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스. ??

 “마르쩰로라고 아랑요, 잭스으?”

 베사리아는 혀가 좀 꼬부라진 목소리로, 어눌한 발음으로, 한 손에 반쯤 빈 포도주 병과 나머지 한 손엔 립스틱 자국이 묻은 유리잔을 든 채 비스듬히 의자에 앉아서, 멍하게 풀린 눈빛으로 잭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딱 봐도 별다른 의도를 가지고 꺼낸 이야기는 아닌 듯싶었다. 아마 정치와 대륙 정세부터 시작해 포도주 코르크 마개 상표까지 온갖 주제로 주절주절 떠들다가 더 이상 생각나는 화제가 없자 던져나 보자는 심정으로 말한 것이리라, 잭스는 대강 그렇게 짐작했다.

 둘이 있는 곳은 베사리아의 저택 정원이었다. 사실 정원이라고 부르기도 뭐했다. 말이 정원이지 그녀의 사생활 성격 상 관리를 전혀 하지 않은 탓에 저택 담벼락 안쪽은 거의 밀림을 방불케 했으니까 말이다. 바로 그 정원 구석, 간신히 식물이란 이름의 녹색 괴물들에게서 벗어난 정자에서 베사리아와 잭스 단 둘만의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자 바닥에 굴러다니는 각종 빈 술병들은 몇 시간 동안 퍼마신 그들의 주량을 짐작케 했지만, 정자 한켠에는 그들이 마신 것보다 배는 더 많은 술들이 나무 상자에 담겨있었다. 흐느적거리는 베사리아에서 그 술상자 더미로 시선을 옮긴 잭스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점심때부터 날이 어둑어둑해지는 때를 넘어 쏟아질 듯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보이는 지금까지 열심히 술을 퍼마셨지만, 상자는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저렇게 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냐면, 이번에‘도’ 베사리아의 그 저주받을 충동구매 덕분이었다.

 으레 상임의원들에겐 지위가 지위이다보니 계절이 끝날 즈음이나 특별한 날엔 각종 선물이 들어오고는 했는데 이번에 베사리아에게 들어온 선물 중 맛좋은 포도주 하나가 섞여 있던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무려 베사리아는 그 술을 맛보고선 맘에 꼭 들었는지 어쨌는지, 단박에 그 양조장으로 달려가서 양조장의 모든 술을 몽땅 사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안된다는 걸 웃돈까지 줘 가면서! 또 베사리아가 한 달치 봉급을 몽땅 써버렸다는 멘드레이크의 푸념 아닌 푸념(멘드레이크는 잭스와는 달리 이 문제에 대해선 마음을 싹 비운지 오래였다)을 듣고 잭스가 그녀의 저택으로 왔을 땐 이미 상황은 모두 끝나 있는 상태였다. 

 그를 반기는 건 ‘사놓긴 했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라는 표정으로 쑥스럽게 웃고 있는 베사리아와 작은 동산 규모로 쌓여 있는 술 상자들이었다. 그야말로 잭스는 그녀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또 돈 없다면서 자기나 멘드레이크에게 돈을 꾸러 올게 뻔했기 때문에) 기왕 이렇게 된거 술이나 원없이 마셔보자고 하는 베사리아의 꼬드김에 넘어가 즉석에서 술판을 벌였던게,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술판의 전조라 할 수 있었다. 이젠 잭스도 될대로 되라는 심정에 마음이 한없이 편안한 상태였다. 좋게 말하면 득도한거고 나쁘게 말하면 자포자기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그도 상당히 취해있긴 했다.

 “아이, 잭스으~마루쩰로라고 들어봤냐니까요오~”
 “물론 알고 있소.” 잭스가 텅 빈 술병을 내려놓고 상자에서 새로운 술을 꺼내며 말했다. “녹서스에 있는 대형 레스토랑 아니오. 미식가 협회 별 네 개짜리.”

