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성씨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건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면서임. 우리나라 김이박 등 몇개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씨는


고려시대 때 시조가 나타난 경우가 많을 것임. 왕건이 중앙집권을 완성하기 위해 혼인도 많이하고, 사성정책(성을 주어 귀족으로 삼는 정책) 등을 폈기 때문임




조선 건국 1392년


전주 이씨가 세운 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말야 본관주의의 나라였어.


무슨 말이냐면, 내 성씨의 본관에 따라 나의 신분이 결정되는 나라였기 때문에 본관을 매우 중요시 했단 소리임


그래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함부로 자기 성의 본관을 속이고 다니거나, 심지어 돌아가신 조상의 묘에 남의 본관을 넣어 신분세탁을 하거나 하면


관청에서 적발해서 반상의 법도를 어지럽힌 죄로 다스려 사형이었어. 따라서 오래된 집성촌 출신이라면 양반여부는 몰라도 성씨는 진짜 니 성씨다




양천제의 조선에서는 성씨를 사용하는 인구가 전체 인구의 40% 정도 였고, 그나마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양반들이나 제대로 된 이름을 짓고 살았지, 평민들부터는 성을 사용해도 이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막짓고 살았고


천민계층에서는 심지어 자기 부모 이름도 모르고 사는 경우도 많았음



그리고 양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선, 개국공신 급이 아닌 이상, 4대 이내에 반드시 과거를 급제한 사람이 있어야 했음. 여기서 과거란 소과와 대과를 모두 포괄하고, 소과인 진사시나 생원시만 통과해도 양반 지위는 유지가 됐음. 그래서 공부에 큰 자질이 없는 집안에선 소과만 급제하고


대과는 똘똘한 자식 나올 때까지 패스하는 경우도 많았음



조선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유연한 사회였다. 드라마에선 양반들만 과거응시를 했던 것으로 나오지만, 천민과 서얼등 몇몇 신분을 제외한 양인(평민)은 누구나 과거에 응시 할 수 있었고, 실제 조선시대 전체의 과거 급제자 통계를 보면 양반 아닌 계층의 급제율이 20~30% 정도를 유지했음.


물론 급제해도 집안 좋은 양반들처럼 좋은 보직을 받거나 높이 올라가진 못했지만 일단 양반에 진입을 하면 자기 자손한테는 희망을 줄수 있었으니깐

(시험 볼때 우리는 이름만 적지만, 조선시대에는 자기 고조부 부터 직계를 다 적고, 외할어버지까지 적어내야 했음),



족보의 역사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대부분 1600년 이후에 족보라는 것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음. 족보라는거 자체가 권력을 쥔 소수 양반이 자기집안의 세력을 파악하고 홍보하기 위해서 만들기 시작한 것임. 조선 중기까지는 양반도 족보가 없었다는 사실!



그리고 장자를 굉장히 중요시 한 문화였기 때문에, 집에 아들이 없으면 같은 성씨의 다른 집에서 양자를 들이기도 하고, 양반들도 족보 보다보면 개판 많음

이건 너무 복잡해지니 skip



그러다 임진왜란 이후 상업 발달로 중인과 평민들 중에서도 자본가들이 나타나고 이들의 신분욕과, 왜란으로 피폐해진 왕실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서로의 필요가 맞다보니, 조정에서 돈을 받고 관직을 팔기 시작함. 관직=양반 을 의미하던 시대에서 사실 저건 신분을 판것임. 이른바 공명첩, 납속책 등 이때부터 양반은 오염되기 시작한거야



임진왜란은 625 버금가게 국토를 황폐화 시켰기 때문에, 돈없는 양반들도 쫄쫄 굶기는 매한가지였어. 그래서 양반이지만 별볼일 없는 자들이 돈을 받고 자기 집안 족보에 상것들을 올려주기 시작해. 족보오염의 시작이지


이 때 새로운 신분을 얻은 자들은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신분을 세탁하고 양반행세를 하며 살기 시작하지 ㅋ


거기다 조선말로 갈수록 그 폐단이 더 심해지고, 갑오경장까지 일어나면서 세상은 카오스로 진입하지.




