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서 태어난 자 -4- <하메라의 거처>




  아스타르는 하메라의 거처에 방문했다. 그녀의 거처는 사원과 다를 게 없었다. 악마가 머무는 곳이라고 하기에는 잘 정돈되어서 깔끔했고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신앙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메라는 거처의 중심부에 앉은 채 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스타르가 걸으면서 나는 발굽 소리에 두 눈을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갑옷은 성기사 시절 입던 밝게 빛나는 갑옷이 아닌 사악한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갑옷이었다.


  그녀가 아스타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독님을 뵙습니다.”


  “명상을 방해했나 보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를 찾아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스타르는 하메라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을 찾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불경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랬어야만 했습니다.”


  “이유를 듣고 싶군.”


  아스타르의 물음에 하메라는 뒤로 물러나더니 무릎을 꿇고 바닥을 짚은 채 주문을 외웠다. 그건 처음 듣는 주문이었다.


  “저는 군단에 대적하던 시절 군단을 속이기 위한 주문들을 익힌 적이 있습니다. 방금 그 시절에 익힌 주문을 지옥마력의 힘으로 사용했습니다. 제 거처 외부에 있는 이들은 제가 보여주고자 하는 환영으로 우리를 인식할 것입니다.”


  “우리 내부에 잠입한 적을 속이기 위함이군.”


  “맞습니다. 하지만 적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이미 오랜 세월 군단에 잠입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오랜 세월 동참해온 것처럼 보였지만 그동안 결정적인 순간에 독을 퍼트렸습니다. 아키몬드님과 킬제덴님의 최후뿐만 아니라 군단이 아르거스에서 패배한 일도 모두 그들에게서 비롯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보다 더 많은 일이 그들의 목적에 따라 일어났을지도 모르고요.”


  “나스레짐.”


  하메라는 이를 알고 있었냐는 듯 아스타르를 올려봤다. 아스타르는 자신의 성소에서 침묵을 지키는 동안 군단의 패배와 지도부의 몰락을 곱씹어 보았다. 적들이 군단의 거점인 아르거스로 치고 들어온다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군단이 총력을 다했다면 얼마든지 저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르거스의 방위에 힘을 썼어야 했던 나스레짐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 나스레짐들의 무능으로 이해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일이었다. 그때부터 아스타르는 아키몬드님과 아버지의 최후뿐만 아제로스에서 겪은 군단의 실패 역시 나스레짐들의 교묘한 영향 때문일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이 사실을 나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의심 정도로 알아차린 것이 아닙니다. 꼭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메라는 두루마리를 하나 내밀었다. 아스타르는 그걸 집어서 펼쳤다. 두루마리에는 빛의 존재들이 주로 사용하는 룬문자들이 적혀있었다. 군단의 구성원들 중 나루의 언어를 이해하는 이는 드물었지만 아스타르는 적들의 생각을 읽고 책략을 세우기 위해서 나루의 언어도 오래전에 익혔다.


  “잠입과 책략에 능통한 나스레짐은 어둠땅의 레벤드레스에서 기원한 종족이다. 그들은 뒤틀린 황천의 원주민으로 보이지만 사실 레벤드레스의 대영주란 존재가 창조한 피조물이다. 먼 옛날 나스레짐은 빛을 속였다. 그들의 불경함을 응징하기 위해서 나루들은 레벤드레스에 천 개의 태양이 퍼붓는듯한 빛의 분노를 쏟아냈다. 처절한 전쟁 끝에 우리는 그곳에서 물러났지만 나스레짐에 대한 증오를 거두지 않았다. 오늘날 나스레짐들은 불타는 군단이라는 악마들의 집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고, 과거에 우리에게 그러했듯 그들을 기만하고 있다...”


  “빛의 군대를 습격했을 당시에 수집해둔 고문서 중 하나입니다. 나루들이 작성한 것입니다. 빛은 저에게 증오스러운 적들이지만 이들의 기록은 충분히 믿을만합니다.”


  아스타르도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나루들은 위선적이고 음험한 면이 있었지만 이들의 기록물 중에는 흥미로운 진실들도 담겨 있었다. 나스레짐들에 대한 기록도 거짓이 아닌 진실일 것이다. 지금까지 아스타르를 비롯한 많은 악마들이 뒤틀린 황천의 나스레자가 나스레짐의 근원지라고 알았지만 그들의 교묘한 기만에 불과했다. 아주 오랜 세월 나스레짐들이 때를 기다리면서 첩자 노릇을 해온 것이 틀림없었다.


  “저들과 손을 잡으실 것입니까?”


  하메라의 물음에 아스타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저들과 손을 잡은 것이 아니다.”


  “모두가 제독님이 티콘드리우스와 협력을 하고 있다고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 정도는 알지 않느냐?”


  “물론 제독님께서는 이미 저들의 음모를 간파하셨겠지만 저들이 제독님께 손을 내민 이유는 곁에 두어서 감시하려는 목적일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제독님의 목도 노리겠지요.”


  아스타르는 하메라의 말을 들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토록 완고했던 빛의 투사가 악마답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하메라는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린 아스타르에게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아스타르는 웃음을 멈추더니 무릎을 꿇고 있는 하메라를 일으켜 세웠다.


  “저들을 안심시킬 수만 있다면 저들의 손을 당분간 꽉 잡고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저들도 나를 어쩌지 못한다. 아직은 저들에게도 나와 내 휘하 병력이 필요할 것이니까.”


  “그렇다면 제독님께서는?”


  “음모를 꾸미고 숙성시킬 줄 아는 건 저들만이 아니다. 우리는 기만자의 이름으로 수많은 세계를 정복하고 성전을 주도해오지 않았느냐?


  아스타르는 기만자가 지었던 미소를 똑같이 재현했다.


  “이를 위해서 네가 나의 검으로서 해줘야 할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