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좀 더 일찍,

좀 더 다른 모습으로 만나면 좋았을 것을.

 

 

 

 


"제길! 도대체 정찰함은 뭘 본거냐!"
"이곳은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아서 미처 다 파악하지 못했나봅니다!"
"쓸모없는 것들! 이 싸움이 끝나면 죄다 고깃밥으로.."

"기습이다! 호위함은 기함을 지켜랏!"
엘리자벳의 말을 지우듯 에르난의 호통이 울렸다.


"아닛-!?"

적선은 빠르게 진입하여 엘리자벳의 진영을 뒤흔들었다.

적함이 발사하는 화염탄은 너무 강렬한 것이었다.


"불길이 너무 강렬하다! 평범한 화염탄이 아냐!"
"화약고에 불이 붙었다! 으아악!"

앞을 막아서는 호위함들이 화염탄에 빠르게 무너져갔다.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게 된 엘리자벳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군은! 아군 본대는 어디 있나!"
"저기 보입니다! 그런데..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한..!"

 

동시간, 엘리자벳의 함대 본대는 발목이 묶여 있었다.
"이런, 당했다! 여기는 해초가 많은 곳이다! 키가 말을 듣지 않아!"
"제길, 그 상선도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빨리 해초를 걷어내!"

 

 


"후, 후후, 후후후후...!"
"제독님?"

"그 녀석이다, 그 녀석의 딸이 틀림없어! 독한 것, 여태 살아있었구나."
어느새 니나의 배는 엘리자벳의 배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어느새 적의 기함이 접근해왔고, 붉은 머리의 제독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너로구나! 그 꼬마 계집이.."

"엘리자벳! 이 바닷속이 당신의 무덤이야! 아버지에게 전수받은 화염포로 널 태워주겠어."

 

니나는 그렇게 외치며 명령했다.

"화염포 발사!"

 

그런데, 니나의 화염탄이 에르난이 세워놓은 방화벽에 막혀 잘 타지 않았다.

 

"불길이 퍼지지 않아?"
"네 애비는 죽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자를 내 수하에 두었지!"


"제독님, 아무래도 저자는 화염탄에 대한 대비를 철저하게 갖춘 모양입니다!"

 

그 때, 망루에서 정찰하던 부하가 다급하게 외쳤다.

"후방에서 적선들이 해초지대를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니나가 뒤를 돌아보니, 엘리자벳의 본대의 배들이 하나 둘씩 돌아오고 있었다.

"칫, 결국 해초는 잠깐의 시간벌기에 불과하군요."
"제독님, 어떻게 할까요!"

 

니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입술을 지긋이 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어요. 적선에 돌격입니다! 그리고 전원에게 퇴거명령을 내리겠어요!"
"그럼 제독님은 어쩌시려고요?"
"저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니나가 갑자기 배의 선수에 불을 붙였다.

"앗, 제독님! 그 공격은 자칫하면.."
"..걱정마세요. 전 그리 쉽게 죽지 않아요. 결판을 내기 전까지는!"
니나는 몸에 물을 끼얹기 바쁘게 키를 잡아 엘리자벳의 기함으로 방향을 맞췄다.


부하들은 잠깐 니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잽싸게 위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자, 다들 몸에 물을 끼얹어라!"
"지금부터 방화공격태세에 들어간다! 돌격하여 적선을 불바다로 만들자!"

 

"잠깐, 다들 무슨 생각인가요? 퇴거하란 명령을.."
니나의 말을 나이든 부하가 막았다. 몇 안되는 니나 부친 휘하의 생존자였다.
"엘리자벳을 골로 보낼 기회는 지금뿐이잖아? 제독에게만 그 재미를 보게 할 순 없지!"
"제독님, 저희도 함께 하겠습니다! 해적잡는 해적의 진가를 보여주자고요!"

니나는 할 말을 잃고 잠시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 후 눈을 다시 정면으로 향했다.


"뭐, 뭐냐!"
시뻘건 불꽃을 날리며 빠르게 돌진해온 니나의 배가 엘리자벳의 배에 꽃혔다.

