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래빗
2013-01-15 18:03
조회: 1,201
추천: 13
현, 그리고 비일상소나의 머리카락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아. 녹서스의 밤 골목은 서늘한 곳이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어릴 때 자라온 아이오니아의 고아원이나, 데마시아에 있던 스승의 집은 얼마나 따뜻했다. 물론 그것은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사람으로서의 온기, 고아원의 보모와 그녀의 스승은 과거가 없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주었다. 어쩌면 그녀의 과거라는 것은 그 이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미 소나의 기억은 따뜻한 사랑만을 받았던 기억들로만 가득차 있었다. 소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얼른 스승의 집으로 돌아가 언 몸을 녹이고 싶었다. 물론 소나도 자신의 과거, 자신의 진짜 부모에 관해 전혀 궁금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아원의 보모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눈 오는 날 고아원 앞에 버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날 소나는 피지 못한 꽃봉오리인 채로 얼어 생을 마쳤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이야. 소나는 생각했다. 이미 그녀의 생일은 실제로 태어난 날이 아니라 그녀가 발견된 날이 되었다. 발견된 그 날은 소나에게 또 다른 탄생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른 것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악기, 에트왈로 충분했다. 소나는 에트왈을 끌어안았다. 고아원 보모들의 말에 따르면 에트왈은 그녀가 이곳에 맡겨졌을 때부터-정확하게 말하자면 버려진 것이었지만- 이미 그녀의 손에 있었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고아원 보모들이 소나의 입양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에트왈을 팔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악기를 사간 사람은 대부분 처음부터 느껴지는 에트왈의 고결한 자태에 반한 사람들이었는데, 어쩐지 소나의 손을 벗어난 에트왈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단지 억지로 울려지며 줄만 떨릴 뿐이었다. 어느새 에트왈에 관해 관심을 가졌던 악기 수집가들 사이에서 그 악기는 악마의 악기로 불려졌고 더 이상 에트왈을 찾는 사람은 없어졌다. 소나는 생각했다. 왜 에트왈은 나에게서만 울리는 것일까. 어쩌면 에트왈이 나를 선택해 준 것일지도 몰라. 고마워요. 에트왈. 소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이오니아에서 적국 녹서스로 오게 된 것은 단지 일 때문이었다. 소나는 이미 발로란에서 매우 유명한 연주자였다. 최근 녹서스의 권력을 잡았다는 소문이 도는 제리코 스웨인도 그녀의 연주를 들으러 올 정도였다. 그녀는 스웨인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평소에는 연주를 하면서 관중을 잘 바라보지 않는 편이지만 어쩐지 그날만큼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한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스승이 이야기하던 ‘강함’ 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경함한 순간이었다. 그때 소나는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인내의 아리아를 연주했다. 순식간에 장내에는 치유의 선율이 울려펴졌고 그제서야 소나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던 그의 까마귀도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었다. 소나는 이 일에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듣고 감동하고 눈물을 흘렸다. 때로는 벅찬 선율을 듣고 열광해주었다, 말을 하지 못하지만 악기 하나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여전히 밤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공기가 점점 더 스산해졌다. 사실 여관은 이미 지나친 지 오래였다. 생각이 너무 길어진 모양이었다. 아이 참. 소나는 당황했다. 지금부터라도 가던 길을 되짚어 가야겠다 생각하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 갑자기 가로등이 꺼지고 오싹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두려웠다. 그녀는 에트왈에 의지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푸른 치마가 바람에 흩날렸다. 자꾸만 무언가 따라오는 기분이었다. 에트왈도 불안에 떨며 제멋대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소나 앞에 흉폭하게 생긴 남자 여럿이 나타났다. 도망치기 위해 뒤를 돌아봤지만 뒤에도 남자 여럿이 지키고 있었다. 그 중에서 그나마 괜찮게 생긴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아가씨, 혼자서 이렇게 녹서스의 밤골목을 돌아다니시면 곤란해. 어떤 일을 당하려고. 그러지 말고 우리 아지트로 데려가 줄게. 지금 이 시각까지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걸 보니 방랑하는 악사인가 본데, 뭐 대우는 괜찮게 해줄테니까. 어때?”
