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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22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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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플 자작 소설] 빛의 그늘 - 7성소의 거대한 문을 쾅 닫아걸자, 밖에서 들려오던 민중들의 야만적인 고함과 사제들의 가식적인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외부의 소음이 사라진 성소 안에는 오직 촛불의 위태로운 흔들림, 그리고 침상 위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엘란의 거친 숨소리만이 감돌았다. 힐라는 짓물러 터진 무릎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꿇어앉아, 시들어가는 엘란의 상체를 품에 안았다. "힐… 라…." 주름지고 부식된 엘란의 손이 지독한 떨림을 뚫고 힘겹게 올라왔다. 피범벅이 된 그의 손가락이 힐라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거친 감촉에 힐라는 더욱 깊게 목을 놓아 울었다. "말하지 마… 제발, 엘란. 내가 방법을 찾을게. 다시 도서관으로 가고, 대륙을 다 뒤져서라도…" "아니다… 힐라.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엘란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희미하게 열린 그의 눈동자 속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 대신, 평생 신전의 그늘 아래 대무녀라는 중압감을 짊어지고 살아온 여인을 향한 아득한 연민만이 담겨 있었다. "평생… 너를 수호하는 기사로 살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엘란…" "단 한 번도… 대무녀로서 너를 본 적이 없다…. 내 눈에는 그저… 아름답고 어여쁜… 한 여인이었을 뿐…." 평생 대무녀와 수호기사라는 거대한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마음.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꺼내놓은 그 진심에 힐라의 가슴이 처참하게 찢겨 나갔다. "나도… 나도 그랬어, 엘란! 내게 이 나라도, 신전도 다 필요 없어! 내게 유일한 세상은 오직 너 하나뿐이었단 말이야!" 엘란의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갔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노인의 얼굴 위로, 한때 훈련장을 호령하던 강건하고 늠름했던 청년 기사의 미소가 환영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맙다… 힐라. 부디… 행복해져라…." 힐라의 뺨을 쓸어내리던 엘란의 손에서 순간적으로 힘이 풀렸다. 툭-. 손이 침상 아래로 무겁게 떨어졌다. 가쁘게 요동치던 그의 가슴이 완전히 정지했고, 유일하게 붉은빛을 발하던 손목의 머리카락 매듭 위로 차디찬 사신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의 전신이 윤기를 잃은 잿더미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엘란…? 엘란, 눈 좀 떠봐. 응? 장난치지 마…" 힐라는 멍한 눈으로 엘란의 가슴을 흔들었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심장의 고동도, 따스했던 숨결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아아아아악-!" 성소의 높다란 천장이 깨어져라 뿜어져 나온 힐라의 부르짖음은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피를 토해내는 짐승의 오열이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목소리가 갈라지고 눈에서 피눈물이 훔쳐내 질 때쯤, 힐라의 오열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그녀의 내면을 받치고 있던 거대한 기둥들이 모조리 무너져 내리고, 그 자리엔 오직 칠흑 같은 허무와 잿더미만이 남았다. 힐라는 넋이 나간 눈으로 차갑게 식은 엘란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 순간,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아카이럼이 흩뿌렸던 '시간을 갉아먹는 저주'의 잔혹함,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늙게 만들어 앗아가 버린 세월의 흐름과 노화라는 거대한 절망이었다. '시간이… 신이 만든 이 잔인한 섭리가 네 젊음을, 네 목숨을 이렇게 덧없이 갉아먹고 빼앗아 갔단 말인가.' 힐라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부릅뜨였다. 피눈물이 흐른 자리를 따라 서늘한 광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아무리 고고한 신성력을 가졌어도, 흐르는 시간과 늙어가는 육체 앞에서는 사랑하는 사람 하나조차 지키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신세라니. 그때, 닫힌 성소 문 밖에서 사제들과 민중들의 야속한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대무녀님! 당장 문을 여십시오!" "그 흉물의 시신을 사막에 던져버려야 아스완이 삽니다!" 힐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 담겨 있던 은빛 신성력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오직 소름 끼칠 정도의 냉혹함만이 맴돌았다. "너희가 바란 것이 이것이었나." 