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방금 전까지의 격렬한 싸움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정적이 내려앉았다. 레오나도, 헬레나도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얼어붙은 채 굳어 있었다. 잭스는 분명히 반격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었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칼날은 그의 어깻죽지를 헤집고 파고들어가 있었다. 불컥불컥 튀어나오는 붉은 피가 그의 상의를 적시고 레오나의 얼굴에 툭툭 튀고 있었다.


 “크흑!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아프군.”

 “잭스? 괜찮아요? 아아 피가……! 서둘러 조치를! 조금만, 조금만 참고 있어요! 레오나! 치유 사제들을 데려올테니 응급조치 먼저 해두세요!”

 “아, 아아…….”


 헬레나가 대신관이라 해도 만능은 아니었다. 그녀는 치유 마법 쪽으론 완전 젬병이었고, 따라서 침착하게 치유 사제들을 불러오기 위해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급소를 다친 건 아니었지만 불컥거리며 샘솟는 피의 양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잭스가 저 정도로 중상을 입은 건 아주 오래 전 일어났던 칼날송곳 협곡 전투 이후로 처음이었다.


 좀 전에 화가 나서 레오나보고 잭스에게 한 방 먹일 각오로 싸우라고 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레오나가 진다는 전제 하에 내뱉은 말이었다. 완전히 해방된 솔라나움을 착용한다 치더라도 레오나가 잭스를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니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수렴했다. 그만큼 잭스는 강한 전사였고, 헬레나는 누구보다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잭스가 상처를 입다니……. 헬레나는 괜시래 자기 탓인 것만 같아서 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한편, 레오나는 잭스의 상처와 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어찌나 몸을 떨던지, 기다시피 해서 가져온 구급상자 속에서 꺼낸 가루 지혈제가 든 작은 통도 제대로 열지 못할 지경이었다. 오히려 침착하게 응급조치를 취한 건 잭스였다. 그는 어깨에 칼이 박힌 채로 상처에 지혈제를 뿌렸다. 혼자서 검을 뽑을 수는 없었다. 재수 없으면 한쪽 어깨를 평생 쓰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지혈제 통 하나 열지 못할 정도로 덜덜 떨고 있는 레오나에게 칼을 뽑아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끄으으윽!”


 그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뎌냈다. 지혈제가 뛰어나서 피는 금방 멎었지만 대신 엄청 아팠다. 달군 쇠톱을 어깻죽지에 쑤셔 넣고 있는 느낌이랄까, 잭스는 숨을 몰아쉬며 지혈제 통을 내동댕이쳤다. 피는 멎었으니 그 다음은 헬레나가 데려올 치유 사제들이 알아서 해줄 터였다. 그러나 그 전에…레오나와 끝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아직 그들의 싸움은, 끝난게 아니었으니까.


 “…레오나.”


 잭스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순간 레오나는 뺨 맞을 각오를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잭스는 그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 위해서 손을 뻗은 것뿐이었으니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크고 거친 손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레오나는 살며시 눈을 떠 잭스를 바라봤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거냐.”

 “제가 미숙해서…스승님께 큰 상처를 입혀버렸어요, 죄송합니다.”

 “그걸 묻고 있는게 아니다.” 잭스가 조용히 말했다. “난 네 이상을 비웃었고, 널 도발했고, 솔라리의 보물까지 멋대로 네게 입히도록 유도해서 널 몰아붙였다. 이 상처에 네 잘못은 없다.”

 “…….”

 “내가 널 이 정도까지 몰아붙인 이유는, 네가 너무 뒤틀려있기 때문이었다.”

 “저는…!”

 “안다, 네가 뭘 말하고 싶은지.” 잭스가 다치지 않은 쪽의 손을 들어 레오나를 제지하며 말했다. “나도 네 꿈이 무척이나 숭고하다는 것은 안다. 변화란 행동하지 않으면 절대 일어날 수가 없는 법이지. 너와 같은 이상을 가진 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 그래, 너라면 전쟁학회의 어둠을…몰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너의 그 올곧은 시선, 마음가짐, 그리고 시련을 이겨내는 인내심까지. 너는 전쟁학회와,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세력의 어둠에 물들지 않고 그것들을 몰아낼 수 있는 자세를 지닌 인재다. 하지만…….”


 잭스는 레오나를 바라봤다. 거기엔 강철 같은 신념을 가진 여전사도 배움의 열의에 가득 찬 수련 사제도 없었다. 그저 비 맞은 작은 새처럼 바들거리며 떨고 있는 소녀가 있을 뿐이었다.