의외로 괜찮은 제안이었다. 잠시. 잠시 머무르는거니까 괜찮을 거야. 소나는 약간 경계를 풀었다. 하지만 수락하기에는 자꾸 에트왈과 자신의 본능에서부터 올라오는 거부반응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소나는 우물쭈물했다. 이런 소나를 보자 그 남자들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어이, 아가씨 안 예쁘게 왜 그래? 남자들이 지켜준다고 했을 때 감사합니다 하고 순순히 따라와야지. 얼굴도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왜 이러실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들이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아까 그 무리의 우두머리 같았던 사람이 소나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을 마구잡이로 훑기 시작하였다. 소나는 저항해 보려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소나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한 순간 어디선가 자신을 끌어당겼다. 소나는 그 힘에 이끌려 남자들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또 무작정 밤거리를 달렸다. 그러나 끌어주는 사람의 손은 너무나 따뜻해서 외롭지는 않았다. --
소나와 알수 없는 그 남자는 숨을 헐떡거혔다. 일단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남자가 왜 자신을 구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이 남자도?
소나는 본능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저 남자가 나를 범하려 든다면 차라리 혀를 깨물어야지. 아니면 저 남자의 목을 모든 힘을 다해 졸라 죽이고 나도 쓰러져 버려야지.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다행히 남자는 지친 모양이었다. 바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자신이 이렇게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소나에게 허전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뿔싸, 에트왈. 에트왈이 없어졌던 것이다, 아까 그 장소에 두고 온 것 같았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에트왈..... 어떡하면 좋지. 그 곳에 다시 가긴 싫은데. 그녀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남자는 그런 소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추워?”
그가 외투를 벗어 소나에게 덮어주면서 말했다. 하지만 소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들었다. 하지만 덮어주는 외투까지 사양하진 않았다. 꽤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으니까.
“그럼 아직도 아까 일 때문에?” 소나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말았다. 사실 아까 일 때문에 에트왈을 일어버린 거니까. 맞는 말이라 생각했다. 이 남자에게 얼른 에트왈을 찾아와야 한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전할 길이 전혀 없었다. 필담을 나누고 싶어도 적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끙끙거리고 얼굴을 붉히면서 고민하는 소나를 본 남자는 안쓰러웠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절레절레 젓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일단 그 남자들은 녹서스에서도 악명높은 조직의 하수인들이었기에 가엾어서 구하긴 했지만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소나는 볼을 부풀렸다. 사실 이건 소나가 스승에게 답답함을 표시할 때 쓰는 일종의 신호이지만 남자가 이해할 리 없었다. 바보. 소나가 생각했다.
“그렇게 볼을 부풀리면 귀엽잖아, 아가씨?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뭔가 답답해 보여” 남자가 능글맞은 웃음을 띠면서 자상하게 말했다. 그래도 어느정도 전달된 것 같았다. 소나는 상기된 표정으로 손짓으로 내가 곤란하다는 걸 표현해보기로 했다. 이 남자, 꽤 이해력은 좋은 것 같으니까.
“음.. 글쎄, 뭘 말하고 싶은 건지 통 모르겠는데.” “......”
음,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소나는 생각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혼자 찾아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남자가 일어서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상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이제 그만 해도 괜찮아. 말하지 않아도 이렇게 하면 다 알 수 있으니까” “......” 남자의 한마디 말에 소나는 지금까지 취하던 경계태세를 전부 풀어버리고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오랜 공연과 여독이 채 가시지 않은데다가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던 탓이었다. 소나는 무심코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버렸다. 남자는 헝클어진 소나의 머릿결을 다듬어주고 누인 다음 팔베게를 해 주었다. 평소같았다면 잠이 들고도 남았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왠지 잠이 오지 않았다.
소나가 눈을 뜬건 동이 트기 전이었다. 밤새 에트왈을 찾는 악몽을 꾸었다. 몸에서는 식은 땀이 흘렀다.
“일어났어? 많이 피곤해 보였는데 일찍 일어났네.” 소나는 화들짝 놀랐다. 자기가 다른 남자의 팔배게를 받고 잠이 들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소나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남자에게서 떨어졌다. 대체 저 남자는 누구지?
