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껏 기다림의 상쇄라는 명분으로 자발적인 망각을 반복해왔습니다.




인과적 연쇄란 결국 인식능력의 결과물이고 세계란 현상들의 총체이기 때문에, 결국 외계(칸트적으로는 '예지계')는 우리의 인식과 무관하며, 따라서 이는 존재론적-인식론적으로 논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이에 근거하여 기억의 상실이란 곧 기다림의 소멸과 동일하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즉, 이러한 가정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머리를 강타함으로써 우리의 경험에 단락과 사멸을 일으킵니다. 우리의 주관세계 속에서 기다렸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망각함으로써, 이러한 인식론적 한계 속에서 우리의 기다림 또한 한정하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기다림이란 정말로, 단순히 우리의 주관적 상태에만 한정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기다림을 일으키는 대상—이는 이곳에 도래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사실 엄밀하게는 인식 대상은 아니고 '대상으로써 가정되는 것'이거나 최소한은 도식화된 어떤 심상의 반복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로서 상상되며 따라서 단순히 이러한 것일거라 가정되는 그 무엇인데—이 지니는 부정성이 우리의 경험 속에서 저항하는 힘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설령 우리의 경험 속에서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해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인식에 대한 부정성으로서 작용하는 사물의 저항에서 완전히 벗어났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단지 우리의 경험 속에서 그 저항을 경험 바깥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이미 앞서 반복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는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결국 기다림은 다시 사후적으로 구성될 것이기에, 실제로 우리가 하룻밤만 기다렸는가 아닌가를 따지기 이전에 우리의 기다림(의 경험)에 대한 확실성은 늘 시험대에 다시 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기다림이 우리의 행위와 사유를 제한하게 두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우리에게서 하나의 원초장면으로서 나타나게 만드는 셈입니다.



즉, 견딜 수 없는 기다림의 불쾌와 그에 대한 방어기제란 트라우마와 같아 그것을 억압하고 회귀하게 하는 방식은 이미 무시간적이고 반복적으로 경험되면서 지속적으로 사후성 속에서 재구성하도록 유도하기에, 따라서 이는 단순히 의식적인 감상으로만 한정될 수 없음을 그 자신의 구조 속에서 드러냅니다.



우리는 늘 하룻밤보다 적거나 많게만 기다릴 수 있을 뿐, 결코 하룻밤만큼만 기다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기다림이란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객관적으로 성취될 그 무엇도 아니고 경험 속에 한정시킴으로써 그 불쾌에서 주관적으로 해방될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설령 하룻밤만 기다렸다는 환희가 우리에게 다가와도, 그 다음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씁쓸함으로 변질될 것입니다.



우리의 치열한 자기망각은 실재의 바다에서 파도가 밀어닥치면 거침없이 휩쓸려서 사라질 한낱 초라한 모래성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기다림의 고통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늘 상징화의 가능성 너머에서 우리를 조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