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리그

개성으로 똘똘 뭉친 게임들이 있다. 이 게임들은 '인디'라 불리며 자신을 쉽게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인디 게임은 독특한 게임을 선호하는 게이머와, 그들을 위한 개발자들만의 축제였다. 마이너 리그다.

매니아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인디 게임들은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됐다. 그 도화선은 '스팀'이었다.

세계 최대의 PC 게임 플랫폼 스팀의 카테고리에 '인디'가 당당히 입성하고난 후, 마이너리그의 입지는 이전과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성장했다. 작품성을 떠나 개성으로만 똘똘 뭉친 게임만 골라 즐기는 유저들이 출현한 동시에, 자금 빵빵한 메이저 제작사의 작품성을 훌쩍 넘어서는 명작 인디게임도 차츰 수면위로 떠올랐다.

인디 게임으로 시작해 명작에 반열에 오른 작품들은 몇 가지 종류로 나뉜다. 깊이는 충분하지만 대중성이라는 족쇄에 걸려 차마 꺼낼 수 없었던 이야기를, 제법 즐길만 한 게임성에 버무려 내놓은 작품도 있었다. '브레이드'나 '림보'가 대표적이겠다. 그런 반면, 스토리? 그런 거 싹 배제하고 게임 플레이 자체가 워낙 신선해 일단 유저들 눈을 모니터에 고정시켜버리는 작품도 있다. 게임을 좋아하는 유저라면 알 만한 '마인크래프트'가 그 예다.

오늘 이야기 할 작품은 캐나다에서 제작한 인디 게임 '아날로그: 어 헤이트 스토리'(이하 아날로그)다. 뭐, 명작이라 말하기엔 조금 어색하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전자, 즉 스토리 부분에 많은 강점을 보이는 작품이다.

[ ▲ 지금껏 보지 못한 이야기, 아날로그: 어 헤이트 스토리 ]




비주얼 노블


아날로그를 설명하려면 우선 장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게임은 인터랙티브 픽션, 소위 말하는 '비주얼 노블'이다. 그렇다. 우리 나이 신체 건강한 남성 게이머라면 한 번 쯤 이름은 들어 보았을(혹은 즐겨 보았을) '동급생'이나 '투하트', '화이트앨범'과 같은 장르다.

예로 든 작품을 보고 유년시절 야릇한 추억을 떠올렸다면, 여가부에서 소송 날아올 수 있으니 얼른 접어두길 바란다. 다행히 아날로그는 그런 18금스런 장면 안 나온다. 이에 더해 게임의 전반적 분위기를 묘사하는 배경조차 없다. 게임 속에서 볼 수 있는 하얀 배경 속에 존재하는 사람은 주인공인 '현애'와 '뮤트', 그리고 당신 뿐이다.

장르가 장르니 만큼 기발한 요소가 들어가는 데에도 어느 정도 제한이 있을 법 하다. 말이 게임이지, 실은 소설을 읽는 것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하지만 아날로그는 대형 개발사라면 일반적으로 가지고 마는 그런 편협된 의식을 우주 저편으로 날려버리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

아날로그가 보유한 무기는 '절대, 지금까지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비교불가침한 독특한 스토리'다.

사실 '비주얼 노블' 장르에서 독특한 스토리는 많다. 하나하나 거론하면 그간 쌓아온 나의 게임경력의 치부가 드러날 수도 있으니 자중하겠다. 스토리 진행이 텍스트로만 이뤄진다는 부분을 최대로 활용,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력이 날개를 펼 수 있는 장르라는 게 핵심이라는 사실만 기억하자. 하지만 그런 부분 다 감안해도 아날로그의 스토리는 독특하다. 일단 소재가 강하다.

[ ▲ 어흠, 어딜 여자가! ]



뭐지, 이 마약같은 몰입도는?


이전 소개 기사에도 언급된 바 있지만, 아날로그의 스토리 소재는 '남존여비'다. 남자는 존엄하고 여자는 비천하다는, 요즘 세상에 함부로 꺼내면 안되는 그 말 맞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이 게임의 재미있는 부분을 두 가지 찾을 수 있다.

1. 구세대 사상 '남존여비'를 소재로 하지만, 게임 배경은 먼 미래의 난파된 우주선이라는 것.
2. 이 게임의 제작자는 캐나다인이며 여성이다.


