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






명량해전의 진실




커피 한잔 하면서 차분히 읽어 보세요.
이순신 제독의 위대함을 이해하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랩니다.

 

진정한 대첩!! 명량해전



 

우리는 지금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이순신이 이전의 신화를 뛰어넘어 더욱 위대한 신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게 된다. 불과 12척의 패잔선으로 일본의 정예 함대 200여 척과 10만 대군을 격멸시키는 믿겨지지 않는 신화인 것이다. (한척의 배가 더 있었다.13척이 명량해전에 동원됨)

 

이 명량해전이야말로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손꼽아 온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을 수백 배 뛰어넘는 진정 위대한 대첩으로,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을 확연히 살펴볼 수 있는 해전이다. (용병술이라기 보다는 지리를 적절히 이용한 전투였다.)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서울에 압송된 후 죄인으로서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판부사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 운동으로 간신히 사형만은 면하고,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육군)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7월 18일, 그러니까 원균의 함대가 전멸당하고 이틀이 지난 뒤 새벽에 원수부의 군관 이덕필과 변홍달이 찾아와 조선 수군의 전멸 소식을 이순신에게 전하였다. (칠천량해전,거제도 앞바다,이전에 조선 수군은 모두 300여척의 전함을 가지고 있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모두 235척의 배를 잃었다.)

 

곧이어 도원수 권율이 원수부의 참모들을 대동하고 병졸 신세인 이순신을 찾아왔다. 해군의 전멸 소식을 듣고, 말단 부하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앞에 나타난 권율은 마치 그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듯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대영웅을 죄인으로 몰아 백의종군시키고 있음을 사과하고 있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 난국을 타개해 줄 사람은 이순신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우국충정에 불타는 이순신은 과거 통제사 시절 그의 밑에서 종사했으면서, 지금은 원수부에 속해 있는 9명의 군관을 차출하여 대책반을 편성한 후, 남은 전선이 정박해 있는 하동의 노량을 향하여 달려갔다.

 



 

전선으로 달려가는 이순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손으로 조선 해군을 다시 재건하여 10만 왜병들의 서해 진출을 막아야 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건져 해군 재건에 활용해야 할 만큼의 악조건에서 전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비를 맞으며 말을 달려 진주에 도착, 진주 부사와 논의를 한 후 4일 만에 다시 142km를 달려 7월 21일, 목적지인 노량진에 도착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 함대가 전멸하던 날 밤, 미리 겁을 먹고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함대를 이탈하여 이 곳 하동 노량진으로 도망쳐 왔었다. 이 12척의 패잔선을 점검해 보니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한편, 선조의 명령으로 이번 해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한 선전관 김식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서울로 돌아갔다. 그는 원균 함대의 괴멸 과정을 소상히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때가 7월 22일이었으니, 원균이 패전한 날로부터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왕은 급히 대신들을 소집하여 사후 대책을 의논해 보았으나, 이미 조선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구국의 영웅을 죄인으로 몰았던 선조는 뻔뻔하게도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요술이라도 부려 자신의 왕조를 구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이로서 1597년 7월 23일자로 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8월 3일 이른 아침 이순신에게 도착하였다.


(“지난날 그대를 백의종군케 해서 오늘 이런 패전의 욕됨을 입었으니 무슨 할말이 있으리요. 그대는 부디 충의를 굳건히 하여 다시 나라를 구해 주기 바란다..From 선조)

 

이때부터 이순신의 움직임은 대단히 기민해졌다. 상대는 수백 척의 대형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에게는 12척의 함선이 있을 뿐이었다. 제독은 이 12척의 전함(판옥선)의 전투력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전 함선을 거북선과의 절충형으로 개조하였다. (거북선은 아니었다.)

 

즉 갑판의 벽을 높여 병사들이 적의 조총탄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왜인들은 이 배도 거북선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우선 배를 움직일 병사와 전투병들이 필요했다. 이 때는 이미 배에 딸린 병사들의 태반이 종적을 감춘 뒤였다. 

 

또 군량미도 구해야 했고, 탄약과 피사체도 모두 부족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의무만 지워줬을 뿐 쌀 한 톨 지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순신은 9명의 군관을 이끌고 이 모든 보급품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이렇게 출발한 이순신 일행은 8월 5일, 곡성읍에 도착하여 고산 현감 최진강으로부터 신병들을 인수받았다. 8월 6일, 옥과에 접어들어서니 구례가 왜병들에게 점령당했다는 소문에 피난민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순신은 여기서 옛 부하 이기남(거북선 돌격대장), 정사준 형제, 군관 조응복, 양동립 등을 만나 일행에 가담시켰다.

