차단이 새어 날아오는 투사체 정도다. 그마저도 [얼음방패]라는 무적기로 위험한 순간을 넘겨버릴 수 있고, 게다가 [일렁임] 두 개로 제약 없이 다른 위상으로 도망칠 수 있는 법사의 시야는 어떤 딜러보다 넓고 느긋하다. 그러니 누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다 보일 수밖엔 없는 것이다. 힐사제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왜 그런지 관심이 없거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볼 수 없는 상황이었던 사람들이라면 또 난리치네, 힐러들이란, 이라고 고개를 저을 수도 있겠지만 사트 씨는 모든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사람이다. 이해하지 않으려 해도 이해할 수밖엔 없다. 추진제를 분출하는 노움전차의 고개가 갑자기 돌아가 까맣게 타버렸고, 용접상자에 쿠조의 폭발도약이 옮겨붙어 또 까맣게 타버렸다. 힐러들 사이에 어떤 국룰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번까지는 참아준다. 하지만 세번째 네임드에서까지 까맣게 익어버리는 경험은 국경없는 의사회라도 참기 힘들다. 사연은 이렇다. 은닉 화염포에 맞아버린 예쁘냥 씨를 살리려다 힐사제도 화염포를 맞아버렸고, 예쁘냥 씨에게 힐 집중해야 할 지 자신에게 힐 집중을 해야 할 지 혼란스러워지는 와중에 자동 손질 톱날이 그녀를 덮쳤고 그대로 눕게 됐다. 언제 죽어버릴지 모르는 야드와, 밑 빠진 독처럼 출렁이는 죽탱의 피를 채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매 네임드 때마다 사고가 일어나니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다. 그런 사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들은 네임드를 격파했다고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고 있으니 성질이 안 날 수가 있겠냐는 거다. 사트 씨는 군단 때 힐스왑으로 수사를 하던 길드암사가 투덜댔던 불평들을 떠올리며 그게 이런 말이었군, 입술을 오므렸다. "......제가, 손이 꼬였어요...... 죄송합니다..... 이게 1번 누르면서 a키도 같이 눌러야 되는데, 자꾸 q가 눌려서....." 예쁘냥 씨는 계속 저자세였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단단히 혼내줄 준비를 했을수록, 상대가 하는 사과 한 번에 풀려버리곤 한다. 결국 그녀가 바란 건 내 힘겨움을 알아달라, 일 뿐이다. 하지만 힐사제는 괜히 한 번 더 성을 내본다. 어떻게 뽑은 칼인데 이렇게 집어 넣어버리기엔 너무 낯뜨겁다. "아, 아니. 냥꾼님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구여. 그니까-" "-그럼 나 들으라고 한 말인가, 여군주." 정원 한 가운데에 힐사제 3배 크기의 양손 룬검을 꽂아넣으며 재민 군이 입을 열었다. 푸른 눈의 한기가 더욱 짙게 피어오른다. 탱에게도 성감대가 있다. 흥분한 개돼지로 만들려면 간단하게 "탱님 공략 모르죠", "여기 이렇게 모는 거 아닌데" 정도만 해주면 된다. 그걸 아는 힐사제는 설마 이걸 자기한테 한 말로 오해한 건가, 하고 손을 떨었다. 점수가 깡패다, 재민 군은 품에서 3800이라고 적힌 명함을 꺼내어 힐사제의 작은 손에 건네주었다. 사트 씨는 턱을 괸 손을 뗐다. 파국이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몇 마디 틱틱대다가 끝났을 싸움을, '대 사사게 전'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점수부심을 부리는 순간 한와는 멸망한다, 는 전설이 있다. 재민 군은 방금 그 금기를 깨버린 것이다. "내가 왜 18단 작업장에 온 줄 아시오?" "나 괴롭힐라고......" "아니오!" 그는 자기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분위기를 잡았다. 살짝은 가볍고, 또 살짝은 다른 차원에서 온 듯 괴상했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거움이 보였다. 고양이는 제발 팟쫑낼 소리는 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듯 그의 허리 갑옷에 앞발을 가져다댔다.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오, 여사제." "맞네, 괴롭히러 온 거." "난 평생을 비주류로 살아왔소." 