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리야, 카이사 단편소설 '틈으로 엮인 인연'
by 데이나 루어리 쇼

터널 입구에서 밖을 내다보는 카이사는 마치 세상의 끝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거대한 틈은 어찌나 깊은지 바닥에 햇빛이 닿지도 않았다. 다른 수십 개의 터널 입구가 틈을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 지면 아래 깊숙한 곳에 있는 바위가 파여 생긴 것으로 이제는 모습이 드러나 바스러지는 중이었다.

한때 어마어마한 공허 생명체 군단의 집이었던 곳이다. 이 터널들은 무작위로 파괴되어 형성된 공허 생명체의 굴이었다. 급하게 꺾이는 모서리, 막다른 길, 빙빙 똬리를 튼 굴은 모두 세상을 먹어 치우겠다는 일념으로 계획 없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공허였다. 아무 생각 없이 현재만을 살아가며 싸우고 먹어 치우고 파괴하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 같은 유기체. 수없이 많은 공허 생명체를 죽인 카이사는 그게 전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카이사가 서 있는 터널은 달랐다. 무작위로 파괴된 게 아니었다. 카이사는 사실상 북쪽으로 쭉 뚫린 직선이나 다름없는 길을 나흘 가까이 따라왔다. 이 터널, 이 '통로'는 어떠한 의도와 목표를 지니고 만든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상황을 파악하려면 이 통로가 어디로 이어지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그러다 이 거대한 틈을 맞닥뜨렸다.

카이사는 반대편에 난 구멍들에 시선을 주었다. 얼마나 깊은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저 중 하나가 지금 자신이 서 있는 통로와 이어진다는 데 두 번째 피부를 걸 수도 있었다.

카이사는 어깨를 돌렸다. 생체 갑옷이 깨어나며 카이사의 몸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며 카이사의 곁을 지킨 유일한 것이었다. 카이사의 가족과 마을을 죽인 공허충 야수 중 하나였다. 그 껍질로 뒤덮인 카이사는 언제나 괴물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게 없으면 공허로부터 세상을 지킬 수 없었다.

이게 없으면 카이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카이사가 첫 번째 표적을 선택하는 것과 동시에 어깨에 있는 비늘 주머니가 움직이며 그 안에 박힌 수정이 빛났다. 수정의 열기에서 플라스마 미사일이 생겨났다. 카이사는 그 미사일을 지면 아래 깊은 곳에 있는 한 터널 입구로 발사했다. 미사일이 틈을 건너는 데만 6초가 걸렸다. '정말 거대하군.' 잠시 후 미사일이 모퉁이에 맞았다. '아니야.' 카이사가 찾는 통로는 아니었다.

이후로는 조준하고 쏘는 일의 반복이었다. 미사일은 대부분은 입구에 들어간 후 1, 2초가 지나면 벽에 맞았다. 하지만 카이사는 인내심을 빼면 시체였다. 얼마가 걸리든 해낼 작정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카이사가 찾던 터널이 발견되었다. 카이사는 미사일이 틈을 넘어가자 시간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저거다. 저게 이 통로와 이어진 곳이야.'

카이사는 씩 웃으며 터널 입구 주위에 미사일을 연사해 표식을 남겼다. 아까 쏜 미사일은 아직도 날아가고 있었다. 그때 뭔가 미사일에 맞고 끔찍한 괴성을 질렀다.

어깨 주머니를 안쪽으로 돌려 빛이 새어 나오지 않게 누른 카이사는 조용히 사냥감이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또다시 귀에 거슬리는 괴성이 들렸다. 반대편 통로에서 공허충 생명체가 나타났다. 카이사는 수년간 싸우며 다양한 공허충을 목격했다. 저건 처음 보는 종류였다. 미사일에 맞아 다친 공허충이 긴 아래턱을 벌리자 둥글고 매끄러운 몸체가 변형되었다. 입 안을 가득 채운 바늘 모양의 반투명한 이빨이 위험한 각도로 돌출되어 있었다. 공허충의 옆구리가 수축하고 팽창했다. 마치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아니면 냄새를 맡는 걸지도.' 카이사는 생명체가 몸을 돌리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눈이 없어도 날 찾을 수 있어.' 카이사는 공허충을 조준했다. 수평선 밑으로 해가 가라앉았다. 공허충은... 빛나기 시작했다. 공허충의 입에서 혀 같은 게 나오더니 부드럽고 푸르스름한 빛을 냈다. 마치 광산에 걸어 놓는 등불 같았다. '저런 공허충은 처음 봐.' 카이사는 공허충의 상처에서도 빛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등불이라고 불러야겠군.' 카이사는 미사일을 날렸다. 등불이 자세를 바꾸더니 날카로운 소리를 길게 내지르며 카이사의 공격을 피했다. '젠장.' 카이사는 다시 미사일을 날릴 준비를 했다.