 

8월 7일, 아침 일찍 옥과를 출발하여 순천으로 향하던 중 부대가 해산되어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던 전라 병사 이복남의 부하들을 만나 이들을 모두 수군으로 편입시켰고, 또 이들로부터 많은 군마와 병기들도 확보할 수 있었다. 

 

8월 8일, 광양 현감 구덕령,나주 판관 원종의, 옥구 군수 김희온 등을 얻고 해질 무렵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에 도착하니 모두 피난을 가버리고 성 안은 텅 비어 있었는데, 무능한 관리들이 도망가기에 바빠 적군에게 큰 도움이 될 군기 창고를 파괴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들의 실책으로 이순신은 많은 병장기와 장편전 등의 피사체를 얻을 수 있었다. 

 

8월 9일, 순천을 떠나 낙안으로 가니,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순천 부사 우치적과 김제 군수 고봉상 등이 가담하여 왔다. 

 

그들은 곧 국창(國唱)이 있는 보성 조양창으로 향하였다. 초저녁에 도착하여 보니 그곳에도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창고가 봉인된 채 있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조선 군관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많은 보급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빈손으로 시작한 이순신의 조선 해군 재건은 최소한의 군병과 병기 그리고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궁색한 모습이었지만 적의 공격을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게 된 것이다.

 

이 때 이순신은 구례.곡성.옥과.순천.낙안.보성 등 330km를 돌며 병사 1천 명과 군량미 1개월 분, 그리고 많은 전투용 병기들을 거두어들여 최소한 한차례의 해전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 두어야 할 점은, 이 많은 병참품들을 왜군보다 불과 하루 정도 앞질러 이순신이 먼저 거두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면 이 모든 것들이 모조리 왜병들 손에 넘어가 버릴 뻔했던 것이다. 이 점만 보아도 선비의 나라 조선이 얼마나 병법에 무지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8월 20일, 드디어 이순신은 갑판 개조를 끝낸 12척의 군함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직접 지휘하여 이진으로 이동하였다. 

 

8월 26일,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해군의 척후선 8척이 이진의 60리(이당시 리의 개념은 5.4킬로미터, 4킬로미터가 10리라는 개념은 일제시대 이후) 거리까지 접근하여 왔다. 원균의 패전 이후 이리저리 도망만 친 12척의 함대였다. 따라서 이순신의 지휘하에 거두는 첫 승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선의 추격을 발견한 이순신은 슬그머니 함대를 전라남도 해남의 어란진으로 옮겨갔다. 

 

한편, 조선 수군의 패잔선 무리가 이진에 있다는 정보에 따라 일본의 척후선단이 추격해 와 보니, 조선의 패잔선단은 겁에 질려 어란진으로 도망쳐 버렸다. 3도 연합 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용맹한 군함들을 보고 도망치는 꼴이 가엾을 정도였다. 

 

이 때까지 일본군들은 도망치는 12척의 선단을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8월 28일 오전 6시, 왜선들은 조선의 패잔선들을 잡기 위해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이순신 제독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조선 해군의 승선원 태반이 해전 경험이 전혀 없는 육군들이었고, 그 중에는 물을 무서워하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따라서 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장병들의 사기도 올려줘야 했고, 또 실전을 통하여 전투 경험도 쌓게 해주어야 했는데, 마침 일본 척후선들이 불과 8척만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

 

적선들의 출현에 조선의 병사들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이순신이 기함을 앞세워 적선들을 가로막고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였다. 이에 의기양양하게 달려들던 왜선들이 갑자기 허둥지둥거리며 혼란에 빠졌다. 

 

이순신의 기함에서 깃발이 올라 전함대에 총공격을 명하자, 왜선들은 급히 방향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전 함대를 몰아 추격전을 펼쳤다. 왜선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자 이를 쫓는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역시 이순신 장군 밑에서 싸우면 백전백승할 수밖에 없다. 모든 장병들은 그 동안의 신화가 현실로 나타나자 자신감으로 재무장하게 되었다. 이순신 함대는 갈두 까지 추격하다가 회군하였고, 장도에 옮겨갔다가 야음을 틈타 벽파진으로 옮겨 진을 쳤다. 

 

척후선단이 혜성같이 나타난 조선 함대의 역습을 받고 쫓겨오자, 일본 수뇌부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이는 일본군의 수륙 병진책에 최대 걸림돌이 될 것으로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의 12척 함대를 잡기 위해 55척의 대함대를 구성하여 조선의 유령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왜의 함대는 조선의 함대가 정박하고 있다는 어란진으로 달려갔으나 조선 함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왜의 함대는 척후함대가 무언가 착각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12척의 별동 함대를 구성해 그 주변의 섬들을 샅샅이 수색해 보도록 하였다.