평생이라기엔 삶이 좀 짧았을 거 같은 닉네임으로 죽탱은 등을 돌렸다. 회한으로 가득찬 눈빛으로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비주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몇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파티를 모으면서도 우린 이 곳을 떠날 수 없소. 다른 클이었으면 더 쉬웠을 거란 조롱을 들으면서도 우린 직업을 바꾸지 않소." 아주 천천히 그의 푸른 눈이 힐사제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감동 받았나 살피는 것 같다. "주류클 피빨아서 점수먹는다는 말에도 우린 계속 돌았소." "......? 아니 전 그렇게까지-" "-그때! 30분째 파티를 모으고 있는 당신에게서 예전의 날 봤소! 폭군 작업장, 지옥과도 같은 어픽스. 맘에 들지 않는 글로벌 팀원,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쐐기를 돌고 있소. 왜! 왜 돌고 있지?" 굳이 물어보니까 대답할 게 떠오르지 않아 벌벌 떠는 작은 여사제의 양 어깨에 손을 댄 재민 군은 눈을 감았다. 마치 자기가 18단 돌던 시절을 추억하는 듯 아련했다. 힐사제는 정신병도 대무가 되나 싶어 자꾸만 해제를 시도했다. 의외로 강렬한 감동을 받은 건 고양이 쪽이었다. 솜방망이 두 개로 입을 틀어막고 거대한 눈으로 그를 고독한 투사라도 된 양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작 갱신 한 번 하겠다고." 나름 괜찮은 반전과 스토리텔링이었어, 사트 씨는 속으로 칭찬했다. 아무 생각을 못하게 만들어서 중탈 얘기마저 잊어버리도록 병맛스러운 컨셉질까지도 서슴없이 하는 자였다.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라는 건 적절히 배합된 액션과 잘 짜여진 대본에서 읽을 수 있었다. 당연한가, 중탈하겠다는 사람이 한두명은 아니었을테니까. 어쨌거나 절대 중학생은 아니네, 라고도 확신했다. "그러니 난 이 메카곤 가장 높은 곳에, 여군주의 자리를 만들어주러 온 거요." "아, 아니 그럴 필요는 없-" "당신도 그래서 온 것이 아니오! 3100점의 냉기 마법사!" 갑자기 모든 시선이 사트 씨에게로 꽂혔다. 감명받은 고양이가 그를 올려다본다. 난데없이 날아온 바톤에 그는 난감했다. 이걸 받아줘야 하긴 할 거 같은데. 그래도 역시 거짓말은 체질이 아니다. "......전, 손목 먹으러 왔는데요." [고양이아니에오]님의 귓속말: 반으로 죽일거야 너 인성문제있어 [고양이아니에오]님의 귓속말: 적폐는 개인주의야 적폐는 자기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아 [고양이아니에오]님의 귓속말: 니 팀 버 더운 입김이 느껴지는 고양이의 귓속말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아직도 땅만 보고 있는 예쁘냥 씨가 보인다. 돌이켜보면 사트 씨도 처음 시작했을 때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그 암사녀석이 도와줬던 것도 사실이다. 캐릭터를 키우는 건 본인 몫이지만, 와우에서 혼자 크는 캐릭터는 없다. 괜히 아즈샤라의 눈에서 몇 번을 죽었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암사 녀석은 힐러에게 혼나는 나를 혼자두지 않았던 거 같다. 어떻게 말했더라. "다들 잘하셔서. 3넴까지 잘 왔고.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시간도 많이 남았고." 누구 앞에서 말하는 건 정말 익숙해지질 않는다. 뚝뚝 끊어지는 문장은 그때 녀석이 말했던 것에 비하면 격이 떨어지지마는, 격으로 대화하는 게 아니니까 애를 써본다. "좋게좋게 가자고 들면, 누구 하나는 좋을 수가 없는 거니까. 잘 말씀해주신 거 같고." 가렵지도 않은 목덜미를 긁으며 말을 이어간다. "가신다는 걸 제가 뭐라고 붙잡겠냐마는, 그래도 또, 저 분도 이제 잘할 거 같으니까-" 물웅덩이가 자작자작 깔린 모래무덤, 나가 바다 마녀로 가득한 아즈샤라의 영지에서 삼트 씨는 괜히 서러웠다. 이깟 게임이 뭐라고 난 이것도 못하고 있을까. 당최 잘하는 일이라는 게 없는 걸까 내 인생은. "-같이 깼으면 좋겠네요." 전설 탓이라니까, 암사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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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