“아침은 조만간 구해다 줄게. 아니면 혹시 원래 묵는 데라도 있었어?” 소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찾아갈 수 있어?” 이번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녹서스는 처음이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절대 알 수 없었다. 남자 역시 답답했다. 데마시아에서 태어나 녹서스 뒷골목에서 나름대로 정의의 사도로 활약해오던 그였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혹시 글자를 쓸 수 있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종이를 어디선가 구해왔다. 소나는 종이를 받자마자 허겁지겁 쓰기 시작했다.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도와줄 수 있는 길이 생긴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의 첫 문장은 이해 불가였다
‘에트왈이 없어’
“그게 뭔데?” 남자가 되물었다. 에트왈이라는 것은 처음 들어봤기 때문이다. ‘내 악기’ “어디서 잃어버린거야?” ‘어제 그 장소’
이제야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 그 장소로 가자. 남자는 생각했다.
녹서스는 도시 전체가 두꺼운 스모그로 덮여 있었다. 소나는 불쾌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따스한 아침 햇살 대신 매캐한 연기와 짙은 냄새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어젠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거리 풍경 역시 꽉 막힌 기분이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은 어두운 색깔로 칠해져 있었고 낡은 집들이 많아 유령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좁디 좁은 거리에 매캐한 바람이 흐르면서 벽돌이 달그닥거리고 귀를 스치며 스산한 잡음을 냈다. 마치 통주저음과 같이 눈에 띄지는 않으나 고막을 천천히 떨리게 하고 있었다. 에트왈, 에트왈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불안했다. 남자에 대한 공포심은 아직도 충분히 많았다. 그녀의 긴 치마를 잡은 한쪽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악기는 없었다. 소나는 당황했다. 자기의 반신이 사라진 박탈감보다도, 지금까지 한번도 에트왈을 손에서 놓아보지 않은 소나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두려웠다. 에트왈은 엄밀히 말해 그녀를 지킬 수 있는 방패도 아니고, 칼도 아니며, 그렇다고 총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에트왈은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그녀의 기억이자 세상과 그녀를 잇는 다리였다.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녀석들 아지트로 가지고 간 모양이야. 길은 알고 있으니 가 볼래? 내가 앞장설테니 걱정하지 말고” ‘좋아’ 승낙은 했지만 소나는 여전히 불안했다. 어제 그 남자들과 이 남자가 한패면 어떡하지? 소나는 긴장했다. 수천명의 관중 앞에서 연주할 때보다도 더 떨렸다.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 없었기에 더욱 더 그랬다. 녹서스의 거리는 그녀에게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괜찮아. 찾을 수 있을 거니까 너무 불안해 하지 마.”
“혼자서 너무 고민할 필요 없다니까? 자 도착했어. 내가 먼저 들어가 볼게” ‘나도 같이’ 소나가 글로 이야기했다. 혼자가 되는 것이 무서웠다. “위험할 지도 모르는데.. 좋아. 가자” 소나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아지트 내부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어제 그 남자들은 토막난 시체가 되어 있었다. 피가 바닥에 흥건했다. 그녀는 구역질을 했다. 시체라고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그런 소나를 부축해서 그나마 멀쩡한 의자에 앉혀놓았다. “돌아 앉아 있어. 악기는 내가 찾아볼게” ‘싫어’ 시체는 싫었다. 정말 싫었다. 부패가 시작된 시체의 냄새는 마치 오래된 고기가 상하면서 내는 냄새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분명 둘의 근본은 다른 것이다. 하나는 문명의 이기를 아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축생이다. 하지만 결국 종장에서는 저리도 다를게 없는 핏덩이가 되는 걸까. 시체 냄새와 오래된 목조 마룻바닥의 탁한 냄새가 섞여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소나는 이 시체들의 사인이 직접적으로 에트왈과 관련있음을 느꼈다. 분노로 가득차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에트왈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만약 저 남자가 에트왈을 잘못 만진다면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르니까, 생명의 은인을 죽이고 싶진 않으니까, 조금 참더라도 따라나서야 했다.. 에트왈은 다락에 있었다. 다락방의 가구들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에트왈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일은 에트왈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임이 확실했다. 소나는 에트왈을 끌어안았다. 기분 나쁜 듯 제멋대로 바들바들 떨리던 현이 하나 둘 가라앉고 있었다. 공간의 울림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천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다행이야, 무사해서 다행이야 에트왈. 소나와 남자는 다시 아지트를 나섰다. 소나의 옷에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살피던 남자가 놀라며 말했다. “피가 옷에 묻었는데 괜찮을까?” 소나가 고개를 내려보니 치마 끝자락이 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굳을대로 굳어버린 피는 이미 그 혈기를 잃어버리고 단지 검은 얼룩에 지나지 않았다. 그 끈끈함도 이젠 액성을 잃어버린채 옷에 기생하여 자취만을 남기고 있었다. 그녀는 이 자취를 하루빨리 감추고 싶었다. 그들의 피는 깨끗하지 않으니까.
