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옛날, 한 8년쯤 전에 이상한(?) 온라인 게임을 종종 했음.
지금와서는 그게 대체 뭔 게임이었는지도 기억이 흐릿해.

굉장히 마이너한 게임이라서 유저층 자체가 적었음.
지금 보면 굉장히 조잡한 수준의 게임이었는데 그땐 거기에 푹 빠져서 나름 열심히 활동했음.

애초에 유저수가 워낙 적어서 친목질이 어느정도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A라는 유저와 좀 친해졌음.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었음.
온라인 게임에서 사람 만나서 친해지는 것 쯤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근데 어느날 이 게임이 서비스 종료를 선언해버림.
유저수가 워낙 적으니까 개발자가 못버틴 거지. 개발자도 입에 풀칠은 해야되니깐...

그래서 A를 포함해서 친하게 지내던 유저들 몇몇이 전부 뿔뿔이 흩어짐.


그리고 몇 개월 뒤...

진성 겜돌이인 나는 또 다른 새로운 모바일 게임을 찾아서 하고 있었음.
근데 모바일 게임에서 익숙한 닉네임이 보이는 거야.

이전 섭종한 게임에서 A가 쓰던 닉이었음.
다른 사람들은 잘 안쓰는 닉이라서 혹시나 싶어서 전체채팅으로 말을 걸었음.

"님 혹시 OOO 게임 하지 않음?"

이러니까 그쪽에서도 바로 알아보더라고.
나도 게임할 때 고정닉을 주로 쓰는 편이라서, 이전 게임이랑 새로운 게임에서 쓴 닉이 똑같았거든.

예상치않게 다시 만나니까 겁나 반갑더라고.
그래서 그때부터 또 맨날 둘이 같이 겜하고 수다떨고 그랬음.

그렇게 한 2개월 정도 지냈나?

이번 게임도 유저수 급감으로 서비스 여부가 불투명해지게 됨.
이제 보니까 나도 망겜만 골라서 하는 힙스터 망무새였네 어휴 


어쨌건 게임 서비스 종료할 때 즈음에 A하고 나는 그냥 웃으면서 이런 대화를 했던 것 같음.
앞으로 잘 지내고, 혹시나 기회되면 다른 게임에서 또 보자고.

서로 그냥 게임내 온라인 인연이라고 생각해서 딱히 연락처 교환할 마음은 없었던 거지.


그렇게 나름 쿨하게 헤어지고 나서 시간이 많이 흘렀어.
3년 정도가 지났어.


진성 겜돌이인 나는 또또 다른 게임을 하기 시작했음.
근데 어느날 익숙한 닉네임으로 게임내 우편이 와있는 거야.

"죄송한데 혹시 OOO게임이랑 XXX 게임 하셨던 분 아니세요?"

깜짝 놀래서 게임내 우편으로 대화나눠보니까 A 맞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쉬바.... 대한민국 게임판이 얼마나 넓은데 왜 게임 할 때마다 마주치냐고.
이쯤 되니까 서로 겁나 웃었음ㅋㅋㅋ

A : 야. 이 정도면 우린 인연인 거 같다. 번호 교환이나 하자.
나 :ㅇㅋ 콜.


이러고 번호 교환 했는데 카톡 프사보니까 A가 여자더라고.
난 상상도 못했지. 여태까진 굳이 너 남자냐? 너 여자냐? 이런거 물어보지도 않았으니까.


근데 참 기묘한게, 이쯤 되니까 서로 이상한 신뢰 같은게 생긴 거야.

"우린 어차피 새로운 게임해도 거기서 또 만날 것 같은데 뭐."

어차피 만날 사람은 만난다? 대충 이런 느낌?
이런 이상한 신뢰가 생기니까 사람이 굉장히 편안해짐.

온라인에서 만난 인연인데도 오래 알고 지낸 실친처럼 별별 말을 부담없이 하게 되더라.
세상 사는거 투정도 하고, 찡찡거리기도 하고, 아무 생각없이 장난스러운 말도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어느새 밤에 A하고 카톡하고 대화하는게 일상이 되버림.