 “네 꿈이 아무리 숭고할지라도, 그 근본이 어긋나 있다면 언젠가 너는 네 꿈 앞에서 좌절할 뿐이다. 그동안 긴가민가했지만 지금 네 반응을 보고서야 확신이 드는구나. 넌 모두를 지키고 싶어하는게 아냐. 모두를 지키고 싶다기보다는…상처 입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너에 의해서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든.”

 “……!”

 “남을 지킨다는 것은 누군가를 상처 입힌다는 뜻이다. 예외란 없어. 그러나 너는 그 누구도 상처 입길 바라지 않지.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려면, 아니 네 이상을 지키려는 경우만 해도 나라는 장애물을 쓰러뜨려야 하지 않았느냐.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겠지, 레오나? 네 꿈이 모순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레오나는 잭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자신도 외면해왔던 자신의 진짜 감정이었다. 숭고한 이념으로 포장되어 있어도 그 속은 후회와 죄책감이란 진흙덩어리로 가득 차 있는 거짓된 감정. 하지만…그녀가 도대체 뭘 어쩔 수가 있었겠는가? 과거를 잊고 살기엔 죄책감이 너무나도 컸고, 후회에 젖어 살기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잭스와의 수업에 열중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차라리 죽을 정도로 훈련을 거치고 지쳐 쓰러지면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잭스가 자신의 아픈 부분을 꾹 하고 찌른 지금은 자신의 진짜 감정과 마주해야 할 때였다. 피할 수는 없었다. 레오나는 다시 잭스를 바라봤다. 가면을, 가면 속에 있는 그의 시선을.


 갑자기 레오나는 뭔가 울컥, 목에 치닫는 느낌이 들었다. 눈물이 제멋대로 눈에서 흘러나고 있었다.


 “…제가 솔라리에 들어오기 전에, 코르의 제례(Rite of Kor)가 있었어요. 막 성인이 된 아이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그런…전통이죠.” 레오나는 ‘전통’이라는 단어를 더러운 것이라도 뱉듯이 말했다. “어쩔 수 없다는 건 저도, 거기 모인 모두도 알고 있었어요. 여기는 식량이 부족하고 쉽게 침략을 받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라도 입을 줄여야했고, 그렇게 해서 강한 전사를 선발해야 했어요. 거기서 그를 만났어요. 몰릭, 내 소중했던 친구. 그리고 내가 죽여야만 했던 상대.”

 “그래, 헬레나에게서 들었다. 너는 거기서 그 아이를 죽이지 않는 길을 택했고, 그 대가로 처형당하기 직전에 네가 태양의 힘을 각성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널 솔라리에서 거두어 들였고.”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그건 전체적인 과정에 불과해요.” 레오나가 조용히 말했다. “전 제가 몰릭을 구했다고 믿고 있었어요. 당시에도, 그리고 솔라리에 들어서는 그 순간에도. 전 제 신념을 지켰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몰릭에게는, 그리고 다른 라코어 인들에게는 그게 아니었나봐요. 그거 아세요? 라코어 인들은 싸움에서 패하는 것보다 도망친 걸 열 배는 더 치욕스럽게 생각해요. 그때 사람들은 몰릭이 당연히 솔라리에 거둬진 제 앞으로 나와 목숨을 거둬달라고 요청할거라 생각했나봐요. 하지만 몰릭은 그러지 않았어요. 겨우 살아남았으니까. 라코어의 관념에 따르기엔, 몰릭은 너무 여렸어요. 그리고 얼마 뒤 전 몰릭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어요. 수치심에 못 이긴 부모님의 손에 죽었다고, 그리고 그 부모님도 자살해버리셨다고…….”


 레오나는 손톱이 어깨를 파고드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자기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제가 그런 거예요. 제 알량한 신념이 몰릭뿐만 아니라 그 부모님까지 죽이고, 그들의 명예까지 더럽혔어요. 하지만…하지만 그 상황에서 도대체 뭘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요! 전 몰릭도 죽이기 싫었고, 코르의 제례라는 쓰레기 같은 전통으로 제 또래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것도 싫었어요! 그 아이들도 꿈이 있었을텐데! 따르고 싶은 스승이 있었을텐데! 살고 싶었을텐데, 누구보다도! 몰릭도! 몰릭은 칼은 못써도 목공예에 대해 얘기할 때면 그 누구보다도 열정을 보이는 아이였어요! 제가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했던 행동이, 결과적으론 그 아이를 죽여버렸다고요. 나 때문에, 내가, 내가 부족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은 흡사 동물의 울부짖음과도 같았다.


