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10. 십자군 왕국의 분열


▲ 1135년의 세력도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자신들만의 나라를 건국했다고 중편에서 말씀드렸는데, 이들이 모두 예루살렘 왕국에 참여했냐면 그것은 또 아닙니다. 아르메니아 공국, 에데사 공국, 안티오크 공국, 트리폴리 공국, 예루살렘 왕국으로 나눠진 채로 십자군이 끝나게 되죠.

문제는 이 다섯 나라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섯 나라 모두 서로의 왕위를 노렸고, 이 과정에서 수 차례의 무력 분쟁과 암살 시도가 있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다섯 나라는 처음에 세워진 방법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세우게 됩니다. 다섯 나라가 단합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의 여부가 불분명한데 이렇게 분열된 상황에선 당연한 생각이었죠.


▲ 이마드 앗 딘의 초상화

이때 셀주크 투르크는 거의 완전히 분열되어 제국은 거의 명목상으로만 존재했고, 이마드 앗 딘 장기라는 셀주크의 후손인 무슬림 장군이 다마스커스 근방의 지역을 통치하던 지방정권 부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력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마드 앗 딘은 셀주크 제국의 후계자 분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 분쟁 도중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예루살렘 왕국과 불가침 협정을 맺게 됩니다. 또한, 이 전쟁 도중에 이마드 앗 딘은 나짐 앗 딘 아이유브라는 젊은 부관 덕에 목숨을 구하고 이에 대한 감사로 자신의 딸과 결혼을 성사시킵니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그 유명한 살라흐 앗 딘으로, 살라딘에 대해서는 후에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셀주크 제국의 후계자 분쟁에서는 패배했지만, 아이유브의 활약으로 자신의 거점 다마스커스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마드 앗 딘은 지지 기반을 마련하고 세력을 넓히기 위해 십자군 국가들이 정복한 땅을 탈환해야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대를 소집합니다. 이후 이마드 앗 딘은 외교적으로 가장 고립되어있었던 에데사 공국을 침략하는데, 십자군 왕국들은 에데사 공국과의 관계가 험악했을 뿐 아니라 지원을 보낸 사이에 다른 십자군 왕국이 공격하는 것을 우려해 명목상의 지원군만을 보냈습니다.

결국 에데사 공국은 이마드 앗 딘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1144년에 멸망하게 됩니다.

11. 제 2차 십자군의 발호


▲ 2차 십자군의 경로

에데사 공국의 멸망은 서유럽 국가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1차 십자군이 성지를 탈환했고 주변의 군소 십자군 국가들도 세웠으니 이들이 무슬림들의 공격을 충분히 격퇴할 역량이 있다고 봤기에 에데사가 멸망한 것은 무슬림들이 십자군 국가 전체보다 강하다는 - 실제로는 서로 사분오열된 것이 원인이지만 - 생각을 하게 만들었죠. 


▲ 교황 유게니우스 3세의 초상화

이에 교황 유게니우스 3세는 칙서를 반포, 다시 한번의 십자군을 소집할것을 촉구합니다. 이미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의 수중에 들어왔으므로 성지 회복은 명분이 될 수 없었기에, 유게니우스 3세는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죄가 면제된다는, 일종의 면죄부를 통해 참여를 이끌어냈죠.

처음으로 이 요청에 응한것은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였습니다. 루이 7세는 봉신들에게 2차 십자군의 중요성과 교황의 권위를 강조하며 십자군에 참가할 것을 요구했고, 아키텐 대공이자 루이 7세의 아내 엘레오노르가 참가를 선언하며 수많은 프랑스 내의 귀족들이 뒤를 이어 십자군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웃나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콘라트 3세는 십자군에 별 흥미가 없었으나, 프랑스의 대규모 십자군 참여에 자극받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들이 십자군에 함께 참가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역시 십자군의 일원이 됩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는 시칠리아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크에 도착했으나, 프랑스의 군대는 루이 7세가 이전의 십자군 원정을 따라 육로로 성지에 가야함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안티오크에서 합류하게 됩니다.