“할 수 없지. 옷을 사 줄게” 남자가 말했다. ‘돈이라면 있어’ “음.. 그럼 가게까지만 데려다주지 뭐.” ‘골라줘도 괜찮아.’ 옷을 고른다..라... 남자는 재미를 느꼈다. 사실 옷을 고르는 것에는 별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저 여자의 옷을 고르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입은 하늘하늘거리는 파란 드레스도 좋지만 예쁜 몸매를 드러내 주는 조금은 발칙한 옷도 나쁘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면 흰색의 여신풍 드레스나,
하지만 옷가게에서 마땅한 옷을 찾기는 힘들었다. 예쁜 옷도 많았고 매력적인 소품도 많았지만 그녀에게 어올리는 것은 없었다. 소나 역시 처음 입어보는 옷들이 너무나 불편했다. 녹서스의 여자들은 잘도 이런 옷을 입는구나. 상의는 가슴이 꽉 조여 오는 것 같아 답답했고 하의의 치마는 너무 달라붙어 걷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바지를 입는 것은 왠지 싫었다. 솔직히 말해서 골라달라고 한 건 자신이지만 보는 눈이 있어서 부끄러웠다. 자꾸만 남자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가시방석 위에 앉은 것보다 남자의 나긋한 시선이 그렇게 불편했다. 아니, 사실은 나만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냥 옷을 세탁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 “......!” 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무엇을 입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이 옷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잠시니까 새로운 것도 입어보고 싶었다. 옷을 세탁하기위해 맡기는 동안 아까 제쳐두었던 짧은 드레스를 훑어보았다. 꽤나 맘에 드는 것들이 있었다. 특히 하얀 미니 드레스가 맘에 들었다. 남자는 또래의 여자아이처럼 다시 옷을 사는 것에 재미를 붙인 소나를 보며 안도했다. 왠지 그녀가 불만족한 표정을 지으면 가슴이 떨리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래도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그리고 귀여워서 남자는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소나의 옷이 다시 도착했다. 하얀 미니 드레스를 갈아입으러 들어가는 소나에게 남자가 말했다. “그 옷이 맘에 든다면 만난 것도 인연이니 하나쯤 사 줄게.” ‘내 돈으로 살 거야. 괜찮아’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런거니까.” ‘.....’ 소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기쁜 마음으로 옷을 선물해 주었다. 이제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데마시아로 돌아가야 하고 남자는 녹서스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소나는 그저 기뻤다. 처음으로 입어보는 귀여운 미니드레스, 무엇보다 자신한테 너무나 잘 어올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남자의 어딘가 침울한 기색은 알아볼 수 없었다.