 레오나는 미친 듯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서, 그동안 쌓아왔던 괴로움, 슬픔,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대신관을, 나아가 자신을 선택해 준 솔라리 전체의 선택을 부정하는 일일 테니까. 거기다가 솔라리의 챔피언 후보로 선정된 마당에 더더욱 말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꾹꾹 쌓여 있던 감정이 지금 터져버린 것이었다.


 “스승님, 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죠? 저는,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젠 싫어요, 챔피언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요,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스승님의 말씀이 맞았어요, 전 뒤틀려 있어요, 챔피언이 될 자격 따위도 없어…….”

 “아니, 그렇지 않다.”


 잭스는 조용히 레오나의 말에 반박을 가했다.


 “비록 네가 그랬을지는 몰라도 넌 정말로 피나는 노력을 해왔다. 여기서 이대로 무너질 거냐? 레오나, 여기서 주저앉아 버린다면 넌 정말로 그들을 저버리는 것 밖에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레오나가 신경질적으로 빽 소리를 질렀다. “나보고 도대체 이 이상 뭘 어쩌란 말이에요, 나보고 뭘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고요!”

 “내가 도와주마.”


 잭스는 그렇게 말하며 레오나의 양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어깨의 상처가 쑤시긴 했지만, 이를 악물고 그녀가 자신의 시선을 볼 수 있도록 얼굴을 마주봤다.


 “넌 네가 잘못되어 있다는 걸 인정했다. 세상엔 자신이 잘못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못 고치는 사람이 있고, 그걸 평생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단다. 하지만 넌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을 인정했다. 그럼 네 역할은 그걸로 된 것이다. 나머지는 내게 맡겨라. 너의 스승으로서, 그리고 너보다 앞서 너와 같은 이상을 품었던 자로서 넌 절대로 나와 같은 길을 걷게 하지 않도록 이끌어 줄테니. 반드시 네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내가 이끌어주마. 반드시! 너는 나처럼 실패하게 두지 않겠다. 그러니 나를 믿어라. 그리고 언젠가는 네 말대로 이 대륙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와다오. 전쟁학회나 리그 따위의 조정 없이도,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런 시대를 네가 이끌어다오. 그럴 수 있겠느냐, 레오나?”


 레오나는 잭스의 말에 깜짝 놀랐다. 설마 그도 자신과 같은 이상을 품었던 자였는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입으로 자기는 실패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오나에게는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지 말게 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레오나는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훅 하고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같은 이상을 품었던 자에 대한 동질감이요, 실패해버린 자에 대한 연민이자, 믿음이었고, 그리고…알 수 없는 무언가의 감정이었다. 지금껏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신선한 그 무언가의 감정. 레오나는 잭스와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제가 가능할까요?”


 “물론. 넌 아직 어리다. 완성되지 않았지. 그건 앞으로 네 앞에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라, 네 자신에게. 그리고 너를 믿는 나에게.”

 “그럼 믿을게요.”


 레오나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서서히 그녀의 결연한 표정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흔들리지 않을게요.”


 잭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결연한 표정 위로 햇살이 드리우고 있었다. 진한 황금빛의 햇살이었다. 그녀를 축복하는 것처럼 태양은 그 어느때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태양빛을 받고 있는 레오나의 눈은, 어둠이 씻겨나간 듯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 레오나, 5년 후



 태양을 연상케하는 화려한 황금 무구로 무장한 여전사가 전쟁 학회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우아했으나 귀부인의 걸음이라기보다는 전사의 걸음에 더 가까웠다.


 화려한 갑옷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깊고 부드럽게 빛나는 눈, 희고 고운 피부, 앙다물어진 작은 입술에 절도 있는 움직임까지. 지금 갑옷을 입고 있지만, 좀 더 여성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조금만 꾸민다면 누구나 감탄해 마지않을 미녀로 칭송받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레오나. 5년 전 잭스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앳된 티를 다 벗어버린 그녀는 한창 피어나는 꽃처럼 생명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약간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럴만도 했다. 지금 그녀는, 챔피언으로서 마지막 시험인 ‘리그의 심판’을 거치러 가는 중이었으니까.


