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09-15 21:54
조회: 72
추천: 0
빅뱅 전 팬소설) 메이플스토리: 황야의 메아리 3화메이플스토리: 황야의 메아리 3화 1장 귀환의 꿈 (3) ![]() 시몬은 태피스트리로 시선을 옮겼다. 한 쌍의 커다란 태피스트리가 알현실 벽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태피스트리는 핏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강렬한 붉은빛을 띠었고, 네모난 테두리에는 금색의 잎사귀와 덩굴 문양이 수놓아졌다. 중앙에는 왕가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사자가 포효하고 있었다. 사자 또한 금색이었고, 그 주위로 왕국의 오랜 역사를 나타내는 삽화들이 그려졌다. 왼쪽 태피스트리에는 고(古) 왕국의 건국과 수난, 멸망과 이주의 역사. 오른쪽 태피스트리에는 신(新) 왕국의 재건과 번영, 전쟁과 정복의 역사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시몬은 알현실에서 진행될 공치사(功致辭) 또한 역사적 순간을 기록하는 삽화로 남을지 생각했다. 곧 의미 없는 생각이라고 결론 지었다. 태피스트리에 장식된 왕국의 역사란, 왕 또는 영웅이 나타나 적들을 물리치고 공고한 성벽과 첨탑들을 지어 올리는, 백성들이 거기에 환호하는, 이 세상 모든 곳에서 반복되고 스러진 풍경들에 지나지 않았다. 승전을 기념하는 화려한 구절도, 왕국의 영원을 비는 수많은 의식도, 이 거대한 역사의 반복을 막지 못했다. 시몬은 잘 알고 있었다. 시몬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알현실의 정문이 육중한 저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 행렬이 있었다. 맨 앞에는 흰 두루마기를 입고 오른손에 자기보다 큰 지팡이를 쥔 백색의 현자 키델마르가 섰다. 그보다 한 발짝 뒤에 선 트라우스 백작은 칠흑색 윤기로 번쩍이는 중갑옷을 입고 있었다. 두 사람 뒤로 여러 소영주들, 그들의 자제와 참모들, 가문이나 소속 없이 자기만의 기치를 들고 싸웠던 방랑 기사들이 행렬을 이루었겠지만 시몬이 선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문이 활짝 열렸다. 현자 키델마르가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트라우스 백작이 뒤를 이었고, 행렬 전체가 기다란 통로 같은 알현실에 들어오기까지는 2분 가까운 시간이 지나야 했다. 전부 들어오자 알현실 문이 닫혔다. 키델마르와 백작이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뒤따라온 행렬 전체 역시 무릎을 꿇었다. 시몬은 그들이 예를 표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핏빛의 태피스트리가 장식한 알현실 벽 아래에는 6미터 높이의 기사 석상이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 있었다. 두 개의 석상은 모두 손에 장검을 쥐고 있었다. 투구 구멍 안으로 검은 안광이 번뜩였다. 기사 석상 앞에는 한 쌍의 사자 석상이 있었다. 2미터 높이였고, 등에 달린 날개까지 더하면 3미터가 조금 안 되었다. 왕좌는 두 마리 사자 사이에 있었다. 왕좌에 앉은 샤렌 3세가 몸을 일으켰다. 알현실이 순간 조용해져서, 왕의 옷자락이 왕좌의 꺼끌한 표면을 긁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왕좌 바로 옆, 그보다 작은 크기의 돌의자에는 왕의 유일한 혈육이자 왕위 계승자인 샤렌 4세 왕세자가 앉아 있었다. 시몬의 눈길은 왕좌에서 일어나 키델마르에게 걸어가는 왕이 아니라, 미동 없이 앉아 있는 세자에게 향했다. “일어나시오.” 왕의 목소리가 알현실의 높은 천장까지 울려 퍼졌다. 키델마르와 트라우스 백작이 몸을 일으켰다. 나머지는 여전히 무릎 꿇은 채였다. “고생하셨소, 백색의 현자. 그리고 트라우스 경.” 왕이 위엄을 갖추면서도 약간의 정감을 표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몬은 수염을 손으로 쓸었다. 희고 꺼슬꺼슬한 수염이 배꼽까지 내려왔다. 왕에게도 길고 풍성한 수염이 있었다. 왕은 체구가 크지 않았지만 두툼한 털망토와 오색빛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이 그를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전설 속 거인의 후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또는 그의 혈통이 지닌 내력과 현재의 권력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지 몰랐다. 