아날로그의 스토리는 우주에서 표류하고 있는 우주선에서 시작된다. 플레이어는 해당 우주선에 얽힌 스토리를 밝혀내기 위해 파견된 것. 하지만 우주와 관련한 어떠한 풍경도 아날로그에선 찾아볼 수 없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검은 우주와 대비되는 하얀 톤 배경이 당신을 반긴다. 게다가 난파에서 떠오르는 거칠고 습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티끌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함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 때문에 이야기 전달에 설득력이 없을까 걱정했다면 안심해도 좋다. 아날로그 속에는 플레이어를 스토리 상 주인공에 일체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으니까. 이러한 요소들은 서로 절묘하게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일으킴은 물론, 벙찐 게임의 배경까지도 상상력을 그려낼 도화지로 보이게 만드는 힘을 갖췄다.

아날로그는 플레이어와 동화되는 특정 아바타가 없다. 게임 속 플레이어는 옆 집 여고생과 어렸을 적부터 알고 자란 소꿉친구도 아니고, 야심한 밤에 이상한 짓을 일삼는 경비아저씨도 아니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에서도 본인 자신이다. 게임을 시작하면 예쁘장한 Ai 현애가 이름을 묻는 것 정도는 여타 비주얼 노블에서도 볼 법한 장면이지만, 그녀과의 대화를 위해서 컴퓨터 로그에 접속해야 한다는 것은 꽤 신선한 부분이다. MS-DOS를 연상시키는 오버라이드 터미널(제한모드)은 이러한 감정이입을 위한 훌륭한 장치로 제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 ▲ 자신의 반복 답변을 플레이어에게 이해시키려는 현애, '오빤 다 이해해' ]

[ ▲ 컴퓨터를 해킹해 무언가를 알아내는 맛이 있다 ]

[ ▲ 오버라이드 터미널에 특정 메세지를 입력해 현애의 옷도 갈아입히는 것도 가능! 좋은 센스다... ]


또한,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인물은 현애와 뮤트 단 둘 뿐이지만, 실제 게임을 즐기다보면, 훨씬 많은 인물 틈에 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플레이어가 우주선에 접속하기 전에 그곳에서 생활했던 두 가문의 이야기가 속속 드러나기 때문. 이 두 가문의 이야기를 파헤치다 보면, 현재 우주선이 왜 우주 쓰레기가 되어 망망대해를 떠돌아 다니는 지를 알 수 있거니와 얽히고 설킨 두 Ai의 진면목도 확인 가능하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게임속에서 현애는 플레이어를 선생님이라 부르는데, 이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꽤 신선하다. 흔히 듣던 'OO짱~'과는 다르다. 진중하면서도 은근한 맛이 있달까.

[ ▲ 그래그래, 앞으로는 이 선생님만 믿으면 돼 ]



게임이기에 더 와닿는 男尊女卑


아날로그를 플레이하며 가장 튀는 부분은 누가 뭐래도 스토리다. 듣기만 해도 교과서적인, 다소 구식으로 느껴지는 단어지만 막상 게임으로써 이토록 진지하게 접근한 것은 아날로그가 최초가 아닐까. 여기에 한 번 더 놀랄만한 사실은, 이 게임의 제작자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사실.

아날로그는 엄밀히 말하면 1인 개발 게임이다. 사운드와 일러스트를 담당한 사람은 따로 있지만, 비주얼 노블의 심장을 담당하는 스토리와 구성은 '크리스틴 러브'라는 22세의 캐나다 여성이 맡았다. 더 놀라고 싶은 사람에게만 알려주자면, 그녀는 레즈비언이다.

그녀는 올해 2월 경, 인디 게임 전문 블로거 PIG-MIN씨와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그녀는 예전부터 한국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조선 왕조에 뿌리내린 남성우월주의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고.
여성 인권 존중여부는 개고기를 먹냐 안먹느냐로 불거지는 문화사대주의와는 뿌리부터 다르다. 당연하지만, 여성도 사람이기에 어느 한 쪽이 우월하다고 인식하는 논리를 문화적 특성으로 치부할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크리스틴 러브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권리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수준이라는 것에 한 번 놀랐고, 당시 여성들이 남긴 글 자체도 적지만 그나마 보전되어 내려온 것은 손에 꼽을 수준이라는 것에 더욱 주목했다. 호기심 많은 캐나다 작가는 당시 여성들이 느꼈던 감정을 일기로 적었다면 그 내용이 어땠을까 궁금해했고, 이는 곧 게임 속 이야기의 주된 흐름으로 적용됐다. 아날로그는 남존여비가 당연시되고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여인네들의 일기와 편지로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 ▲ 갑갑한 스토리에 몰입도가 더해져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

[ ▲ 당시 우주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족보까지 제공 ]


눈에 띄는 부분은 스토리의 구성이다. 얘기만 듣고 보면, 그저 우울우울 열매를 먹은 신파극 하나 흘러가겠다고 생각할 법 하다. 하지만 아날로그의 스토리 서술 방식은 미스테리에 가까우며, 과장 좀 보태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피가 튀고 살이 튀고 혼령도 튀어나와 플레이어 심장을 쫄깃하게 만든다는 소리는 아니다. 아날로그의 무거우면서도 몰입도 높은 스토리가 최적화된 UI와 어우러져 어떤 '분위기'를 풍기는데, 이게 참 먹먹하게 두렵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유저를 위해 쉽게 설명하자면, 논리라고는 통하지 않는 앞뒤 꽉 막힌 세상 한 가운데로 플레이어가 내던져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하면 되겠다.