 “처음 뵙겠소, 레오나 양.”


 등 뒤에서 불쑥 누군가가 말했지만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의 감각을 속이고 접근할 수 있는 자는 몇 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 목소리에, 장소를 고려한다면…그녀는 뒤를 돌아서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예상대로 거기 서 있는 자는 잭스였다.


 “그동안 명성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챔피언 잭스.”


 다른 사람들이 듣기엔 무뚝뚝한 목소리일지는 몰라도, 레오나는 그가 가면 밑에서 빙글거리고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솔라리와 연이 있다는 것도 자신의 스승이라는 것도 모두 외부로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기에, 부득이하게 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선 잭스와 레오나는 이렇게 웃기지도 않는 연극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음, 이번에 리그의 심판을 치른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같은 지역 출신의 판테온에 비해 너무 느린 거 아니오?”

 “챔피언 후보로는 예전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만, 제 스스로 수련이 부족하다 판단하여 리그에 오길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이제야 허락해주셨으면서 뭘 그래요, 레오나는 그런 마음을 담아 곱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잭스는 짐짓 레오나의 눈빛을 못 받은 척 딴청을 피웠다. 사실 정말 레오나의 챔피언 등단엔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판테온이 대략 40번째로 챔피언으로 리그 챔피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면, 레오나는 거의 80번 가까이 되어서야 챔피언 명단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엔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근 5년 간 레오나는 순례 여행이란 명목으로 발로란 대륙 전체를 돌아다녔던 것이었다.


 5년 전 그 사건 이후로 잭스는 1년마다 정기적으로 찾아와 레오나를 지도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레오나에게 특정 지역으로 순례 여행을 떠나라고 지시했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라는 발로에서였다. 그의 의도대로 레오나는 여행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고, 그만큼 더 성숙해져왔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리그의 심판 따위 웃으며 통과해주리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잭스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혹 심판이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너무 좌절하진 마시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전 태양의 전사입니다. 전 꺾이지 않습니다, 그 어느 때에도.”

 “아니, 꺾일 거요.” 잭스가 ‘얘가 아직 뭘 모르는군’이라는 뉘앙스로 말했다. “챔피언 후보들을 한 번 떠보기 위해 만든 시스템이거든. 고약하기 그지없지. 개중에야 정말 심판을 꿰뚫어 본 자도 있다고 하지만…그들이야 아주 특이 케이스이고.”

 “전 그 특이 케이스가 안 될 거란 말씀이신가요?”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아니오.”


 넌 아직 멀었다, 잭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자가 큰 시험을 치루러 가는데 응원은 못해줄망정 재만 팍팍 뿌리다니…레오나는 슬쩍 입을 삐죽였지만 꾹 참았다. 잭스는 미운 소리를 해도 허튼 소리는 안하는 스승이었다. 그가 힘들 거라면, 심판은 자신에게 아주 힘들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설령 좌절한다 하더라도 다시 일어서리라. 그걸 위한 5년이었다.


 “충고 감사합니다, 무기의 달인.”

 “…다음에 볼 때는 소환사의 협곡에서 봤으면 좋겠군. 상대로든, 아군으로든.”


 마지막이 되어서야 잭스는 잘 보라고 빌빌 꼬아 응원의 메시지를 날려주고선 휘적휘적 걸어갔다. 레오나는 그의 등 뒤로 살짝 고개를 숙이며, 스승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심판을 통과하겠다고 이를 갈며 다짐했다. 골이 났는지 회랑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 사나워졌지만, 거기엔 5년 전과 같은 어둠 따윈 한 줄기도 서려 있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 속 어둠을 지우고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상, 그녀는 설령 좌절한다 할지라도 태양처럼 다시 밝게 빛날 터였다. 그리고 얼마 후 리그에선 새로운 소식을 발표했다.


 태양의 영웅이, 리그에 참전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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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길고 길었던 가로등과 태양이 이제야 끝나는군요, 빌어먹을 입니다. 무려 한글문서 20장 분량이 나와버렸어요. 지금껏 쓴 단편들 중에 제일 깁니다. 덧붙여서 끝마무리가 좀 맘에 안들긴 하네요. 각 편에 따른 제 심상은 이랬습니다.


1-오 레오나랑 잭스랑 ㅋㅋ 재밌겠네


2-조금 더 심도 있게 해볼까.....