이후 이마드 앗 딘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십자군은 에데사를 재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으나, 보급의 부족으로 잠시 물러서게 됩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마드 앗 딘의 아들 누레드 앗 딘은 에데사 내의 모든 기독교인을 죽이거나 추방했으며, 십자군의 사기는 떨어지게 됩니다. 


▲ 십자군에 참가한 루이 7세

안티오크 공국의 대공 레몽은 에데사에 대한 공격을 재개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미남에다가 인간적인 카리스마가 넘치던 레몽을 시기하던 루이 7세는 이 주장을 묵살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결정에 대해 십자군 내부에서 수많은 반발이 있었고, 루이 7세의 아내 엘레오노르도 에데사에 대한 공격을 재개할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루이 7세도 고집을 꺾고 에데사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려 했지만, 십자군 내부에서 레몽과 엘레오노르의 염문설이 퍼지게 됩니다. 이에 격분한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를 가두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하게 됩니다.

12. 제 2차 십자군의 결말

루이 7세는 예루살렘에 도착해 예루살렘의 공동 왕 멜리자드와 볼크의 환대를 받았고,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가 십자군에 합류하게 됩니다. 하지만 루이 7세는 여전히 에데사로 돌아가 공성을 진행할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예루살렘 주변의 다른 도시들을 정복하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공격하는 십자군

여기서 루이 7세는 중동의 대도시 다마스커스를 공격한다는 결정을 내리는데,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다마스커스와 예루살렘 왕국은 이마드 앗 딘의 협정으로 인해 상호 불가침의 관계였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왕국은 황당해했으나, 루이 7세는 이교도를 몰아내야한다는 고집을 부리며 독단적으로 다마스커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이 다마스커스에 대한 공격을 거부하자 공성에 대한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던 십자군은 다마스커스를 함락할 방법이 없었고, 4일의 명목상의 공성 끝에 포위를 풀고 퇴각했습니다. 이에 다마스커스는 친 기독교 정책을 버리게 되었으며,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도 기독교인들에 대한 신뢰를 잃고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동맹을 철회하게 됩니다. 이후에 루이 7세는 예루살렘에서 잠시 주둔하다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2차 십자군은 이룬 것도 없이 예루살렘 왕국의 적만 늘려주고 끝난 셈이죠. 

13. 아이유브 왕조의 부상


▲ 살라딘의 초상화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나짐 앗 딘 아이유브는 원래 이마드 앗 딘의 부관이었습니다. 이마드 앗 딘이 죽은 이후 아이유브는 다마스커스를 통치하게 됐는데, 그는 원래 기독교인들에 대해 유화적인 정책을 폈지만 2차 십자군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다마스커스를 공격하면서 십자군 왕국들과의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나짐 앗 딘은 기독교 왕국들이 점령하고 있던 영토를 제외한 시리아-팔레스타인 일대의 무슬림 세력들을 통합했으며, 악명높은 암살자 조직 하사신을 포섭해 정복에 사용했습니다. 이때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는 1차 십자군으로부터 패배한 이후 내부의 분열과 부패로 힘이 매우 약해진 상황이었는데, 나짐 앗 딘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집트를 공격,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이유브 왕조를 열게 됩니다.


▲ 아이유브 왕조의 강역

이어 나짐 앗 딘이 병으로 죽고 술탄으로 즉위한 아들이 그 유명한 살라흐 앗 딘, 그러니까 서양식으로는 살라딘입니다. 살라딘은 공정함과 자비로움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아직까지도 이슬람 세계의 영웅으로써 칭송받는 인물입니다. 그 명성은 살라딘이라는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살라흐 앗 딘은 아랍어로 정의로운 사람을 뜻합니다. 원래 이름은 알 말리크 안 나시르 아부 알 무자파르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이븐 샤디 이븐 마르완 알 아이유비(الملك الناصر ابو المظفر صلاح الدين يوسف ابن ايوب ابن شاﺬي ابن مروان الايوبي),  해석하자면 '승리의 왕(알 말리크 안 나시르), 승리의 아버지(아부 알 무자파르), 신념(이슬람)의 정의인(살라흐 앗딘), 아이유브 일가의 마르완의 아들인 샤디의 아들인 아이유브의 아들 유수프'입니다. 즉 본명은 유수프(يوسف)죠.