엘리자벳은 경악했다.
"뭐야! 자신의 배에 불을 붙이다니.. 정, 정말 네가 미쳤구나!"
이미 반이 불에 휩싸인 배에서 니나가 엘리자벳의 갑판으로 뛰어들었다.

 

강렬한 불길은 엘리자벳의 배를 빠르게 잠식해갔다.
니나의 부하들은 소수였으나, 불길에 혹은 적의 공격에 쓰러지면서도 용감하게 싸웠다.
전의를 상실한 엘리자벳의 부하들이 하나 둘 줄행랑을 쳤다.

 

불리하단 생각에 도망치려던 엘리자벳의 앞을 불의 화신과도 같은 형상의 니나가 막아섰다.

질려버린 엘리자벳은 뒷걸음질치다가, 뒤로 넘어졌다.

 

"으으.. 내, 내가 잘못했어. 목, 목숨만은..!"
"네가 지금까지 죽인 목숨, 그리고 아버지를 배신한 대가다!"
니나는 아버지의 도끼를 높이 쳐들었다.

 

 

그 순간 니나를 막아서며 몸을 날린 이가 있었다.

"앗!"
갑작스런 공격에 니나가 도끼를 놓치며 에르난에 깔려 쓰러졌다.
"지금입니다, 제독님! 어서 이 배에서 피하십시오!"

 

"오 그래, 잘했다. 에르난! 그, 그대로 꼼짝말고 있어!"

엘리자벳은 황망히 총을 꺼내어 둘을 겨누었다.


"제독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걱정마라, 해군에겐 명예롭게 상관을 지키다 전사했다고 일러두마!"
"제독님!"

 

"이것으로 네 녀석을..! 캬아아악"
 
엘리자벳 뒤의 화약고가 폭발하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이어진 폭발음에 묻혀 사라졌다.

재차 폭발음이 울리며, 하늘 높이 시커먼 연기가 솟아올랐다.

기함이 당한 것을 본 엘리자벳의 본대가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고마워요, 경황이야 어쨌든 당신이 제 목숨을 구했어요>

 

에르난은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도 어렴풋한 음성을 들었다.
'누, 누구..'

 

<그처럼 형편없는 상관에게도 충성을 다하다니.. 정말 우직하군요. 그런 사람, 싫어하지 않아요>

'이..목소리..는'

 

<당신을 좀 더 일찍,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요>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의식이 다시 흐려지기 직전, 에르난은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렸다.

 

"카탈.. 리나"
카탈리나와 닮았던 그녀의 인상을, 그 목소리를.

 

 

엘리자벳의 부관은 중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으나, 죽지는 않았다.
격전이 끝나고, 에스파니아군의 추격을 피해 가까스로 육지에 올라온 니나 일행은 근처의 해안가에 남자를 내려놓았다.
몸 여기저기엔 니나가 정성스럽게 감은 붕대 위로 피가 얼룩져 있었다.

 

어느덧 날이 밝아오며 니나의 얼굴을 비추었다.

니나의 몸 곳곳은 피와 재로 검붉게 그을리고, 붉게 물결치던 머리카락은 상당부분 타서 두건으로 감싼 채였다.

역시 쌔까맣게 털이 그을린 미핏이 니나 곁에서 자신의 털을 고르고 있었다.

 

"당신을 좀 더 일찍,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요." 
니나는 남자에게 말을 걸듯이 중얼거리며 자리를 뜨려 일어섰다.

얼마 후 해안을 도는 에스파니아군 경비대에 발견되겠지.

 

 


"ㄹ..리나"


의식을 잃은 채 신음소리만 내던 남자의 입에서 내뱉어진 짤막한 말이 니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니나..? 아니, 설마.. 분명 무슨 리나라고.."

"이봐, 제독! 너무 지체했어! 죽이지 않을거면 어서 빠져나가야 해! 배의 수리도 시급하고!"


나이든 부하의 외침소리에, 니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언젠가 다시 적으로 만나게 될 우직한 남자를 뒤로 하며.. 배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처투성이인 배를, 그리고 몸과 마음을 잠시 쉬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