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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농업정책에 대한 글이 있어서 급 끌려서 적어봅니다.




대약진 운동 추진의 배경과 농업정책에 관련된건 링크로.









대약진 운동은 농업생산성 증대와 함께 철의 생산성도 늘리자는게 기본 골자였죠.

농업집단화, 제사해운동(사해란 참새, 쥐, 모기, 파리 죽이기)같은 농업 정책의 병크는 위 링크에 있고, 

철의 생산성을 늘리자고 한짓이 참 가관;;







철을 '산업의 지배자'라고 부르며, 철만 많이 만들어내면 경제대국이 되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마오쩌둥은,

체계적으로 철강산업의 기틀을 잡아가는 대신, 중국의 가장 큰 자산인 인민들을 활용....

윗 사진처럼 마을 또는 공공장소 마다 작은 크기의 재래식 용광로를 만들고 주변의 주민들을 동원.








인민들에게 쇠붙이를 구해오게 하고.

관리, 교사, 의사 직업, 남녀노소 불문 모두 철을 구해와 용광로에만 매달리기 시작.

아이들조차도 학교에 가지 않고 쇠붙이를 구하러 돌아다니고, 밥솥과 주방기구들도 몰수해 용광로에 집어넣으며,

거리의 철책도 뜯어다가 용광로 안으로 넣습니다.






농업생산성을 극대화 시키자니 실적에 매달린 관리들의 성화로 인해 농기구도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고, 

철 생산을 위한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나무의 씨 또한 말라 버리며,

이 미련한 방법으로 만든 철 생산은 양을 채우지도 못했으며 질이 형편없었기에 쓸수 없을정도의 것들이 태반.
(당연히 철 생산이라고는 해본적도 없는 인민들을 동원했으니 제대로 된게 나올리가...)







철 생산에 집착하다보니 야심차게 밀어붙이 농업생산성 증대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시작.

농기구도 없이 농부들이 맨손으로도 논밭을 파해치며 농사를 짓지만, 온동네가 철생산에 매달리니 농기구와 일손 부족,

농업 집단화를 실시하며, 집에 식량 저장을 엄격히 금지했고 제사해 운동으로 인해 해충과 병충해가 늘어나 흉년.

하지만 질책이 두려운 관리들은 농작물 생산량을 허위보고해 세금만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 불행하게도 가뭄과 홍수가 연달아 덮치면서 흉년을 넘어서 대기근이 중국전역을 휩쓸고 혼돈의 카오스가 열리게 되는데......








물론 가장 큰 책임은 결정을 내리고 정책을 추진한 마오쩌둥에게 있지만,

이 마오쩌둥에게 가려진 인물이 있으니 바로 첸쉐썬 박사



매사추세츠 공대에서 교수까지 지낸 인물로, 

한국전쟁 당시에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붙잡힌 미국 공군 포로와 교환 조건으로 중화인민공화국측에 인도







그리고 중국과학역학연구소의 소장이 되어 이후 중국의 우주 개발을 이끌며, 

중국의 1세대 미사일과 인공위성, 핵무기 개발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여기까진 좋은데 자기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농업 정책에 자문을 맡게 되면서,

검증도 안된 괴상한 논리를 마오쩌둥에게 조언했고 그대로 추진해서 나온게 대약진 운동의 농업 관련 정책들.






결국 대약진 운동은 실패해 유례가 없을정도의 대재앙이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가 군인과 민간인 합산해 4~5천만명으로 추정되는데(자료에 따라선 7천만까지 올라감)

대약진 운동 또한 최소 3천만에서 4천만까지의 아사자가 나오는 기적의 미라클이 발생



전쟁난것도 아니고 정책 한번 잘못세워서 2차대전 희생자에 육박할만큼 죽어버리죠.
(그것도 중국인만...)









대약진 운동 실패로 마오쩌둥의 위상이 추락하고, 궁지에 몰리자 권력과 정치력 회복을 위해 다시 추진하기 시작한게



문화 대혁명....고만해 미친놈아.



중국의 인민들에게 있어서 5~70년대는 어쩌면 2차대전때의 유럽인들보다도 생명의 위협을 받던 시기였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