 

일본의 별동 함대는 유령 함대를 찾아 벽파진으로 다가갔고 이들의 움직임은 거미줄 같이 쳐 놓은 이순신의 감시망에 낱낱이 탐지되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일본의 함대는 이순신이 다시 돌아와 유령 함대를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이순신은 드디어 일본의 별동 함대를 격멸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자신이 선두에 서서 일본 함대를 향해 돌진하였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유령 함대가 함포를 일제히 발사하며 달려들자, 크게 놀란 일본의 별동 선단 12척은 황급히 배를 돌려 도망가 버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조선의 유령 함대를 이끄는 장수는 확실히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일본 함대는 적어도 조선 함대의 두 배인 25척의 함대로 일시에 몰아쳐 조선 해군을 제압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날 밤 이순신 제독은 일본군의 야습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군작전 회의를 엄중하게 진행하였다. 적의 야습에 대비하여 일사불란하게 행동하고 제독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적은 군세로 큰 군세를 공략하려면 사소한 실수라도 있어선 안되겠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12척의 군함들은 강력한 지자총통으로 무장하고 바위 곁의 어두운 곳에 함선을 감추고 포진하였다. 한편, 적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작은 협선들을 묶어 놓고 그 위에 불을 밝혀 적의 표적이 되게 하였다.

 

9월 7일 오후 10시, 과연 20여 척의 일본 특공 함대가 소리도 없이 벽파진 안으로 미끄러지듯 접근하여 왔다. 제독의 예측대로 일본군의 야습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유인을 위한 협선들을 발견하고 야습에 성공하였다고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미리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조선 함대가 불시에 튀어나오며 함포를 발사하자 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일본 함대는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순신 제독의 포위망은 여간해서는 잘 뚫리지 않았다. 이로서 선봉에 섰던 일본 함대는 모조리 격침되었고, 일부 탈출한 함선들도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를 통해 신참 병사들은 역전의 용사들로 거듭 태어나고 있었다.

 

벽파진 야습에 실패하고 돌아온 함대를 보고 일본 해군의 수뇌부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괴멸된 줄 알았던 조선 수군이 아직 건재해 있었던 것이다. 비록 12척 뿐인 것으로 파악되었지만 그 위세는 일본군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12척 조선 함대의 지휘관이 이순신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일본군 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일본군에 있어서 이순신은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수적 차이는 아랑곳 없이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순신을 만나는 것만으로 죽음에 이른 병사의 수가 헤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왜의 수뇌부는 크게 당황하였다. 만약 정말 이순신이라면 일본군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왜군은 아무리 이순신이라 하더라도 단 12척의 패잔선으로 수백 척에 달하는 일본 해군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최신의 대형 전투함들을 대거 투입해 조선 유령 함대를 일거에 격멸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일본 해군의 신형 전투함(기존 전투함은 안택선(安宅船, 배의 가운데 집을 한 채나 두채 지어 놓은 배), 신형전투함은 관선(關船,세키부네,중형선에 해당)들을 모두 벽파진에서 70리 떨어진 어란진에 집결하도록 명령을 하달했다.


결전

 

일본 해군의 조선 함대 격멸전은 일본의 최신예 전함 200여 척과 한강 마포에 상륙을 준비하던 일본군 10만이 어란진으로 모여드는 것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일본 해군의 움직임은 이순신 제독에게 낱낱이 파악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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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 기다리던 일본군 척후선 2척이 나타나 벽파진에 있는 이순신 함대의 동태를 면밀히 정탐하고 돌아갔다. 조선군의 함대가 작은 협선을 제외하면 실제로 전함이라곤 12척 뿐임을 최종 확인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은 벽파진을 목표로 하여 작전을 전개할 것이다.

 

일본의 정탐선들이 벽파진의 지형과 수로 그리고 이순신 함대의 동태 등을 관측하고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이순신 제독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그저 무방비 상태로 관망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군의 공격 목표를 벽파진으로 유도하려는 속임수였다.

 

9월 14일, 드디어 삼호원 나루터에서 봉화가 올랐다. 어란진을 감시하던 척후 군관 임준영이 정탐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것이다. 

