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명 다리야바우시. 흔히 다리우스 대왕이라고 한다. 제사(祭司) 가우마타는 선왕인 캄비세스 2세가 동생 바르디아(스메르디스)를 죽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르디아라고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선왕은 이집트로 원정을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죽었으므로 그와 동행했던 다리우스가 귀국하여 여러 제후와 함께 제사 가우마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가우마타를 정통적인 계승자라고 오인한 제후들은 다리우스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2년간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이를 평정하여 제국의 기초를 확립한 뒤, 정벌의 상세한 기록을 비시툰의 산길 절벽에 새기게 하여 왕위계승에 대한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아우렐리아누스황제의 투구
아우렐리아누스 [Aurelianus, Lucius Domitius, 215?~275]
로마의 황제(재위 270∼275).
국적
로마
활동분야
정치
병졸에서 입신출세하여 군대의 추대를 받고 황제에 즉위한 군인황제이다. 전술·군제(軍制)를 개혁하여 외적에 대비하였고, 반달족·다키아인 등을 도나우강 지대에서 추방하였으며, 북방 알라만족을 토벌하고, 동방에서는 팔미라제국을 격파하여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또 만족침입(蠻族侵入)에 대비하여 로마시를 주위 19km의 성벽으로 방비하였는데 그 성벽은 현재도 남아 있다(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또한 274년 동방의 태양신을 국가신으로 숭배하기도 하였다. 275년 페르시아 원정 중에 암살되었다.
스키피오의 투구
스키피오 [Scipio (Africanus Major), Publius Cornelius, BC236~BC184]
고대 로마의 장군 ·정치가.
별칭
대(大)아프리카누스
국적
고대 로마
활동분야
정치, 군사
‘대(大)아프리카누스’라고 불린다. 명문 스키피오가(家) 출신으로 제2차 포에니전쟁 초기의 장군 P.C.스키피오의 아들이다. 제2차 포에니전쟁에는 아버지와 함께 이탈리아에 참전한 후, BC 210년 사인(私人)인데도 집정관 대행의 대권이 부여되어 스페인의 카르타고군(軍)을 격파하였는데, 그 때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였다. BC 205년 집정관으로서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공격을 결의하여 스스로 시칠리아섬으로 건너갔으며, BC 204년 아프리카에 군대를 진격시켰다. BC 202년 아프리카의 자마에서 한니발을 무찌르고 제2차 포에니전쟁을 종결시켜 ‘아프리카누스’의 칭호을 얻었다. 그 후 제2차 마케도니아전쟁(BC 200~BC 197)이 시작되자 호구총감(戶口總監), 원로원 수석으로서 친(親)헬레니즘정책을 취하며 로마 정계를 지배하였다. BC 190년 동생과 함께 군을 지휘, 소아시아에서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와 대접전을 벌였으나, 귀국 후 보수파인 대(大)카토 일파의 반격을 받아 실의 속에서 죽었다.
투탕카멘 가면
투탕카멘 [Tutankhamen, BC 1370~BC 1352?]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재위 BC 1361∼BC 1352).
별칭
투트 앙크 아멘
국적
이집트
활동분야
정치
정확하게는 투트 앙크 아멘이라 한다. 제10대 왕 이크나톤(아멘헤테프 4세)의 아우 또는 조카라고도 하는데, 출생에 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제11대 세멘크카라는 만년에 이크나톤과 공동통치를 펼쳤으나 재위 3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9세에 즉위하였다. 왕비는 이크나톤과 네페르티티의 제3왕녀인 안케센아멘이다.
왕은 처음에는 아텐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텐으로 칭하였으나, 즉위 4년째 아멘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멘으로 개칭하고 수도를 아마르나에서 테베로 옮겼다. 연소한 투탕카멘이 당시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신 아이와 노장 할렘헤브(모두 후에 국왕)의 보좌에 힘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8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왕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고 있으며, 업적에 관한 기록도 남겨지지 않아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왕묘가 테베의 서쪽 교외인 '왕가의 계곡'에 조영된 탓으로 이 묘가 발굴되면서부터 유명해졌다.