등불 뒤쪽에 있는 터널이 온통 푸른빛으로 빛났다. 입을 열고 빛나는 혀를 들어 올린 수백 마리의 등불이 선두에 있던 등불과 합류했다. 카이사는 천천히 호흡했다.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황도 있었다.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군. 잘됐어.' 카이사는 한 방에 모든 공허충이 쓰러지길 바라며 미사일을 퍼부었다.

미사일이 건너가는 동안 모래처럼 쏟아져 나온 공허충들이 거대한 틈의 벽에 달라붙었다. 미사일은 아무런 해를 주지 못하고 지나갔다.

'저게...'

공허충들은 다친 등불의 주도하에 하나처럼 움직이며 카이사를 향해 다가왔다.

'...뭐야?'

카이사는 양손을 들고 공허충 무리를 향해 미사일을 빠르게 발사했다. 몇 마리에 명중했지만 수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거리는 이미 사 분의 일 정도 좁혀진 상태였다. 카이사는 미친 듯이 주변을 둘러봤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현재 위치에서 싸운다. 뒤쪽 통로로 달아난다.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아래로 뛰어든다. 지면으로 기어 올라가서 싸운다.

카이사는 위를 힐끗한 후 공허충 무리를 바라봤다. 거리는 절반으로 좁혀졌다. '올라가자.' 바위에 지그재그로 네 번 미사일을 쏜 카이사는 각 자리를 손으로 잡고 발을 디뎌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몸을 당겨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쏘고 잡고 당기고. 쏘고 잡고 당기고. 카이사는 최대한 빨리 나아갔다. 카이사의 어깨 주머니가 무리를 향해 미사일을 쐈다. 거리가 가까웠지만 카이사의 속도는 빨랐다. 벌써 절반 가까이—

그때 카이사의 손이 모래에 닿았다.

카이사는 다시 미사일을 쐈다. 미사일이 꿰뚫을 만한 곳이 없었다. 미사일이 적중한 자리에는 더 많은 모래가 흘러내려 빈 공간을 채울 뿐이었다. 잡을 곳이 없었다. 지면까지 점프할 수 있을까? 이를 악문 카이사는 괴물들을 돌아봤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최대한 많은 수를 끌고 갈 생각이었다.

그때 공허충 주변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벽은 결국 바스러졌다.

수백 마리의 등불이 돌과 함께 떨어지자 거대한 틈의 어둠이 등불의 빛을 삼켰다. 카이사를 쫓는 남은 등불은 세 마리뿐이었다. 이 정도는 상대할 수 있었다. 거리는 등불의 혀에 돋은 가시가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미사일 세 발이 발사됐다. 등불 두 마리가 떨어졌다. 남은 것은 한 마리였다.

등불이 가시 돋은 혀를 휘둘러 카이사의 갈비뼈를 쳤다. 카이사의 몸이 바위에 충돌하며 갑옷 밑 갈비뼈에 금이 갔다. 카이사는 갑옷이 회복되는 동안 숨을 쉬려고 애썼다. 왼손으로는 벽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등불의 혀에 돋은 가시 바로 밑을 잡았다. 보랏빛 힘이 밀려들었다. 카이사의 손에 붙들린 등불의 혀가 녹아내렸다. 등불은 괴성을 지르며 물러났다. 카이사는 등불을 조준했다.

이번에는 빗나가지 않았다.

'좋아.' 카이사가 숨을 쉬었다. '좋아. 이제 다음 단계야.' 지면까지 올라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모래에서 네모난 돌이 튀어나와 있는 게 보였다.

'아까는 없었는데.' 카이사는 손을 뻗어 돌을 잡았다. 딱 잡기 좋은 크기였다. 무게를 살짝 실어 보았다. 끄떡없었다. 의아해진 카이사는 한쪽으로 몸을 기울여 위를 올려다봤다.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간격으로 네모난 돌이 줄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 행운의 정체가 무엇이든 지금은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카이사는 한 번에 하나씩 돌을 잡으며 빠른 속도로 올라가 밖으로 나왔다. 달빛에 비친 주변에는 모래 언덕과 암벽만 보일 뿐 눈에 띄는 지형지물이 없었다. 멀리서 모래 폭풍이 일었다. 카이사는 거대한 틈을 내려다봤다. 눈을 가늘게 뜨면 희미한 빛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바람이 거세졌다. '폭풍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어.' 카이사는 몸을 돌려 폭풍을 마주 봤다. 폭풍 한가운데에는...

'여자아이?'

발밑에서 땅이 폭발했다. 카이사는 금이 간 갈비뼈를 팔로 감싸며 폭풍을 향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자세를 바꾼 카이사의 어깨 주머니가 카이사 앞에서 공성퇴처럼 접혔다. 공격한 자가 카이사를 유인하려고 했다면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무엇인가 카이사의 어깨 주머니와 손목을 칭칭 감더니 카이사를 끌어 내려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갈비뼈가 불타는 것 같았다. 땅과 부딪힌 머리 부분의 투구에는 금이 갔다.