왕이 말을 이었다. “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왕국이 붙들어야 했던 과업이, 또 하나의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었소. 모두 경들을 포함한 그대들의 용기, 지혜, 충정 덕분이오. 왕좌에 가만히 앉아 명령만 내렸던 내가 이런 과분한 선물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소.” “저는 전하와 전하의 왕국을 위해 봉사할 뿐입니다.” 키델마르가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그가 쥔 지팡이 끝에 달린 수정구가 알현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반사했다. “언제나 그 봉사에 감사하고 있소. 나뿐만 아니라, 나의 하나뿐인 아들도 말이오.” 왕이 그렇게 말하며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세자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키델마르와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은 왕이 왕좌로 돌아갔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왕은 노령의 나이를 단숨에 거스르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시오.” 그때까지 무릎 꿇고 있던 자들이 일어섰다. 트라우스 백작은 선 자세를 꼿꼿하게 고쳤다. 왕의 말했다. “기사도 정신에 입각하여, 각자가 지닌 모든 지혜와 무용을 발휘한 그대들을 왕과 여신의 이름으로 치하하오. 그대들 하나하나의 헌신이 우리 왕국의 숙적, 폰토스 고원의 저주받고 타락한 자들을 또 한 번 몰아내는 데에 기여했소. 일찍이 나는 승전보를 전해 들었고 온 왕국이 그대들의 위업을 노래로 지어 부르고 있지만, 이 자리에서 나는 분명히 말하겠소.” 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몬은 다시 한번 수염을 쓸었다. “백 년의 혈투 속에서 마침내, 불의 산은 샤레니안 왕국의 정당하고 명백한 영토가 되었음을 선언하오!” 화약통이 폭발하듯 알현실의 모든 이가 환호를 터뜨렸다. 시몬이 파악하기로 소리를 지르지 않은 사람은 두 명이었다. 시몬 자신, 그리고 알현실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은 세자. “불의 산 정복에서 공을 세운 자들에게 그에 어울리는 치하가 있을 것이오. 전하께서 호명하시는 순서대로 앞으로 나오시오.” 왕실 서기장이 앞에 나와 말했다. 가장 먼저 호명된 백색의 현자 키델마르는 지팡이를 바닥에 부딪치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왕좌 앞에 선 키델마르에게, 왕은 폰토스 고원 서쪽의 넓은 분지, 그 땅에서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리, 광물 채굴권과 매매권, 여러 소영주들에 대한 대영주로서의 권리 등을 하사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키델마르는 왕의 전언이 끝나자 입을 열었다. “전하. 전하의 넓으신 아량과 은혜로움에 이 늙은 신하는 기쁨에 몸을 떨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백 년도 훨씬 전, 왕국의 번영과 평화에 제 한 몸을 바치기로 전하의 현조(玄祖) 되시는 로이 전하께 맹세한 몸입니다. 저는 왕국의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땅이라 할지라도 전하의 이름을 빌려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저의 지식과 지혜를 이용하여 재물을 얻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 늙은 신하의 오래된 맹세와 그만큼이나 오래된 고집을 헤아리시어, 보다 자격 있는 신하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왕이 한 번 더 키델마르에게 봉토를 받을 것을 권하였으나 키델마르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형식적인 행위였다. 왕국의 사(四)현자는 봉토나 작위를 받을 수 없었다. ‘현자’라는 왕국법에 없는 호칭만이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명예이고 보상이었다. 그럼에도 왕은 현자들이 공을 세울 때마다 그들에게 봉토와 작위를 내려야 했다. 그리고 현자는 거절해야 했다. 현자는 지식과 지혜를 베풀 뿐 그 이상을 넘보지 않는다는 약속을 확인받기 위한, 백 년 가까이 된 관습적 절차였다. 키델마르가 물러나고 트라우스 백작이 왕 앞에 섰다. 서기장은 백작에게 키델마르가 거부한 서쪽 분지와 이에 딸려오는 여러 권리를 하사한다는 내용을 읊었다. 