트로이 전쟁 때는 그리스군의 총지휘관으로서 출진하였는데, 여신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사 출항(出港)할 수 없게 되자 여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하여 자기의 딸 이피게니아를 산 제물로 바쳤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서는 그가 총지휘관이라고는 하지만 중심적 인물은 못 되고 아킬레우스보다 못한 인물로 다루어지고 있다.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의 왕녀 카산드라를 데리고 귀국하였으나, 그가 집을 비운 동안 밀통(密通)하고 있던 아내와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에게 카산드라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자 그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살해함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 이야기는 비극작품의 좋은 소재가 되어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 등 많은 비극작품을 낳게 하였다.
아그리피나의 머리장식
아그리피나 [Agrippina Minor, Julia, 15~59]
로마 네로황제의 어머니이며 대(大)아그리피나의 장녀.
별칭
소아그리피나
국적
로마
통칭 소(小)아그리피나라고 부른다. 28년 아헤노바르부스와 결혼하였다. 49년 숙부인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재혼, 54년 남편을 독살하고 네로를 제위(帝位)에 오르게 하였으나 네로의 명령을 받은 노예에게 피살되었다.
오토 1세의 왕관
오토 1세 [Otto I, 912.11.23~973.5.7]
독일 국왕(재위 936∼973), 신성로마제국 황제(재위 962∼973).
별칭
오토대제(大帝)
국적
독일, 신성로마제국
활동분야
정치
오토대제(大帝)라고도 불린다. 부왕 하인리히 1세의 유업을 이어받아 독일의 국가통일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처음에 부족 대공들의 분립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왕족을 대공과 왕령백(王領伯)으로 임명했으나, 그들이 왕의 아들 루돌프를 선두로 부족 세력과 손을 잡고 반항하였으므로(루돌프의 난, 953∼954), 그 정책은 좌절되었다. 그러자 초부족적인 교회 세력과의 동맹을 시도, 주교 ·대수도원장을 왕권의 정치적 지주로 삼고, 그 교회령을 물질적 토대로 하는 방침(제국교회정책)을 확립하였다. 반왕권파(反王權派)의 배후에는 서프랑크의 루이 4세가 있었는데, 오토는 3차의 원정에 이은 비제의 화약(940)과, 교황 사절의 출석을 얻어서 연 잉게르하임 주교구 회의(948)에 의하여, 이 방면에서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동부에서도 잇딴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작센 동방에 몇 개의 변경구를 설치하여 수비를 굳히는 한편, 955년에 아우구스부르크 근교인 레히펠트전투에서 마자르인(헝가리인)으로부터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내란을 극복한 직후에 거의 독일 전역에서 동원된 통일 군대의 승리로서, 왕권의 위신을 높이어 같은 시대의 사가인 비두킨트는 재빨리 그에게 ‘황제’의 칭호를 바쳤다. 이보다 앞서 951년, 오토는 제1차 이탈리아 원정을 시도하여, 이탈리아왕 로타르의 비아델하이트를 비(妃)로 삼고, 이탈리아의 왕위를 얻은 뒤, 베렌가르 2세를 토벌, 이 기회에 황제 대관의 일로 교황 아가페투스 2세의 의향을 타진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그러나 여러 부족 대공에 대한 맹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또한 독일 교회에 대한 지배를 굳힐 필요에서, 교황 요한 12세의 파병 요청에 따라 다시 이탈리아로 출정, 962년에 교황으로부터 숙원의 제관(帝冠)을 받았다(신성로마제국의 창시). 그것은 독일 왕권을 비잔틴 황제와 같은 격인 보편적 ·초독일적인 황제권으로 높이는 반면, 그 뒤의 역대 황제가 이탈리아 정책에 깊이 개입하는 화근의 씨앗을 뿌려, 최고 지배권을 둘러싼 교황권과의 운명적인 대결의 길을 열어 놓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교황의 윤허를 얻어 마그데부르크대주교구를 설치하고(962), 동방 발전의 기초를 닦았고, 아들 오토 2세의 비로 비잔틴 황녀 테오파노를 맞아, 수교와 황제권의 상호 승인을 꾀하는(972) 등의 포석은 당시의 여러 조건하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의 교회 정책이나 이탈리아 ·비잔틴 관계를 계기로 문학 ·예술의 융성을 가져왔으며, 흔히 이를 오토의 문예부흥이라고 한다.
