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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9 16:13
조회: 11,624
추천: 22
성깔남 특집, 올드 트래포드의 왕 에릭칸토나■ 올드 트래포드의 왕, 에릭 칸토나(Eric Cantona) 제가 앞으로 포스팅할 선수들은 한 성깔하는 성깔남들 특집입니다. 맨유의 로이 킨 하면 아스널의 비에이라와
툭하면 다툴 정도로 다혈질이었지만 천하의 로이 킨도 에릭 칸토나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줄 정도로 칸토나의
성질은 유명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퍼거슨(
그럼 앙리 이전에 '영국인이 사랑한 프랑스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맨유의 레전드, 에릭 칸토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칸토나는 SO 레 카이롤을 거쳐 '83년에 프랑스 AJ 오세르에서 데뷔를 합니다. 그는 놀라운 재능으로 17세의
나이로 팀의 주전이 되어 준수한 활약을 합니다. 하지만 지랄 맞은 성격은 어디가지 않는지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습니다. 당시 팀의 주장이 자신의 가방을 대기실에 놓고와서 가져다 달라는 사소한 부탁을 했었는데, "니가 뭔데 나한테
명령질이야!"라는 말을 날리며 주장의 얼굴을 날려버린 사건으로도 유명합니다. 오세르와의 계약이 만료되고, '88년에 U-21에서 프랑스가 우승하는데 큰 기여를 한 칸토나를 잡기 위해
여러 구단이 군침을 흘렸지만 다들 그의 성격을 알기에 망설이던 중 당시 마르세유 회장이던 베르나르 타피가
계약서에 사인을 했습니다. 훗날 타피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헤어진 후, 나는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고 회상합니다. - '89년 1월 토르페도 모스크바와의 친선경기중 심판의 파울판정에 열받아 관중석에 공을 차버리고 경기장 탈주 - 프랑스 국가대표에 뽑아주지 않은 감독에게 육두문자를 날리다가 국가대표 1년 출장 정지 처분 위의 사건으로 1년동안 보르도에 임대생활을 시작합니다. 보르도도 역시나 그의 성깔을 감당할 수 없어 몽펠리에
로 다시 임대보내게 됩니다. 임대가 끝난 후 마르세유로 돌아왔지만 부상을 입게 되자 결국 마르세유는 님 올랭피크로 이적을 시켜버립니다. '그라운드의 망나니' 칸토나는 님에서도 경기중 분을 못이겨 심판에게 공을 던져 1개월 출장 정지 처분을
받습니다. 이에 "x나 고맙습니다 얼간이들아."라고 응수하여 3개월 출장 정지 처분으로 중징계됩니다.
칸토나는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은퇴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칸토나의 재능이 꽃을 피기도 전에 지는 것을 아쉬워한 미셸 플라티니는 그에게 영국행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리퍼풀의 수네스 감독은 선수들과 불화를 우려해서 미적지근한 태도로 일관하고, 셰필드 웬즈데이는 일주일간
의 입단 테스트 후에 이적을 결정하겠다고 하자 셰필드 정도의 팀이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할 수 없다며 이적을
포기합니다. 영국행이 무마되는 듯 싶었는데 리즈 유나이티드(이하 리즈)의 하워드 윌킨슨은 칸토나에게
손을 내밀고 결국 칸토나는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칸토나가 리즈에 입단한 바로 그 해! 91/92시즌에
리즈는 리즈 시절이 맞게 됩니다. 무려 18년만에 1부리그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된 것입니다.
또한 리버풀과의 커뮤니티 쉴드(영국 프리미어 리그 1위와 잉글랜드 FA컵 1위가 맞붙는 대회)에서도 우승을
하게 됩니다. 이렇듯 칸토나 효과를 톡톡히 보았지만 윌킨슨과 칸토나는 자주 다투게 되고 윌킨슨은 칸토나를
어떻게 해야되는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한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퍼거슨 감독은 마틴 단장과 얘기를 나누던 중 리즈의 CED였던
빌 포더비에게 전화가 오게 됩니다. 포더비는 당시 맨유의 윙백 데니스 어윈을 팔라고 하는데 마틴 단장은
말도 안된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퍼거슨이 칸토나를 이적시키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어보자
칸토나를 어떻게 처리해야되나 고민하던 리즈는 옳다구나하고 맨유에 넘기게 됩니다.
