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또 중고팟이야...."

피곤한 몸을 이끌고 따뜻한 물로 피로를 씻은 뒤 시원한 맥주 한 캔과 함께 컴퓨터를 켠다. 오늘도 지배의 홈 부위와 조각을 먹을 상상을 하며 공격대 찾기 제2지구 대기열에 등록한다. '두둥' 소리와 함께 입장하지만 고통장이 라즈날로 향하고 있는 이른바 '중고 파티'에 들어간 경험은 공격대 찾기를 이용했던 플레이어라면 한 번씩은 경험해봤을 것이다.

우린 어떤 이유에서 유독 공격대 찾기 제2지구의 중고 파티에 입장하게 되는 걸까. 그것은 부정 지배의 조각의 핵심 부위인 '머리'가 '넬쥴의 잔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부정의 세트 효과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세트 효과를 만들기 위해서 부정 소켓 방어구 드랍 몬스터만 잡고 빠지는 이들이 많아졌고, 이로 인해 공격대 찾기 제2지구는 후반부 네임드만 매칭되는 안 좋은 상황이 계속 심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 나오게 된 것을 두고 탈주하는 이들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 3가지 지배의 조각 간 밸런스가 무너져 버린 탓을 하는 게 옳다. 레이드를 가는 이유는 아이템 파밍을 위해서다. 누가 부족한 시간 속에서 쓰지도 않을 부위를 드랍하는 네임드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을까. 애초에 지배의 조각 밸런스가 괜찮았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 우리가 아이템 레벨이 낮더라도 공격대 찾기를 통해 넬쥴의 잔재에 가는 이유


모두가 부정을 착용하는 이유 - 부정 세트의 압도적 파괴력

부정 세트는 주 능력치를 엄청나게 증가시키고 간단한 발동 조건으로 인해 다른 2종류의 세트 효과에 비해 압도적으로 좋은 효율을 보인다. 주문 및 능력 사용 시라는 발동 조건으로 인해 탱, 힐, 딜의 역할 군과 상관없이 모두 쉽게 사용할 수 있다

반면, 냉기와 혈기는 발동 조건이 까다롭고 효과도 애매하다. 냉기 세트는 치명타 및 극대화 효과를 발휘할 때마다 바람이 바람이 입힌 피해의 일부를 축적하며 20초마다 방출하여 축적량과 같은 양의 피해를 입힌다. 극대화 및 치명타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아이템 세팅이 뒷받침됨과 동시에 캐릭터 스킬의 타수에도 영향을 받는다.

혈기 세트는 적에게 피해를 입히면 피의 고리가 형성하며 이는 3초마다 피해를 입히고 입힌 피해의 100%만큼 자신을 치유하는데, 솔직히 계륵이다.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조건이기 때문에 힐러의 효율이 좋지 못하고, 1차 스탯을 증가시켜주는 부정에 비하면 딜러나 탱커에게도 썩 좋은 효과도 아니다.

부정은 역할 군을 가리지 않고 쉽고 간단한 조건과 함께 제일 좋은 1차 스탯 증가 효과를 보유하고 있으니 너도 나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설명만 보더라도 다른 세트에 비해 부정이 발동도 쉽고 효과도 좋아 보인다


맥을 짚지 못하는 상황 - 아니 PTR에서부터 부정 OP론이 대세였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블리자드는 지배의 조각 시스템 3종 간의 격차가 '의도한 것 이상으로' 크게 나타났다며 냉기, 혈기 세트를 상향했다. 상향 이후 실제로 잠행 도적 등 일부 직업에서는 꽤 두각을 드러냈으나 부정 세트에 비하면 갈길이 매우 멀다.

8월 4일 또 한 번의 패치가 있었다. 지난 4일 핫픽스로 냉기 세트 효과가 초과 치유량에 축적되지 않도록 변경됐다. 초과 치유량까지 축적하던 시기에도 부정 세트의 효율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많은 플레이어들은 의문을 가졌다. 패치 이후 당연하게도 냉기 세트의 효율은 다시 바닥을 찍게 됐고 부정 세트 대용으로 사용하던 힐러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힐러에게 이도 저도 아닌 옵션이 되어버린 것이다.