3-아 이게 왜이렇게 길어지냐 짜증나게


4-아 존나 고통스럽다 그냥 빨리 끝내고 싶어


그리고 초기 콘티는 아래와 같았습니다.


레오나 잭스?


5대 1싸움 잭스와 솔라리 전사들. 솔라리 전사들이 태양을 섬기는 사제라고는 하나 그게 라코어 전사보다 약하다는 소리가 아님. 오히려 라코어 전사 중 가장 싸움 실력도 뛰어나고 인성도 올바른 애가 솔라리가 될 자격이 있다.


싸우고 끝. 잭스, 대신관 헬레나 솔라리와 대화. 잭스와 옛날 무슨 절친한 관계였는지 타곤 산의 비고인 솔라리 신전에도 잘 들어오게 함. 라코어 부족의 엄청난 영예를 잭스는 그냥 누리고 있다는 거. 하지만 그정도로 강함.


이번에 새 솔라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잭스 끄덕거림. 솔라리의 인성은 없지만 뛰어난 라코어 전사도 나왔다고. 잭스 다시 끄덕거림. 그들을 리그에 보낼거라는 말 듣고 움찔 놀람. 잭스는 리그에 챔피언이 노예계약이라 생각하기 때문.


하지만 아이오니아를 봐서 타곤 산도 수수방관 할 수 없는 노릇. 정치권에서 발언권이 없다는게 얼마나 나쁜건지 뼈져리게 깨달았으니까. 잭스는 솔직히 왈가왈부는 할 수 없는 노릇.


헬레나, 잭스를 보다가 그들을 평가해달라고 함. 놀랍게도 라코어가 아닌 솔라리 쪽 사제를. 잭스는 그런 중대사를 왜 외부인에게 맡기냐며 놀라지만, 어쨌든 부탁받았으니 해주기로 함. 레오나임. 정중하기는 하나 어딘지 모르게 꺼리는 느낌을 받음.


처음에 대련 형식으로 하다가 잭스가 기묘해서 진짜 무기 들고 하라고 함. 레오나 솔라리 무구를 들지만 오히려 더 못싸움. 두렵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심판도 통과 못할 거라고 잭스는 말함. 헬레나는 레오나가 실력에 비해 마음이 여려서 그렇다고 하지만, 잭스는 코웃음 침. 기왕 부탁받았으니 진지하게 임하는 잭스. 그때부터 레오나를 진짜 죽도록 몰아붙임. 하지만 전투 끝나고 쉴 때에는 옛날이야기라든지 여러 가지를 들려줌.


레오나, 자기 고백. 과거에 지키고 싶었던 아이들이 있었다고. 태양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그 아이들을 죽인게 후회된다고. 잭스는 만약 그게 네 검을 무디게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착각이라고, 너는 그저 너 자신이 피를 묻히길 두려워한다는 거라고 이죽거림. 그리고 정말 필요한 순간에 그게 네 칼을 방해한다면, 정작 지켜야 할 사람이 상처받을거라고. 진짜 생명을 소중히 한다는 건 상대방이 다칠까 두려워하는게 아니라, 지킬 것을 위해 칼을 들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레오나 깨달음. 그리고 검에 망설임 없어짐.


잭스와 마지막 대련. 비록 지긴 했지만 약간 개운한 표정. 잭스는 그걸 보며 일단 심판을 통과할 정도의 정신 수양은 된 것 같다며 놔줌. 레오나 잭스에게 감사 인사 표현하려고 하나, 잭스가 제례용 술 대가로 얻어가는거 보고 표정 싹 사라짐. 레오나 역시 라코어 출신이라 싸움에 대가가 있으니 마치 자기를 판 것 같아서 기분찝찝. 10통이나 받아가는거 보고 내가 10통짜리냐고 반박하니 20통 받으려는거 봐줘서 10통 받아간다고 함. 레오나 처음으로 열받아서 씩씩거리며 두고보자고 으르렁거림. 헬레나는 레오나가 화도 내고 마음 풀린거 같다고 기뻐함. 이런 일 몇 번 있고, 후에 레오나 챔피언 등록.


이런 식으로 가볍게 가볍게 끝내려고 했는데 지금 내용은 무슨 레오나 고해성사를 쓴 기분...ㅋㅋㅋㅋ 에이 모르겠다. 하여간 열심히 썼으니 평가는 독자의 몫입니다. 이것으로 가로등과 태양을 마칩니다. 이야 난 약속을 지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