자리에서 일어선 카이사는 묶인 손목을 힘주어 떼어 냈다. 돌이 달린 붉은 스카프가 떨어져 나갔다. 카이사는 거친 고함을 지르며 양손에 불을 붙였다.

그러다 소녀의 얼굴에 떠오른 놀란 표정과 공포를 보고 그대로 멈췄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누군가 자신을 괴물처럼 바라보는 것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마, 카이사.' 카이사는 다시 손을 들어 올리며 공격할 준비를 했다.

"혹시 '인간'이야?"

카이사는 자신이 투구의 금이 간 부분을 통해 소녀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내가... 보여?" '그건 중요하지 않지만.' 인간들은 카이사가 인간이라는 걸 알든 모르든 항상 카이사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소녀의 표정은 카이사에게 어리석은 희망을 주었다. 이번에는 다를지도 몰랐다. 카이사는 조심스레 머리에서 투구를 벗으며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드러냈다.

소녀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카이사의 숨이 턱 막혔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해. 나는 네가—"

"괴물인 줄 알았다고?"

"응." 소녀가 거대한 틈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이렇게 붕괴된 곳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하거든." 소녀는 카이사의 두 번째 피부를 빤히 바라봤다. "그런데... 인간처럼 보이지 않더라고. 처음에는 말이야."

소녀는 카이사가 생각했던 것만큼 어리지 않았다. 카이사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더 많아 보였다. 카이사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스카프가 돌이 달린 끝자락부터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봤다. "돌이군." 카이사가 조용히 말했다. "돌을 조종하는구나." 스카프가 마법처럼 날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의 목을 감쌌다. "모래에서 튀어나온 네모난 돌도 네가 만든 거고."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누군가 밑에서 그 괴물들이랑 있는 게 느껴져서 도우려고 했지." 소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몇 주 동안이나. 몇 달인가? 얼마나 됐는지 기억도 안 나네."

카이사가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눈이 따가웠다. '나 말고도 공허와 싸우는 사람이 있었다니.' 카이사는 깨달았다. '나랑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넌 누구지?"

미소가 돌아왔다. "내 이름은 탈리야야."


탈리야의 야영지에 들어서자 춤추는 불빛이 두 사람을 반겼지만 카이사의 주의를 끈 것은 고기를 굽는 냄새였다. 카이사는 탈리야가 먼저 가서 다른 이들에게 괴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굶주리면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먹어 치우려고 드는 생체 갑옷을 입고 있으니 다들 두려워하는 게 당연했다.
천 조각과 단단한 석판을 꿰맞춰 만든 천막은 탈리야의 작품 같았다. 서른에서 마흔 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야영지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모닥불 주위에 모여 있었다. 대부분 아이와 노인이었다.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눈을 크게 뜨고 어깨를 움츠린 채 카이사를 바라봤다. 지독하게 익숙한 시선이었다.

'공포다.' 카이사는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건 저들을 위해서야.'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탈리야는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카이사를 소개하며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극적으로 이야기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은 깜빡이는 불꽃뿐이었다. 탈리야가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고요와 정적만이 흘렀다.

"꼭 머물 생각은 없어." 카이사가 중얼거렸다.

탈리야는 고개를 저었다. "다쳤잖아. 먹지도 쉬지도 않은 상태로 그냥 보낼 순 없어. 그건 안 되지."

키가 탈리야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아이가 일어섰다. 어깨에 붉은 천을 두른 남자아이였다. "정말 인간 맞아?" 아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위장 같은 걸지도 모르잖아." 아이는 좀 더 나이가 많은 여자아이 둘이 힘을 주어 끌어 앉히는 바람에 뒤로 자빠질 뻔했다.

탈리야가 웃음을 터뜨리며 응수했다. "공허 괴물이 웃는 것도 봤니, 사미르? 난 못 봤거든."

다들 기대에 찬 표정으로 카이사를 바라봤다. 카이사는 최선을 다해 미소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지나쳐 보이지 않게 입은 다물었다. 아이들이 겁먹지는 않은 것 같았다. 성공이었다.

사미르라는 남자아이가 다시 일어섰다. "좋아." 카이사 쪽으로 걸어온 사미르는 반쯤 먹은 고기가 꽂힌 꼬챙이를 내밀었다. "내 모래뱀 꼬치 줄까?"

카이사가 음식을 받아 들자 다들 한숨이 놓인 듯했다. 카이사는 꼬챙이에 꽂힌 고기를 물어뜯은 후 씹지도 않고 삼켰다. 갑옷이 만족한 듯 그르렁거렸다. 사미르를 끌어 앉힌 여자아이 중 머리카락을 구슬로 장식한 자이파라는 아이가 음식을 더 내밀었다. 이번에 카이사는 천천히 씹으며 계피, 시큼한 레몬, 연기 냄새가 밴 울타와트 열매의 맛을 음미했다.

옛 기억이 떠오르는 맛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시절, 아버지가 화로 위에서 요리하는 동안 어머니는 절굿공이로 울타와트를 빻곤 했다.