살라딘의 통치기는 이슬람 세계가 가장 안정적이었던 시점중 하나로, 미술과 문학작품이 꽃을 피워 중기 이슬람 예술의 황금기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이런 이슬람 세계의 황금기는 십자군 왕국들에게는 큰 위기가 되었죠.

14. 카타리파의 등장


▲ 카타리파의 확산 과정, ?는 전래된 시기가 불분명함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의 얘기는 너무 십자군과 중동에 치중한것 같으니, 다시 한번 눈을 서유럽으로 돌려보겠습니다. 12세기에 나타난 카타리(Cathar - 어원은 순수를 뜻하는 그리스어 καθαρὀς, 카타로스입니다)파인데요, 위의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카타리파는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에서 영향을 받아 시작된 것입니다. 카타리파의 원류는 바오로파(Paulician)라는 일종의 이단이었습니다. 바오로파는 예수는 요한과 마리아의 친자식이 맞지만, 이후 야훼에게 선택받음으로서 성자가 되었다는 교리를 주장했는데, 이는 삼위일체를 뿌리부터 부정하는 것으로 종교재판에서 이단 판결을 받고 관련 사제들이 사제 자격을 박탈당하거나 사형당하기도 했습니다.


▲ 보고밀파의 수장 보고밀 사제

하지만 이들의 일부는 살아남아 오늘날의 불가리아 땅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들은 기존의 교리를 정리해 보고밀파(Bogomil)라는 새로운 교단을 세웁니다. 이들은 세상은 야훼가 아닌 사탄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는데, 물질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정신적 세계에 도달함으로써 야훼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고 검소한 삶과 금욕을 강조했습니다. 세상을 사탄이 창조했다는것은 분명히 교회의 철퇴를 맞을 만한 교리였지만, 금욕은 수도사들에게 가장 중요시되는 덕목중 하나였기에 보고밀파 수도사들은 자신의 신앙관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독실한 크리스쳔으로 위장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이러한 금욕적 삶을 중요시하는 교리는 수도사들과 교류를 가지던 주변을 수많은 여행하던 상인, 용병, 음유시인들에 의해 서유럽으로 전파되게 됩니다.

이때 어째서 수도원 내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수도사들이 다른 이들과 교류가 있었는지 궁금하실 분이 많은데, 숙박업이 전문적으로 발달하기 어려운 소도시나 농촌에서는 교회가 여행자들의 일종의 숙소 역할을 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량한 기독교인이 야훼의 성전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를 청하는" 것에 대해 돈을 청구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한 돈을 기부하지 않고 떠나는 여행객에게는 따가운 눈총이 함께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수도원 중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수도원들은 성지로 향하는 기독교 순례자들이 많아지며 점점 규모가 커지게 되고, 일부 수도원들은 독실한 군주들로부터 땅을 기부받아 거의 반 독립 세력을 구축하기도 했는데 이들이 구호기사단이나 성당기사단, 튜튼기사단 같은 카톨릭 군사단체의 기원이 됩니다. 구호기사단은 원래 성지로 향하는 기독교인들을 돌보기 위해 설립된 조직이죠.


▲ 미사를 집전하는 카타리파 사제

각설하고 카타리파의 얘기로 돌아오면, 이들은 보고밀파의 창조론을 받아들이고 물질세계의 사악함을 주장하며 검소하고 금욕적인 삶을 중시했습니다. 이들은 물질계를 악한 것, 정신계를 선한 것으로 봤기에 물질계에서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카타리파는 단순히 육신에 의해 결정된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고 봤고, 물질계 내부에서 얼마나 많은 재화나 명예를 가진지에 의해 결정되는 신분은 기독교도들이 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여성도 완덕자, 그러니까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될 수 있다는 교리를 설파했는데 위의 그림을 보시면 알겠지만 왼쪽의 사제는 여성입니다.