어려운 주제를 술술 풀어낸 모범적인 한글화


이 게임이 한국에서 주목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일차적으로 한국적 소재를 다룬 것이 크겠다. 하지만 그 뜨듯미지근한 이야기를 알차게 풀어내기 위해서는 꽤나 수준높은 한글화가 따라야 한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다행히 아날로그의 한글화는 최근 즐겨 본 게임 중에서도 최고수준이다. 팬들의 사랑 속에 꽃 핀 유저 한글화의 노고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날로그의 한글화는 그 수준을 훨씬 상회한다. 이 게임은 스팀에 출시되자마자 격이 다른 한글화 퀄리티로 각종 커뮤니티에서 화제를 모았는데, 그 배경에는 수많은 책을 번역한 프로 번역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번역가는 그저 텍스트를 묵묵히 한글로 옮겨적은 것이 아닌, 게임을 직접 즐겨보고 심도있는 고찰을 거쳤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발생할 법한 사적 생각 포함 여부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된다. 원작자인 크리스틴 러브의 이야기를 최대한 알기 쉽게 풀어내는 선에서 깔끔하게 끊었다. 텍스트가 많은 게임이니만큼 중요한 부분이 번역인데, 아날로그의 번역 수준은 한국에서 출시한 게임 이상으로 깊이를 보여줬다.

[ ▲ 또다른 Ai인 뮤트는 이 게임의 한글화 수준을 제대로 보여준다 ]

[ ▲ 저 찰진 제목... ]



비주얼노블이 보여준 가능성


솔직하게 말해보겠다. 비주얼노블은 텍스트 기반의 게임이기에 스토리에서 강점을 보이는 작품이 다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못지않은 강렬한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일부 매니아들의 전유물이 됐다. 툭 까놓고 말해 어디 나서서 자랑스럽게 '나 이거 즐겨요'라고 말할 만한 장르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날로그: 어 헤이트 스토리'를 즐겨본 후 이러한 생각에 약간이지만 금이 갔다. 인상깊은 스토리가 게임의 주체가 될 때, 그 게임을 보는 시각이 어느 정도 품질까지 끌어올려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케이스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게임의 원작자 크리스틴 러브와 번역가 김지원 씨의 한 마디를 기록한다.



"제 목표는 그 시절이나 국가를 비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절의 조선에서 세상이 좀 더 공평하고 평등하게 될 수 있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에요. '그 시절의 그런 상황이 다시 벌어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죠. 이 질문은 저를 무섭게 만들었고, 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날로그'의 줄거리에서 중요한 갈등은, 현대 한국의 가치를 갖고 있는 창백한 신부가 옛날 가치들과 충돌하고 폭발하는 내용이에요. 서양에 있는 누구라도 생각해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북미에서도 사람들에게서 이런 권리를 가져가려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특히 게이나 레즈비언에게서 말이죠) 그런 사람들은 '고전적인 결혼'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과거에 대한 향수 이미지를 가져오기 위해서요. 저도 '고전적인 결혼'이라는 용어를 역시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그 용어를 앞으로도 열망할만한 요소로 삼을 게 아니라는 것과, 그 용어는 과거의 여성들을 억압하는데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말이죠"


- 제작자, 크리스틴 러브 -

"저는 이 게임의 배경이 조선인 것은 단지 서구권에서 아직 한국 역사가 덜 알려졌기 때문에 선택된 거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것은 지난 시대에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여자들이 '정말로' 이런 대우를 받았다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이 게임에서 주장하는 게 '여권신장'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에요. 이 게임에서 정말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인정에 가깝다고 생각하거든요. 다시 말해 '남녀'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는 존귀하고 누군가는 비천하게 여겨지는 세상을 비판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게임에 나오는 사건들이 극단적이기는 해도 비현실적이지는 않기도 하고요. 인종차별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죠. 이보다 더 잔혹한 일이 비일비재했으니까요.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이 이걸 지나치게 '성'차별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보다는 '차별'에 관한 이야기라고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번역자, 김지원 -





[ ▲ 그녀와의 첫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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