카이사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몰아냈다. 과거를 곱씹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나머지는 굳이 먹을 필요가 없었다. 배는 충분히 차서 벌써 갈비뼈가 회복되는 중이었다.

야영지에는 어느새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 식사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카이사에게 등을 돌린 사람도 있었다. 신뢰의 표시였다. 희망으로 빛나는 탈리야의 눈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제발 머물러 줘. 벌써 가지 마.'

카이사는 고집을 꺾었다. "잠깐 머물게. 몸이 나을 때까지만."

통로는 내일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카이사는 밤새도록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다들 이야기를 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집이 어떻게 모래 속으로 떨어졌는지, 부모와 형제가 얼마나 보고 싶은지 얘기하며 곧 다시 만날 날을 기대했다.
'그들은 죽었어. 우리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공허에 의해서.' 카이사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떤 노인들은 태양의 축복을 받은 초월체 전사 이야기를 했다. 다른 이들은 마지막 황제의 이야기와 그가 죽자 발생한 혼돈에 대해 말했다. 자이파는 초월체를 타락시켜 광기와 악으로 몰고 간 어둠에 대해 얘기했다. 그중 믿을 만한 내용은 없었지만 카이사는 열심히 들었다.

돌로 된 팔 보호대를 찬 큰 여자아이, 카디라가 해 준 이야기는 제일 말이 안 됐다. 카디라는 사이 칼리크 너머에 있는 졸란이라는 곳이 천 년 동안 마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했다. "낙원이라고 하더라." 카디라가 한숨을 쉬었다. "도서관이랑 정원이 있고, 눈으로 좇을 수 없는 곳까지 물이 흐른대. 다들 두려움 없이 안전하게 살고 말이야."

카이사는 카디라와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고 자신이 코웃음을 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허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어. 사이 칼리크와 그렇게 가까운 곳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그건 그냥 지어낸 이야기야."

카디라가 우겼다. "진짜야.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는 거야?"

다른 말 없이 일어선 카이사는 계속해서 이야기가 이어지는 자리를 떠났다.

천막에 몸을 기댄 채 자이파, 사미르와 정신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탈리야가 보였다. 불빛보다 달빛이 환한 곳이었다. 자이파가 펼쳐진 두루마리를 따라 쭉 손가락을 그었다.

"정말 그 졸란이라는 곳을 찾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카이사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만 믿고 사이 칼리크를 건너는 건 너무 위험해."

탈리야가 자이파와 눈빛을 교환했다. 자이파는 카이사에게 두루마리를 건넸다. 슈리마 동부의 지도였다. 자이파가 사이 칼리크 북쪽에 있는 점을 가리켰다. 졸란이었다. '북쪽. 통로가 향하는 곳과 같은 방향이야.' 카이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탈리야가 설명했다. "이 사람들이 안전히 있을 만한 곳은 여기뿐이야. 다들 집이 파괴됐고, 가족과... 헤어졌어. 이 사람들에게는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필요해."

"거짓 희망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공허에 대응할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빠르길 바라면서 도망치는 것뿐이지."

탈리야가 고개를 저었다. "사이 사막을 돌아가면 식량이 떨어질 거야. 가만히 있어도 식량은 떨어지지. 돌아가면 마을이 사라진 자리만 남아 있을 테고. 대체 어디로 도망치라는 거야?"

카이사가 탈리야를 바라봤다. "사이 칼리크에 뭐가 사는지 알아? 뭐가 '사냥'하는지 알아?"

"제르사이. 우리도 이야기는 들었어."

"아니. 졸란이야말로 이야기에 불과하지. 제르사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야. 난 떼로 몰려온 녀석들과 싸운 적이 있어. 여긴 제르사이가 우글거리는 곳이야. 여길 건너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나도 공허 생명체와 싸웠어. 내가 구해 준 거 벌써 잊은 거야?"

"그건 제르사이가 아니었어."

"그게 뭐였든 네가 물리치지 못한 걸 난 물리쳤잖아." 이를 악문 탈리야의 모습에서 굳은 결심이 느껴졌다. "졸란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면 난 거기로 모두를 데려갈 거야."

"게다가 계획도 세워 놨는걸." 사미르가 신이 나서 말했다. "탈리야가 모래 위로 다리나 벽 같을 걸 만들면 다 같이 사람들을 건너게 할 생각이야."

'내가 공허에 끌려갔을 때랑 비슷한 나이 같은데.' 카이사가 큰 소리로 물었다. "너도 돌을 움직일 줄 안다고?"

"나만 한 바위타기 명수는 처음 만날걸?" 사미르가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내 샌드보드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괴물은 없어. 좀 빠르다 싶어도..." 사미르가 땅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시늉을 했다. "탈리야가 '바위 폭발'로 물리쳐 버리지."

"어린애처럼 말하는군." 카이사가 내뱉듯이 말했다. 사미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렉사이의 아이들은... 그저 먹어 치울 뿐이야. 놈들의 앞을 가로막는 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카이사가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너희 소리가 들리면 쫓아올 거야. 너희를 물어뜯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겠지."

