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무녀가 자리를 비우고 엘란마저 쓰러진 왕국군은 무력하게 무너졌고, 내전은 사제들과 신전파의 완승으로 허망하게 끝이 났다. 매캐한 연기와 화염이 신전 주변을 여전히 감싸고 있는 가운데, 대무녀의 성소 내부엔 오직 서늘한 정적과 가쁜 숨소리만이 흘렀다.

화려했던 융단 위, 침상에 누워있는 사내는 한때 아스완에서 가장 강건했던 수호기사 엘란의 모습이 아니었다. 주름지고 메마른 피부, 뼈 마디가 비틀려 깊게 파인 볼, 실시간으로 생명력을 잃고 잿빛으로 변해버린 백발. 당장 내일 숨을 거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늙고 병든 노인의 형상이 그곳에 누워 있었다. 오직 그의 비틀어진 손목에 감겨 있는 붉은 머리카락 매듭만이 그가 엘란임을 아프게 증명하고 있었다.

"아… 윽…."

"움직이지 마, 엘란. 제발… 제발 가만히 있어…!"

힐라는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두 손을 엘란의 가슴 위에 얹었다. 손 끝에서 눈이 부실 정도의 은빛 신성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과거 아스완에 역병이 돌았을 때 수천 명의 민중을 한 번에 구원해 냈던 아스완 최고의 신성력. 그 어떤 치명상도, 베인 상처도 순식간에 메워버리던 대무녀의 기적.

그러나 은빛 빛무리가 아무리 엘란의 몸을 감싸도, 엘란의 몸은 그대로였다. 힐라의 치유 능력은 육체의 다친 곳을 빠르게 회복시키는 능력일 뿐, 아카이럼이 내뿜은 '시간을 강제로 갉아먹는 노화'와 그로 인한 육체의 시듦을 역행시킬 수는 없었다.

"왜… 왜 안 되는 거야! 내가 대무녀인데… 이 나라 모든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었는데, 왜 너만 안되는 건데!"

자신의 무력함 앞에 힐라는 목이 쉬도록 통곡했다. 강인했던 기사의 손이 떨리며 힐라의 뺨을 향해 힘겹게 올라왔다. 거칠고 주름진 그 손을 두 손으로 꼭 쥐며 힐라는 뺨을 문질렀다.

"힐… 라… 그만해라….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아."

"시끄러워! 숨 쉬기도 힘들면서 왜 자꾸 말을 해! 내가 살릴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너를 돌려놓을 거야!"

힐라의 울부짖음은 성소의 높다란 천장에 허망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엘란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기 위해, 힐라는 사흘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신전의 금서 구역을 뒤지고 자신의 생명력까지 쥐어짜 내어 정화 약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더 영험한 기운이 담긴 약재와 고서를 구하기 위해, 시들어가는 엘란을 수레에 싣고 신전 성문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신전 광장을 메운 것은 힐라를 향한 존경이나 위로가 아니었다.

내전의 화염 속에서 횃불과 몽둥이를 든 민중들, 그리고 대사제 자카리아의 지휘 아래 웅성거리는 사제들의 차갑고 벌레를 보듯 하는 시선이었다.

"대무녀 마마! 당장 그 저주받은 늙은이를 신전 밖으로 내던지십시오!"

사제 하나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 뒤에서 대사제 자카리아가 서늘한 눈빛으로 힐라를 내려다보며 말을 보탰다.

"저 기사는 저주에 오염되었습니다. 저주받은 자를 신전의 성역에 두고 대무녀께서 헛되이 신성력을 쏟아부으시니, 아스완을 수호하던 결계가 약해지고 내전의 비극이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국가를 위해, 그리고 아스완의 안녕을 위해 저 기사를 버려야 합니다!"

힐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 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자카리아! 엘란은 신전을 지키던 수호기사다! 내전의 혼란 속에서도 나를 지키려다 저주를 받은 기사란 말이다!"

"그의 공로는 높이 삽니다. 허나 지금은 그저 신전을 오염시키는 흉물일 뿐입니다! 그도 진정 수호기사라면 본인이 신전에서 나가야함을 잘 알고 있겠지요. 제 발로 걸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게 오히려 기쁠 겁니다."

사제들의 선동에, 미리 준비해둔 바람잡이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맞다! 저주받은 기사 때문에 대무녀님의 신성력이 오염되겠다!"
"모두가 살려면 저 늙은이를 내보내야 한다!"
"대무녀님, 정신을 차리십시오! 고작 기사 한 놈 때문에 나라를 망칠 셈입니까!"

결국 힐라가 구해주었던 아스완의 민중들마저 돌을 들기 시작했다.

투걱-!

누군가 던진 날카로운 돌멩이가 힐라를 스쳐 지나가며 엘란의 나약한 몸을 때렸다. 힐라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제 몸을 내던져 엘란의 위를 덮어 막아섰다.

자신들이 기근과 질병에 시달릴 때는 힐라의 발치에 엎드려 '생명의 어머니', '아스완의 구원자'라며 추앙하던 자들이었다. 힐라가 밤을 새우며 신성력을 쥐어짜느라 피를 토할 때도 당연하다는 듯 기적을 요구하던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정작 힐라가 숨을 쉴 수 있는 단 하나의 구원이자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내를 살리려 하자, 저마다 돌을 던지며 배은망덕한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버려라…!"
"저주받은 늙은이를 사막으로 던져라!"

민중들의 광기 어린 부르짖음과 사제들의 가식적인 읊조림이 힐라의 귓가에서 기괴한 소음으로 맴돌았다.

힐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고 손가락질하는 아스완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 담긴 것은 인간에 대한 존엄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들의 안위만을 챙기려는 비겁함과 추악한 탐욕뿐이었다.

'아….'

힐라의 내면 깊은 곳에서, 평생 동안 그녀를 옭아매고 있던 '대무녀로서의 사명감'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마지막 끈이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완벽하게 끊어져 버렸다.

힐라의 눈동자에서 따뜻했던 은빛 생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차갑게 식어버린 잿더미와, 핏빛보다 짙은 극심한 환멸만이 들이찼다.

"내가… 너희를 위해 내 인생을 바쳤는데."

힐라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광기 어린 광장을 차갑게 압도했다. 그녀는 뺨에 흐르는 피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내며, 광장에 서 있는 위선자들을 향해 서늘하게 읊조렸다.

"내가 너희의 병을 고치고, 너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내 청춘과 온 인생을 바쳤는데…… 너희는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단 하나의 구원조차 허락하지 않는구나."

"대무녀님…?"

힐라의 달라진 눈빛과 오싹할 정도로 냉혹해진 분위기에 자카리아와 사제들이 찔끔하며 물러섰다.

힐라는 더 이상 그들에게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수레에 누워 거친 숨을 내쉬는 엘란의 손을 꼭 잡은 채, 오만한 걸음걸이로 돌아서 성소의 문을 쾅 닫아걸었다.

이 썩어빠진 도시와 위선적인 사람들을 위해 신성력을 쓸 이유는 이제 단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스완이 잿더미가 되든, 이 민중들이 전부 피를 토하고 죽어 나가든 상관없었다.

이 순간부터 힐라의 세상에는 오직 하나, 시들어가는 기사 엘란을 살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열망은, 도래할 완벽한 붕괴와 검은 계약을 향해 차갑게 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