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얼마간 총독부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로자레일은 왕국 법에 따라 재판을 받았다.
죄목은 귀족사칭죄. 그의 할아버지 때까지만 하더라도 로자레일 가문은 왕실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귀족가문이었다. 그러나 악마기사 레위스 가르지라 드 로스베인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렐린 왕국은 악마기사에 쫒겨
내려온 제국 귀족이 세운 남부의 소국이었다. 작금에는 주변국 보다야 우위에 서있지만,
과거 200년 전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모든것이 부족했다. 때문에 자렐린 왕국의
귀족들은 악마기사를 극도로 혐오했다. 당대에는 그가 두려워 숨죽였지만, 100년 전부터는 
왕국 축제에 꼭 빠지지 않는 행사가 악마기사 화형식이었다.
일단 소문이 퍼지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다. 왕실 귀족원에서는 빠르게 논의를 끝냈다.
악마기사의 후예 임이 사실이라면 응당 일족을 멸해야 하겠지만, 사실을 확인할 수 없을 뿐더러
로자레일 가문이 세운 공들을 상계하여, 파작에 그치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로자레일 가문은 평민이 되었다. 
왕국 법에 따르면 아무리 전대에 귀족이었더라도 평민은 귀족을 사칭해서는 안된다. 
퀘드리아는 2개월전 비첼을 만나러 갔을 때 귀족의 예로 그녀를 대했다. 귀족파티에 
그녀의 파트너로 참석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군학교를 졸업하여 임관하면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된다. 겨우 3달여를 남겨놓고 그 일이 문제가 될 줄이야!
퀘드리아 데 로자레일을 구하기 위해 가르젠 가문과 그의 동기들이 발벋고 나섰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악마기사의 전례도 있었던 가문인 만큼 사형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온갖 곳에 손을 벌려 마지막으로 로자레일의 처우를 논하는 총독부 회의가 오늘 오전에 있었다.
로자레일은 총독부 감옥에서 가르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총독부 지하감옥.
이 곳을 탈옥 한 이는 왕국 역사상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총독부 지하 공동에서도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 이 곳은 지하공동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었다. 입구와 먼 곳일수록 
어둠과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로 인하여 몇 일만 갇혀있더라도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기 일 
수였다. 로자레일은 그래도 다행히 입구 근처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정신이 
멀쩡했다. 오히려 여느 때보다도 더 냉철하게 깨어 있었다. 로자레일은 보름동안 갇혀 있으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할어버지 대의 그 일과 자신이 지금 갇혀 있어야하는 이유가
모두 음모일지도 모른다다고... 뚜력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몰락한 귀족에게 귀족사칭으로 사형을 내린적은 몇 번 없다. 그 몇 번도 모두 
정쟁에 휘말려 파작된 당대 귀족들이었다. 로자레일은 자신의 생각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그 때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로자레일은 쇠창살로 막혀진 입구 쪽으로
엉금 엉금 기어갔다. 발목을 구속하고있는 쇳덩어리가 차갑게 옥죄었다.
철컹철컹, 로자레일의 걸음걸이에 쇠사슬이 춤을 춘다.  
어느새 로자라엘의 감옥 앞에 도착한 가르젠 남작이 그런 로자레일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남작님..."

가르젠 남작이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는다. 아예 눈마저 감아버린다. 그 모습을 보고있던 
로자레일은 크게 절망한다. 무너지듯 주저앉아 쇠창살에 기대 흐느낀다. 가르젠 남작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허허, 이것 참! 초상났습니까? 아직 안죽었어습니다. 사형안된다니까요!"

가르젠 남작의 옆에 서있던 중년 남성의 말에 로자레일이 눈을 부릅뜬다. 로자레일의 눈에서 
안광이 폭사하는 듯 하다.

"로자레일군... 간신히 사형만은 면했네, 하지만 자네가 평민신분을 박탈당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네. 미안하네. 우리 인연이 이것으로 끝인가 보네."
"하하, 그 유명한 로자레일가의 마지막 자손이시군요! 이렇게 직접 뵙게 될줄은 몰랐습니다. 
주인이 결정될 때까지 제가 당신을 맡도록 되었습죠. 여보게, 간수! 로자레일 씨를 풀어주게!"