"당신 때문에 겁먹었잖아." 자이파가 진정시키듯 사미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나무랐다.

"잘됐네. 겁먹어야 해."

탈리야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같이 가자. 네가 모두를 지킬 수 있게 도와주면 되잖아."

"아니. 그곳으로는 가지 마." 카이사가 사미르를 가리켰다. "이 애들을 그런 위험에 몰아넣어선 안 돼. 죽을 거야. 사이 사막을 돌아서 가. 최대한 많은 인원을 데려가. 뒤처지는 사람은 버리고 그 식량으로—"

"그럴 순 없어!" 사미르가 정면에 서서 카이사를 노려봤다. "탈리야가 우릴 지켜 줄 거야. '내가' 우리를 지킬 거야." 사미르는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난 '모두' 사막을 무사히 건널 수 있게 도울 거야. 왜냐하면... 목숨이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 사미르가 모닥불 쪽으로 쿵쿵거리며 돌아가자 자이파가 그 뒤를 쫓아갔다.

카이사가 조용히 말했다. "그 방법뿐이야. 아니면 다 같이 죽자는 거나 다름없어."

"아니." 탈리야가 카이사 앞으로 다가와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붙들었다. "이 세계는 융단이고, 모든 생명은 서로 다른 색을 가진 실과 같아. 한 올 한 올이 전체를 더 아름답게 만들지."

'비유를 하시겠다?' 카이사가 답했다. "그럼 공허는 불꽃이야. 닿는 것을 닥치는 대로 없애 버리지. 네 융단에 불이 붙는다면 전체가 타 버리겠지만... 그을리는 실을 잘라 낸다면 나머지는 살릴 수 있어."

"틀렸어. 올이 하나라도 나가면 전체가 불안정해지면서 풀리기 쉬워지지." 지평선에 햇빛이 나타나며 탈리야의 눈이 금빛으로 빛났다. "난 '누구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야영지는 낮의 열기를 피해 잠이 들었다. 카이사는 해가 지기 몇 시간 전 일어났다. 사람들이 짐을 지고 보따리를 싸며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납작한 빵과 치즈를 나눠 주었다. 한 아이가 카디라의 로브를 당기며 '무서운 여자'한테 음식을 대신 가져다주면 안 되냐고 수줍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탈리야는 돌로 만든 구조물을 다시 땅으로 무너뜨렸다. 구조물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카이사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빵을 최대한 천천히 씹었다.

탈리야가 말했다. "여전히 우리랑 같이 갈 생각은 없나 보네?" 땀으로 번들거리는 탈리야의 이마가 카이사의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힘든 일인가 보군.'

"그래. 따로 가야 할 곳이 있어." 카이사가 한숨을 쉬었다. "너도 생각을 바꾸지 않은 모양이네."

탈리야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가야 할 곳이 있거든." 탈리야는 다시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쉽다. 넌 공허 괴물을 잘 상대하잖아. 사람들한테 도움이 많이 됐을 텐데."

'그 공허 통로를 만든 게 뭔지 알아내는 게 내가 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야. 그건 어떤 목적을 지니고 만든 통로지... 그 사실이 날 두렵게 해.' 카이사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너 혼자서도 충분하길 바랄게."


통로는 카이사가 지나온 만큼 길게 직선으로 이어졌다.
'전과 달리 외롭군.' 괜히 탈리야와 함께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사는 지하에 사는 공허 괴물들만 상대하며 인생의 절반 이상을 홀로 보냈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깨닫지 못했다.

생각에 잠긴 카이사는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몰랐다. 곧 통로 벽에 간간이 뚫려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터널들이 보였다. '제르사이 터널이야. 여긴 사이 칼리크 아래인가 보네.' 하지만 제르사이의 모습이 보이거나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한 터널 아래가 푸르게 빛나는 게 보였다. 카이사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움직여 어둠으로 이어지는 구멍을 내려다봤다.

전에 상대하고 이름을 지었던 작은 종류의 제르사이가 여러 마리 보였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이족 보행을 하며 먹이를 움켜쥘 수 있는 턱발톱이 달린 울음충 한 무리가 서로 재재거렸다. 울음충은 사막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로 다른 제르사이들에게 새로운 사냥감의 존재를 알리곤 했다. 그 옆에는 이미 울음충보다 크지만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뾰족뾰족한 새끼 제르사이들이 서 있었다. 놈들은 수십 마리의 등불을 에워싸고 있었다.

등불 한 마리의 옆구리에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푸른빛으로 빛나는 자국이 있었다. '내가 쏜 녀석이야.' 카이사는 경악했다. '탈리야의 공격에도 죽지 않았어. 어쩌면 한 마리도 죽지 않았을지 몰라...'

계속 지켜보자 새끼 한 마리가 푸른 자국이 있는 등불에게 접근했다. 등불은 혀를 길게 내밀어 새끼의 뿔을 만졌다.

부드러운 푸른빛이 새끼를 휩쌌다. 새끼는 은은하게 빛났다.