그래서 현실적으로 자기가 진짜 양반집안인지 쉽게 판별하는 법은 없어.


아 길어지니깐 힘들다. 대충 결론 쓰자




양반일 확률일 매우 높은 식별요인들


1. 친가가 최소 400년 이상된 집성촌이거나, 집성촌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을것. 입향조가 어디서 온 누구고 그분이 뭘하던 분인지 알 수 있다면

적어도 근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2. 종중 또는 향교와 연이 닿아 있을 것. 종중 향교는 족보를 팔고 갑오경장이 일어나던 시기에도 철저하게 족보를 관리했던 집단이야. 여기서 인정받으면

진짜 양반이다



3. 족보도 요즘 광복이후 발간된 양장된 족보만 있다면...알제? ㅋㅋ 오래된 세보가 있어야 한다. 대동보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리고 집집마다 족보를 가지기 시작한건 현대사회 와서야. 예전에는 장손집에만 족보가 있었다.


옛날엔 인쇄술이 발달 안해서 책 하나 만들려면 요즘 아반떼 소나타값이었다. 그리고 족보도 펴낼려면 종중어른들 허락을 받아 수단받아서 책임지고


펴내야 하기 때문에, 지금이야 통신술도 좋고 하니깐 상대적으로 수월하지 예전에는 다 사람이 왔다갔다 하고 편지로 작업하고 사람 검증까지


해야했으니 돈도 많이 들고 개빡쎘겠지. 실제로 같은 핏줄이지만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소식 못듣고 족보에 못 올라가는 경우도 부지기수 였음


근데 또 625 때 족보가 소실된 집안도 많아서 이건 그냥 참고로만




4. 가풍. 이게 가장 확실하다. 양반집안은 예의와 효, 그리고 독서와 입신양명을 굉장히 중요시 한다. 이건 문반 무반 불문이고. 자기 집안이

딱 봐도 책하고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면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5. 재산. 일제시대 때도 기득권 회유를 위해서 양반 재산은 건들지 않았다. 따라서 독립운동한 양반 아니면 대부분의 재산을 보전하면서 36년을 버텼음.

개인적으로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독립운동 안한 양반집안은 양반이라고 삐댈것도 없어. 매국노랑 마찬가지니깐


암튼 양반집안이라면 대대로 내려오는 서원 또는 최소10대가 묻혀있는 선산이 있을 것임. 땅은 필수로 있어야 한다.


농경사회에선 논이 요즘으로 치면 건물주랑 동급이었음. 집안에 대대로 땅이 없었다면 양반이 아닐 확률이 높다




6. 종친회와 종중 구분 못하면 100% 상놈집안임. 종친회 열심히 나간다는 소리하면 따지지 말고 거르면 된다




7. 김해 김씨가 망한 가야국 왕족이라서 천민들이 가장 많이 활용한 성씨다. 현재 대한민국 인구 중 제일 많지?

김해 김씨는 신라 이후로 끝발이 전혀 없던 성씨임. 실제로 조선시대 수백년간 정승이 1명인가 밖에 안나왔을정도로 양반 중에서도 완전 밑바닥 성씨임.

김해김씨 어쩌구하면서 양반소리 하면 그냥 믿고거르셈
더추가해보면 전주이씨도 왕실에서 해방된 공노비들이 죄다 가져다쓴 성씨였음.

한국에 인구가 유독 많은 본관이라면 걸러라




암튼 동서양 불문, 귀족계층은 전체 인구의 2% 내외, 넓게 잡아도 5% 내외였음


근데 지금 한국 전체 인구가 양반집안이라고 개소리들 해대니 ㅋㅋ 사실 자기 집안이 양반 아니라고 다른 사람 부러워 할 필요도 없다. 옆에 놈도 양반 아닐 확률이 95%가 넘으니깐




이정도. 또 생각나면 추가할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