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는 죽어가고 있었다.



MMORPG의 황금기가 지났다. '리그 오브 레전드',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같은 AOS장르가 득세하고 모바일 게임이 약진함에 따라 와우 역시 케주얼화 되는 트렌드에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패치방향은 티탄벼림, 군단전설, 전역퀘, 황천빛 도가니 같은 운빨요소로 나타났다. 


랜덤 요소를 극대화시킨 확장팩 '군단'은 새로 도입한 '유물력'과 '끝없는 벼림' 시스템으로 유저들의 반복적인 컨텐츠를 유도했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게임이 루즈해진다는 비판도 함께 받았다.
 

가장 큰 문제는 '끝이없다'는 것이었다. 군단 이전에는 파밍의 상한선이 어느정도 정해져 있다보니 주간 일정을 끝내면 어느정도 여유가 생겨 부캐를 파거나 와켓몬, 업적 같은 다른 컨텐츠에 눈돌릴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새로 도입된 끝이없는 유물력 시스템은 유저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할 것을 강제했다. 유물레벨을 높이고 전설을 먹으려면 재미없는 10개의 신던을 매주 돌고, 발로도 잡는 공찾을 의무적으로 돌아야되며, 반복되는 전역퀘는 마치 '숙제'처럼 강요되었다. 


누군가의 실수로 던전 진행이 지연된다면 '아. 초보시구나. 배려해드려야지'가 아닌 '아 별 허접새끼때문에 시간날리네. 이 시간이면 벌써 두번을 돌았겠다' 란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추가된 컨텐츠들은 유저들에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도록 플레이방식을 변화시켰고, 유저들은 영악한 방식으로 실리를 추구했다


일정시간 내 던전을 클리어하면 추가상자를 주고, 전제조건으론 클리어가 가능한 높은 수준의 아이템이 필요했다. 그 장비 역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벼림파밍의 반복이였으며, 파티원들의 장비 수준에도 영향을 받는 쐐기 컨텐츠는  '아귀맛집', '스피드팟' 같은 시간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킨 그들만의 리그로 변질되었다.   


이로인해 암사, 풍운 같은 비주류 클래스들은 '동료'가 아닌 '짐'으로 취급당했다. 쐐기뿐만 아니라 레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는 말은 군단에선 예외였다. op클래스 편향 현상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사람들은 구인에 wcl로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트라이를 거부하는 풍토. 잘하는 사람들과 빠르게 컨텐츠를 끝내고 싶다는 개개인의 욕심은 사람들의 마인드를 변화시켜 갔다.









그리고 2017년의 역사적인 어느날.
웹사이트 Curse에 한개의 애드온이 올라오면서 본격적인 와망이 가속화 되었다.

'Potted Percentage And Progress' 라는 이름을 가진, 줄여서 PPAP(엌ㅋㅋㅋ)으로 불리는 이 애드온은 파일크기가 고작 10 byte 남짓에, 인게임 점유율도 제로에 수렴하는 가벼운 애드온이였다. 기능도 무척 심플했다. 단지 아이디 옆 1~3자리의 숫자를 표기할 뿐이었다.





PPAP는 간단한 채팅 애드온으로,
아이디 옆에 플레이어의 WCL 로그 백분율을 표시해줍니다.




이 애드온의 등장으로 와우 커뮤니티는 말 그대로 초토화 되었다. 군단이 열리면서 급부상한 '워크래프트 로그(WCL)'는 기존에도 레이드 분석도구로서 많은 공대에서 사용되었지만, '로그주작. 상위공대의 전유물' 같은 부정적인 인식으로 공론화 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군단에 들어서며 확립된 효율성 중시 풍조와 드군 끝무렵부터 우후죽순 생겨온 고업손파티로 인해 로그는 한국 와우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왜 난리들이죠? 어차피 지금도 로그보고 사람뽑는건 똑같구요. 그걸 한눈에 볼수있게만 해주는게 문제될게 있나요? 그런식으로 따지면 파티원 템렙이 자동으로 뜨게하는 애드온이나, 특성, 마부유무를 한번에 체크할 수 있는 엑소서스는 스토킹 애드온인가요? 전형적인 내로남불이죠" 



"로그자체가 문제있다는게 아니라 순기능을 제하고 역기능을 극대화했으니 문제가 되는겁니다. 실제로 지금 게임상에서도 이 애드온으로 불이익을 받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고,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숫자 몇자리로 플레이어가 판단받는데 이게 주홍글씨랑 다를게 뭡니까?"



