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는 가시의 전쟁 및 격전의 아제로스 초반 스토리 전개의 스포일러를 다수 담고 있습니다. 열람 시 주의를 요합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WoW)의 차기 확장팩 "격전의 아제로스"(이하 격아)를 2주 앞두고 사전 퀘스트인 가시의 전쟁이 북미 서버부터 적용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단편 애니메이션의 두 번째 순서인 "전쟁인도자: 실바나스" 역시 공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영상을 본 많은 플레이어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텔드랏실이 불타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던 일이지만, 적어도 타당한 이유 ― 포세이큰 저항세력에 의한 방화나 점령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 ― 가 있었을 것이라는 예상을 많은 호드 플레이어들이 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르나서스 수비대의 대장인 델라린 서머문과의 대화 중 화를 이기지 못하고 텔드랏실을 불질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많은 비판을 받는 상황입니다. 단순히 영상에서의 암시 외에도 공식 홈페이지의 공지를 통해서도 이런 정황을 확정하면서, 적대 세력이지만 민간인이 다수 거주하는 대도시이자 드루이드들의 성지에서 방화를 저지른 이유가 단순한 화풀이라는 것이 주된 지적입니다.


○ 공식 홈페이지의 "전쟁인도자: 실바나스" 소개 문구

호드의 대족장 실바나스 윈드러너는 다르나서스의 나이트 엘프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그들의 보금자리인 세계수 텔드랏실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합니다. 하지만 죽어가던 젊은 궁수 하나가 실바나스의 목적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녀가 진정으로 싸우고 있는 상대, 생명 자체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하자, 실바나스는 아제로스 역사의 흐름을 바꿀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 불타버린 텔드랏실


그동안 WoW의 스토리에 몰입하던 팬들은 이번 텔드랏실 방화 사건과 관련해 과거 가로쉬가 저지른 테라모어 학살과 다를 게 뭐냐는 불만과 함께, 현장에 같이 있던 사울팽은 실바나스의 결정을 제지하지 않고 뭘 했는지에 대한 지적, 오그리마 공성전 때처럼 포세이큰 세력이 공격대 우두머리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 등 다양한 반응이 나오는 중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행위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호드 플레이어가 직접 해야 한다는 점에서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2의 "No Russian" 미션과 같은 불쾌감을 준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아니, 미션을 스킵해도 특별한 손해가 없는 No Russian 미션과 달리, 탈것을 얻기 위해선 무조건 수행해야 하는 텔드랏실 방화는 더욱 질이 나쁜 편이라고 할 수 있고요.

이런 실바나스의 행동은 판다리아의 안개 당시 가로쉬를 연상시킵니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인망 있던 전임 대족장에게 자리를 물려받은 점이나, 자신이 속한 종족과 호드 전체 사이에 끼어서 지도력을 의심받았다는 점, 급작스러운 전개로 상대 진영에 대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공격을 시도했다는 점 등이 그렇습니다. 열혈과 냉정이라는 양극단에 선 두 인물이 걷는 길이 비슷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기도 합니다.


▲ 전쟁인도자 영상 공개 후 오히려 가로쉬의 주가가 오르는데...



■ 나의 여왕님은 이렇지 않아! - 아니, 우리 여왕님은 원래 그랬어.

다만 이런 실바나스의 행보가 캐릭터 붕괴인가를 얘기하자면 다소 애매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녀는 워크래프트3: 혼돈의 통치에서 켈투자드의 부활을 위해 쿠엘탈라스로 진격하는 아서스의 스컬지를 방해하는 역할로 게임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다소 오만하면서도 포기를 모르는 끈질김은 서리한을 들기 전의 아서스와도 비슷할 정도였는데, 그런 집요함에 진절머리가 난 아서스는 패배한 그녀에게 죽음의 안식 대신 밴시로의 부활이라는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확장팩인 얼어붙은 왕좌에서 자신의 시체를 되찾은 실바나스는 어둠 순찰자(다크 레인저)가 되어 로데론의 잔당을 학살하는 스컬지의 선봉에 섭니다. 하지만 노스렌드에 있던 리치왕(넬쥴)의 힘이 일리단의 공작으로 약화되면서 아서스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이후 아서스를 배신해 쫓아낸 후 로데론에 남아있던 공포의 군주(드레드로드)까지 처리하면서 로데론 폐허에서 언데드의 나라인 포세이큰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임시 동맹을 맺었던 가리토스 장군을 배신해 죽이는 등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고 나면 언제라도 동맹을 배신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종족 차별을 한 나머지 캘타스가 이끄는 블러드 엘프가 호드에 합류하는 계기를 만든 가리토스가 무능한 지휘관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요.


▲ 팀밀리 승리 직전에 동맹을 끊은 격


이런 모습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도 이어집니다. 증오스러운 아서스의 스컬지를 쓰러트릴 역병을 만들기 위해 언더시티의 왕실 앞에 큰 규모로 연금술 실험실을 꾸려 놓고, 비밀리에 동맹 종족들을 대상으로 역병을 실험하는 등 오리지널 초기부터 그녀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악당 같은 면모는 그녀 자신도 퓨트리스 같은 급진파 소속 심복에게 배신당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지만, 조만간 진행될 로데론 공성전에서 역병을 살포해 피아 구분 없이 죽게 만든다는 점을 생각하면,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이 포세이큰의 기본적인 성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분노의 관문에서 퓨트리스가 하던 짓을 로데론 공성전에서 종용 받는다.