이로써 맨유는 전 시즌 엄청난 활약을 한 정상급 스트라이커를 120만 파운드라는 껌값에 얻게 됩니다.
(사실 맨유의 1순위, 2순위 영입 스트라이커 대상은 David hirst와 Peter beardsley였으나 둘 다 실패하고 디온 더블린을 데려오지만 6경기만에 다리가 부러져서 시즌 아웃됩니다.) 칸토나가 이적한 92/93년에 맨유는 2위인 아스톤 빌라를 승점 10점차로 따돌리며 26년만에 우승을 이뤄냅니다.
그리고 93/94시즌에는 리그와 FA컵 둘 다 우승하는 기염을 토해냅니다.
맨유로 이적하고 나서 잦은 퇴장은 있었지만 큰 사건은 없었습니다.
저체급에서 나오기 힘든 스피드입니다.) 하지만 칸토나도 축구생활에 위기를 맞게 됩니다.
1995년 1월 25일 크리스탈 팰리스와 열린 원정경기에서 보복성 태클로 퇴장당하던 중 매슈 시먼스(당시 20세)
라는 상대편 팀 서포터에게 어머니에 대한 욕설을 듣자마자 유명한 '쿵푸킥'을 날리게 됩니다. 칸토나의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있었는데 어머니의 욕설을 듣자마자 폭발한 것입니다. 밑의 영상을 보시면
시먼스는 쿵푸킥을 맞고도 반격을 가해 칸토나의 주먹을 3~4방 더 맞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맨유팬들조차 돌아서며 선수자격을 박탈해야된다는 말이 나올정도였습니다. 선수에 대해서
는 팀에 필요가 없으면 가차없이 내치고, 선수의 실수에 대해 엄격한 퍼거슨 감독은 온갖 비난으로부터 칸토나를
지지하며 감싸줍니다. 결국 퍼거슨의 노력으로 9개월 출장 정지와 120시간의 사회봉사,그리고 2주간의 감옥생활
로 징계를 받습니다. 칸토나가 출장 정지당한 9개월 동안 인터밀란은 끈질기게 오라고 권유합니다. 당시 헤이젤 참사(1985년 브뤼셀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리버풀과 유벤투스 팬의
난투극으로 인해 콘크리트 벽이 무너져 내려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 이 사건으로 잉글랜드 클럽은 5년,
리버풀은 7년동안 UEFA에서 개최하는 모든 대회 출전 금지가 됨)로 인해 영국 축구는 침체기가 다가오고
있었기에 인터밀란의 제안은 그로서도 솔깃했을 것입니다. 불 같기만 하던 그도 퍼거슨의 노력을 알아준 것일까.
기자회견 장에서 "나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맨체스터에서 뼈를 묻을 것입니다."라는 사나이다운 발언으로
맨유팬들의 사랑을 다시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칸토나가 출장정지당한 해에 맨유는 준우승에 그치고 복귀한 이듬해인 95/96시즌에는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더블을 달성하게됩니다. 이에 퍼거슨은 과감하게 96/97시즌에 칸토나에게 주장완장을 채웁니다.
맨유 역사상 최초의 비영국인 주장을 맡게된 것입니다. 그 후 챔피언스 리그에서 뮌헨상대로 4강전에서
패했지만 그해 리그에는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97년 5월 11일 웨스트햄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칸토나는 "나는 팬들이 나의 이름을 연호하는 노래소리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내일 그 소리가 멈출까봐
두려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명예롭게 은퇴하겠다며 구단 홈페이지에 한 줄 휘갈긴채
인터뷰도, 기자회견도 없이 은퇴했습니다. 올드 트래포드의 왕이 맨유는 떠나는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피지컬(188kg, 87kg)로 보면 타겟형 스트라이커라고 생각되지만, 그는 섬세한 볼터치와
빨래줄 같은 중거리, 그리고 덩치에 맞지않는 속력으로 수비진들을 붕괴시키는 처진 스트라이커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득점은 물론이고 어시스트까지 엄청나게 높은 걸로 유명합니다. 아래 영상을 보시죠.