"아니. 어차피 설치한 사람한테만 보이는건데 뭐 그리 신경씁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되죠. 이건 명백히 로그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악질 애드온이에요. 지금도 사람들이 로그에 목매고, 파티가 전멸하던 말던 공략 쌩까고 말뚝딜만 하는게 지금 실태라구요. 설치 안하면 된다구요? 자신보다 타인의 시선을 더 중요시하는게 요즘 현실인데요?" 





그렇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와우가 아닌 다른 예를 들자면, 인게임상에서 보이지도 않은 이름 테두리를 갖기위해 용돈을 털어 대리를 맡기고, 그저 번쩍거리는 이름표 하나를 갖기위해 수십, 수백만원치의 랜덤박스를 돌리던 것이 바로 한국 온라인게임의 현실이었다.


남들과는 다르고, 인정받고, 잘나보이고 싶은 과시욕구를 애드온 PPAP은 정확히 캐치한 것일 뿐, 생각해보면 이런 애드온이 지금껏 나오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전반적으로 로그에 부정적인 인벤 레이드 게시판이였지만 이미 애드온 PPAP이 수면에 오른 이상 널리 퍼지는건 시간 문제였다. 흔히 '쌀공장' 이라 불리는 고손팟 공장들은 너도 나도 할것 없이 애드온을 사용해 구인시간을 단축하였고 실제로 효과를 보았다. 이는 구인모집 글에서도 확인 할 수 있었는데, 구인문구로 많이 쓰이던 [유물력/템렙 기재/wcl참고] 옆에 어느순간 '본캐귓말 필수' 라는 문구도 추가되었다. 


경험자를 구하기위한 파티. 기존에는 경험을 중요시 했다면, 이제는 아이디 뒤에 따라오는 몇자리의 숫자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었다. 마치 인사담당자가 인서울 대학교가 아닌 이력서들을 미리 컷하는 것처럼 말이다.

 
일등이 있으면 꼴등도 있는 법. 모든 게임엔 똥손과 심해가 있고, 보통 대부분의 게임에서는 실력이 모자라도 적어도 비슷한 사람들과 공평한 상황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게임을 즐길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와우에선 그런것 따윈 없었다. WCL기록이 플레이어의 Best hit으로 기재 된다지만, 냉혹한 상대평가인 시스템상 모두가 보라, 주황로그를 찍을 수 없는게 현실이었다.
 

레이드가 와우의 전부는 아니지만, 한국서버는 레이드가 컨텐츠의 전부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서버로서의 명맥을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는 1서버 '아즈샤라'는 오직 레이드에 집중된 서버였고, 해외보다 높은 막공수준을 가졌다는 특징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되었다. 회색 숫자. 10점짜리 딜러로 낙인찍힌채 게임을 한다는 것. 애써 외면해도 레이드가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섭' 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게임을 계속 할 사람들은 없었다.


동료들과 인스턴스 던전을 몇 시간씩 헤딩하며 공략의 재미를 느끼던 와우는 이미 죽었고, 룩템 하나를 먹기 위해 수백 수십번 던전을 쉬지않고 돌던 와우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리고 유저들이 환멸을 느낄 때 쯤.
한국와우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 다시한번 등장하게 되었다.









해당 파티는 올킬을 못한 것도 아니였고 구인광고에 '길드팟'이라 정확히 명시했으며, 진행이 조금 늦을 수 있다는 양해멘트까지 써 놨었다. 단지 평균연령이 높아 전체적인 실력이 떨어지기에 시간이 다소 늦춰질 뿐. 개인적인 불만을 가질 순 있어도 공개적으로 비난 받을 건덕지는 없는 평범한 길드파티였다.   