갑자기 울음충들이 재잘거리기 시작하자 카이사의 숨이 턱 막혔다. '뭐 하는 거지?' 더 많은 새끼와 울음충이 빛을 받으려고 등불 무리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에 카이사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제르사이를 더 강력하게 만드는 건가?' 카이사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몰아내고 푸른 자국이 있는 등불을 조준했다.

'뭔지 몰라도 막아야 해.'

그때 커다란 폭발음이 땅을 뒤흔들었다.

거대한 제르사이 모래 언덕 파괴자가 여덟 개의 눈 위에 솟은 칼날 같은 뿔로 돌벽을 뚫었다. 턱을 따라 달린 발톱이 바위를 할퀴자 깊이 파인 자국이 남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흔들리며 사냥감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모래 언덕 파괴자는 쉭쉭거리며 등불 무리를 향해 뿔을 휘둘렀다. 단번에 세 마리가 쓰러졌다.

'등불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등불들은 괴성을 지르며 카이사가 있는 통로를 향해 달아났다. 카이사는 익숙한 힘이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몸과 갑옷을 투명하게 했다. 때맞춰 등불 무리와 모래 언덕 파괴자가 차례로 카이사를 지나치며 북쪽으로 돌진했다. 모래 언덕 파괴자의 뿔이 통로 위쪽을 가르며 깊은 틈이 생겼다. 천장이 안쪽으로 휘어졌다.

'통로가 무너질 거야.'

카이사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틈을 타서 거대한 제르사이를 쫓아가기 위해 앞으로 돌진했다. '이 통로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아야겠어. 반드시 알아내야 해.'

그때 뒤쪽 어딘가에서... 비명이 들렸다. 인간의 비명이었다.

카이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황급히 지면으로 올라가자 밑에 있는 통로가 완전히 무너졌다. 카이사는 투구가 햇빛에 다시 적응하는 동안 눈을 깜빡였다. 먼지구름이 시야를 가리고 요란한 낙석 소리가 귀를 울렸지만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카이사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앞을 보니 모래 언덕 파괴자의 뿔이 통로 천장을 가른 곳에 깊이 틈이 생겨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돌로 된 판이 매달려 있었다. 대부분은 모래 위에 있어 아슬아슬하게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돌판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한 사람만은 침착했다. '탈리야. 탈리야의 돌다리군. 탈리야 덕분에 떨어지지 않고 있는 거야.' 탈리야는 힘이 잔뜩 들어가 떨리는 팔로 천천히 돌판 앞쪽을 들어 지면으로 돌렸다.

밑에서 아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통로로 떨어졌어.'

카이사는 탈리야에게 달려갔다. "물러서야 해!" 카이사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다리가 떠올랐다. "움직이지 않으면 밑에 있는 게 다 무너질 거야!"

마침내 다리가 쿵 소리를 내며 지면에 안착하자 탈리야가 소리쳤다. "저 밑에 사미르가 있어! 사미르를 두고 갈 순 없어!"

탈리야가 힘겹게 소리를 지르며 한 손으로 공중을 밀었다. 다리가 탈리야로부터 멀어지며 끌리는 소리가 났다. 붕괴 지점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까지 다리를 밀어낸 탈리야는 틈 속으로 뛰어들었다.

카이사는 가장자리 너머를 바라봤다. '내가 돕지 않으면 저 밑에서 죽을 거야.'

카디라와 자이파가 다리에서 달려왔다. 카이사는 둘의 발치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뭐 하는 거야?!" 카디라가 깜짝 놀라 물러서며 외쳤다.

"그 거대한 제르사이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여기를 빠져나가."

"탈리야와 사미르가 무사한 걸 확인하기 전까진 아무 데도 안 가." 자이파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우리도 도울게."

'이럴 시간 없어.' 카이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 주머니를 펼쳤다. 수정이 힘으로 타닥거렸다. '이 둘을 죽이면 나머지는 알아서 달아날 테지.'

카디라와 자이파는 손을 맞잡되 움직이지 않았다. 카이사는 모닥불 주위에서 저들이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저들이 나눠 준 음식을 떠올렸다. 자신을 향한 저들의 공포와 하룻밤 사이 그 공포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떠올렸다.

'...해치고 싶지 않아.' "내가 내려가서 도와줄게. 너희는 돌아가. 저들에게는 의지할 만한 사람이 필요해."

"좋아. 대신 두 사람 다 꼭 데려와야 해." 자이파가 내뱉듯 말하며 카디라와 함께 다시 다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래. 약속할게.' 카이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점점 커지는 구멍 속으로 뛰어내렸다.

카이사는 보통 사람이었다면 뼈가 부러졌을 정도로 세게 바닥에 착지했다. 멀리서 빛나는 공허충 무리가 보였다. 등불뿐 아니라 등불의 힘으로 변한 새끼 제르사이와 울음충까지 전부 매끄러운 반구형 돌을 둘러싸고 있었다. '탈리야와 사미르가 있는 곳일 거야.'

