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하~ 역시 이 맛이지!"
일등항해사 앙드레(32, 미혼)는 빈 잔을 요란스레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왼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배에 오른지도 어언 17년. 그는 세비야 일대의 알아주는 항해자였다. 아직 자신의 배를 장만할 처지는 못되어도 서른 둘에 일항사라는 것은 괄목할만한 출세다. 그만큼 능력있고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그였다. 그런 앙드레였지만 그가 겪은 숱한 뱃일 중에도 이번 항해는 기억에 남을만큼 괴로웠다. 앙파 해적에게 연 사흘 쫓기는가-하면 벗어났다 안도하는 찰라 끔찍한 폭풍이 몰아쳐왔던 것이다. 적하는 절반 이상 잃었고, 선원이 일곱이나 쓸려갔다. 게다가 쓸려간 선원 중 둘이 항법사와 조타수라는건 최악이었다.

겨우겨우 마데이라에 입항하여 상태를 점검해보니 애시당초 세비야를 출항한 다섯 척 가운데 대서양 횡단이 가능한 배는 기함 단 한 척 뿐이었다. 두 척이 침몰, 두 척이 반파. 이번 에스파니아 카리브 무역선단은 참담한 실패다. 수전노 선주가 강행을 부르짖었지만 귀항을 결심한 선장단의 고집은 확고했다. 그럼요, 선장님. 세상에 돈보다 중요한건 목숨이라구요.

럼 한잔을 추가로 주문하며 앙드레는 흘낏 세비야의 꽃 로잘리오를 건네보았다. 원양을 떠도는 거친 선원들에게 그녀는 구름 위 천사나 다름 아니다. 사랑하고 흠모하지만, 마치 주성의 주위를 공전하는 위성처럼 다가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앙드레는 자신이 럼주 세잔에 벌써 취했는지 의심했다.

"늘 먹던걸로~"
"우유에 토르띠야?"
"응! 그리고 선원들에게 럼을 돌려줘. 부탁해, 로잘리오."

주점에서 우유를 찾는 장면도 처음 보았지만-바다의 사나이에게 우유라니 어울리기나 한 얘기인가-그 목소리는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고음. 혹시 여자인가? 여자를 배에 태우면 해신이 노하여 재수가 없다는 전설이 전설로 남는 시대. 여자가 해적 두목까지 맡는 시대니 여자 선장이라해서 딱히 신기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앙드레의 눈에 들어온 '여자'는 이제 갓 열살쯤 되어보니는 꼬맹이였다. 어울리지도 않는 커다란 왕관(...불경죄로 잡혀가는거 아닌가)에 머리는 잔뜩 짓눌리고 거기에 또 왠 토가자락을 바닥에 질질끌며(...바닥 청소는 다 하고 있었다) 나타난, '소녀'라기보다 '어린이'라는 단어가 더 걸맞는 아이였다. 아버지 심부름인가...하는 생각도 잠시, 대체 어느 정신 나간 아버지가 저런 꼬마애를 선원들의 술집으로 보내겠는가. 게다가 일반 선원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콧대 높은 로잘리오가 직접 상대해주는 것도 의외다.

"이번 항해는 어땠나요?"
"어휴.. 말도 마. 바다에서는 크라켄이 덤비지, 폭풍은 사흘이 멀다하고 연달아 밀려오지, 곤란했다구."
"목표하시던 것은요?"
"짜잔~ 이거면 대답이 될까?"

소녀는 허리춤에서 하얀 주머니-처럼 생긴 것을-꺼내어 로잘리오의 눈 앞에다 펼쳐 보였다. 뭔가 털이 수북이 덮인게 가죽...?이라는 느낌인데..

"어머나.. 드디어 백호를 찾아내셨군요!"
"응! 생포해오기엔 너무 사나워서 목만 베어다 투구로 만들었지!"
"대단하세요!"
"그럼, 난 대단하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밤 방으로 찾아갈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무지무지 많다구."

앙드레는 입에 머금은 럼을 푸욱-하고 마주앉은 이등항해사 로드리고의 얼굴에 뿜어버렸다. 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야심한 밤에 단 둘이라니, 아니, 그, 에, 그러니까.. 저.. 응?

"일항사님, 이게 뭡니까.. 벌써 취하신 것 같지도 않은데."

로드리고가 투덜대며 손수건을 꺼냈다.

"로드리고, 저기, 저 소녀 알고 있나?"
"누구요? 아.. 저 분요?"
"저 분?"
"모르세요? 요새 이 바닥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인데. 열살에 불곰을 때려잡고 크라켄 다리를 안주삼아 버커니어를 사냥하는.. 게다가 리스본의 크리스티나와 마르세이유의 일레느까지 저 분의 능란한 화술에 마음이 그만 녹아버렸다죠. 국가에서는 벌써 일등훈작사에 봉해야한다 말아야한다는 말까지 나온다던데요."

앙드레 나이 서른 둘(미혼). 자부심에 넘쳐 바다를 대하던 그의 마음에 처음으로 회의라는 감정이 요동쳤다. 나, 다 때려치고 고향에 가서 농사나 지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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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의 진실.
10살에 크라켄을 때려잡고, 10살에 해적과 싸우고, 10살에 여급과 침대를.. 음?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