이쯤 되니까 나도 운명(?)에 수긍해버림.
그래서 정말 갑작스럽게, 나도 모르게 그냥 만나자고 해버림.

"야, 얼굴이나 함 보자."

얼떨결에 톡 보내고 "아 ㅅㅂ.... 괜히 말 꺼냈나?" 살짝 후회했음.
사는 지역도 모르는데다가 상대방이 부담 가질 수도 있으니깐.

근데 잠시 뒤에 A한테 톡이 왔음.

A : ㅇㅋㅋ 언제 올 거임?
나 : 내가 너 만나러 당연히 가야되는 것처럼 말한다?? 너 사는 지역이 어딘데?
A : 나 바빠. 만날거면 니가 와라ㅋㅋ 나 서울 사람임.


쉬바... 난 경상도 사람인데? 온라인 인연 만나자고 서울까지 가야 된다고?
근데 이미 말 꺼낸 이상 만나는 걸로 분위기가 굳어져버렸음.

그래서 급하게 KTX타고 서울로 올라감.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뭐에 홀린 듯이 행동했다.

서울 올라가서 만났는데 어... 처음엔 솔직히 조금 어색했다.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리고 내 생각보다 A가 더 예뻐서 좀 긴장했음.

근데 또 서로 관심사가 게임이고, 여태 대화를 많이해서 상대방 직장이나 일상을 알고 있으니까 금방 편해지더라.
그날은 둘이 만나서 밥 먹고 가볍게 술 한잔 하고 부산으로 내려옴.

생각해보면 웃기지. 온라인 친구 한 명 보려고 경상도에서 서울까지 KTX타고 올라가서 밥 한끼 먹고 왔으니까.


그 뒤로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이 좀 더 지났음.
이젠 서로 폰 번호를 아니까 게임 하고 말고 이런걸로 인연이 끊기지는 않게 됐음.

둘 다 직장 갖고 막 경제생활 시작할 시기다보니 게임 할 시간이 많이 안 나기도 했고.
그래도 꾸준히 연락하고는 있었음. 톡하고 가끔 통화도 하고.

어느날 톡으로 수다를 떠는 중이었음.
기억이 확실하진 않은데, 아마 내가 당시 다니던 회사에 지쳐서 푸념하는걸 A가 들어주고 있었던 것 같음.

A : 야, 그냥 그 회사 때려쳐라 때려쳐. 누나가 먹여살려 줄게ㅋㅋ
나 : 에이 뭔 말도 안되는 말을ㅋㅋㅋ
A : 진짠데? 너 그냥 서울 올라와서 나랑 같이 살래? 방값 아끼고 좋겠네.
나 : ??? 즈기요?


이후로 A가 톡을 안 해... 전화도 안 받음.
며칠간 연락이 없다가 나중에 전화하니까 그러더라고.

자기가 말해놓고도 아차싶었는데 변명하거나 이러면 더 이상하게 보일까봐 그냥 잠수탔다고.

근데 이쯤 되니까 나도 이미 마음속에 불이 지펴진 상태였음.
원래 '이 사람과 나는 인연이다' 이런 마음이 있었는데, 이게 여태까진 연애감정 까진 아니었음.

그냥 내 마음 속의 온화한 모닥불 정도로만 남아있었던 거지.
근데 이런 말을 듣고 여태 있었던 일을 쭉 생각해보니까 마음 속의 불길이 거세지더라.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꺼냈어.

나 : 나 OO일에 서울 갈건데 얼굴이나 볼래?
A : 서울 왜 옴? 회사 출장잡힘?
나 : ㄴㄴ 걍 너 보고싶어서 가는 거임.
A : 어..... 아랐슴. 몇 시에 올 건데?