현자가 거절한 왕의 선물은 다음으로 불려나온 자가 받는 것이 또한 관습이었다. 그런데 백작은 돌연 무릎을 쾅 소리 나게 꿇은 뒤 말했다. “전하. 황송하오나, 저에겐 그 땅을 다스릴 자격이 없습니다.” 왕도 조금은 놀란 눈치였는지 조금 경직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자격을 말하는 것이오, 경?” 백작의 벗겨진 정수리에 누런 햇살이 비껴갔다.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희 가문은 폰토스 고원의 완전한 정복과 평화가 이뤄지기 전까진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넓은 땅을 가지지 않기로, 역시 전하의 현조 되시는 로이 전하께 맹세하였습니다. 비록 폰토스의 사악한 이교도들을 먼 서쪽으로 몰아냈다고는 하나, 전쟁이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제게 하사하기로 하신 땅에 대해서는, 제 전우들이기도 한 여러 소영주들, 기사들, 책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십시오. 또한 제가 곧장 서쪽 전선으로 돌아가 전하와 왕국의 땅을 방비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백작의 느닷없이 쏟아진 말에 알현실은 어색한 침묵에 빠졌다. 시몬은 어떻게 하면 백작의 충정을 치켜세우면서도 그가 땅과 권리를 군말없이 받도록 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문장을 지어냈다. 침묵을 깬 것은, 몸을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린 왕이었다. 왕실 서기장은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손에서 놓칠 만큼 당황했다. 키델마르도, 다른 신하들도, 심지어 시몬도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현실 천장에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가 어쩐지 심술스러웠다. 겨우 웃음을 멈춘 왕이 백작에게 말했다. “감동했소. 경의 요청이 이 자리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해석에 따라선 군주에게 불복종하는 행태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야겠소.” 시몬은 그때까지도 얼굴에 웃음기 하나 보이지 않은 세자를 흘겨보았다. 세자는 상석에 앉아 있음에도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세자는 젊었다. 몇 년 전에 성년을 넘겼고, 아직 얼굴에 소년의 풋풋함과 어리숙함이 묻어 있었다. ‘힘을 더 빼셔야 합니다.’ 시몬은 생각했다. 왕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경의 진심을 깊이 헤아리고 있으며 또한 순수한 감동을 얻었기 때문에 경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소. 단,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오. 한 달 뒤면 건국기념일 축제가 있을 것이오. 축제가 끝날 때까지는 경이 우리와 함께 수도에 머무르기를 바라오.” “전하에 뜻에 따르겠습니다.”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일어서려던 백작은 갑옷 때문에 몸을 가누기 힘들어, 시종 두 명의 부축을 받고 물러나야 했다. 현자와 백작이 거절한 봉토는 이후 왕 앞에 선 소영주들, 그들의 장수들, 이름 없는 방랑 기사들에게 배분되었다. 시몬은 가장 지루한 시간이라 생각했다. 서기관이 손에 쥔, 끝도 없이 아래로 늘어진 두루마리에는 똑같은 형식의 치하하는 말들이 적혀 있었고, 봉토나 작위의 이름 정도만이 달랐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의식이기도 했다. 땅과 그 땅에서 난 것을 수확할 권리는 여신에게서 비롯되었다. 여신이 정한 절차를 따르지 않은 권리 양도는, 산이나 바다에서 노략질을 벌인 도적들이 재물을 나눠 가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등을 여신 셰키나와 샤레니안 왕국의 통치자인 샤렌 국왕 전하의 이름으로 하사한다.” 마지막 차례로 왕의 하사품을 받은 지저분한 행색의 방랑 기사가 왕 앞에 허리를 숙였다. 시몬은 가볍게 한숨지었다. 세자가 표정 없는 얼굴로 시몬을 슬쩍 보고 있었다. 알현실에 행렬을 지어 들어왔던 이들 대부분은 공치사가 마무리되자 밖으로 나갔다. 알현실의 문이 다시 닫혔을 때, 남은 자들은 왕과 세자, 키델마르와 시몬, 트라우스 백작이었다. 왕은 왕좌의 돌 등받이에 기대 앉아 있었다.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신하들을 말없이 훑어보고 있었다. 