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적자?"


살기 넘치는 검은 사슬 너머로 익숙한, 그리고 꽤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미너스!"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라니아가 먼저 루미너스에게로 달려갔다.


"별 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라니아. 그 낯익고도 위험한 어둠의 기운.. 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렇게 애틋하게 서로를 걱정하고 반기는 둘을 앞에 두고 있자니, 나와 저 둘 사이에 무슨 경계선이 있는 것 마냥 달라지는 분위기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루미너스는 이윽고 날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그보다도.. 그런 어둠의 기운의 정체가 너라니, 상당히 의외로군. 검은 마법사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아. 날 찾아온 이유는 그것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이런 분야에서는 루미너스님만큼 잘 아는자가 없을 거라는 하인즈님의 말을 듣고 루미너스님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걸로 찾아온 손님이라면 내 집으로 초대하지. 나도 그 경위가 궁금하고 말이야."


그렇게 나는 오랜만의 손님이라며 신나하는 라니아와 그런 라니아와 손잡고 걸어가는 루미너스의 뒤를 따르며 그가 사는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악기와도 같은 청아한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와 높이 솟은 나무 사이로 드는 햇빛이 비추어주는 집.. 라니아와 루미너스의 집은 그야말로 고급스런 뷰와 평화로운 분위기를 가진 그런 이상적인 집이었다.


나는 아무리 세상에서 대우가 좋다해도 집 없고 가족 없는 떠돌이가 아닌가. 모험이 좋아서 스스로 선택한 길이고 그 과정에서 정말 좋은 친구들을 여럿 만났지만 이런 그들을 보고 있자니 뭔가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나를 상상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넋이 나간채 창밖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을 하고 있는 중, 루미너스가 나를 불렀다.


"앉아서 이야기하지. 무슨 일이 있어서 네 검이 그렇게 된건지, 그건 어떤 힘인지 나도 알고 싶군."


"예. 일단 이 검을 보시지요."


나는 검을 빼내어 둘 사이의 탁자에 내려놓았다.


검날은 여전히 일렁이는 어둠의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마법을 모르는 나로써도 불안정하기 그지없다고 느껴지는 에너지였다.


꽤 오랜시간 검과 그 에너지를 관찰하던 루미너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확실히 검은 마법사의 그것이로군. 하지만 놈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는 부분이 많아. 분명 강해지는 힘이지만 불완전해. 마치 퍼즐 조각 같이 빠져 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세히 얘기하자면 복잡하고도 오래 걸리는 이야기다. 하지만 네가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 에너지는 그가 악의를 가지고 너를 잠식하거나 하는것은 아니야. 오히려 네 검에 빛의 초월자의 힘을 새겨넣은 수준이지. 그리고 퍼즐 같은 불완전함이란 말은.. 놈이 너에게 힘을 주려고 하되 일부러 불완전한 힘을 새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제가 나머지 부분을 채워서 그 힘을 완성하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일까요?"


"네 검의 상태를 보아서는 그 쪽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내게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지. 그가 왜 이런 것을 네게 남겼나? 그를 소멸시킬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나는 루미너스에게 에르다로 흩어졌을 때 그를 만났던 것부터 시작해서, 그와의 대화. 그리고 그 대화에서 느껴졌던 그의 의지와 의도. 그를 바탕으로 무너진 검은 태양의 잔해로 간 뒤 그곳에서 있었던 일 등 모든 것을 설명했다.

그는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나의 이야기를 진중하게 모두 듣고는 잠시간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나도 네게 시험을 하나 해야겠군."


"어떤 시험을 말입니까?"


"너는 검은 마법사가 하려 했던,  운명을 속박하는 사슬을 끊어 내겠다는 의지를 잇겠다고 내게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너는 비록 그보다 힘은 미약하나 그 강대한 힘도 이겨낸 대적자의 운명이 있으니 검은 마법사와 결과는 다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네가 그것을 행하기 위해 결국 검은 마법사와 같은 행보를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나?