 그는 이 말을 하고선 그 근엄한 목소리에 걸맞지 않게 킬킬거렸는데, 믿기 어렵겠지만 이건 잭스가 농담이랍시고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병마개를 비틀어 열더니 입 주변으로 짐작되는 가면 구멍에 쿡 박아놓은 작은 깔대기에 무슨 연료 집어넣듯 술을 병째로 들이부었다. 옷깃 사이로 그의 목울대가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그가 들이붓고 있는 술의 이름은 ‘베르카디 131(Verkhadi 131)’. 베사리아가 마시고 있는 포도주나 사과주 등의 과실주의 도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려 알콜 도수 65도가 넘어가는 독한 술이었다. 그런 독하디 독한 술을 담았던 술병들이 텅텅 빈 채 전사한 시체처럼 그의 발밑에서 열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그 독한 술을 그냥 입에 들이붓는 경악스러운 주법으로 마시고도 비교적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잭스는 술꾼들의 성자요, 신이 내린 술꾼이었다.

 “아니에요오-!”

 어째 시간이 갈수록 급속도로 반응이 배 이상으로 느려지는 베사리아가 유리잔으로 테이블을 탁 치자 술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베사리아가 안주랍시고 내놓은 치즈 덩어리에도. 덧붙여 말하자면 그 치즈 덩어리는 잭스가 자르다가 안에서 쥐 시체를 발견한 이후론 잭스도 베사리아도 손도 안댄 것이었다.

 “당신이 말하는 건 미르젤리 레스토랑이구요오, 난 지금 마르쩰, 히끅, 마르첼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라구요오-!”

 …어째서 혀가 꼬일 때까지 술을 퍼먹어놓고서도 자기가 한 말이랑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일까, 그것이 베사리아의 신기한 술버릇 중 하나였다. 베사리아는 개개풀린 눈으로 잭스를 째려보며 말을 이었다.

 “소원을 따악 한 가지만 뭐든지 이뤄준다는, 그 돌인지 공인지 주사위인지 하는 거, 끅, 있잖아요오. 다아 알면서!”

 베사리아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치즈 덩어리(쥐 시체가 든 바로 그것) 한쪽을 나이프로 슥 베어 입에 넣고선 오물거렸다. 당연히 잭스는 말리지 않았다. 재밌으니까. 베사리아는 아마 자기가 뭘 씹고 있는지도 모를 터였다.

 “그래서 잭스는 그거 가지면 뭐어를 빌고 싶을까요? 천하의 잭스니임…….”

 헤롱거리며 중얼거리듯 이야기하는 베사리아를 바라보며, 잭스는 술 한 번 더 들이붓는 걸로 침묵을 지켰다. 마르첼로. 그걸 왜 그가 모르겠는가. 뭐든지 단 하나 소원을 들어준다는, 아득한 전설 속의 주사위. 온갖 미신과 전설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지는 용병들의 세계에 몸담고 있던 그가 그 마르첼로를 모를 리가 없었다. 비록 전장에서나 떠도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일지라도 그 내용 자체는 매혹적이었다. 너무 매혹적이어서, 마치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느껴질 정도로. 만약(절대로 그럴 리 없겠지만, 그게 ‘만약’이라는 가정법의 묘미 아니겠는가) 그런게 자신의 손에 들어온다면…잭스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창한 것까지 써서 이루고픈 소원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던 것이었다. 그는 전쟁 그 자체인 삶을 살아오며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욕심은 곧 죽음과 직결되는 곳이 바로 전쟁터였으니까. 그래서 그는 아무렇게나 베사리아의 물음에 답했다.

 “흠…….” 그는 가면 밑으로 손가락을 넣어 턱을 긁적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붉은 달의 아리아’ 19년산 시리즈 딱 한 병만 달라고 하고 싶소. 그건 데마시아 왕실 헌정품이라 돈으로는 구할 수 없거든.”
 “뭐에요, 좀스럽게에…….” 베사리아가 김이 빠진다는 듯 테이블에 얼굴을 찰싹 붙이고 중얼거렸다. “과거를 바꾸고 싶다느은…생각은 안 들어요, 잭스?”
 “……."

 잭스는 또 한 번 입을 닫았다.

