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나는, 기다려야 하나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한 생일상. 어두운 방 안에서 나는 뾰족한 고깔모를 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다. 친구들과 어른들이 방 안에 함께 있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친구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그 뒤로 흐뭇해하는 어른들이 서 있다. 노래가 끝날 즈음 나는 2단 딸기 케이크의 촛불을 훅 불어 껐다. 방 안이 깜깜해지고, 여기저기서 요란하게 폭죽이 터져나왔다. 환호성과 함께 친구들이 박수치고, 소리지르면서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축하해!"
"야! 생일 축하해, 대박."
"언니, 생일 너무 축하해요. 오늘따라 너무 예뻐요!" 
"로아, 디테, 헬렌. 얘들아… 너무 고마워."
 오늘은 내 생일. 축하해주는 사람이 너무 많다. 고마운 사람들. 언제나 나와 함깨해준 내 친구들, 평소에는 엄격했던 어른들도 오늘만은 내 생일이라고 잘 대해주신다. 헬렌보다도 나를 더… 오직 나만을 위해 준비된 오직 나만의 생일 파티. 나만의 날.
 "자, 생일 선물!"
 헬렌이 생일 선물이라고 내민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헬렌. 이건, 이건 받을 수 없어. 그 분이 주신 거잖아. 그 분이 너에게 주신 거야."
 "걱정 마. 그 분은 이제 이게 필요없다고 하셨어. 나도 이게 꼭 필요하지 않아. 이게 정말로 필요한 이에게 주는 게 내 기쁨이야." 
 "정말 괜찮겠어?"
 "나는 정말 괜찮아. 그 분은 이게 나를 보호해 준다고 하셨지."
 그리고 헬렌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너는 내게 정말 소중한 친구니까. 이건 나보다 너에게 더 필요한 것 같아. 나에겐 네가 있으니까, 이런 물건 정도는 줄 수 있어. 받아 줄 거지?"
 나는 헬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우정에, 그녀가 나에게 해주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헬렌…너무 고마워."
 나는 헬렌을 껴안았다. 헬렌도 내 포옹을 받아들였다. 주변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포옹을 풀자, 상기된 헬렌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는데, 음, 제일 중요한 사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분은 안 오셨어?"
 그러자 방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갑작스레 감도는 기묘한 공기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 분. 아. 그 분은 바쁘다고 하셨어. 요새 마을 바깥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나 봐. 심각한 일이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나는 잘 모르겠어."
 앉아있던 헬렌은 나에게 대답하고서는 어른들을 올려다보았다. 어른들은 대답이 없었다. 이상한 분위기였지만 
 "뭐, 상관없어. 헬렌. 이렇게 내 생일을 축하해주는 사람이 많은 걸. 선물, 너무 고마워."
 나는 그녀에게 활짝 웃어 주었다. 생일파티는 그럭저럭 끝났다. 선물 개봉은 밤에 나 혼자 하기로 했다. 생일 파티가 끝난 뒤에는 궁도장에 친구들과 함께 활쏘기를 하러 갔다.


 헬렌이 먼저 사로에 서서 다섯 발을 쏘았다. 그 중 두 발이 빗나갔다. 그 세 발도 과녁 정중앙에 맞은 건 하나 뿐이었다.
 "이 선물 정말 내가 써도 될까?
 "걱정하지 말라니깐."
 헬렌이 다가와 나를 꼬옥 껴안아 줬다.
 "그 동안 걱정 많았지? 이제 그 맘 탁 풀어 놓고, 즐겁게 살자. 웅?"
 나는 헬렌이 준 선물을 감사히 받기로 했다. 그럼 지금 바로 써 봐야겠다.
 한 발 째,
 "맞췄어!"
 두 발 째,
 "이번 것도 맞았어."
 세 발, 네 발, 다섯 발. 다섯 발 모두를 맞췄다.
 "와! 대단해! 너, 진짜 활 잘 쏜다! 어떻게 그렇게 잘 쏴?"
 헬렌이 내 활솜씨에 감탄했다. 디테와 로아는 우아아 하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 조금 우쭐해졌다. 너 몰래 열심히 연습했다고, 밤 늦은 시간에 몰래몰래. 라고 이야기 하려다가 나는 조금 겸손해지기로 했다.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선물이 좋은 거지 내가 활을 잘 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게 활쏘기를 하다보니 즐거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곧 주변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내일 만나서 놀기로 하고 헤어졌다.