공치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알현실 구석진 곳에 있었던 시몬도 지금은 왕 앞에 서야 했다. 키델마르의 것보다 조금 짧은, 어깨높이까지 오는 지팡이를 쥔 시몬은 회색의 도톰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회색의 현자.” 왕이 말했다. 한 발짝 앞으로 나선 시몬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 전하.” “일전에 했던 얘기를 다시 듣겠소.” 왕은 오른손에 턱을 괸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시몬을 향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건국기념일 축제 말이옵니까, 전하?” 시몬이 물었다. 왕이 말했다. “왜 축제에 요정들을 초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전에도 같은 청을 올렸던 것을 내가 거절했지만, 경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였소.” 시몬은 목을 가다듬었다. 바로 옆에 선 키델마르가 자신을 향해 살짝 고개 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책망하는 듯한, 또는 시몬의 처지가 고소하다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시몬이 입을 열었다. “한 달 후에 있을 건국기념일은 왕국이 세워진 지 정확히 이백 년을 맞는 날입니다. 지난 이백 년의 수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선, 왕국의 경사에 요정들을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미래라는 게 무엇이오?” 왕이 냉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샤레니안 왕국이 악마의 그림자를 떨쳐내고 진정한 ‘인간의 나라’가 되는 미래입니다, 전하.” 시몬이 말했다. 키델마르가 끼어들었다. “무슨 불경한 말씀이오, 경. 왕국은 백 년 전에 악마를 봉인하고 추종자들을 멸했소. 어째서 우리가 악마의 그림자를 여전히 떨쳐내지 못했다는 것처럼 말씀하시오?” 왕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시몬이 키델마르에게 몸을 돌리고 말했다. “경의 말씀은 사실이오. 하지만 요정들은 영원한 삶을 살며, 고작 백 년이 지났다 해서 의혹이 사라지지는 않소. 바로 우리가 악마를 추종하고 악마의 힘을 부린다는 불경한 의혹 말이오.” 시몬은 침묵에 잠긴 왕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전하. 이번에야말로 왕국이 무고하며 고결하다는 진실을 요정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이는 요정들을 안심시키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요정들이 왕궁을 방문하여 전하 그리고 세자 저하와 함께 거동하는 모습을 만민이 보게 된다면, 왕국에는 더 많은 이들이 몰려올 것이며 기사 서임을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샤레니안 왕국은 수많은 인간이 왕래하고 정주하는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전하께서 오랫동안 염원하셨던 인간의 나라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지나치게 위험하오.” 왕이 즉각 대답했다. “요정들은 언제나 우릴 싫어했지. 세계수의 신성한 땅에 인간들이 숲의 나무를 베고 돌과 흙의 집을 지었다면서 말이오. 요정들은 샤렌 1세께서 건설하신 이 왕국과, 고원에 사는 이교도들을 똑같이 취급하오. 요정들을 왕궁에 불러들이는 건, 왕국에 간섭하고 염탐하는 짓을 요정들에게 허락하는 결과만 낳을 거요. 그래서 내가 일전에 경의 요청을 거절했소.” 시몬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인간의 나라는 인간들끼리만 누리면 될 일이오. 인간이 자신의 주인이며 구원자가 되는 세상에 요정의 오만과 편협함이 끼어들 자리는 없소. 모두 그렇게 알고 있으시오.” 왕이 왕좌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시몬이 말했다. “남부에도 인간의 나라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왕이 다시 왕좌에 앉았다. 그는 팔걸이에 두 손을 올려놓고 턱을 빳빳이 들었다. 회백색 수염이 석고상처럼 흔들림 없었다. 키델마르가 조금 찌푸린 인상으로 말했다. “시몬 경은 왜 전하의 시간을 자꾸 빼앗으시는 거요?” 