‘음악 연주해 줄까?’ 소나가 남자에게 말했다. 고마운 사람에게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해 줄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사람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일 밖에 없었다. 그 사람에게 자신의 울림이 닿는 것만으로도 좋아. 소나는 속으로 되뇌이며 긴장하는 마음으로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남자는 웃으며 수락했다. 녹서스는 예로부터 여러 군웅들이 할거하던 곳이었고 지금도 정권을 잡기 위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위험한 곳이다. 그래서 녹서스 곳곳에는 비밀 아지트와 회당이 존재한다. 더러는 그 조직이 소멸되어 비게 되면서 공연장이나 교회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남자는 소나를 작은 회당으로 안내했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오래 전에 버려져 덩굴나무가 그 벽을 덮어 단정하지 못한 인상을 주었지만 안은 정교한 샹들리에와 조각품들로 꾸며져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흔히 이런 아름다움에는 ‘우아미’라는 단어를 쓰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회당에는 ‘숭고미’, 아니 그 이상의 단어를 써도 모자랄 것 같았다. 소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에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니. 이런 장소를 알고 있는 남자에게 또다시 고마웠다. 이런 마음을 가득 담아 연주해야지. 소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금빛 타일이 깔린 회당의 중앙 단상 아래에서 악기를 들었다. 에트왈 역시 회랑 내의 차분한 공기를 타고 잔잔한 울림을 내었다. 그녀의 손이 현 위를 미끄러지듯 흘렀다. 순간 에트왈에서 명랑한 소리가 울려펴졌다. 그 울림은 너무나도 특별한 것이었다. 세상의 다른 어떤 악기도 낼 수 없는 에트왈에게서만 나오는 소리였으니까. 또렷한 공명을 확인하자마자 소나는 확신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세줄 건너 가운데 음부터 음악을 끌어올려갔다. 작은 회당 안에 현의 소리가 가득 찼다. 남자는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이 사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는 눈앞의 그녀는 마치 뮤즈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연주는 소리 그 이상이었다. 사람을 치유하고, 원기를 복돋으며, 때로는 피를 끓어오르게 했다. 소리 자체는 고막의 울림에 지나지 않지만 고막의 울림을 통해 대뇌피질에서부터 생명의 소리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잠시 현을 뜯는 것을 멈추는 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질 정도로 한 순간 순간이 아름다웠다. 소나 역시 지금까지의 연주에선 느낄 수 없는 황홀함에 빠져 있었다. 한 사람을 위해 연주한다는 것, 그것은 너무나도 행복한 것이었다. 자신의 연주를 들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얼굴에서 소나는 연주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손이 다급해졌다. 그녀의 심장소리 역시 연주가 절정으로 다다를수록 빨라졌다. 너무 긴장한 걸까. 소나는 당황했다. 자꾸만 얼굴이 붉게 물들고, 그 사람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수백명의 관중들 앞에서도 음악에 몸을 맡기기만 한다면 전혀 떨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 앞에서는 아무리 연주에 집중하려 해도 자꾸 흔들렸다. 에트왈은 이런 소나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새침데기 소녀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가올 듯 말 듯, 먹먹한 소리지만 듣기엔 또렷하게 들리는. 그녀의 마음은 마치 팽팽한 에트왈의 줄 만큼이나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간신히 연주를 끝내고 소나는 남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남자는 연주가 끝나자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버렸다. 그녀는 자기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것 같아 몸둘 바를 몰랐다. 어쩌면 좋지. 어쩌면 좋아. 이윽고 남자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연주... 잘 들었어.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였어. 고마워.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해줘서.” ‘구해주고 이렇게 예쁜 옷을 사준 보답이니까.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야.’ 소나가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할 말이 있어” ‘...?’ “여기서부터는 안전하니까, 이제부터는 혼자 길을 떠나렴. 고국이 데마시아라고 했지? 그리고 이 곳에 초청받아 온 거니까 국경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거야. 하지만 나는 녹서스인이니까, 데마시아인과 오래 교류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무사하지 못해. 그러니 잘 가. 같이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 소나는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벌써 이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더 함께하고, 아니 이 남자라면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녀는 다시 펜을 들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나를 구해준 거야. 