멀리서 들려오는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모래 언덕 파괴자가 방향을 돌렸어. 등불을 쫓고 있다면... 곧장 여기로 돌아오겠지.'

카이사는 생체 갑옷의 힘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보라색 빛이 카이사의 손목을 감싸더니 사라졌다. 다시 투명해진 것이다.

카이사는 울음충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했다. 다섯 마리 모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었다. 새끼들은 공격이 날아온 곳을 찾아 몸을 돌렸다. 카이사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앞을 못 보지만 공기를 감지할 수 있는 등불뿐이었다. 카이사는 위치가 정확히 발각되기 전 빠르게 새끼들을 해치웠다.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수십 마리의 등불이 카이사를 향해 돌진했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카이사는 최대한 빨리 달렸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미친 듯이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몇 마리만 떨어져 나갈 뿐이었다. 한 마리가 카이사의 발목을 붙들더니 혀에 돋은 가시로 갑옷을 베었다. 카이사는 더 많은 공격을 피하려다가 넘어졌다. 등불들은 카이사의 갑옷이 회복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사방에서 공격해 왔다. 카이사의 팔다리와 뺨에서 피가 흘렀다. 입술 위로 흐르는 피에서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다.

그때 밑에서 무엇인가 폭발했다. 등불들은 뒤로 멀찍이 밀려났다.

혼란에 빠진 등불들이 주춤거렸다. 반구형 돌 위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탈리야가 뭐라고 소리쳤다. 카이사의 투구가 형태를 바꾸자 탈리야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와!"

카이사는 몸을 웅크렸다. "추진력을 보태 줘!"

밑에서 땅이 폭발하며 카이사를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공허충 무리를 넘어 탈리야 쪽으로 날아간 카이사는 멀쩡한 발목으로 착지해 질주하려고 했다. 무리였다. 결국 다시 갑옷의 힘에 몸을 맡긴 카이사는 갑옷이 자신의 남은 힘을 흡수하게 해 발목이 회복하는 속도를 높였다. 오래는 달리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시도는 해 봐야 했다.

등불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탈리야는 다시 한번 카이사를 자신이 있는 쪽으로 날렸다. 이번에 카이사가 착지한 땅에는 전과 달리 날카로운 혹 같은 게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었다. 카이사는 그 위를 달리며 등불들이 탈리야에게 가지 않도록 유인하려고 애썼다. 앞쪽에 푸른 자국이 있는 등불이 보였다. 등불은 다시 카이사에게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 폭발이 일어나며 등불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카이사는 충격에 얼어붙었다.

탈리야가 외쳤다. "계속 달려! 그래야 폭발이 일어나!"

카이사는 탈리야 주변을 빙빙 돌며 계속 달렸다.

등불 몇 마리가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가 탈리야의 '바위 폭발'에 목숨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속도를 늦춘 다른 등불들은 카이사가 날리는 미사일의 표적이 되었다.

등불의 수는 금세 줄어들었다. 하지만 모래 언덕 파괴자가 돌아오며 나는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중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

남은 등불은 많지 않았다. 지친 카이사는 반구형 돌 옆에 서서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미사일을 날렸다. 미사일은 지뢰밭 때문에 속도가 느려진 등불에게 모두 적중했다.

카이사는 씩 웃으며 탈리야를 돌아봤다. 하얗게 질린 탈리야는 모래 먼지 때문에 기침을 하고 있었다. 겁에 질린 사미르는 탈리야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힘겹게 부축했다.

탈리야가 헐떡였다. "더는... 땅이... 너무 불안정해. 더는 못 버티겠어..."

카이사는 탈리야를 안아 들었다. 사미르에게는 자신의 등에 매달리라고 손짓한 후 구멍의 벽을 향해 달려갔다. '나도 한계야. 이런 상태로 지면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갑자기 탈리야가 카이사의 손에서 벗어나 뛰어오르며 발밑에 떠오르는 돌판을 소환했다. 탈리야는 카이사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 후 돌판을 위로 올렸다. 탈리야의 힘은 지면에 닿기 직전 바닥났다. 가장자리를 붙잡은 카이사와 탈리야는 온 힘을 다해 버텼다.

그때 흙과 먼지로 뒤덮인 십여 개의 손이 내려왔다. '꿈인가?' 카이사가 손을 뻗으며 생각했다. '꿈이 아니야.' 위를 올려다보자 탈리야의 야영지에 있었던 얼굴들이 보였다. 카이사의 손목을 잡은 손 중 하나는 카디라의 손이었다. '날 구해 주고 있어.'

"자이파!" 다시 단단한 땅으로 올라선 탈리야가 외쳤다. "카디라! 돌아와 줬구나!"

"도와줄 사람도 데려왔고." 카이사가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고마워."

아래에서 모래 언덕 파괴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왔다. 카이사는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움직이지 마.' 모래 언덕 파괴자는 소리가 나거나 느껴지거나 움직임이 보이는 것만 감지할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 살 수 있어.'