시몬은 키델마르에게 대꾸하지 않고 곧장 말했다. “남부는 지난 팔십 년 동안 왕국의 실효 지배를 받지 못했습니다. 리스 백작의 영지를 제외하면, 남부인들의 자치로서만 다스려졌습니다. 그리고 이십 년 전부터는 대륙을 방랑하던 어느 요정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요정은 전하와의 상의도 없이, 순찰대라 불리는 사병 조직을 만들어 남부를 제멋대로 관리하고 통치했지요.” “헬레나.” 왕이 겨우 들릴 만큼 작게 말했다. “다 아는 얘기요, 경.” 키델마르가 대꾸했다. 시몬이 말했다. “요정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도 아시겠지요, 키델마르 경. 인간이 요정에게 해를 끼친다면, 숲에 은둔한 요정들은 물론 동쪽 하늘의 용왕까지도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전하. 헬레나의 사병 조직에 해를 끼치는 것 또한 헬레나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간주될 테지요.” “잠깐, 잠깐.” 트라우스 백작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몬 공, 참견하는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저로서는 말씀의 갈피를 잡지 못하겠습니다. 요정들을 건국기념일 축제에 초대하는 일과 헬레나가 남부에서 활개치는 것이 무슨 관련입니까? 헬레나를 상대로 전쟁을 하자는 말씀은 아닐 것으로 압니다.” “나도 경의 말뜻을 헤아리기 어렵군. 본론을 말하시오.” 왕이 말했다. 시몬이 지팡이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요정들을 초대하는 것은 왕국의 의혹을 해소하기 위함만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중요한 건, 왕국과 요정 간의 신뢰 관계를 만민에게 보여주는 일입니다. 현재 남부는 드레이크들로 인해 곤혹을 치르고 있습니다. 많은 남부인들이 죽거나 살던 곳을 잃었고, 헬레나의 순찰대만으로는 드레이크를 막아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전하의 명령에 따라, 남부의 영주들은 일절 개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분 자기 성에 숨어 있거나 수도로 피신하였지요.” “경이 그러라고 강권하지 않았소?” 왕이 말했다. 시몬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불의 산을 정복하여 고원의 이교도들을 다시 한번 몰아냈으니, 다가올 건국기념일 축제에 요정들과 함께한다면 왕국의 위상은 이백 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드높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국의 다음 과업은 남부로 진군하여 드레이크를 무찌르고 남부인을 구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키델마르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드레이크 문제에 관여해선 안 된다고 직접 칙서를 작성했던 경이, 지금 와서 개입하자고 말을 바꾸는 것이오?” “헬레나를 몰아낼 수도 있겠군요.” 알현실에 있는 모두가 세자에게 시선을 향했다. 세자는 줄곧 왕좌 옆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키델마르와 백작은 지금 막 세자를 발견한 것 같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자는 시몬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긴장한 입매가 굳어 있는 것이 시몬의 눈에 띄었다. ‘이 시점에 말문을 여신 것은 위험합니다.’ 시몬은 생각했다. 하지만 세자의 존재감을 도로 감출 수도 없었다. 시몬이 세자의 시선을 그대로 받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자 저하. 지금도 적지 않은 남부인들이 왕국 수도에 몰려들고 있습니다. 건국기념일 축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부에서 터전을 잃고 피난 온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선 헬레나의 순찰대도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끊이지 않고 들려옵니다. 헬레나의 무능을 탓하는 목소리도 조금씩 커지고 있지요.” 백작이 물었다. “드레이크를 막아내고 있는 건 순찰대 아닙니까? 어째서 책임을 그쪽에 묻는 겁니까, 남부인들은?” 시몬이 대답했다. “팔십 년 동안 남부를 지배하지 않은 왕국은 책임을 물을 대상이 못 됩니다. 남부인들도 자신들이 왕국에서 독립하여 살아가는 것에 나름의 자부심을 품고 있었죠. 