 “늘 후회했잖아요, 룬 전쟁…….”

 베사리아가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술김에 나온 이야기 치고는 꽤 무거운 주제였다. 그녀에게나, 그리고 잭스에게나. 잭스가 어물쩍 딴 대답을 했을 때 그냥 넘어갔어야 했는데. 베사리아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그렇다고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잭스는 과거를 후회했다. 10년 가까이 지내면서 상대를 속속들이 파악한 건 잭스 뿐만이 아니었다. 베사리아 역시 잭스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끔 그가 온몸으로 쓸쓸함을 표출하며 먼 곳을 아련하게 바라본다던가, 술은 마시면서 좀처럼 고기는 손도 대지 않는다던가, 의도적으로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으며 초야에 묻혀 산다던가……. 베사리아가 보는 그의 모습은, 쓰임새의 의미를 잃어버린 한 자루 낡은 장검이었다. 여기저기 덧대고 손때로 반들반들하지만 그 날은 아직도 예기를 품고 있는, 그러나 이 평화가 지속되는 한 쓰일 곳이 없는…그저 과거 룬 전쟁의 얼마 남지 않은 잔재. 베사리아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느낌은 잭스가 자기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생각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대와 애쉬람, 그리고 멘드레이크와 만나기 전이었다면 아마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었을 거요. 룬 전쟁이,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걸로 되길 원한다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생각은 비열했소. 그건 과거를 후회하는게 아니오. 과거에서 도망치는 것이지. 그렇지 않소, 베사리아?”
 “…….”

 이번엔 베사리아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테이블에 엎어져 있었지만 잭스는 그녀가 깨어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령 정말로 마르첼로가 있어서 룬 전쟁을 없는 걸로 한다 친들, 내가 그 전쟁을 겪으며 수많은 생명을 이 손으로 앗아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소. 그건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요.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업보. 그걸 없었던 일로 치부해버린다는 것은 내 자신에 대한 배신이자…내가 살기 위해 짓밟았던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오. "잭스는 술병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소. 과거를 후회하긴 하지만 그걸 없었던 일로 치부해버리고 싶진 않소. 좋든 싫든 그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과거는 가치가 있는 법이라 생각하오, 베사리아.”
 “그래서어…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오, 고작 소원이 술 한 병 달라는 거에요오?”
 “하하하, 이거 한 방 먹었군.”

 잭스는 아주 오랜만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개인적인 이유는 앞서 말한 그대로지만, 사실 룬 전쟁을 없었던 것으로 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또 있긴 하오. 만약 룬 전쟁이 없었더라면 그걸 해결하기 위한 전쟁학회도 없었을 것이고, 그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국가 간의 분쟁을 조절하는 구심점도 없었겠지. 또 공허의 존재들을 전면으로 막을 수 있는 강력한 억제력 또한 없었을 터이고.”
 “치잇…쪼잔하게…….”
 “…도대체 당신이 생각하는 쪼잔함의 기준이 뭐길래 그러시오?”

 베사리아는 의미 불명의 푸념을 조그맣게 궁시렁거리며 유리잔을 못살게 굴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버리면…나도, 후회하고 있는데…내가 너무 바보같이 느껴지잖아요…….”
 “…너무 과음했소, 베사리아. 일어나시오, 침대까지 데려다 줄테니.”

 베사리아가 너무 심하게 우울해하자 안되겠다 싶었던지 잭스가 그녀의 유리잔을 뺏고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베사리아는 깜짝 놀랄만큼의 순발력으로 잭스의 손을 피하더니, 재빨리 남은 포도주를 잔이 넘치도록 눌러담고 뭐라 할 새도 없이 주욱 한 입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 발악이었는지 베사리아는 절인 배추처럼 축 늘어졌다. 잭스는 그런 베사리아를 보며 한숨을 푹 쉬고선 대충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한텐 안 물어봐요오?”
 “뭘 말이오?”
 “씨잉…나한텐 왜 안 물어봐요, 소워언……. 내가 말했으니까 잭스도 물어봐야 하는게 예읜데…치사하고 짭쪼름하고 막돼먹고, 술만 돼지같이 꾸역꾸역 퍼마시는 바보 멍청이 잭스…….”
 “…………….”