 나는 방에 돌아와 친구들이 준 선물을 풀어보았다.
 "이건 로아가 준 선물인데. 빗이네."
 내 머리색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보라색 손잡이의 나무빗이었다. 보라색 꽃물 들이기, 정말 힘들텐데. 우툴두툴한 빗이었지만 내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걸로 봐서는 로아가 직접 만들었나 보다. 로아의 손톱이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던 게 그래서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제까지만 해도 로아네에 놀러가면 바쁘다면서 만나 주지도 않은게 그래서였구나 생각하니 미소가 나왔다.

 선물을 모두 풀어보고는 오늘 하루의 일기를 적었다.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기쁜 하루였다. 친구들이 나에게 선물을 잔뜩 안겨 주었다. 헬렌은 그 분이 주신 마을의 보물을 내게 줬다. 정말 깜짝 놀랐지만 나는 헬렌이 준 선물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나는 슬펐다. 

 나는 불을 끄고 누웠다. 하지만 그 분 생각을 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말똥말똥한 두 눈을 일부러 꾹 감고 
 
 삐걱-

 하고 방문이 열렸다. 등불을 든 실루엣이 문에 나타났다. 
 "누구, 누구세요?"
 "내가 누굴까?"
 대답을 듣는 순간, 그 실루엣이 미소지었다고 느꼈다. 이 목소리는, 그래. 그 분이 오셨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분.
 내가 제일 본받고 싶어하는 그 분이 오셨다.
 "메르세데스님…"
 메르세데스님이 침대가로 다가오셨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메르세데스님은 그런 나를 만류하셨다.
 "괜찮아, 괜찮아. 누워 있으렴. 자고 있을 때 찾아온 내가 잘못인걸. 오늘, 생일이라고 들었어."
 "네. 생일이에요. 오늘 친구들이랑 파티도 했는걸요. 활도 쐈어요."
 "생일파티는 즐거웠니?"
 "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못 가서 정말 미안했단다. 내가 바쁜 일이 있어서 미처 파티에는 가지 못 했어. 대신, 일 마치고 얼른 달려왔단다. 아, 그리고 헬레나가 너에게 미스틸테인을 주었다는 소리를 들었단다. 너 하나만을 보려고. 단 하나뿐인 너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말이야."
 "네? 미스틸테인… 네, 맞아요."
 나는 순간 불안해졌다. 미스틸테인은 원래 메르세데스님이 헬렌에게 준 거니까. 설마, 그걸 메르세데스님은 걱정하는 내 표정을 보셨는지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말하셨다.
 "안 그래도 그거에 대해 말해주려고 했지."
 "네… 저는 그런 걸 가질 자격이 안되는 거겠죠…."
 "루시드."
 메르세데스님이 갑자기 한 발자국 더 다가와서 말씀해주셨다.
 "너는 미스틸테인을 가질 자격이 있어."
 내 방 벽에 걸린 엘프 마을의 보물, 미스틸테인을 바라보며 메르세데스님이 나직이 말했다. 창 밖에서 달빛이 쏟아져내리는 아래,  메르세데스님이 가지런히 빗어내린 금빛 머리를 빛내는 모습이 너무 황홀해 나는 그 광경을 그저,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녹색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났다. 그 분은, 그분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천사만 같았다.
 "그 동안 열심히 수련해왔잖니. 모두가 너를 자랑스러워한단다. 나도 마찬가지야. 미스틸테인은 이 자체로 마을의 상징인만큼, 네가 가지는게 옳다고 헬레나는 생각했나보구나. 나도 마찬가지란다."
 갑자기 천사님이 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의자를 끌어와 앉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셨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메르세데스님."
 "그래. 여기 있어. 그러니 무서워하지 말고."
 메르세데스님은 입을 오물거렸다. 그 작은 입술이 열리고-
 "그래서. 이제, 이제 만족하니?"
 한기가 느껴졌다.
 "네?"
 스으으, 하고 얼음을 저미는 것 같은 날선 소리, 그리고 피부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
 "이제 만족하냐고."
 "무, 무슨 소리세요?'
 조금씩, 금이 갔다.
 "그래서 이제 만족하느냐고. 루시드."
 일그러진 녹빛 눈동자와 함께 세상이 깨어졌다. 


 꿈에서 깨어나.
"메르세데스님, 메르세데스님…."
나는 흐느꼈다. 얼음 속에 갇힌 채. 
 