옷은 왜 사준 거고, 또 왜 날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어 놓은 건데’ “널 구한건 단지 죽은 여동생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나는 녹서스 길거리에서 너처럼 곤란한 상황에 빠진 여자들을 구하는 것이 일이야. 그러니 이제 너는 더 이상 내가 보호해야 할 이유가 없어. 그러니 이제 나는 가봐도 되잖아?” 남자 역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도 이별을 바라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이 아가씨를 평생 사랑하고 아끼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이 커져서는 안된다는 걸 알기에. 남자는 그녀를 밀쳐내고 있었다. ‘바보!’ 소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남자의 눈 앞에 종이를 바싹 들이댔다. 이대로는 안 질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너야말로 내가 너 위해 무엇을 해줬는지 알면 이제 날 좀 이해해줘. 난 할 일이 많아” ‘......’ 소나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천천히 고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안겨준 사람이 떠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멈춰버렸으며 좋았을 텐데. 시간의 모래시계를 번갈아 뒤집어 엎을 수만 있다면 현재는 현재이고 미래도 현재니까, 과거도 현재로 흘러가 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때였다. 남자가 소나에게 다가왔다. 소나는 그를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버텨내려는 소나의 팔을 가볍게 어깨에 얹고 두 팔로 소나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시간은 잠시 멈추었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믿고 있었다. 그때 남자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소나는 지금까지는 맡아보지 못한 눈물 향기를 느끼고 남자를 꼭 안았다. 그의 품은 따뜻했다. 지금까지 있어 본 어떤 난롯가보다도 따뜻하면서 나른하지 않았고 상냥하면서도 외람되지 않았다. 둘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렸다. 현의 울림에 미묘하게 떨리던 초승달 빛이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날 밤 소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자는 떠나지 않았다. 국경까지는 함께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거면 충분할거야. 소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다리를 베고 누운 남자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남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명랑하고 능글맞기만 하던 사람에게 그런 슬픈 일이 있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녀는 그런 남자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워 그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해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이 있든, 멀리 떨어져 있든, 나의 소리의 주인은 앞으로도 이 사람이 될거야. 이 사람을 위해 살아가고, 이 사람과 함께 죽어야지.’
여자는 남자의 볼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남자는 평온하게 잠들었다. 에트왈은 부드럽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그 소리는 연인들의 창가에 깃든 별빛의 노래와도 같았다.
소나와 남자는 다음 날 길을 떠났다. 말은 두 필이었다. 돌아올 때는 한 필이 되어 있겠지만 두 사람은 아무렴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기쁨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녹서스 시내에서 벗어난 교외지로 나가자마자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다. 겨울의 도시가 서늘했다면 벌판은 한기로 가득 차 있었다. 곧 만물이 얼어붙겠지. 발로란 대륙의 겨울은 매서우니까. 소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벌판에서 소박한 작은 마을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데마시아와 녹서스 사이의 전쟁으로 폐허가 되기 전 이곳은 작지만 꽤 번창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근처 평원에서 일어난 전투를 승리하고 오만감에 도취된 데마시아 전사들에 의해 이 마을은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데마시아 사람들에게 정의란 그들이 지켜야 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들이 추구하는 것 자체였기에 또 뒤집기도 쉬운 것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곧 정의이기에 그들이 부와 명예를 바란다면 그것이 곧 정의이고 가난과 불명예는 마땅히 도태되어야 할 것들이었다. 어쩌면 남자의 여동생도 그런 부조리에 희생된 걸지도 몰라. 소나는 마음이 아파왔다.
‘여동생은 어쩌다가..?’ “사고였어” 남자는 말을 끝마치자마자 고개를 휙 돌렸다. 소나는 여자의 직감으로 보통 사연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힘들어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만 물어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사연은 의외로 남자 입에서 쉽게 나왔다.