▲ 8월 4일 핫픽스로 초과 치유량이 더는 겨울의 강풍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 핫픽스 이후 힐러가 사용하는 겨울의 강풍 효과는 미미해졌다

버프 된 이후로 아이템 구실을 하나 싶었더니 버그 수정이란 명목하에 다시 너프 되는 상황이 오자, 플레이어들은 개발진이 지배의 조각 밸런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수정을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지배의 조각 시스템 3종의 각 콘셉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 이번 부정 세트에 대한 쏠림 현상에 힘을 실었다는 피드백이 많다. 하나의 예시로 탱커는 혈기, 힐러는 냉기, 딜러는 부정같이 각 역할 군의 콘셉에 맞게 설계됐어야 했단 의견이다. 파밍의 난이도는 높았을지 언정 모든 플레이어들이 부정 세트 하나만 보고 파밍 하진 않았을 것이다.

3종 모두 피해량 및 치유량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면 설계 자체는 '원하는 지배의 조각을 골라서 사용한다'라는 개념으로 파밍의 선택지를 넓힐 목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건이나 수치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못했고 역할 군 관계없이 모두가 부정을 선택하게 됐다. 결국 유저들 머릿속엔 1개의 OP와 2개의 함정카드란 인식으로 남게 됐다.


심화되는 양극화 현상 - 이른바 '부정셋 오너'

WFK 레이스 때부터 지금까지 명예의 전당을 위해 달리는 길드에겐 부정 3세트의 유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차이었다. Echo 길드의 근딜인 Perfecto는 부정 조각을 모으지 못해 후보로 내려 실력과 관계없이 후보로 내려가야 했던 슬픈 사연이 화제였다.

Limit 길드의 공대장인 Maximum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이번 지배의 조각 시스템에 대해 RNG(Random Number Generator, 운에 대한 변수가 많은 것들을 지칭) 라고 지칭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지배의 조각과 같은 흔히 말하는 '운빨망겜'의 시스템이 예전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의 티어 세트, 타락 장비 등 늘 와우와 함께 있었던 부분이다. 하지만 이번 시스템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의견이 다수다. 지배의 홈 부위와 겹치는 쐐기돌 보상 아이템은 꽝이 됐으며, 스탯 유무와 관계없이 특정 장비 부분은 고정이다.

부정 세트가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을 가리는 형태의 양극화도 심해졌으며 우스갯소리로 부정 세트를 먹은 사람들은 '부정 오너'로 표현하곤 한다. 물론 지배의 성소가 열린지 1달이 다 된 시점에서 그동안 일반, 영웅 난이도에서 꾸준하게 파밍한 사람들 대부분은 부정 세트를 모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해결해 주는 문제라고 해서 이러한 시스템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신규, 복귀자들에게 진입장벽이나 마찬가지며, 기존 플레이어들까지 이탈하게 만드는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한국 서버는 벌써부터 부정 세트를 요구하는 파티까지 조금씩 등장하려는 분위기다.


현실적인 개선안 - 상향평준화를 통한 밸런스 조정 필요

개발진은 현 상황의 문제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또 핫픽스를 통해 개선할 노력을 보였다. 허나 부정 세트 대세론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블리자드의 현 상황이나 인게임 상황을 볼 때 조각의 콘셉을 다시 잡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미 지배의 조각 강화에 들어간 저승 불씨란 재화의 문제 등의 이유로 부정 세트를 하향하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향을 통해 아이템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아닌 냉기와 혈기의 상향을 통해 간극을 메꿔야 한다. 특히 이번 지배의 조각은 밸런스가 최악이라 평가되기 때문에 한 번의 패치에 끝나는 것이 아닌 지속적인 관찰과 조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는 것 자체가 보상은 아니다. 목표를 달성하며 얻는 것은 성취감이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아무것도 얻지 않고 퀘스트를 완료하는 것이 충분히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결국은 보상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파밍의 재미, 이번 주는 어떤 아이템이 나올지 설레는 그 마음은 게임의 윤활유가 된다. '부정 망겜'이 되어버린 이번 시즌2 작금의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져 많은 사람들이 파밍에 스트레스 받지 않으며 레이드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하루빨리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