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선은 난잡했다. 곳곳에 검은 탄흔이 박혀 있었고 돛대는 깊게 찢어졌다. 붉은 피는 그런 분위기를 더 음산하게 만들었다.
 제임스는 칼에 묻은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길래 진작 도망갈 것이지. 끝까지 싸울 건 또 뭐야. 바이킹의 후손이라는 건가?”
 스무 명도 채 안 되던 해적들은 삽시간에 전멸했다. 사납기로 유명한 노르만 해적이었지만 발할라의 선원들은 그런 해적들과 전투경험을 충분히 쌓은 자들이었다. 선원의 피해는 부상자 세 명이 전부였고, 그나마 경상에 그쳤다. 하지만 제임스에게는 한 명도 남기지 않은 게 걸릴 뿐이었다. 항복하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남은 해적들은 바다로 뛰어내렸다. 당연히 파도에 휩쓸려 죽었을 것이다.

 “할 거면 스웨덴 놈들처럼 제대로 하든가. 이런 쪼그만 배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건지. 전원 요르문간드로 돌아가라! 상선을 지원해야 한다!”
 제임스는 투덜거리는 걸 멈추고 명령을 내렸다. 포격을 가하거나 불을 질러 배를 침몰시켜야겠지만 중요한 건 상선을 먼저 구하는 거였다. 하지만 부관이 제임스에게 이상한 보고를 했다.
 “옆의 해적선에서도 전투가 다 끝난 것 같습니다. 해적들이 j의 갑판에 뻗어 있어요.”
 “그래? 상선치곤 제법인데. 상선의 피해는 얼마나 되지?”
 “그게... 한 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
 “뭐?”

 제임스는 놀라며 해적선을 보았다. 몇 안 남은 해적들 사이로 핏줄기가 마구 튀었다. 그들 사이에서 보이는 건 붉게 물든 머리칼 뿐이었다.
 “선원들 중 전사한 사람이 없단 말이야? 저렇게 혼자 있는데?”
 “그게... 처음부터 뛰어내린 사람이 한 명 뿐인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돼...”
 요르문간드에 다시 올라타면서 제임스는 그 말을 연신 중얼거렸다.


 옆에서 몇 발의 총성이 들렸다. 에이레네의 앞에 서 있던 해적이 스르르 쓰러졌고, 나머지는 뒤를 돌아보더니 곧바로 뱃전을 향해 달려갔다. 풍덩 소리가 작게 퍼졌다.
 에이레네의 옷은 물론 얼굴과 머리에 온통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기분 나쁜 듯 그녀는 물을 찾았지만 보이는 건 갑판에 튄 피 뿐이었다.
 해적선 한 쪽에서 군함 한 대가 접현을 했다. 그리고 선원 몇이 뛰어내렸다. 에이레네는 다시 긴장하며 레이피어를 뽑아들었다.

 화승총을 어깨에 멘 사내가 앞장서서 다가왔다. 그가 쥐고 있는 검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에이레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습니... 큭!”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검날이 부딪쳤다. 차가운 불꽃이 튀면서 검 하나가 휭 소리를 내며 저 멀리 날아갔다. 레이피어가 다시 자세를 잡고 남자의 목을 향할 때까지 남자는 아무 대응도 못 하고 얼빵하게 서 있었다.
 “뭐, 뭡니까!”
 “잉글랜드가 언제부터 여기까지 사략질을 하게 됐지?”
 그녀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붉게 물든 피부 사이로 검은 두 개의 눈동자가 살의를 가득 품고 있었다.
 “자잠깐만요! 우우린 해적이 아닙니다! 일개 상단이예요!”
 “그걸 어떻게 믿지?”
 제임스가 갑자기 앞으로 다가왔다. 검날에서 떨어지는 피가 가슴에 닿을 정도까지 접근한 제임스는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발트해까지 왔으면서 상단 발할라도 못 들어봤단 말입니까? 이런...”
 “선장님! 괜찮으십니까?”
 아까의 그 칼부림을 본 선원들이 뛰어왔다. 그들은 제임스의 가슴 바로 앞에 있는 레이피어에 놀라 주춤거렸다. 제임스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괜찮아. 이 아가씨가 우리를 해적으로 오인해서 말이지.”
 “네? 하긴, 선장님 얼굴을 보면 누구라도 그러겠습니다만.”
 “언더우드!”
 “헤헷, 죄송합니다.”
 제임스가 아까는 볼 수 없던 살의를 띄었다. 언더우드라는 선원은 뒤로 마구 도망쳤다. 그 때, 제임스의 뒤에서 작은 웃음이 들렸다.

 “어라?”
 차갑기만 하던 에이레네의 입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제임스가 다가갔다.
 “오해가 풀린 거죠? 전 상단 발할라의 제임스 노먼입니다. 아아니 바이킹 아니예요! 엄연한 잉글랜드인이라구요! 호드라고 불러주세요.”
 “호드?”
 “북유럽 신화의 신이죠... 바이킹 아니거든요? 칼 좀 내려요. 바이킹 애들 하나만 잡아도 우리 이름을 알건데...”
 노먼이라는 이름과 북유럽 신화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올라가던 레이피어가 겨우 내려갔다. 

 “난 에이레네 아우도시우스. 네덜란드 상인이예요. 상단의 이름은 올림포스. 오해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나저나... 대단하시군요. 혼자서 이 많은 놈들을 상대하시다니...”
 칭찬이라고 한 말이겠지만 에이레네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 역시 죄책감이 드는 듯 했다.
 “태생이 아테네라서 검에는 자신이 있거든요.”
 제임스는 그제서야 그녀가 게르만인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 했다. 잠시 멋쩍은 침묵이 오가고, 멀리서 선원의 고함이 들렸다.
 “기함이 접근합니다!”
 에이레네와 제임스가 모두 그 쪽을 돌아보았다. 발할라의 기함 뇨르트가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