헬레나와 순찰대는 그들이 자랑스레 여기는 자유의 상징입니다. 순찰대가 드레이크 문제를 해결 못한다면 남부인들의 자유도 무용해집니다. 그들 중 일부는 다시 왕국의 지배 하에 보호받기를 원하겠죠. 일부는 끝까지 싸울 수도 있지만, 그건 헬레나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헬레나가 초대에 응할 것 같습니까?” 세자가 물었다. 시몬이 말했다. “응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든, 남부를 방치한 우리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든 말입니다.” “헬레나가 숲 요정들의 힘을 빌려 드레이크를 몰아낼 수도 있습니다.” 세자가 말했다. “헬레나가 숲 요정들의 은신처에 숨어들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시몬이 말했다. 세자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시몬도 수염을 몇 번 쓸기만 할 뿐 조용히 서 있었다. 키델마르가 시몬과 세자를 번갈아 보더니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전하. 시몬 경의 주장은 추측에 불과합니다. 헬레나는 초대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엘프 사제들이나 숲 요정들을 불러들여 요정들이 왕국 내정에 간섭할 빌미를 제공합니다. 인간의 나라는 인간의 힘만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또한 남부는 북부에서의 전쟁을 마무리한 뒤 천천히 되찾아도 될 것입니다. 요정들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일을 다시 한 번······.” 웃음소리에 키델마르의 말이 묻혔다. 낮고 길게, 모깃소리처럼 꺼림칙하게 퍼지는 웃음소리였다. 왕은 알현실 천장으로 얼굴을 올린 채 한참동안 웃었다. 키델마르는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돌연 웃음을 그친 왕이 그늘진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 “과연. 경이 나에게 드레이크를 방치하라 말한 이유가 그거였군. 요정들을 초대하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헬레나를 제외한 요정들은 백성들에게 이렇게 설득하기 위한 장식인가? 요정 한 명의 힘으로는 남부에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왕국의 힘만이 가져올 수 있다. 그러니 왕국이 남부로 군대를 진군하는 것은 정당하고 정의롭다. 이런 식인가?” 시몬이 대답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전하. 사태가 길게 이어지면 왕국에도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커질 겁니다. 요정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십시오. 헬레나뿐 아니라 숲의 요정들, 대륙 남쪽에 있는 엘프 사제들에게도 말입니다.” “오르비스에는 안 보낼 것이오?” 키델마르가 핀잔을 주듯 말했지만, 이미 어떠한 영향력도 가지지 못한 말임을 시몬은 알고 있었다. 왕이 다시 손으로 턱을 괸 자세를 했다. “지나치게 위험하오.” 왕이 말했다. 시몬은 말없이 왕의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요정의 통찰력은 인간의 것을 상회하지. 헬레나가 경의 뜻대로 움직여 줄 것 같소?” 왕의 읊조리는 듯한 말에 시몬은 수염을 손으로 쓸려다가 말았다. 시몬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트라우스 백작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왕의 옷자락이 왕좌에 쓸리는 소리가 났다. 시몬은 눈을 떴다. 왕은 일어서 있었다. “고민하고 결정하겠소. 지금은 불의 산 방비와 축제 준비에 전념하시오. 초대장을 보낼 시간은 많이 남았소.” 알현실 벽에 난 복도로 왕이 걸어갔다. 세자가 시몬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조용히 뒤따랐다. 왕좌를 지키고 선 기사와 사자 석상이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트라우스 백작이 두 현자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키델마르가 시몬을 향해 “무슨 꿍꿍이요?”라고 말했지만 시몬은 답하지 않았다. 시몬은 그저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로 시선을 향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태피스트리의 삽화로 수놓기 어려워 보였다. 