“우리 아버지는 원래 녹서스의 권력자 다크월의 수하였어. 전쟁에서는 수많은 데마시아 사람들을 쓰러뜨리신 명장이었지. 우리 일가는 탄탄대로를 걸었어. 그 높으신 뒤 쿠토 장군의 딸 카타리나와 카시오페아와도 친하게 지냈을 정도로 말이지.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전투에 나가 며칠 간 돌아오시지 않으셨어. 아버지는 늘 전투를 승리를 이끄시는 분이었으니까 우리 가족들은 곧 돌아오실줄 알고 기다렸어. 그런데 몇주 뒤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전사 소식과 보상금 몇푼이었지. 가족은 실의에 빠졌고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나는 아버지가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권력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다녀야만 했지. 하지만 그들은 비탄에 빠진 우리 가족을 모른 척 했어. 달라진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 하나였어. 하지만 우리 가족은 금세 모든 것을 잃었지. 나는 군대에서 복무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기간에는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가족을 보살폈어. 그리고 얼른 아버지처럼 뛰어난 장군이 되어 어머니와 여동생을 다시 행복하게 살게 해주고 싶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오랜만에 우리 집에 아버지의 오랜 친구라는 분이 찾아오셨어. 그런데 그 분이 나에게 알려주신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어.” ‘무슨 일이었길래..?’ “아버지는 전사하신 게 아니었대. 최근에 다크월 장군의 자리를 노리는 거대 세력이 등장했는데 그 세력들에 의해 교묘하게 암살되신 거라고... 내 마음은 그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지. 그리고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어. 알고보니 그 세력의 우두머리는 검은 장미단의 수장 르블랑과 비밀스러운 천재 군인 스웨인이었던 거야. 나는 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저널 오브 저스티스에 모든 자료를 넘겼어. 아버지의 억울한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지. 그런데, 어느 날, 어느 날.....” 남자는 잠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치워 내었다. 소나는 그런 남자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와보니 여동생과 엄마가 참혹하게 살해당했어. 나를 노린 범죄인 것 같은데 오히려 내 가족들만 당한 거야. 아름다웠던 여동생은 남자들에게 험하게 당해서 옷이 제멋대로 찢어져 있고 눈도 감지 못한 채 핏덩어리로 세상을 떠났고 엄마는 칼에 난도질 당한 채로 버려져 있었지. 나는 일순간에 내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어. 그 이후로 나는 녹서스의 뒷골목을 전전하며 유랑 용병이 되어야만 했지. 그러면서 그들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자꾸 위험한 꼴을 당하는 여자들을 보니 내 동생이 떠올라 가만 둘 수 없었어. 너도 그랬고. 사실 네가 입었던 그 하얀 드레스, 내 동생이 좋아하던 옷이었어. 넌 너무나 내 동생을 닮았으니까...그래서...” ‘......’ 소나는 자신이 말을 할 수 없는게 너무도 안타까웠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위로의 한마디도 해줄 수 없는 나는 얼마나 매정한 여자일까. 그녀는 남자에게 이렇게 썼다. ‘쉬어 가자. 이제 괜찮아’ “응...” 두 사람은 큰 아름드리 나무 그늘 아래에 걸터 앉았다. 누군가 깔아놓은 푹신한 건초가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남자는 방금 전 이야기 때문에 아직도 침울해 보였다. 소나는 남자를 쓰다듬고는 에트왈을 들었다. 치유의 선율이 울려퍼졌다. 남자는 평온히 잠들었다. 가엾은 남자. 어린 나이부터 세상을 자기 등에 전부 짊어져야 했던 남자. 소나는 남자를 품 안에서 재우고 자신도 남자 위에 쓰러져서 잠들었다.
오후 늦게 두 사람은 달콤한 낮잠에서 눈을 떴다.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밤이 깊기 전에 민가에서 밤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방에서 소나가 조용히 필담을 시작했다. ‘사실은 네가 부러워’ “왜?” 여독에 지쳐 윤기를 잃은 소나의 머리카락을 가다듬어주던 남자가 말했다. ‘나는 청상 고아였으니까.. 가족이란 것을 가져보지 못했어. 물론 스승님은 친어머니처럼 날 대해주셨지만 그래도 나는 가끔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궁금해. 그들은 왜 나를 버리신 건지.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아’ “너 같이 예쁜 아이를 버리신 데는 무언가 정말 심각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 ‘아이 참, 어릴 때는 별로 안 예뻤어. 고아원 보모들이 조용한 공주님이라고 부르긴 했는데.. 이마는 넓고. 코는 또 높고..’ 소나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졌다.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고국으로 돌아가면 뭘 할거야?” ‘계속 연주여행을 다니겠지? 나름 유명하니까. 만약 녹서스에 갈 일이 생긴다면 꼭 봐 주었으면 좋겠어.’ “그때도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을까? 현의 명인 아가씨?”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네.’ “그때는 너도, 나도 둘다 조금 더 자라있을까?” ‘물론이지. 더 좋은 노래를 준비할 테니까.’ “나도 더 멋진 사람이 돼 있을게”
둘은 서로를 꼭 껴안았다. 창 밖에는 쌀쌀한 바람이 불었지만 서로의 체온을 나누면 전혀 춥지 않았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거나 그런 것은 너무도 그 상처가 깊어 힘든 것이었지만,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 같은 시간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두 사람에게는 축복이었다. 며칠 뒤, 녹서스 국경에 도착했다. 황량한 벌판 너머로 작은 키의 수풀들이 푸르게 자란 데마시아 땅이 보였다. 가깝지만 너무나도 다른 나라, 데마시아와 녹서스. 하지만 그 곳에서 같은 사연을 가진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는 건 소나에게 분명한 행복이었다. 노을이 진 시각이라 국경을 넘어갈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더 늦게 헤어지고 싶은, 어린 아이 같은 마음뿐이었다. 둘은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집 마당에서 본 밤하늘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소나는 옛날의 추억들을 떠올렸다.
