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참, 분위기 한 번 침침하군요. 폐가 체험하러 온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올리는 짙게 깔린 주변의 어둠이 적응이 안되는 듯 실없는 농담을 꺼냈다.


"엄밀히 따지면 폐가 아니겠어? 검은 마법사가 살던 집이니까. 검은 마법사 귀신 안 만나게 조심하라고."


나름 분위기를 가볍게 풀어주려고 던진 말이었지만 뒤따라오던 올리의 표정을 보아하니 역효과가 난 모양이었다.


" 서둘러서 확인하고 나가자. 저 하얀 빛.. 희미하긴 하지만 검은 마법사가 쓰러진 지금 이시점에도 빛나고 있어.

뭔가 있다면, 분명 저기에 있어."


"으으으.."


하지만 올리는 이미 귀신을 본듯한 혼이 쏙 빠진 얼굴로 발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발끝에서 에스페라의 바닷물이 첨벙대는 소리가 잦아들 만큼 깊이 들어왔을 때,


우리가 향하던 빛을 향해, 갑자기 내 검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 무슨?"


그러더니 이내 검에서 검은 기운이 휘몰아치더니 이내 거인의 심장부에서 빛나던 빛을 향하기 시작했다.


이건.. 확실하다. 내게 주어진 역할이 분명 있다. 어쩌면 내 존재 이유가 될 지도 모르는 운명이.


이미 심장은 형용할 수 없는 전율로 고동치고 있었다.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휘몰아치는 듯하던 검은 기운이 안정을 찾아갈때쯤, 나는 드디어 마주했다.


거인의 심장부, 검은 마법사가 있던 곳..


그곳에선 반쯤 깨어져 무너진 창세의 알 위로, 검을 감싸던 검은 기운과는 정 반대의 새하얀 빛의 결정이 부유하고 있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검을 그 결정에 가져다 댔다.


이윽고 눈부신 빛의 결정이 그 기운과 공명하더니 소리없는 폭발을 일으키며 검으로 흡수되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새하얀 빛이 눈앞에서 폭발하는데도,


나는 조금의 눈부심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빛이 나의 검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카오 님, 대적자님!! 괜찮으세요? "


정신을 차려보니 올리가 옆에서 나를 흔들고 있었다.


"아, 올리. 난 괜찮아. 오래 기다렸어?"


"아닙니다. 다만, 너무 넋나간 표정으로 계시길래, 무슨 일 있나 싶었습니다."


"별 일 아니야, 다만.. 이 검은 이제, 그냥 검은 아니게 된 것 같아."


창세의 알 위로 빛나던 결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칠흑같은 어둠은 빛을 흡수한 내 검이 옅게나마 주위를 비춰주고 있었다.


하지만, 검 자체는 검은 빛과 하얀 빛이 불안정하게 뒤섞인 채 일렁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검, 뭔가 이상해졌어. 이 상태로는 뭔가, 오히려 검으로 끌어낼 수 있는 힘이 억압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검은 마법사의 함정이었을까요? 뭔가, 불안합니다."


"아니야, 함정이라고 하기엔.. 내 힘을 억제하거나 흡수하는 게 아니야. 그냥, 내 힘을 검으로 발현하는 것을 억제하고 있어. 힘 자체는 확실히 느껴지지만, 마치 우거진 넝쿨에 가려져 있는 느낌이랄까?"


그 말을 들은 올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대적자님, 하인즈님에게 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 분이라면 전쟁 중에도 검은 마법사의 목적과 전력을 분석하는데 가장 많은 성과를 내신 분이고, 현재도 검은 마법사에 대한 연구를 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거 좋네. 그렇다면 더 이상 여기에서 지체할 필요는 없지. 에레브로 귀환해서 여제께 보고를 한 뒤에 바로 하인즈님을 찾아가 봐야겠어."


"좋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나갈 때가 된겁니까?"


마치 이 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올리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래, 이제 여기서 볼일은 없어. 에레브로 귀환하자."


"그거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입니다."


올리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도 이 께름칙한 분위기를 풍기는 바다에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귀환하는 비행선 안에서, 지나오던 아케인리버의 구역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미래의 나의 소멸, 무토, 루시드와 방독면, 아르카나의 정령들, 쟝,  타나...


모든 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솔직히, 지금도 좀 버겁다.. 내 운명이라지만, 아무리 난 혼자가 아니고, 전우들과 함께라지만.


내게 지워진 짐은, 너무나도 무겁다..


단풍나무 위로 떨어지던 그 시점부터 이미 내 운명은 정해져 있었지만,


검은 마법사와의 결전까지 겪고 난 요즘에 이르러서는, 평범한 모험가로서의 나를 상상에 그려보기도 하곤 했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 난 이미 대적자가 되어 어쩌면 앞으로 있을 소용돌이에서도 중심에 놓인 채 항상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선택을 해야만 할텐데.'


이런 생각이 들자 머리가 복잡해 더 이상 생각하기 귀찮아진 채로 그냥 잠을 청했다.


 자고 일어나면, 그래도 생각을 추스를 순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