 내 도움을 받고 싶거든 네가 검은 마법사와는 다르다는 걸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입증해 보여봐라."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검은 마법사와의 결전 이후 정말 수백번을 생각했던 내용이었다.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저는 대적자이기 이전에 모험가입니다. 모험가는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가 최우선의 가치이지요. 통제받지 않고 스스로가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검은 마법사는, 자유를 위해 자유를 제한하는 모순적인 행보를 이었고, 이로 인해 그는 혼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검은 마법사는 오롯이 강대한 자신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진 채로 점점 목적을 위한 광기에 휩싸였고, 결국 그와 그의 목적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운명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제가 이 의지를 잇는 것은 결코 제가 그 속박을 끊어내 보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를 원하고 갈망하는 이들에게 그저 그 속박을 끊어낼 칼날이 되어 움직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힘은, 자유를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쥐어질 칼날의 숫돌이 될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루미너스는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


"너의 의지는 확실히 그와는 다르다. 하지만 강대한 힘은 굳이 따로 마법을 걸지 않아도 그 소유자를 탐욕스럽고 독선적으로 만드는 속성이 있지. 이 힘을 모두 완전하게 개방시키면 네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강대한 마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결국엔 그렇게 변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에 대한 해결책은 빠져 있지 않은가."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었다. 나 스스로는 내 의지를 의심할 이유가 없으니 여태껏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나,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정말 말문이 턱 막혔다.


잠시 고민한 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이계에서 떨어진 이후, 가족도 집도 없는 저를 메이플 월드의 주민들은 반겨주고, 호의를 베풀어 주었으며, 친구들은 제게 가족같은 존재가 되어 그들과 서로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제 의지의 방향은 검은 마법사와 동일할지언정, 그 의지를 뒷받침하는 힘은 검은 마법사와 같은 신념이 아니라, 가족과도, 이웃과도 같은 그들의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의지가 저와 같지 않다면, 저는 기꺼이 제 신념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지금 내 의지를 보일 수 있는 말은 정말 이게 다였다. 정말 전투도 아닌 상황에서 이렇게나 긴장되는 건 처음이었다.

루미너스는 그런 날 보더니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내 의지가 너와 반한다면 어쩔 것인가. 세계의 법칙이 내게 남긴 운명이 만약 라니아와 행복한 여생을 보내는 것이라면,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필멸자의 눈으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검은 마법사를 통해 우리의 의지가 속박되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이었으니까요."


그 말에 루미너스는 눈을 지그시 감은 뒤 말을 꺼냈다.


"네가 검은 마법사와의 전투에서 보여줬던 모습으로도 이미 너의 의지는 충분히 내게 보였었다. 하지만, 네 생각을 묻고 싶었지. 나이에 비해 모진 경험을 한 건 분명하지만, 아직 많은 경험을 해봤을 시간은 아니니까.

도와주도록 하지. 그 힘이 다시 우리 세계가 위협에 처했을 때, 선봉에 나서리라 믿어도 되겠지?"


"그 힘이 없더라도, 기꺼이 저의 친구와 이웃과 동료를 수호하기 위한 창끝이 될 것입니다."


"좋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이 검에 담긴 힘은 기본적으로 검은 마법사의 힘인 빛과 어둠의 힘을 기반으로 한다.

빛과 어둠의 힘은 균형을 이룰 때 폭발적인 시너지를 내며 강력해진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공명하는 힘의 크기는 서로 비슷해야 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

그리고 이런 힘 역시.. 그가 우리 세계에 여럿 흩뿌려놓았었지."


"그런 힘이라면.."


"군단장들이지."


"하지만 군단장들 중 다수가 패전한 뒤 죽거나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자 루미너스는 뭔가 알 수 없는 조소를 내비치며 잠시 틈을 가진 뒤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놈이 정말 너를 믿고 남긴 힘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겠나. 그리고 어쩌면 그 힘은 너에게 놈의 의지를 잇는 것 외에도 다른 의도가 있을 지도."


"다른 의도라 하시면..?"


"아마 네가 그 검을 가지고 새로운 모험을 하다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정확한 건 나도 잘 모른다. 만약 내가 너라면 일단은 소재지 확실한 반 레온을 찾아가 볼 것 같은데."


반 레온.. 그의 성을 찾아 성에 걸린 저주를 풀고 동료들과 함께 그를 결국엔 제압했었지.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그 낡은 고성에서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듯 했다.


이윽고 마음을 다잡고 떠나는 인사를 할 때였다.


" 감사합니다 루미너스님.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제가 오래 귀찮게 해드린 것 같군요."


"벌써 가는건가?"


"모험가의 모험이란 자고로 길이 정해지면 그곳으로 떠나는 법이죠.  길을 정해주셨으니, 저는 새로운 모험을 하러 가보겠습니다."


문을 나서는 나를 향해 루미너스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 여행이 의미있고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라지."


"고맙습니다."


루미너스의 마지막 말을 뒤로 한 채, 어느 새 해가 저물어 붉은 석양빛이 비치는 숲을 걸어갔다.


다음 목적지는 반 레온의 성.. 어떤 일이 있을까.


이번 모험은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보다는, 뭔가 걱정이 앞선다.


기존과는 다른 큰 시련이 닥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지닌채로, 나는 오르비스행 정거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