 술 취한 걸 방패삼아 가슴에 담아뒀던 온갖 막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베사리아였다.

 “후우…그럼 어디 말해보시오.”
 “뭐얼요?”
 “그 잘난 소원 말이오, 소원!”

 베사리아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잭스가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딱딱거렸다.

 “소원…….” 베사리아가 이번엔 테이블보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엄, 나도오…과거 후회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의미로?”
 “마르첼로가 있으면 주름살 좀 지워달라고 빌고 싶어요오……생각해보니까 정말 최고의 미용 용품이네요…헤헤…….”
 “…….”

 미용 생각하면 과음이나 하지 말면서 그런 말을 하시오, 라는 말이 잭스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는 어이가 없었다. 주름살이야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인데 그걸 왜 없애달라고 하는 것인가? 차라리 자기 소원이 백배는 더 나아보이는 잭스였다.
 
 “차라리 보석이나 한가득 달라고 하지 그러시오.”

 내 돈 뺏어서 사지 말고, 라는 뒷말이 들리는 듯한 한 마디였다.

 “마법 재료로 쓸 보석은 학회에 차고 넘치는데 뭐하러요. 개인적으로 쓸 건 멘드레이크나 당신 돈 빌려서 사면 되는데…….”
 “…제발 부탁이니까 자기 돈으로 사서 쓰시오.”
 “싫어요오…다 써버렸으니까아…….” 베사리아는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근데 보석은 돈으로 살 수 있는데에…주름살은 돈 준다고 안 사라지니까아…….”
 “마법으로 가리면 되지 않소.”
 “마법이 무슨 화장인 줄 아시나요, 잭스으…….”
 “너무 그러지 마시오. 주름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지 않…….”

 순간 공기가 변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공기가 변했다. 잭스는 말을 다 할 수 없었다. 가면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사막 모래바람과도 같은 뜨거운 바람이 안면에 확 몰아쳤다. 그 근원지는 베사리아였다. 그녀는 언제 취하기라도 했냐는 듯 분노에 가득찬 눈빛으로, 온 몸에서 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잭스를 노려봤다.

 “저 그렇게 안 취했어요 잭스. 제가 말했죠, 절대 내 앞에서 나이니 뭐니 이야기 하지 말라고. 그리고 내가 취해서 있다고 무시하지 말라고! 제가 이래보여도 알아들을 건 다 알아듣는다고요!”
 “아니 먼저 얘길 꺼낸 건 당신…….”
 “이제 숙녀에게 책임까지 떠넘기나요! 어떻게 숙녀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고선 그렇게 파렴치하고 뻔뻔스럽게 나올 수 있죠? 그 가면 밑의 얼굴도 가면만큼이나 두껍나보군요!”

 잭스는 기가 막혀서 맥이 탁 풀릴 지경이었다. 베사리아가 나이에 대해 예민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세상에 이 정도일 줄이야. 그녀는 지금 술에서 깬게 아니라 몸속의 마력을 돌려 강제로 각성상태가 된 것이었다. 그것도 술에 취해 자제심이라는 브레이크가 사라진 채로. 베사리아의 머릿속엔 앞의 대화 내용따윈 들어있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잭스가 자신에게 ‘나이가 들었다’라고 말한 것이고, 그게 그녀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것 전부였다. 다른건 전부 개미 발자국만큼이나 하찮기 그지없는 것들일 뿐이었다.