 완전히 꼭두각시처럼 말하는 자는 진실로 꼭두각시이다. 
 그러한 꿈을 나는 원치 않는다.
 가로되 자유의지를 가진 자는 진실로 자유의지를 가졌다.
 그러한 꿈을 나는 원치 않는다.
 꼭두각시이자 자유의지를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꿈을 원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이 추위를 잊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엔 조금 더 고분고분하게, 마치 꼭두각시처럼…


얼마나 나는 기다려야만 하는지 
야속한 바람도 대답 없이 떠나가고 

내일이라고, 정말 내일일 거라고 
길고 긴 하루를 버티고 또 버텼지만 
무엇을 기다리는지 그것마저 이젠 다 잊었나 봐요 

시간은 그저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영원한 감옥일 뿐이죠 
단 한 걸음도 내가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면 

어서 내 이름을 불러 이곳에서 날 꺼내 줘요 
더 늦기 전에 내 곁으로 돌아와요 


 "그리하여- 선언하는 바입니다."
 나는 숨을 들이키고 외쳤다.
 "검은 마법사를, 영원히 물리쳤다고. 다시 이 세계에 평화가 도래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와아아-!!"
 "와--- 전쟁이 끝났어!!"
 "드디어 이 지겨운 전쟁이 끝났다니! 만세! 평화다!"
 "여왕님!"
 "루시드 여왕님 만세!"
 확성 마법으로 엄청나게 커진 목소리가 광장의 구석구석까지 울려퍼졌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란색이었고, 날씨는 대관식으로 치르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검은 마법사와의 전쟁, 그 전후 결과와 성과를 발표하는 이 넓은 광장에 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올려다보며 열광하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며, 나만을 바라보며 열광하는 수많은 사람들 엘프들, 마족들, 인간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를 경외의 시선으로 올려다보고 있다. 그래, 그래야 마땅하다. 나는 이제 엘프의 왕이자 모든 종족의 왕이니까. 내 앞에는 인간족의 왕, 마족의 왕이 나를 향해 무릎 꿇고 왕관을 바치고 있다. 
 "이 왕관을."
 "이 명예를 당신께 바칩니다."
 "고맙게 받도록 하지. 자네들은 각각 공작으로 봉하도록 하겠네."
 그리고 나는 내 앞에 놓인 왕관을 들어 썼다. 검은 마법사를 물리친 나라면 이 왕관들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제 내가 메이플 월드의 황제이니까. 
 "여제님 만세!"
 "루시드 여제님 만만세!"
 "평화를 가져다준 루시드 여제님, 그리고 메이플 제국이여 영원하라!"
 온 세상이 쏟아내는 만세 합창을 들으며 나는 뒤로 돌아섰다. 당장 이 자리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체통이 있으니까. 시간은 많고, 내 즐거움은 이제 시작이니까. 그리고 이젠 여제의 자리에 걸맞는 사람이 될 차례이다. 
 