 

이순신은 제장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해 엄중하고도 비장한 지시를 내리게 된다. 왜군의 수는 전함 200여 척에 거함만 55척인 초대형의 함대이다. 또 그 병사의 수효는 10만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의 함대는 단 12척 뿐이다. 그러나 조선의 함대에게는 자연의 조화와 천형의 지형이라는 동맹군이 있음을 갈파하고 일본 해군 섬멸 작전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 작전은 우수영에 있는 명량 해협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명량 해협은 평균 1500(약 500m)자의 폭으로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의 수로이다.(현재 진도대교가 놓인 울돌목) 이 해협의 좁은 곳은 900(약 300m)자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그 양쪽으로 암초가 널려 있어 배가 이용할 수 있는 곳은 그나마 400자(약 130m) 정도뿐이다. 

 

또 수로의 물살이 빨라 물살의 방향만 잘 이용하면 적을 능히 격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작전을 상세히 설명하며 불안에 떠는 부하들을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균 함대의 전멸을 경험했던 장교들은 불안한 마음을 쉽사리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 다음날인 9월 15일, 일본군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 이순신 제독은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순류를 타고 전 함대를 몰아 명량 해협을 통과하여 우수영으로 이동했다.

 

9월 16일, 일본군 연합 함대는 어란진을 발진하여 벽란진으로 총출격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유령함대는 또 사라지고 없었다. 벽란진에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수로는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남쪽과 조선의 수군 사령부가 있는 북쪽의 우수영 방면뿐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대함대의 출격에 겁을 먹고 우수영으로 달아났다고 판단, 즉각 추격하기 시작했다.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는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선봉으로 하여 도도 다카토라와 가토 요시아키 등이 합세하고 있었다. 특히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1592년 6월 5일 벌어진 당항포 해전에서 전사한 형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선봉을 자원하고 나선 자였다. 그는 무려 133척의 정예 함대를 이끌고 명량 해협으로 접근하였고, 70여 척의 제 2 함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일본 함대가 명량 해협의 남쪽 입구에 도착한 것은 12시경이었다. 마침 바다의 물결이 잔잔하여 하늘이 일본 함대를 돕는 듯 하였고 항해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미치후사 함대가 명량 해협 중 가장 폭이 좁은 울돌목에 접근하니, 도망갔다고 판단했던 유령 함대가 기함을 선봉으로 하여 미리 포진해 있었다.

 

미치후사가 눈여겨 살펴보니 유령 함대의 기함에 오른 장기(將棋)는 분명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으로 되어 있었다. 

 

비로소 그 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이순신이 실제로 유령 함대를 지휘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기함이 선봉에 서서 일본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뒤로 11척의 전함들이 포진하여 결사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뒤에도 멀리 한 무리의 선박이 있었으나 큰 전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미치후사는 당대의 영웅이라 불릴만한 이순신과 한판 붙어보는 것에 야릇한 흥분을 느끼면서 단 12척의 적선을 133척의 최신예 전함으로 이기지 못한다면 배를 갈라 죽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며 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해협의 폭이 좁아 함대는 종대로 전진해야 했다. 

 

헌데 이 당시의 해전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적선에 접근하여 병사들이 배를 기어올라 선상에서의 난전을 통해 승부를 결정짓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수척의 일본 돌격선들은 조선의 기함을 사방에서 포위하고자 양쪽으로 날개를 벌리며 우회하려 하였다.

 

그런데 바깥쪽으로 돌던 왜선들이 돌연 물 속에 숨어 있던 암초에 걸리면서 기동 불능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서야 왜 함대는 기함을 포위하려던 작전을 바꾸어 중앙으로 재집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왜선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기함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으로 집결된 왜선들이 앞으로 전진하여 해협을 빠져나오는 순간, 좁은 물길을 가로막고 우뚝 서 있던 조선 함대의 기함이 서서히 옆으로 돌더니, 종대로 덤벼드는 일본 함대를 향해 지자포와 현자포 등, 함재포들을 일제히 발사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갑판 위에 있던 병사들도 일제히 활과 총을 쏘아 대기 시작하니, 선봉에서 달려들던 일본 전함이 단번에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조선 함대는 우선 현자총통과 지자총통 등을 발사하여 일본 군함의 기동력을 마비시킨 후, 곧이어 조란환이라 불리는 새알 크기만한 쇳덩어리를 한 번에 300개씩 산탄으로 발사하였다. 이순신의 기함 한쪽에서 한 번에 발사되는 조란환은 모두 약 2척 개나 되어 갑판 위에 노출된 왜병들은 순식간에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 전법을 이순신 제독은 합력사살이라 하였다.