대격변에서도 그녀는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길니아스 공격을 포함해 언덕마루 구릉지나 서부역병지대 등 옛 로데론의 주변 지역을 점령해나가는 과정에서 공공연하게 역병을 활용하거나 시체들을 발키르를 이용해 포세이큰으로 부활시키는 등의 직접 혹은 수하를 시켜 플레이어에게 맡기곤 했습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당시 대족장이던 가로쉬가 "리치왕과 다른 게 무엇이냐?"라고 질타하기도 했지만 "나는 호드를 섬긴다."라고 뻔뻔하게 맞받아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판다리아의 안개까지 이어져서 오그리마 공성전 당시 블러드 엘프 진영에 사망자가 발생하면 포세이큰으로 부활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가 수장인 로르테마르 테론에게 극구 거부당하기도 했습니다.


▲ 언더시티 주변 지역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역병 살포,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외부적으로도, 내부적으로도 적을 많이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실바나스의 공격으로 길니아스를 잃어버린 겐 그레이메인과 늑대인간은 이후 확장팩에서 사사건건 충돌하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고, 콜티라 데스위버와 같은 포세이큰 소속 죽음의 기사조차 병력과 민간인을 싸잡아 역병에 중독시키고, 포세이큰으로 만드는 행위에 거부감을 느끼며 그녀의 명을 거부하다가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드레노어의 전쟁 군주에서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어서 이런 부분이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군단에서는 부서진 해변 전투에서 호드가 먼저 후퇴하는 바람에 바리안 린이 굴단에게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실바나스-겐 사이의 대립이 두드러집니다.





■ 가장 큰 쟁점 : 왜 호드는 맹목적으로 그녀를 따르는가?

어쨌거나 현시점에서 가장 불만을 사고 있는 부분은 스토리라인 및 등장인물의 개연성 측면입니다. 군단에서 대족장의 자리에 오른 실바나스는 WoW 게임 내에서 대족장으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까요.

포세이큰을 존속시키기 위해 헬리아와 뒷거래를 해서 에이르를 지배하려던 시도가 겐 그레이메인에게 저지당한 이후로는 전역 퀘스트를 위해 부서진 섬 곳곳에 있는 감시탑 점령을 지시하는 것 말고는 실질적인 비중이 없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호드라면 지긋지긋할 "그레이메인의 병력이 감시탑에 주둔하고 있다! 쳐부숴라! 자비란 없다!"라는 외침 말고는요.

그런데도 대족장이 된 이후로도 포세이큰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녀에 대해 기존 호드의 지도자들(바인, 사울팽 등)이 제대로 제어를 하지 못한다는 점은 다소 의아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그들은 독선적인 지도자의 행동으로 자신들의 수도가 공격대 던전이 되는 굴욕을 겪은 바 있고, "가로쉬처럼 호드가 명예를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너희를 끝내겠다"라고 경고를 받은 그들은 누구보다도 대족장의 폭주에 경계해야 하는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가시의 전쟁 스토리 내내 호드의 원로라고 할 수 있는 사울팽은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역할만을 하고 있으며, 화풀이 식으로 텔드랏실을 불태우라는 실바나스의 명령에도 변변한 제지를 하지 못합니다. 실바나스와 맞서고 있던 말퓨리온을 뒤에서 기습한 것을 명예롭지 않은 일이라고 후회하지만 그게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로데론 공성전 이후, 사울팽은 얼라이언스의 포로가 되어 실바나스의 호드와 함께 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그러나 만약 실바나스의 행보에 사울팽이 저항 세력을 규합해 그녀를 끌어내리는 시나리오가 진행된다면 판다리아의 안개 시즌2에 불과할 것이고, 극적인 반전이 있어서 실바나스에게 어떠한 정당성이 부여된다면 스타크래프트2에서 지적되었던 "초월체의 용기"라거나 "가, 짐, 어서."로 대표되는 막장 전개의 새 역사를 쓸 위험성이 높습니다.


▲ 공허의 유산에서 이 장면을 보고 느낀 허탈감이란...



■ 호드의 심장을 뛰게 할 이야기는 나올 것인가?

어찌되었건, 실바나스는 이번 확장팩 초반 시나리오에서 부정할 수 없는 "악역"으로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No Russian 미션을 통해 블라디미르 마카로프라는 악역에 대한 각인과 녀석을 반드시 파멸시키겠다는 플레이어의 동기 부여가 이뤄졌던 걸 생각하면, 가시의 전쟁 시나리오는 그녀를 매우 효과적으로 악당으로 만들어낸 건 분명합니다. 그 악당이 호드의 대족장이라는 문제만 빼면요.

물론 어느 정도 실바나스의 이런 행동이 타당성이 있다는 배경이 공식 소설인 Before the storm(폭풍전야)나 단편 코믹스인 "세 자매" 등을 통해 제시되기도 했지만, 적어도 인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만으로는 "얼라이언스에 대한 불신에 빠진 실바나스가 그들이 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쳐서 전쟁을 억제한다"는 식으로 텔드랏실을 공격한 것에 불과한 상황입니다.


▲ 사실상 전쟁 명분은 "얼라가 공격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선수를 치자"뿐


이번 가시의 전쟁 시나리오와 로데론 공성전을 통해 얼라이언스는 칼림도어 대륙에, 그리고 호드는 동부 왕국 대륙에 영향력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확장팩의 주 무대가 잔달라 섬과 쿨 티라스이기에 이런 변화가 당장은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미지수이지만, 호드에 잔달라 트롤이 합류하고 얼라이언스에 쿨 티란 인간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격전"의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격전의 아제로스에서 두 진영은 어떤 대립을 펼치게 될까요? 지난 개발자 Q&A에서 "호드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라며 "장기적으로 호드에게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라는 계획을 밝힌 바 있는데, 부디 이러한 부분을 게임 내에서 잘 표현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