 “나 참 어이가 없…자, 잠깐 베사리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잖소!”
 “용서할 수 없어요, 어떻게, 어떻게!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베사리아가 이를 갈며 살짝 손짓을 하자 그 육중한 테이블이 공중에 둥둥 떠서 성난 황소처럼 잭스를 향해 위협적으로 까닥거렸다. 그녀는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뭔가를 계속 웅얼대면서(간간히 ‘나이’와 ‘주름살’이란 단어만 제대로 들렸다) 잭스를 노려봤다. 그 눈빛이 흡사 부모님의 원수를 바라보는 눈빛 바로 그것이었다. 잭스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낄 수 있었다. 설마 저 테이블을 자신에게 던지려고 들은 건 아니겠지? 그의 마음속으로 그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으나…‘설마가 사람 잡는다’라는 아이오니아 격언은 괜히 있는게 아니었다. 아차 하는 사이 테이블은 그를 향해 대포알처럼 쏘아졌다. 그리고…….

 쾅!

 퍽도 아니고 쾅이었다. 잭스는 입으로 흘러드는 찝찔한 콧물과 피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코가 깨진게 틀림없었다. 눈앞에서 별무리 휘청휘청거렸다. 쓸데없이 마력으로 강화라도 한 것인지 테이블은 그렇게 세게 부딪혀 놓고서도 멀쩡했다. 정말 쓸데없는 곳에서 빌어먹을 정도로 세심하다고 잭스는 욕지거리를 했다. 그러나 그게 입 밖으로 나올 일은 없었다. 그도 그럴게 뒤로 물러났던 테이블이 다시 그를 향해 쏘아졌으니까.

 쾅, 쾅, 쾅!

 “잠, 크헉, 베사리아! 진짜 날 죽일 작정…컥!”
 “시끄러워요, 시끄럽다고요! 그 입으로 두 번 다시 나이란 말을 못하게 해드릴게요! 아니 그냥 말을 못하게 해드릴게요! 아니! 그냥 여길 당신 무덤으로 만들어드릴게요!”

 온갖 방향으로 날아오는 테이블에 잭스는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베사리아가 여자라서 반항을 안하는게 절대 아니었다. 반항은 둘째치고 말할 틈도 없이 테이블이 전방위에서 날아왔고, 잭스는 문자 그대로 복날 개 패듯 쳐맞는 수밖에 없었다. 취했어도 상임의원이란 직위를 딱지치기로 딴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듯이 베사리아의 염동 마법 실력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정말 멘드레이크의 표현대로 ‘쓸데없는 곳에서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어, 막아요? 막네요? 그래 반항할 힘이 남아 있다 이거네요? 반성을 덜 했다 이거네요!”
 “살려고 그러는거요!”
 “말대꾸까지 할 힘도 남아있군요!”

 그건 정말 가혹한 오해였다. 그럼 목을 향해 테이블이 날아오는데 가만히 맞고 목 부러지기라도 하란 것인가? 잭스는 지금 반항이고 뭐고 다 필요 없이 오직 살기 위해 몸을 구부리고 양 팔로 공격을 막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상실한(그런 주제에 언행과 마법 실력은 정상인) 베사리아에게 잭스의 행동은 기름에 불을 댕기는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잭스를 씹어 죽이기라도 할 듯 이를 득득 갈던 베사리아가 손을 위에서 아래로 휙 긋자, 테이블의 궤도가 갑자기 기괴하게 뒤틀리더니 잭스의 머리 위로 쾅 하고 떨어졌다. 잠시 그대로 서있던 잭스는 가면에 난 일곱 개의 구멍에서 피를 쏟고 죽…지는 않았지만 뒤로 쿵 소릴 내며 자빠졌다. 그리고 완전히 뻗은 듯 고르게 오르내리는 배를 제외하고선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학, 하악……어머나 잭스으…내가아, 음냐, 무슨 짓을…….”