‘첫 콘서트때 말이지, 어디서 했는 줄 알아?’ “어디에서 했는데?“ ‘작은 바깥 무대에서 했어.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 “누구나 처음은 힘든 법이지. 나도 처음에 전쟁터에 나갔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데. 내 옆의 사람이 죽었을 때는 너무 두려워서 도망칠 수 없었어” ‘그래도 용케 살아있잖아’ “얼마나 다행이야. 너도 만나지 못하고 죽을 뻔 했는데” 소나가 수줍게 웃었다. 남자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첫 무대에 섰을 때 다리가 오들오들 떨려서 스승님만 계속 바라봤어. 실수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의문만 계속 가지고 있었고... 그런데 악기를 켜기 직전에 하늘을 바라봤어. 도와달라고 기도하려고 말이지. 그런데 하늘이 너무 아름다웠어’ “오늘 밤하늘 만큼이나 아름다웠어?” ‘모르겠어. 하지만 그때 별들이 너무 예뻐서, 그 아름다움에 취해 두려움도 잠시 잊고 연주했던 것 같아’ “하지만 오늘은 별이 잘 안보이는걸” “.......?” 소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 옆에 천사님이 내려와 계셔서 너무 눈이 부시거든” ‘.......’ 소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잠시만 다시 여길 볼래?” ‘.......“ 소나가 뒤돌아 본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얼굴을 보여준다면 부끄러우니까. “그러지 말고. 선물 줄게” “.......”소나가 물끄러미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지니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 소나에게 걸어주었다. “이것만 있으면 언제라도 함께 하는거야. 다시 만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 소나는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간단한 말도 할 수 없어서 슬펐다. 내 마음을 읽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왠지 남자가 야속하기만 했다. 소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 사람을 위해 줄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좋은 음악? 그것 뿐일까? 아니면.... 남자는 이런 고민에 빠져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처음 하룻밤을 보냈던 그때처럼. 그제서야 소나는 자기 옆의 남자에게 자신이 해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여자는 살포시 미소를 짓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사랑을 축복하는 에트왈의 따사로운 소리가, 혹은 하늘을 가득 매우고 있던 별과 은하수의 세레나데가 울려퍼졌다. 둘 중 무엇인지는 하늘만, 아니 이 세상 다른 그 어떤 것도 모를 것이다. 다만 그 소리는 두 사람의 현재와 닮아서 세상 그 어떤 사랑노래보다도 달콤했다.
fin..
--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인사드리는 루나래빗입니다. 재밌으셨는지 모르겠군요. 첫작 치고는 소나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쓰느라 텐션이 올라갔,... 라기보다 그 모델은 접니다! 라고 하면 안되겠죠. 사실은 이즈... 도 아니에요. 그냥 하얗게 불태웠어요. 롤은 북미섭 30이고 시작한지 얼마 안 됐어요..ㅎㅎ 고3이라.. 앞으로도 많은 관심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P
350
(50%)
/ 401
루나래빗
|
인벤 공식 앱
댓글 알람 기능 장착! 최신 게임뉴스를 한 눈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