뛰어난 회화적 감각을 지닌 장인의 솜씨로도 부족했다. 그날 밤 시몬은 왕자의 방이 있는 탑으로 걸음을 옮겼다. 각주: 1) 샤레니안 왕가의 상징이 날개 달린 사자라는 본작의 설정은 원작 〈길드대항전〉의 맵 ‘현자의 분수’의 NPC 분수 조각상, ‘에레고스의 왕좌’의 몬스터 사자 석상에서 따왔습니다. 이후 원작에 추가된 차원의 도서관 6장 〈샤레니안의 기사〉의 아이콘도 날개 달린 사자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켈라드의 갑옷에도 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원작에서도 날개 달린 사자를 샤레니안의 상징으로 삼은 것 같습니다. 2) 붉은색에 노란색 테두리가 있는 태피스트리는 〈길드대항전〉 맵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거기에 새겨진 문양은 본작의 창작입니다. 3) 〈길드대항전〉에는 ‘현자의 분수’라는 맵이 있으며 ‘옛 샤레니안의 충신’들이 언급됩니다. 이곳 분수에는 4개의 조각상이 있으며 4명의 충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벤트 퀘스트 〈세인트 세이버를 찾아서〉에서는 ‘현자 키리안’이 언급됩니다. 본래 ‘현자의 분수’라는 이름에서 ‘현자’는 분수 조각상의 수수께끼를 푸는 플레이어들의 지혜를 가리키는 것일 테지만, 본작에서는 ‘현자’를 4명의 충신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이를 종합하여 과거 샤레니안 왕국에는 왕의 충신이었던 현자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왕에게 ‘용맹의 훈장’이나 ‘지혜의 두루마리’ 등을 하사받을 만큼 높은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시에 현자들을 나타내는 석상이 갑옷으로 중무장한 전사의 모습이며 유적 발굴지의 몬스터들과 군영의 존재를 통해 샤레니안 왕국이 군대 양성과 정복 활동에 열성적이었음을 알 수 있으므로, 4명의 현자들은 왕에게 여러 전략적 조언을 베풀었던 핵심 참모들로 추정됩니다. 원작에서 이름이 밝혀진 현자는 키리안이 유일하며, 다른 현자들의 이름은 본작의 창작입니다. 4) 폰토스 고원이라는 지명은 가이드북 『메이플스토리 퍼펙트 가이드 16』(시공사, 2003)의 “빅토리아 아일랜드의 북쪽 폰토스 고원에 위치하고 있는 페리온은 원주민 전사 ‘휘페리온’(높은 곳을 달리는 자)이 세운 마을이다”에서 언급됩니다. 본작에서는 빅토리아 북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사용됩니다. 5) 원작에서 샤레니안 왕국은 “고대의 신비 샤레니안”, “고대 문명 국가”(NPC 샨) 등으로 언급됩니다. 본작은 원작으로부터 300여 년 전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고대 왕국 샤레니안이 본작에 건재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어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길드대항전〉의 퀘스트 아이템인 ‘700년산 주니어 네키 술’을 통해 샤레니안의 멸망이 원작 기준 700년 이내의 사건임을 알 수 있으며, “고대의 책” 또는 스톤 골렘을 만든 “고대의 마법사들”의 경우처럼 원작에서 ‘고대’라는 표현은 분명한 시기 구분 없이 남용되는 느낌이 강합니다. 이에 따라 본작에서는 ‘고대’라는 수식어를 다소 무시한 채 샤레니안 왕국을 등장시키기로 했습니다. 6) 국왕 샤렌 3세의 왕세자가 샤렌 4세라는 본작의 설정은 원작의 〈샤레니안의 기사〉에 등장하는 샤렌 4세에게서 따왔습니다. 이름을 제외한 배경 설정은 본작의 창작입니다. 7) 트라우스 백작의 이름은 레벨 40제 한손검 트라우스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ITCG나 그리스 신화 이외의 경우는 대부분 원작의 장비에서 이름을 따옵니다. 8) 본편에서 언급된 로이 왕의 이름은 ITCG 카드 ‘애로우 레인(Rain of Arrows)’의 영문판 설명에서 따왔습니다.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King Roe survived the rain of arrows only to fall victim to a monsoon of spears.”
EXP
74
(74%)
/ 101
|
메이플스토리 인벤 자유 게시판 게시판
인벤 전광판
[Evergreen2] ㅁㅇㄴㅇㅇㄴㅁㅇㅁㄴ
[요시무라에토] 적응성 회로 가동! 라마트라. 내 고통을 느껴라!
메이플스토리 인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플위유] 안눙허세요
[불여우] 블래스터좀 제발 살려주세요
[Gletscher] 이타미오 칸지로

누가퍼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