 몸속의 마력을 돌려 강제로 각성상태가 되었던 부작용이 삽시간에 찾아왔는지, 베사리아는 종전보다 열 배는 더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력을 돌리며 억제하고 있던 취기가 한꺼번에 몰려온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잭스으…어머나 움직이지 않네에…그래도 숨은 쉬고 있으니까 죽진 않았네요…에헤헤, 하긴 제가 죽을 정도론 안 때렸어요……용서해줘요 잭스으…….”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쓰러진 잭스에게 다가간 베사리아는, 약간 우그러든 잭스의 가면을 슥슥 문지르며 연신 고개를 꾸벅꾸벅 거렸다. ‘죄송해요오’ 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리면서. 가면에 대고 말하는 그녀의 입에선 지독한 알콜 냄새가 연신 뿜어져 나왔다. 결국 계속 실없이 헤헤 거리며 꾸벅거리던 베사리아는…그대로 잭스의 가슴팍에 쓰러져 골아떨어졌다.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전쟁 학회에서 비인가 마법사용을 감지한 단속반이 우르르 몰려올 터였다. 그들은 저택의 끔찍한 외관과 더불어 폭격이라도 맞은 듯 처참하게 박살나 있는 정원(이라 쓰고 밀림이라 해석하자)의 정자의 모습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잭스와 베사리아를 학회로 이송해 갈 것이고, 베사리아는 지각에 학회 바깥에서 비인가 마법을 쓴 데에 대한 시말서를 쓰느라 전쟁을 해야 할 터였다…주름만큼이나 말 많은 원로 소환사들의 잔소리를 배경 음악으로 깔고서 말이다. 잭스에게 펼쳐진 미래도 그다지 밝진 않았다. 무려 그가 깨어나야 할 곳은 학회 한구석에 마련된 취조실이었으니까. 얻어맞아 기절한 것도 억울한데 취조까지 해야 할 운명이 그의 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자신들 앞에 펼쳐진 이 암울한 미래에 대해 알 리가 없는 잭스와 베사리아는 그저 잠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베사리아가 그의 위에서 옆으로 기어내려 갔는지 잭스의 팔을 배개 삼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물론 잭스는 그런거 없고 그냥 기절한 것뿐이었다.

 몇 시간 뒤에 펼쳐질 이들의 운명이 암울하긴 했지만, 그건 일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잭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베사리아에게 민폐 좀 그만 끼치라고 화를 내도, 그런 행동도 전부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어떻게 보면 평화를 즐기는 이들 나름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날 술안주거리로 얘기했던 ‘마르첼로’가 그들에게 화를 내고 웃고 울 여유조차 없는, 끔찍하디 끔찍한 사건을 몰고 올 거라는 걸 이들은 아직 몰랐다.

 그것이 죽음과 피의 광기를 몰고 올 것이라는 것도.
 이들과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이룩해 낸 평화가 모래성처럼 바스라질 것이라는 것도. 이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아직은 평화로운 때, 그러나 어둠은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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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르카디 131(Verkhadi 131): 데마시아 북부 지방 도시인 푸에르코의 대표적인 럼(Rum). 이 지방 럼의 특징은 여러 과일을 한데 섞어 맛과 향을 첨가하는데 양조장마다 그 비율과 종류가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즉 양조장마다 고유의 럼이 있다는 것. 그 중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은 베르그 양조장의 베르카디 시리즈인데, 그 중에서도 넘버 131은 무려 60도를 웃도는 높은 도수를 자랑하기로 유명하다. 잭스나 그라가스 정도의 주당이 아니고서야 보통 사람이 병나발을 불면 급성 알코올 중독 걸릴 확률이 높다. 보통은 얼음이나 물에 희석해서 입술 축이듯 조금씩 마신다.

>바카디 151의 패러디다.

 2. 붉은 달의 아리아: 단편-가로등과 검 참조. 소게 모 작가님의 작품 제목이기도 하다.

롤 소게에서 팀 프로젝트로 진행하고 있는 '마르첼로'라는 합동 소설입니다. 제가 쓴 건 여기다가도 올리니 관심 있으신 분은 '리그 오브 레전드 한국 커뮤니티'의 소설 게시판에서 마르첼로라고 검색해서 보시면 됩니다. 

글이 생각 이상으로 잘 뽑혀나와서 기분이 좋습니다. 재밌게 보시길 바랍니다.

참고로 이 프로젝트는 제가 쓰는 가로등과 별이나 그 외전과는 전혀 다른 작품입니다. 다른 글들은 추후 업데이트 하겠습니다....파도 편 파트3 빨리 올려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