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서 태어난 자 -2- 제안




  킬제덴은 아스타르를 군단의 원정함대 '아스타리'의 제독으로 임명했다. 불에서 태어난 자들. 불에서 태어난 자인 아스타르에게 하사된 함대였다. 그는 원정함대 제독으로서 오랜 세월 성전에 몰두했다. 그의 지휘 아래 불탄 세계와 잿더미가 된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세계가 불타는 풍경과 가치 없는 자들의 비명을 갈구했다.


  아제로스를 군단이 대대적으로 침공하던 시기에 그는 킬제덴과 함께 아제로스를 불태우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는 녀석들의 희망을 자르기 위해 빛의 군대를 파멸시키라고 명령했다. 킬제덴의 명은 절대적이었다. 아스타르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맡겨진 일에 집중해야만 했다.


  나루의 군대는 매번 그의 병력을 따돌려 시간을 허비시켰다. 어렵게나마 고위나루를 파멸 할 기회를 얻었지만 교묘한 함정이었다. 제라로 위장한 나루가 스스로 희생해서 빛의 결계를 만들어냈다.

아스타르는 한동안 발이 묶여 있어야만 했다. 힘겹게 결계를 파훼했을 때는 이미 기만자가 몰락했고, 군단이 아르거스에서 패배를 맛본 이후였다.



 

  패전 이후 아스타르는 지휘부를 차지하려는 악마들의 내전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몰락과 군단의 패배 이후 킬제데른의 성소에서 침묵을 지켰다. 처음에 다른 악마들은 그의 침묵을 경계했다. 아스타르가 그의 아버지처럼 간계를 꾸밀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몇몇 악마들은 아스타르를 제거하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아스타리 원정함대는 수많은 세계를 정복했던 최정예 병력이었다. 시도는 당연히 미수로 끝났고, 아스타르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이후 다른 악마들은 굳이 아스타르를 자극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가 지휘하는 강대한 세력을 경계했지만 굳이 적으로 만들어서 득을 볼 게 없다고 판단했다.


  한차례 소동 이후 몇몇 악마들은 아스타르에게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에레다르의 지배자들이 저마다 에레다르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아스타르를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려 했다. 그들은 평소에 킬제덴의 힘으로 에레다르가 된 아스타르를 거짓 에레다르라고 멸시했었다. 하지만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들은 오만한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자락서스와 벨리스라, 말체자르가 제각각 야심을 가지고 아스타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심지어 아스타르를 뒤에서 가장 멸시했던 비쥴도 그에게 동맹제의를 했다. 그러나 아스타르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나이힐란의 유력한 군주인 마그테리돈과 브루탈루스도 아스타르와 손을 잡길 원했다. 본래 아나이힐란들은 만노로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지옥불성채에서 필멸자들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맛본 만노로스는 살게라스의 노여움을 사서 망각의 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강력한 지배자였던 만노로스의 부재는 호시탐탐 지배자의 야심을 품고 있던 아나이힐란 군주들의 경쟁을 촉발했다. 아웃랜드에서 일리단과 필멸자들에게 굴욕을 맛보았던 마그테리돈은 킬제덴에게 실패에 대한 벌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군단이 패배하자 벌에서 해방된 마그테리돈도 아나이힐란 지배자의 자리를 두고 패권경쟁에 참여했다. 그는 아제로스 침공에 참여했다가 패배를 맛보고 뒤틀린 황천으로 돌아온 다른 아나이힐란들이 힘을 회복하기 전에 기습했다. 그 결과 아나이힐란의 2인자였던 아즈갈로가 황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아즈갈로의 죽음은 마그테리돈이 패권경쟁에서 한 걸음 더 우위를 점하는 계기가 되었다.


  브루탈루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마그테리돈과의 경쟁에서 거의 균형을 이루며 선전했다. 비록 세력이 예전 같지 않았지만 기만자가 선봉장 자리를 자주 맡겼던 아나이힐란답게 마그테리돈의 세력을 훌륭히 저지했다. 두 아나이힐란 군주들은 아스타르가 자신을 지지해주길 원했지만 아스타르는 이번에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에레다르와 아나이힐란 다음은 나스레짐이었다. 킬제덴과 아키몬드 다음 서열인 티콘드리우스는 밤의 요새에서 필멸자들에게 패배한 이후 뒤틀린 황천으로 돌아와서 숨죽이고 있었다. 군단의 지도자들이 사라지자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섰다.