- 4분 9초부터 16초까지보시면 드리블 치면서 수비수들보다 빠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9분 15초에는 골각이 없는데도 무각슛을 넣습니다.
- 칸토나가 유린한 경기입니다. 경기가 하기 싫어지겠네요.
- 세간에 알려진 거만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칸토나는 엄청난 연습벌레였습니다. - 한 선수가 떠난다고 해서 절대 팀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던 퍼거슨 감독도 정작 그가 은퇴할 때는 엄청나게 흔들렸다고 합니다. - 퍼기의 아이들(베컴, 긱스, 스콜스, 버트)은 자신들의 기량 발전에 칸토나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 당시 이십대 초반이었던 긱스는 왼쪽 윙에서 미친듯이 질주해가다가 오른쪽을 딱 보면 자신보다 한 발 먼저 칸토나가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 경기장 밖에서는 거만하지 않고 조용했으며 긱스와는 카풀로 친해졌다고 합니다. 제일 친한 사람은 슈마이켈. - 스타플레이어에 대해 엄격한 퍼거슨 감독도 칸토나만은 특별 대우를 해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변 선수들도 그걸 인정했다고 합니다. - 칸토나는 처음부터 영어를 잘했습니다. 기자들이 답변하기 싫은 질문을 했을 때 어깨를 들썩이며 "뭐라고요?, 무슨 소린지 못알아 듣겠네요."라고 대답을 회피했다고 합니다. -'쿵푸킥' 사건으로 인해 열린 기자회견에서 느릿한 발음으로 "갈매기들이 고깃배를 따라오는 이유는 어부들이 정어리를 바다에 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자리를 유유히 떴다고 합니다. 이에 기자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고. - 1995년 아침, 주장인 브루스가 15,000파운드를 들고 라커룸에 나타났다. 맨유 퍼스트팀 선수들이 축구 비디오에 다같이 출연했는데 그 돈이 출연료였다.18명이 돈을 나눠야 되는 상황에서 다수결 투표 끝에 한 선수에게 돈을 몰아주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응하기 싫은 사람은 명당 800파운드(약 150만원)를 챙기고 내기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시 800파운드의 돈은 어린 선수들(게리, 벡스, 필립 등)에게는 월급의 반이었기에 그들은 당연히 800파운드를 택했다. 어린 선수들 중 내기에 참여한 선수는 폴 스콜스와 니키 버트. 12000파운드(약 2천 2백만원). 이 돈은 누구에게 갈 것인가. 마침내, 각 선수들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모자에 넣고 모자에서 쪽지를 뽑았을 때 적힌 이름은 에릭 칸토나였다. 칸토나는 다른 선수들의 야유와 장난도 부록으로 가져가야만 했다. 다음 날 아침 칸토나는 수표 2장을 들고 온다. 그 수표에는 폴 스콜스와 니키 버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칸토나가 말하기를 "이 돈은 자칫하면 한 푼도 받을 수 없는 위험한 내기에 용기내어 참가한 두 어린 선수들에게 내가 주는 상이다."라고 하면서 주었다. 이 일화에서 무턱대고 성질만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팀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은퇴 후 칸토나는 영화배우로 활약하다가 '05년부터 '11년까지 프랑스 국가대표 코치로 활약, '10년 부터는 미국 MLS 뉴욕 코스모스의 구단주가 됩니다. - 1995년 프랑스 영화 'Happiness is in the field'로 데뷔해 '에릭을 찾아서'라는 영화로 '09년에 무려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았습니다. 현재도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중입니다. 가장 최근 작은 '웨스턴 리벤지'에서 악역으로 활약했습니다. - 2012년에는 프랑스 대선까지 노렸으나 실패했습니다. 역시 최고가 아니면 하지 않는 에릭 칸토나다운 모습입니다.
Park님의 블로그http://blog.naver.com/junjin2575?Redirect=Log&logNo=110013010238 Ryan W giggs님 in 싸커걸 아이러브싸커 치우폐인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chiwoopyein/1955753) 위키피디아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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