카를대제의 왕관
샤를마뉴 [Charlemagne, 742.4.2~814.1.28]
카롤링거왕조의 제2대 프랑크 국왕(재위 768~814).
별칭
카를대제, 카롤루스대제
활동분야
정치
카를대제 또는 카롤루스대제라고도 한다. 부왕 피핀이 죽은 뒤 동생 카를만과 왕국을 공동통치하였으나, 771년에는 동생 역시 죽어 단일통치자가 되었다. 772년부터 804년까지 몇 차례의 원정을 감행하여 작센족의 정복, 북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 병탄, 이베리아반도에서의 사라센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에스파냐 국경에 변경령(邊境領)의 설치, 바이에른족 토벌, 그 부족의 태공(太公) 타시로 폐위, 바이에른과 케른텐 병합, 아바르족 ·벤드족 정복의 업적을 이루고,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는 이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하여 각 부족이 시행하던 부족법전을 성문화(成文化)하여 각 부족의 독립성을 인정하였고, 아울러 중앙에서 그라프 ·순찰사 등의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적 지배를 가능하도록 하였다. 지방봉건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세 여러 봉건국가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 실력을 배경으로 로마교황권과 결탁하여 그리스도교의 수호자 역할을 하여 서유럽의 종교적인 통일을 이룩하였다. 800년에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로서 대관(戴冠)되었는데, 이 사건은 서유럽이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영향에서 명실공히 완전히 독립한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로마 고전문화의 부활을 장려하여 아헨의 궁정을 중심으로 알쿠인, 파울루스 디아코누스 등 성직자들이 활약하여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룩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전문화 ·그리스도교 ·게르만 민족정신의 3요소로 이루어지는 유럽 문화가 샤를마뉴 시대에 이르러 개화(開花)되어, 유럽의 역사적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전기(傳記)는 측근이었던 아인하르트의 《카를대제전》 등 몇 편이 있고, 점차적으로 이상화 ·우상화되어 ‘샤를마뉴 전설’이라고 불리는 사상적 ·문학적 전승을 이루게 되었고, 중세 무훈시(武勳詩)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람세스 2세 [Ramses II, ?~?]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제3대 왕(재위 BC 1279~BC 1213).
별칭
라메세스(Ramesses) 2세
국적
이집트
활동분야
정치
라메세스(Ramesses) 2세라고도 한다. 아버지 세티 1세 이후의 팔레스타인 정복을 계속하였으며, 치세 5년경에는 카데시에서 히타이트왕 무와타리시와 크게 싸웠으나 결전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후 16년이라는 긴 세월을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으로 시달리다가 BC 1258년 두 나라 사이에 화약이 성립되어 이집트는 시리아를 포기하고 말았다.
평온을 유지하는 가운데 BC 1245년에는 히타이트의 왕녀가 왕에게 시집왔다. 그 무렵 서(西)델타에서 리비아인과도 싸웠다. 왕은 여생을 각지의 신전 건조에 바치고, 델타 북동부에 왕도 페르라메스를 만들었으며, 아비도스 ·테베 ·누비아의 아부심벨 등에 신전 ·장례전(葬禮殿) ·신문(神門) 등을 세웠다. 왕의 시대에 이집트왕조의 융성기는 끝나고, 제20왕조의 왕들은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왕은 대표적인 오리엔트적 전제군주로, 자신의 조상(彫像)을 각지에 남기어 자신을 과시하였다. 적어도 아들 52명을 포함 100명이 넘는 자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5호고분은 이 왕의 가족묘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