축 처진 등불의 사체를 뿔로 쿡쿡 찌른 모래 언덕 파괴자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빛나는 울음충과 새끼 제르사이의 사체를 발견했다.

적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만족한 모래 언덕 파괴자는 다시 바위를 파고들며 땅 밑으로 사라졌다.

카이사는 모래 언덕 파괴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여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지쳐서 창백하게 질린 탈리야가 땅에서 다른 돌다리를 들어 올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모두를 옮겼다. 진이 빠진 카이사와 다소 얌전해진 사미르는 맨 뒤를 지켰다.

"나 혼자서도 올라올 수 있었을 거야." 사미르는 피곤한 기색으로 카이사를 향해 씩 웃었다. "그래도 도와주러 와서 고마웠어. 나 때문에 이동이 지체될 뻔했으니까."

사미르를 곁눈질한 카이사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만난 최고의 바위타기 명수가 위험에 처했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모닥불에서 밝은 불이 활활 타올랐다. 사이 사막에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 탈리야의 돌다리는 야영지를 둘러싼 벽이 되어 있었다.
카이사는 불빛이 있는 곳에서 떨어져 있었다. 아직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먹는 것보다 쉬는 게 나아.' 카이사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까맣게 탄 양배추 냄새가 카이사 쪽으로 흘러왔다.

탈리야가 앉더니 아무 말 없이 양배추와 수수로 가득한 그릇을 권했다. 카이사는 그릇을 밀어냈다.

"배 안 고파?"

"화가 났거든."

탈리야는 깜짝 놀란 듯했다. "왜?"

카이사가 매섭게 말했다. "내 말을 들었어야지. 넌 네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어. 우릴 공격한 공허충은 네가 죽인 줄 알았던 그 녀석들이야. 하마터면 모두 몰살할 뻔했어. 내가 거기 있지 않았다면 그랬겠지." 탈리야의 일그러진 입술과 앙다문 턱에서 후회가 엿보였다. "그리고 넌 네가 가장 필요한 순간 사람들을 버렸지.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도 않은 사람 하나를 구해 보겠다고 모두를 죽게 내버려 둔 거야."

탈리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고맙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네가 날 도우러 내려온 것도 결국 같은 일이라는 거 알지?"

카이사는 할 말이 없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카이사가 입을 열었다. "졸란으로는 가지 마. 내가 따라가다 무너진 공허 통로는 너희가 가는 경로 바로 밑에 있었어. 아마 졸란으로 이어지는 통로였을 거야. 그곳도 이미 공허에 당했다는 뜻이지."

탈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탈리야의 어깨가 축 처졌다.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전할게."

"전한다고? 너는 어쩌고?"

"난 졸란으로 갈 거야."

"탈리야—"

"너도 거기로 가는 거지?" 탈리야가 한숨을 쉬었다. "난 내가 이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어.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네 말이 맞아. 안전한 곳은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곳을 만들어야 해."

"뭐? 그게 무슨 뜻이야?"

"졸란에 공허가 있다면... 우리가 되찾으면 돼! 모두를 데려가도 안전한 곳으로 만들고... 이미 거기 있는 사람들을 돕는 거지." 탈리야의 말은 아주 낙관적이었다.

"공허가 마을을 장악했다면... 구할 사람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야."

"여기선 모르지. 우리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고 해도 나한테는 그걸로 충분해." 탈리야가 앞으로 나와 카이사의 손을 쥐었다. 두 번째 피부 너머로 굳은살이 박힌 따뜻한 손이 느껴졌다. "네가 없으면 안 돼, 카이사. 나 혼자서는 그 등불들을 죽이지 못했지만... 너랑 함께 있을 땐 해냈잖아. 우리 같이 졸란을 찾아보자."

'고향이 공허로 떨어졌을 때 탈리야가 있었다면... 난 지금과 다른 존재가 됐을지도 몰라.' 카이사는 탈리야의 눈에 깃든 희망과 힘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나야. 이 세상에는 지금의 내가 필요해. 탈리야에게도 그렇고. 우린 함께 엄청난 일을 해냈어. 나한테도 탈리야가 필요한 모양이야.'

'아직 졸란에 살아 있을지 모르는 누군가에게도 그렇겠지.'

카이사는 까맣게 탄 양배추를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융단의 또 다른 실을 찾으러 가자고."


탈리야는 자이파를 따라 떠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떠나기 전, 자이파는 지도에서 무역 도시였던 곳을 찾았다. 그곳으로 가면 목초지가 나올 것이다. 자이파는 말했다. "식량이 떨어지더라도 거기서 사냥을 하면 될 거야."
탈리야가 자이파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안전하게 잘 지내. 모두에게 대지모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바랄게."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탈리야는 다음 여정의 유일한 동행인 카이사를 돌아봤다. '동행이 생겨서 기쁜 것 같아.' 탈리야는 몰래 웃으며 생각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함께 둥둥 떠다니는 돌다리에 올라 사이 칼리크를 건너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운명이 잠시 하나로 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