보통 이런 무례한 비난글은 게시판 내 자정작용으로 비추천을 받아 블라인드 되거나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는것이 일반적이지만, 안타깝게도 얼마전 탄핵당한 게시판지기 '십원'의 공백으로 모니터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로그 떡밥으로 과열된 여론은 길드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평균 연령 48살의 와저씨, 와줌마들의 소소한 친목길드 <행 복 한 사 람 들>은 <손 고 자 틀 딱 들>이란 멸칭으로까지 조롱당하게 되었다. 뒤늦게 나타난 인벤팀에 의해 해당 글은 삭제되었지만 "로그가 낮으면 욕먹어도 싸다" 라는 무의식적인 암시는 암암리 퍼져만 갔다.


길드장 '혈류메이지'는 길드내 여론을 수습하기 위해 애썼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였다.
'길드원과의 추억'. '사람과 사람의 만남' 은 어르신들이 지금까지 와우를 놓지못하게 한 원동력이였다. 하지만 익명성을 기반으로한 무차별적인 조리돌림은 와재들에게 상처를 주기 충분했고, 결국 길드는 해체수순을 밟게되었다.


쐐기를 박은 것은 길드 큰형님 "한팀장"의 와접이였다.
공찾에서 누군가가 한팀장에게 사사게를 들먹이며 성질을 긁었고, 이에 반박했지만 키보딩이 느린 모습을 '틀딱'이라 조롱. 아이디 옆에 뜨는 회색로그를 '흰머리'에 비유하며 묻지마 추방한 것이 원인이였다. 이 사건으로 와우에 환멸을 느낀 '한팀장'는 조용히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오랫동안 길드의 정신적 지주이자 대들보였던 "한팀장"의 와접은 길드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더 이상 그의 위풍당당한 맹공풀셋과 전경방패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하며 길드원의 이탈은 줄줄이 이어졌고, 게임 내외적으로 비난이 가속화 되면서 결국 12년 역사의 <행복한사람들>은 '해체'라는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애드온 PPAP이 한국에 퍼진지 고작 한달만의 일이었다.




< R.I.P >






 
좆우 근황.....jpg



그걸로 끝이 아니였다. 사건이 짤방으로 요약되어 유머사이트와 온갖 게임 커뮤니티에 퍼지게 된 것이다. 한 때 피시방 좌석의 절반이 와우로 가득찼을 정도로 수많은 게이머들에게 추억의 게임으로 기억되던 와우였지만, 사건에서 보여주는 썩을대로 썩어버린 한국서버의 실정에 게이머들은 난색을 표했다.


게임내에서도 유저이탈은 급격하게 일어났다. 애드온 PPAP을 설치한 유저가 점점 더 많아지자 로그의 존재유무도 모르던 대다수의 평범한 유저들이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요 근래 파티에 들어가는게 힘겹다고 느껴졌고, 빈번히 거절당하는 이유가 자신의 아이디옆에 따라다니는 43라는 흉한 숫자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중,하위권 유저들의 이탈은 노손팟, 트라이팟의 전멸로 나타났다. 인맥이 없다면 영원히 정체되고 허접으로 낙인찍히는 분위기와 이를 해소할 방법은 오직 현질이라는 냉혹한 현실에 와우는 더이상 게임이 아니게 되었다.


한국서버의 비상식적인 레이드 환경은 와켓몬, 지역 탐험, 퀘스트, 업적질, 룩딸, 스토리 등 그나마 남은 컨텐츠들의 가치를 퇴색시켰고, 이는 뉴비의 진입을 원천 차단시키는 문제로 발전하였다. 골드 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월 정액요금을 내고도, 추가로 토큰을 결제해야하는 게임실정과. 이미 빛이 바랠대로 바랜 MMORPG 장르는 분식입맛에 길들어진 새싹겜창들에게 더 이상 경쟁력이 없었고, 뉴비장려가 일체 없는 만렙 컨텐츠에 집중된 패치방향도 겉들여져 "WOW는 회생불가능한 썩은게임이다" 라는 인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만 갔다. 더이상 회생의 여지는 없어보였다.



최소한 예나 지금이나 죽어간다는 평가는 정확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