힐라의 낮고 서늘한 중얼거림과 함께, 그녀의 손끝에서 순백의 신성력 대신 칠흑 같은 어둠의 주술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아카이럼이 뿌리고 간 어둠의 잔재, 그리고 그녀 자신의 환멸과 쇠락에 대한 지독한 집착이 결합하여 신성력을 기괴하고 오염된 주술로 완벽하게 비틀어버린 것이었다. 그 깊은 절망과 증오의 기운에 응답하듯, 성소 천장의 공간이 마치 유리창처럼 균열을 일으키며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차원의 틈새 너머로, 태양조차 삼켜버릴 듯한 칠흑 같은 어둠이 물밀듯이 쏟아져 내렸다. 공기 중의 모든 소음과 질량이 압착되는 듯한 지독한 중압감 속에서, 성소 한복판에 형태를 규정할 수 없는 거대한 어둠의 형상이 떠올랐다. 실체조차 명확히 보이지 않는 붉고 차가운 눈동자만이 허공에서 힐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섭리에 옭아매여 모든 것을 잃은 자여.] 성소 내부가 아닌, 힐라의 뇌리와 영혼 깊은 곳을 직접 울리는 나지막하고도 압도적인 목소리. 검은 마법사의 의지였다. [세월의 쇠락을 한탄하는가. 죽음과 소멸이 지배하는 이 세계의 비극을 원망하는가.] 그의 거대한 손길과도 같은 칠흑의 기운이 힐라의 몸을 부드럽게,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감싸쥐었다. [나의 목적은 신이 만든 이 불완전한 세계를 파괴하고 완벽한 신세계(新世界)를 재창조하는 것. 내가 완성할 세계에서는 소멸한 영혼도, 끊어진 인연도 비틀린 섭리를 벗어나 다시 찾아올 것이다.] 검은 마법사의 초월적 선언.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신의 섭리에 빼앗긴 힐라에게 내려진 단 하나의 구원과도 같았다. '모든 것이 재창조되는 세계…! 그곳이라면, 죽어버린 엘란의 영혼마저 다시 불러내어 온전히 재회할 수 있다…!' 힐라에게 새로운 희망과 과업이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세계에서 그를 다시 마주하기 위해, 힐라 자신 역시 세월에 마모되거나 시들지 않는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그날까지 살아남아야만 했다. 그것이야말로 엘란이 기억하는 아름다운 힐라로서 그를 맞이할 유일한 길이었다. [나의 과업을 위해 네 지혜와 영혼을 바쳐라. 그렇다면 네게 세월조차 앗아가지 못할 영원의 육신과, 그를 다시 맞이할 신세계의 자리를 주겠다.] 검은 마법사의 거룩하고도 무거운 제안에 힐라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거래의 대가와 목적이 완벽해진 순간, 그녀 안의 환멸이 지독한 신념으로 바뀌었다. "기꺼이." 힐라는 팔을 벌려 어둠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성소 중심에 웅장하게 봉인되어 있던 '대무녀의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스완 전체의 생명력과 결계가 연결된 신물. 힐라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찢어 검붉은 핏방울을 구슬 위에 떨어뜨렸다. "나의 영혼과, 이 썩어빠진 아스완의 모든 생명을 너에게 바치겠다!" 콰아아앙-! '대무녀의 구슬'이 핏빛으로 폭발하며 아스완 전체로 칠흑 같은 어둠의 결계가 뻗어나갔다. "크아아악! 대무녀님! 살려주십시오!" "내 몸이…!" 성문 밖에서 돌을 던지며 고함을 치던 사제들과 민중들의 비명이 순식간에 비틀려 나갔다. 그들의 산 생명력과 영혼이 실시간으로 쥐어짜여 구슬 속으로, 그리고 검은 마법사의 어둠을 거쳐 힐라의 몸속으로 피처럼 흡수되어 들어갔다. "대무녀님! 제발... 제발 정념을 거두어주십시오! 엘란 단장님께서 원하신 것은 대무녀님이 이런 어둠에 빠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메디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힐라의 예복 자락을 잡으며 눈물로 애원했다.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고 닮고 싶어 했던, 언제나 완벽하고 다정했던 스승의 눈동자에는 이미 인간의 온기 대신 기이한 붉은 광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단장님은 대무녀님과 아스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유지를 저버리고 이 찬란한 아스완과 백성들을 악마에게 바치시겠다는 거라니요...!" 힐라는 메디사의 울부짖음을 들으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엘란의 뺨을 쓸어내리는 그녀의 손길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그 입술에서 새어나온 목소리는 빙하보다 차가웠다. "네가 뭘 안다고 입을 놀리느냐, 메디사." "대무녀님...!" "너를 무녀로 임명한 것도 나였고, 이 아스완을 찬란하게 만든 것도 나였다. 하지만 엘란이 없는 이곳이, 늙어 시들어갈 내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백성들? 무녀들? ...내가 빛나기에 너희도 빛나는 법이었거늘, 내가 시들어간다면 너희 역시 존재할 이유가 없다." 힐라가 차갑게 손을 휘두르자 붉은 주술의 기운이 메디사를 쳐내고, 아스완 전체를 어둠으로 짓눌렀다. 메디사는 사슬처럼 자신을 죄어오는 어둠 속에서, 스승이 백성들의 생명과 영혼을 영원히 잰더로 만들어버리는 잔혹한 광경을 눈에 담으며 절망의 눈물을 흘렸다. 아스완은 순식간에 산 자가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죽음의 지하도시, 영혼들이 갇힌 지옥으로 변모했다. 화염과 핏빛 안개가 자욱한 성소 한복판, 힐라는 영원한 아름다움과 죽지 않는 영생을 얻은 채 천천히 눈을 떴다. 피처럼 붉은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고, 눈동자는 핏빛으로 깊게 물들어 있었다. 피부는 늙지 않는 영원의 기운으로 더욱 창백하고 매혹적으로 빛났다. 아스완의 대무녀 힐라는 그날 죽었다. 그 잿더미 위에서 탄생한 것은, 신세계를 완성하여 엘란과 재회하겠다는 미쳐버린 집착에 사로잡힌 '군단장 힐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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