이는 12세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분명히 혁명적인 사상이었고, 수많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놀라운건 이 카타리파가 번성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 제후들이 카타리파를 지지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카톨릭 교회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정치적 해석도 존재하지만, 언제나 변화의 순간에는 일부 선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15. 알비주의 십자군


▲ 카타리파를 비하하는 카톨릭 교회의 그림

하지만 당연히 이런 만민평등의 교리는 중세 봉건제와 카톨릭 교회를 완전히 무시하는 사상이었고, 카톨릭 교회는 제 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선언하게 되며, 이어 교황은 기독교 세계의 심장부인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이단을 "정화"하기 위한 성전을 선포합니다. 이 군사적 원정은 교황으로부터 십자군의 이름을 부여받고 알비주의 십자군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이 원정은 "순수한 카톨릭 교도들을 홀리는 사탄의 사도 카타리파를 정화한다"라는 완벽한 명분 - 물론 당시의 시대상을 기준으로 - 가지고 있었기에 수많은 귀족이 참여를 선언했으며, 원정로에 있는 수많은 카톨릭 군주들도 적극적으로 협조했습니다.


▲ 화형당하는 카타리파 사제

본격적으로 십자군이 다가오자 기존의 카타리파를 옹호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들은 카타리파를 내버리고 순결한 카톨릭교도인양 행동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카타리파 교도들은 홀로 소규모의 무력 저항을 시도했으나 간단히 분쇄되고 맙니다.

문제는 이제 카타리파가 번성한 도시 - 카톨릭의 입장에서는 이단의 요새 - 를 점령하고 난 이후에 불거졌는데, 누가 카타리파 교인이고 누가 카톨릭 교인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카타리파라고 무슨 사탄 숭배자마냥 성경을 불태우거나 악마의 낙인을 이마에 찍고 다니고, 역십자를 집안에 두는 것이 아니었기에 카타리파가 살짝 말조심만 하면 카톨릭교도들 사이에 숨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 단체로 화형당하는 시민들

이에 교황의 특사가 내린 결정은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황당한데, 당시 말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 죽여라. 하느님은 누가 자신의 백성인지 아신다.

이 결과 교회에 의해 "이단의 요새"로 지목되었던 도시들은 일부 귀족들과 성직자, 어린이, 그리고 교회에 뇌물을 바친 부호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화형당하게 됩니다. 칭기즈 칸의 학살을 야만적이라고 가장 강력하게 비난한게 누군가 보면 재밌는 일이죠.

1321년 마지막 완덕자 기욤 베리사스토가 교회에 잡혀 화형당하면서 교회는 존재하는 이단의 목록에서 카타리파를 지우게 되나, 카타리파는 일종의 점조직으로 남아 14세기 후반까지는 존재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16. 성군 보두앵 4세와 암군 기 드 뤼지냥


▲ 보두앵 4세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그림, 어릴적부터 문둥병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눈을 돌려 예루살렘 왕국을 보면, 예루살렘에는 "문둥병 왕" 보두앵 4세가 즉위해 선정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보두앵 4세는 십자군과 예루살렘 왕국의 한계를 일찌감치 이해해 예루살렘 왕국의 생존은 이슬람 세계와의 화해와 포용만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유화책에 의해 예루살렘은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을 환영하는, 기존의 국제도시로서의 성격을 되찾았고, 한동안의 평화로운 공존이 지속됩니다. 영화 <킹덩 오브 헤븐>을 보신 분은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 멋진 연기력으로 등장하는 신마다 미친 존재감을 드러낸 <킹덤 오브 헤븐>의 보두앵 4세

하지만 이 평화는 기 드 뤼지냥, 그러니까 프랑스 출신의 기사가 강경책을 주장하며 이슬람 상단에 대한 습격을 시작하며 깨지게 됩니다. 단순히 기사 하나가 돌발 행동을 저지른 것이었다면 그를 처벌하는 것으로 끝났겠지만 그는 당시 왕위계승권 1위인 보두앵 4세의 여동생, 시빌라의 남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쟁으로 이슬람을 완전히 없애야한다는 예루살렘 내부의 강경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죠.