이 대화 이후 직접 만나러 서울 올라가기 전까지 며칠 텀이 있었음.
그런데, 이 대화 이후에는 서로 짠 것처럼 대화의 흐름이 미묘하게 변해버렸음.

대화의 흐름이 변해버렸다는게 뭔 말이냐고?

예전에는 그냥 친한 친구처럼 신변잡기 이야기하고 직장 푸념하고 게임 이야기 하는게 일상이었다면,
이 시점 이후부터는 서로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대화'를 굉장히 많이 하게 됨.

아침 몇 시에 일어나고, 저녁 몇 시에 잠드는지, 무슨 습관 같은게 있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뭐고, 싫어하는 음식은 뭔지.

이런 시시콜콜한 생활 습관부터 시작해서

나는 남친이 어떤 성격인건 싫더라, 무슨 행동하는건 싫더라.
나는 여친이 뭘 했으면 좋겠더라.
기념일에는 뭘 해주면 좋은거 같더라.

원거리 연애를 잘 이어나가려면 서로 뭘 해야 되는 걸까.
원거리 연애하던 커플이 결혼하면 직장은 어떻게 되는 걸까.


형식적으로는 자기 연애경험 썰 풀면서 가상의 남친, 여친한테 바라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거였지만
사실은 '내가 A에게 바라는 것, A가 내게 바라는 것'에 가까웠지.

어쩌면 이건 연애를 시작하기 앞서서 서로 맞대어보는 최후의 확인 작업이었을지도 몰라.

근데 웃겼던건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음.

나나 A나 둘 다 성격이 직설적이라서 마음에 안 드는건 대놓고 말하는 타입인데
서로가 서로에게 걸리적거리는 게 하나도 없었던 거임.

이런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며칠 톡을 주고 받다가 결국 그날이 왔음.
내가 서울가서 A를 만나기로 한 날.


KTX타고 서울 올라가서 만나고, 그날 저녁에 밥 먹고 카페 들러서 커피 테이크아웃해서
둘이 나란히 아메리카노 들고 한강변을 걸었음.

근데 사귀자고 말은 하고싶은데 입이 잘 안떨어져 시바...
예전에 만났을 때하곤 다르게, 만나서 밥먹을 때부터 내 스스로 얼굴이 달아올랐다는게 느껴질 정도로 화끈거리는 상태였거든. 스스로도 얼굴이 용암처럼 뜨거운 게 느껴지는 상태인데 사귀자는 말을 어떻게 하냐고...

그런 상태로 한강변을 쭉 걷다보니까 둘 다 말이 없어짐.
갑자기 어색한 시간이 찾아왔음.

속으로 '아. 시부레... 조졌다.'

이러고 있는데 A가 갑자기 그러더라고.

A : 난 솔직히 연애 해본 적도 오래됐고 기간도 짧다. 내 성격도 빈말로라도 좋다고 하기 힘들다. 전남친하고 안 좋게 헤어져서 연애에 자신이 없다.
나 : 내가 언제 니 전남친에 관해서 물어보든?
A : 아니...
나 : 그런데 왜 네 스스로 전남친 생각하면서 자신감을 깎아먹는 건데?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문득 둘이 서로 보고 웃었음.
서로 대놓고 사귀자는 말도 안 했는데 이미 연애를 전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상황이 너무 웃기니까.

피식거리면서 좀 웃다가 내가 용기내서 손을 잡았음.
A가 손을 빼지는 않더라.

부드러운 손을 매만지면서 한강변을 걸었음.

A : 야...
나 : 뭐. 왜. 남자친구가 여자친구 손 잡은 건데 뭐 문제있나?
A : 아니... 그건 아니고...


우리는 그렇게 사귀기 시작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결혼해서 잘 살고 있음.

여태 자잘하게 다툰 적이야 있지만, 크게 싸운 적도 없고 서로 연락 끊고 냉전 벌인 적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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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내용의 달달한 로맨스 만화&소설 추천 좀 해주세요.
솔로라서 요즘 달달한 로맨스 이야기가 끌리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