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네브리스의 깊은 어둠, '고통의 미궁'은 생명체의 정신을 사정없이 갉아먹는 기괴한 공간이었다. 미궁이 자아내는 잔혹한 환영과 이간질에 연합군은 분열되었고, 대적자는 동료들을 하나둘씩 잃어버린 채 홀로 깊은 칠흑 속을 헤매야 했다. 

그런 대적자의 곁에는 '아잘린'이라는 가면을 쓴 힐라가 있었다. 힐라는 불안하게 떨며 대적자에게 끊임없이 절망을 주입시켰다. 여제도, 연합도 이미 무너졌다며 대적자가 스스로 희망을 포기하도록 은밀하게 가스라이팅을 이어갔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미궁이 뿜어내는 기분 나쁜 사멸의 기운이 대적자의 영혼을 옥죄어 왔다.

이 모든 것은 대적자를 완벽한 절망으로 몰아넣어 그 고결한 영혼을 검은 마법사에게 바치고자 했던 진 힐라의 치밀한 덫이었다.

그러나 힐라가 대적자의 영혼을 완전히 무너뜨리려던 순간, 난입한 오르카의 기습으로 인해 힐라의 가짜 껍데기가 산산조각 났다.

"아쉽네. 손쉽게 정리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뭐... 그렇다고 한들 바뀌는건 아무것도 없을거야."

정체가 드러난 힐라는 아쉬운 듯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미궁 깊은 곳, 자신의 본거지인 '욕망의 제단'으로 모습을 숨겼다. 

"여전히 약하구나."

"..."

"멍청이. 정신 차려. 앞으로 더는 돕지 않을 거니까."

오르카는 툭 한마디를 내던진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대적자는 홀로 미궁 최심부의 미로와 사멸의 기운을 헤쳐 나가야 했다.

동료들의 염원과 스스로의 의지로 미궁 최심부의 환영을 끊어내며 마침내 욕망의 제단 입구에 다다른 대적자. 비릿한 사멸의 기운이 핏물처럼 일렁이는 제단 중앙에는, 검은 마법사의 사멸 권능을 받아 생사(生死)를 초월한 모습으로 거듭난 여왕 진 힐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 힐라는 제단 허공으로 오만하게 떠올라, 미궁 전체의 어둠과 사멸의 기운을 전신으로 끌어모으며 대적자를 내려다보았다.

"우매한 불나방이 결국 여기까지 발악하며 올라왔구나."

공간이 기괴하게 일렁이는 대치 속에서, 진 힐라는 손끝에서 사멸의 핏빛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아스완의 찬란했던 시절부터… 사람들은 내게 완벽함을 요구했지. 내 유일한 빛이자 그늘이 세월이 흐르고 죽어갈 때, 나를 향했던 칭송은 순식간에 그를 향한 차디찬 멸시로 변했다. 육신도, 사랑도, 세월 앞에서는 그저 썩어가는 껍데기일 뿐… 그렇기에 나는 영원을 하사받았다."

진 힐라의 피처럼 붉은 눈동자에 지독한 광기가 일렁였고, 그녀는 거세게 손가락을 튕겼다.

"보아라,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한 나의 완벽한 영원을!"

제단의 칠흑 같은 어둠이 강제로 찢겨나가며, 온몸이 잔혹한 핏빛 실로 관통당한 거대한 괴수 '욕망의 현신'이 끌려 나왔다. 수백 년 전 아스완의 소멸 속에서 가공해 둔 엘란의 영혼이었다.

"나의 엘란, 저 오만한 불나방을 찢어발겨라!"

사멸 권능의 파동 속에서 폭주하는 괴수와 맞선 대적자는 괴수의 무자비한 공격에 섞인 미세한 주저함을 읽어냈다. 괴수의 흉측한 외형 속 엘란의 영혼은, 스스로의 해방보다 진 힐라의 미쳐버린 광기를 끝내기 위해 대적자의 칼끝이 힐라의 손끝, 즉 붉은 실의 원천을 향하도록 자신의 공격 궤적을 미세하게 비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사는… 스스로의 해방보다 그녀를 끊어내길 바라고 있어!'

"너의 절망도, 비틀린 집착도… 결코 승리할 수 없다!"

대적자는 기사의 마지막 의지에 응답하듯 한계 너머의 에르다를 무기에 응축시켰다. 눈부신 빛의 일격이 제단을 가르고 뻗어나가, 진 힐라의 손가락에 연결된 잔혹한 붉은 실들을 단번에 끊어냈다!

콰-앙!!

"아… 안 돼…! 내 실이! 내 영원이……!"

붉은 실이 허공으로 바스러짐과 동시에 괴수의 형상이 거대한 빛으로 분해되었고, 수백 년 만에 본래의 단정하고 고결한 모습을 되찾은 엘란의 영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란은 마침내 찾아온 자유 속에서 바닥에 무너져 내리는 진 힐라를 향해 아련하고 슬픈 눈빛을 보냈다.

"엘란…! 가지 마…! 나를 두고 가지 마라……!"

진 힐라는 허물어지는 육신을 끌며 손을 뻗었으나, 대적자의 검에 꿰뚫린 순간 사멸의 권능이 역류하여 그녀를 사정없이 갉아먹었다. 아름답던 피부는 잿빛으로 마모되고, 순식간에 추악한 노인의 형상으로 부식되어 갔다. 자신이 그토록 공포스러워했던 늙음과 죽음의 형상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엘란의 영혼은 피를 토하며 오열하는 힐라를 향해 나지막이 고개를 숙여 기사로서의 마지막 경례를 올린 뒤, 빛이 되어 어둠 속으로 산화되어 사라졌다.

"아아아아악-!"

단 하나의 사랑마저 잃어버린 진 힐라의 절규가 욕망의 제단을 찢었다. 사멸의 권능이 꺼져가며 진 힐라의 형상 역시 잿더미가 되어 차가운 바닥에 흩뿌려졌다. 수백 년간 아스완을 짓눌러온 비극과, 미궁의 깊은 어둠이 마침내 바스러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