▲ 기 드 뤼지냥의 초상화. 정말 쓸데 없이 잘생겼네요

기 드 뤼지냥과 그의 심복 레이놀드 드 샤티옹의 이슬람 호송대에 대한 습격은 계속되는데, 이 과정에서 살라딘의 누이가 전투에 휘말려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보두앵 4세와 살라흐 앗 딘 양측이 모두 무력 충돌에 대한 보상을 사재를 털어 지불하면서까지 모른척 모른척 넘어왔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 없을 정도의 파란이 일죠. 특히 살라딘은 레이놀드 드 샤티옹을 잡아 죽일 것을 맹세하기도 합니다. 보두앵 4세가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예루살렘 내부의 무슬림들의 권리를 증진시킴으로써 일단은 마무리되었으나, 어디까지나 미봉책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이 불안한 평화가 지속되었으면 좋았겠지만, 결국 문둥병이 악화된 보두앵 4세가 죽으며 두 종교의 충돌은 더이상 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은 (애초에 결혼을 안했습니다) 보두앵 4세의 여동생 시빌라가 왕위를 계승했고, 이어 시빌라가 남편 기에게 선양하면서 기 드 뤼지냥이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됩니다.

보두앵 4세라는 전쟁을 막던 최후의 장벽이 무너진 이후, 양측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사를 소집하게 됩니다. 당시 이슬람군의 지휘자인 살라흐 앗 딘은 이미 수 개월 전부터 해당 지역에 대한 조사를 완전히 끝낸 상태였고, 사막 지형에서 보급의 중요성을 아버지의 정복에서 배운 그는 강을 따라 느리게 전진하게 됩니다. 반면에 영웅심과 종교적 광신, 왕이라는 오만함에 휩싸인 기 드 뤼지냥은 황금 십자가를 앞세우고 이슬람인들의 군대를 향해 직선으로 진군하게 됩니다.


▲ 하틴 전투에서의 양쪽의 움직임을 나타낸 지도

결국 두 군대는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미 보급 체계를 완성한 이슬람군은 "하틴의 뿔"이라는 별명이 있는 지역에서 진을 치고 여유롭게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루살렘 왕국군은 식수 부족으로 고난을 겪고 있었으며, 이슬람군이 불을 피워 매캐한 연기를 진영으로 보내며 진영이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기 드 뤼지냥이 돌격을 명령하나, 갈릴리 호수의 물에 정신이 팔린 기사들이 보병진에 비해 너무나도 깊이, 일찍 진입하는 바람에 후발 보병대와 분리되어 괴멸당하게 됩니다. 이후 주요 전력을 잃은 예루살렘 왕국군은 밤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패배, 패주하게 되며 이벨린의 발리앙이 이를 수습해 예루살렘으로 퇴각하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기 드 뤼지냥과 레이놀드 드 샤티옹은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는데, 살라딘은 레이놀드를 참수하지만 기 드 뤼지냥은 감금하게 됩니다. 이어서 살라딘은 예루살렘으로 진격, 공성을 개시하게 되는데, 앞서 기독교 세력이 예루살렘을 정복할때도 그랬듯이 이런 거대한 도시에 대한 공성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하틴 전투의 여파로 병력이 크게 줄은 예루살렘군을 상대로도 오랜 시간이 걸릴만한 일이었습니다.


▲ <킹덤 오브 헤븐>의 살라딘. 대단한 싱크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간이 살라딘의 발목을 붙잡게 되는데, 중세 봉건제 하에서 봉신들은 주군의 전쟁에 군사를 파견할 의무가 있지만 일정 기간을 넘어서게 되면 타당한 보상을 요구하거나 군사들을 다시 돌려보낼 권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에 방어전을 지휘하던 발리앙의 이벨린과 살라딘 사이의 협정이 타결, 기독교인들을 무사히 나가게 해주는 조건 하에 도시를 살라딘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이 또한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 어느 정도 각색을 거쳐 묘사되어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한번 보면 좋습니다.

이 결과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교도에게 탈환되게 되고, 제 3차 십자군이 시작되게 됩니다. 제3차 십자군 부터의 내용은 다음 글에서 적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