  티콘드리우스와 나스레짐들은 자신들의 주특기인 잠입과 첩보전 능력을 살려서 내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세력이었다. 에레다르 군주들과 아나이힐란 등 여러 세력들이 나름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지만 나스레짐들이 가장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런 세력의 지도자가 직접 킬제데른에 방문해서 아스타르를 만나길 원했다.




  아스타르는 티콘드리우스와의 면담을 수락했다. 티콘드리우스는 아스타르와 함께 킬제덴을 오랜 세월 보좌했던 악마라서 둘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군단 내 서열로는 아스타르보다 위였지만 기만자의 총애를 받는 아스타르를 군단의 동지로서 존중해왔다.


  “아스타르, 내 오랜 동지여. 그대와 난 기만자님의 종복으로서 오랜 세월 함께 성전을 주도해왔네. 자네가 이 성소에서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불타는 성전을 재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누구인지 가늠하고 있기 때문이지. 내 말이 틀렸는가?”


  아스타르는 티콘드리우스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티콘드리우스는 책략의 달인답게 상대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


  “티콘드리우스. 그대는 정확히 날 꿰뚫어 보고 있네. 그대 말대로 난 이 내전을 종식하고 성전을 재개할 수 있는 세력을 가늠하고 있네.”


  “그대가 보기에 어느 쪽이 가장 고지에 가깝다고 생각하나?”


  티콘드리우스는 자신이 있다는 투로 물었다.


  “이 내전이 계속된다면 결국에는 나스레짐이 승기를 잡겠지. 에레다르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악마군주들의 털끝에도 못 미치는 역량을 지녔으면서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네. 게다가 자리에 대한 탐욕 때문에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있지. 아나이힐란의 지배자들은 강대한 힘에 비해서 지략이 부족한데다 서로 치열하게 다투고 있지. 마그테리돈과 브루탈루스 둘 중 하나가 아나이힐란을 규합할 가능성이 높지만 아마 전력을 많이 상실한 이후일 걸세. 그래서 장기적으로 보면 그대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네.”


  티콘드리우스를 만족시킬 의도로 꾸민 말이 아니었지만 그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와 손을 잡는 것을 주저하는 것인가? 우리의 승리가 그대가 원하는 성전을 더 빠른 시일내로 재개할 수 있는 방법일텐데.”


  “나스레짐들이 내 휘하 세력으로 여러 차례 잠입을 시도했더군. 나를 잠재적인 적으로 보고 있었던 거 아닌가?”


  아스타르의 말에 티콘드리우스의 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스타르는 티콘드리우스가 꽤 당혹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휘하 세력으로 잠입을 시도했던 나스레짐을 색출해서 제거한 것만 벌써 수차례다. 이는 나스레짐 지도부의 의지가 명확히 반영되었다는 뜻이었다. 나스레짐은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세력이지만 그만큼 가장 믿을 수 없는 족속이었다.


  “그 점은 내가 사과하고 싶군. 우리 동족 중 일부는 자네의 침묵을 경계하고 있었지. 하지만 난 자네가 우리의 성전을 완수하려는 의지가 확고하단 걸 알고 있네. 서로 간의 오해를 청산하고 우리와 뜻을 함께 하는 건 어떤가?”


  티콘드리우스는 침착하게 제안했다. 하지만 아스타르가 굳이 지금 당장 제안을 수락할 이유는 없었다. 술과 음모는 조금 더 묵혀두는 것이 묘미니까. 아직은 티콘드리우스의 애간장을 태워도 괜찮을 것이다.


  “티콘드리우스. 술과 기다림은 더 오래될수록 묘미가 아니겠는가? 조만간 원하는 답을 듣게 될 것이네.”


  아스타르의 미소는 기만자의 미소를 연상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