그는 노예상인 푸마르토였다. 딱히 노예가 아니더라도 왕국에서는 알아주는 상인이었다. 특히 
노예상품에 대해서는 드물게 왕국에서 허가받은 노예상인이었다. 노예 중에서는 전쟁노예가
그의 주력 상품이었다. 해군에 잡힌 해적이나 타국의 패잔병, 귀족의 명예를 더럽힌 사병들이
그의 먹잇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로자레일은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어릴 뿐만 아니라 
해군학교를 정식으로 마칠 수 있을 정도의 인재였다. 또한 비록 몰락했다하나 귀족출신이라 
교양도 풍부했다. 

"오랜만에 정말 만족스럽군요. 고객들께서도 매우 흡족해 하시겠습니다. 하하핫!"
"그를 잘 부탁하네."
"걱정마십시요. 비록 천한 상인이라고 하나, 예법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끌려나가던 로자레일이 고개를 돌려 가르젠 남작을 보았다. 만족스럽게 웃고있는 푸마르토에게 
돈주머니를 건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 한심했다. 무기력한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 가 없었다. 절망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폭력이었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멈춰선 
그에게 간수가 주먹을 날렸다. 

"빨리 가지 못해!"

그쳤던 눈물이 다시 샘솟았다. 양팔, 양다리를 구속하고 있는 쇳덩어리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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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마르토의 사무소에서 깨끗히 씻겨지고 따뜻하게 먹은 로자레일은 그나마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깔끔한 신색과 다르게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입구 근처였다고는 하나
지하 감옥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던 그였다. 그러나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이 이 상황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말 잘듣는 순한 양이었다. 푸마르토의 노예관리인이 시키는 일도 제깍제깍
했다. 먹으라면 먹고 씻으라면 씻고. 로자레일은 삶을 더이상 무의미한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에겐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용기는 없었다. 귀족 퀘드리아 데 로자레일은 소심할지라도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 용감한 바다 사나이였지만, 노예 퀘드리아는 그저 소심한 노예일 
뿐이었다. 왕실 귀족원은 그에게서 평민 지위를 박탈하면서 자존심과 자부심 용기 등도 박탈해
버렸다.

벌거 벚겨진 채로 단상에 올라가 값이 매겨졌다.역시 로자레일은 상등품 노예였다. 군살 하나
없는 매끈한 몸매에 서글서글한 인상. 18살이란 나이. 단련된 검술과 항해능력 등등. 대양을 
오가는 선단이나, 남부 블레야 제도의 귀족이라면 군침을 흘릴 최상품이었다. 딱히 이들이 
아니더라도 로자레일은 누가 써도 쓸모가 많을 것이다.
10골드, 15골드, 30골드, 50골드. 단숨에 50골드를 뛰어넘었다. 
푸마르토 노예교역소의 역대 최고 기록은 374골드 였다. 미녀나 이종족, 몬스터 노예를 취급하지
아니하고 오직 전쟁노예만을 취급하는 푸마르토 노예교역소였다. 일반적으로 신체건강한 남성
노예가 10골드 내외였다. 절색의 미녀라도 100골드를 넘지 않았다. 50골드를 넘는 남자노예는 
유명한 해적이나 뛰어난 군인들이었다. 퀘드리아는 훌륭한 군인은 아니지만 로자레일 가문이라는
유명세와 18세라는 어린 나이 덕분에 최상품을 뛰어넘는 노예로 취급되었다. 50골드를 뛰어넘고도
여기 저기서 그치지 않던 외침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방금 전에 제시된 최고액이 54골드였다,
푸마르토 노예교역소 최고액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남자 노예에게는 너무 과분한 금액이었다.
단 한명만을 제외한 모든 고객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유일한 한 명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있는 노귀족이었다. 단상위 경매 진행인도 숨을 죽였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진행인이
입을 열었다.

"오, 오십사 골드가  현재 최고액입니다. 다른 분 안계십니까? 앞으로 열을 세겠습니다. 자,
하나 , 둘, 셋..."

"60골드!"

 경매장의 모든 이들이 놀라 소리가난 곳을 바라보았다. 중년의 상인이었다. 대륙 서부 
키젤 왕국의 상인이었다. 대단한 거상은 아니지만 대륙 서부와 남부 일대를 항해하며 부를 
쌓은 무역상이었다.많은 이들이 그가 낙찰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방금 전과 마친가지로
경매 진행인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열을 셀 동안 60골드보다 높은 금액을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로자레일은 키젤 왕국의 무역상에게 낙찰되었다.
키젤왕국 무역상 베체코의 배를 타고 자렐린 왕국령 디온 항구를 빠져나올 때도 로자레일은
노예 로자레일이었다. 바다에서 열흘 밤낮이 지나고 배가 키젤왕국에 도착할 때 까지 로자레일은
배정받은 선실에서 먹고 자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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