 "피곤하네요. 뭐라도 마실 것 좀 가져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내 머리위에 내 스스로가 왕관을 씌우는 거라지만 그래도 즉위식은 피곤한 행사였다. 정자세로 서서 목청높여 소리치느라 목이 쉴 것 같으니 차갑고 달달한 뭔가를 마시고 싶었다. 마실 것을 주문하자 대기하던 시녀가 방을 나갔다. 혼자 앉아 기다리는 시간, 나는 그 동안의 전투를 떠올렸다. 일곱 반역자들과 검은 마법사들. 데몬슬레이어를 차례로 물리치고 힐라를 계략으로 끌어내 죽인 다음 아카이럼을 영점으로 비틀린 시간 속에 절대 빠져나올 수 없도록 가둬버렸다. 반 레온은 그의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미쳐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오르카와 스우는 원래의 검은 정령으로 되돌려버렸다. 구와르는 내가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로서 어찌어찌 잘 설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군단장들을 모두 검은 마법사에게서 떼놓아 버린 후 연이은 공격을 감행했다. 그렇게 점차 힘을 잃어버린 검은 마법사를 어렵사리 물리치고 얻어낸 평화. 그렇게 하나씩 보내버린 걸 떠올리자 실실 웃음이 배어나왔다. 방문에서 갑작스레 노크 소리가 들려와 표정을 고쳤다.
 "흠흠, 들어와."
 그러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감차를 가져왔습니다."
 "메르세데스님. 어째서 메르세데스님이 이런, 일을"
 달고 차가운 차를 가져온 것은 다름아닌 메르세데스님이었다. 어떻게, 메르세데스님이 이런 일을. 하녀들도 많을 텐데! 나는 화가 나려고 했다.
 "게 누구 없느냐! 어째서 메르세데스님이 이런 천한 일을 하는 거냐! 빨리 책임자를 대령하지 못할까!"
 그러자 아까 전 명령을 받고 나갔던 시녀가 안절부절못하며 재빨리 방안에 들어와 몸을 낮추었다.
 "저, 저, 저, 저는 그저…"
 "루시드님."
 갑작스레 메르세데스님이 앞으로 나섰다.
 "루시드 님이라니, 메르세데스님. 말을 낮춰 주세요."
 "이 아이는, 그저 제가 그 일을 하고자 했기 때문에 나서지 않은 것 뿐입니다. 부디 이 아이를 탓하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감히 제가 어찌 여제님의 존대를 받을 수 있을지… 부디 말씀을 낮춰 주시길."
 오히려 메르세데스님이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만류했다.
 "메르세데스님, 제가 비록 여왕이, 여제가 되었지만 저는 메르세데스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때 주셨던 가르침들, 지도들, 한 마디 한 마디 말들 하나하나가 저를 지금의 이 자리에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어떻게 제가 메르세데스님을 하찮게 여기겠습니까."
 "저를,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라면,"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메르세데스님의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검은 마법사에 대한 승리는 온전히 여제님의 것입니다. 저는 그저, 저는 그저 당신의 승리를 도운 신의 안배라고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고개를 든 메르세데스님의 눈이 눈물로 영롱하게 반짝였다. 오른손바닥을 가슴에 댄 채, 메르세데스님은 말했다.
 "저를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메르세데스라는 이름 아래 빛나는 작은 별로서 인생의 영광이겠습니다만, 저는 감히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메르세데스님을 이대로 놔둘 순 없었다. 이 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저의 스승, 왕의 스승으로서, 그러니까 왕사로서 있어주실수 있으시겠지요?"
 고개를 숙인 메르세데스님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셨을까? 아니다, 놀라셨다 해도 이 정도 직위는 드려야 마땅하다.
 "저에게 그런 과분한 직책을 주신다면… 저는 어찌해야할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성은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받아들여주십시오."
 메르세데스님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거절하기도, 받아들이기도 막막한 심정일테다. 하지만 나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여봐라, 메르세데스님을 왕사의 직책에올리고
 "네! 알겠습니다!"
 밖에서 일제히 명령을 받들겠다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몇몇이 흩어지는 기척이 느껴진다. 내 명령을 전하러 갔겠지. 메르세데스님을 바라보니 화들짝 놀란 기색이다.
 "저, 저 따위를 여제님의 스승으로…"
 "일어나세요. 제가 비록 황제일지라도 저를 바로잡아줄 사람 하나쯤은 필요한 법. 저는 그것이 메르세데스님이었으면 합니다."
 메르세데스님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면, 한 말씀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세요."
 나는 스승인 메르세데스님의 첫 번째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너는,"
 그 미소는 잔인한 핏빛처럼 메르세데스의 얼굴에서 빛났다.
 "그럴 자격이 없어."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안되는거야!!"
 나는 얼음속에서 소리쳤다.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지만 내 답답함과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이 울분을 털어놓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이 슬픔을, 이 외로움을, 이 답답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 것이 아닌 그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내 꿈이 아닌 누군가가.
"누구든, 이 악몽을 끝내줄 수만 있다면,"
 나는 들어줄 이 없는 속삭임을 말했다. 영원히 이 추위 속에서 맴돌, 들어줄 이 하나 없이 점차 식어갈 속삭임을.
"아무리 그래도, 그게 그 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메르세데스님, 당신이었으면."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돌아오기엔 너무 멀리 가 버려서 
이젠 내 목소리 더는 듣지 못하나요? 

처음 걷는 길, 낯선 거리를 헤매다 
길을 잃었나요? 그댄 지금 어디 있나요?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것마저 어느새 다 잊었나요? 

기억은 그저 쉴새없이 나를 할퀴는 끔찍한 악몽일 뿐이죠 
단 한 순간도 나는 그대를 잊은 적이 없으니 

어깨를 힘껏 흔들어 이 꿈에서 날 깨워 줘요 
더 늦기 전에 내 이름을 
 
어떤 날들을 견뎌왔는지 언젠가 그대에게 들려 줄 수 있게 
내가 얼마만큼 자랐는지 그대에게 보여 줄 수 있게




그리고, 그 분이, 나에게 오셨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던 내 기다림은 끝나고, 나는 해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