 

앞장선 전함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처참한 지경이 되자, 후열의 전함들은 조선 군함의 가공할 함포 사격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그들은 뒤를 따르는 동료 함선들 때문에 뒤로 물러서고 싶어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물살이 그들을 조선 함대 쪽으로 밀어주고 있어서 후퇴하기가 물리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진해도 죽고 물러서도 죽게 되었으니 선발 돌격선들은 결사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선의 함선들은 기함의 위기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선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제독의 기함이 홀로 적을 맞아 약 1시간 동안 결사전을 전개하며 왜 선단을 차례로 격침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 수군이 육박전을 겨냥하여 조총을 주로 사용한 데 비하여 조선 해군은 대포를 주무기로 한 현대적인 함포전으로 일관하여 처음부터 상이한 전투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불과 1시간여의 싸움으로 일본 군함 20여 척이 깨어졌으며 승선 인원 대부분이 몰살당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설 수도 없는 일본 수병들은 악귀같이 달려들었고, 조선 함포를 피한 몇몇 돌격선들이 접근에 성공하여 배 위로 왜병들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서야 비로소 이순신 제독은 중군기와 초요기를 세워 중군장 김응함에게 자신의 기함을 엄호하도록 지시하였다. 기함의 명령을 받은 중군장과 거제 현령 안위가 즉각 그들의 함선을 몰아 일본 함대 속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 동안 일본군의 공격에 수비로만 일관하던 조선 수군이 마침내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소극적인 전법으로 공방전을 벌이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나머지 9척의 전함들은 여전히 기함의 명령을 주시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전면에 나섰던 20여 척의 선봉 전함들이 모조리 격파되자 드디어 적의 대장선이 노출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배에는 깃대 꼭대기에 새의 날개가 꽂혀 있었고 붉은 기가 매달려 있었으며, 누각 주위는 푸른 장막으로 둘러쳐져 있었다고 한다. 적장은 다락방 위에서 선봉 돌격 함대를 지휘하였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이 그의 기함을 빠르게 몰아 접근한 후 집중 함포 사격을 퍼부으니 일본의 대장선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적의 대장은 바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기함의 병사 김을손이 적장을 끌어올려 보니, 그는 붉은 문양이 그려져 있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있던 구루시마 미치후사였다.

 

미치후사의 목은 즉각 기함의 돛대 꼭대기에 매달렸고, 멀리서 이를 본 일본 병사들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상대적으로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지를 듯 충천하였다. 
12시경에 시작된 해전은 어느새 3시간 정도 계속되었고, 북쪽으로 흐르던 물살도 서서히 바뀌어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더니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전진하려는 일본 군함들이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써 노 젓는데 노력을 집중하는 반면, 조선 함대는 물길을 따라 흐르면서 마음껏 적선을 공략하는데만 열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순신이 기다리던 공격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마침내 이순신 제독의 기함에 전 함대의 총공격을 알리는 깃발이 올랐다. 기함을 주시하며 휴식을 취하던 9척의 전함들은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며 달려들었다. 이순신의 기함 한 척에 진땀을 흘리며 3시간을 소모한 일본 함대는 혼비백산하여 뱃머리를 돌려 도망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큰 실수였다. 전투 지원을 위해 후방에서 좁은 해협을 따라 올라오던 함선들과 탈출하려는 함선들이 서로 충돌하게 되었고, 이를 피하려다 양 옆의 암초에 걸려 침몰하는 등 일본 함대는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적을 단번에 격멸시키기 위하여 물의 흐름이 가장 빠른 신시까지 전투를 질질 끌며 기다려 왔던 것이다. 또 전투경험이 적은 조선 수군에게 단 1~2척의 함선으로 수백척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감과 결전의 의지를 갖게 하는 것과, 그 반대의 효과를 왜군에게 주는 고도의 심리전 전술이었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전술이 극치를 이루며 세계 해전 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날의 울돌목,진도대교

 

일본 함대는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는 다툼으로 인하여 연쇄적으로 좌충우돌하였고 또 해협의 양측 암초에 부딪쳐 처절하게 파선되어 갔다. 무사히 빠져나간 듯 싶었던 함선들도 시속 11노트라는 가공할 속도로 흐르는 물살을 타고 마치 나는 듯 추격해 온 조선 함대의 함포에 맞아 침몰되어 갔다. 

 

이 수라장 속에서 무려 100여 척 이상의 일본 군함들이 격침되었고 멀리서 대기하던 70여 척만이 도망갈 수 있었으나 그들도 거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전투는 끝났다. 200여 척으로 구성된 최정예 함대에 10만 대병을 싣고 서울로 상륙하려던 일본군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본은 불과 12척의 이순신 함대에 의하여 200여 척의 대함대 중 무려 133척을 잃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본은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호랑이가 버티고 있는 한 서해를 돌아 진격하려던 작전에 근본적인 수정을 가해야만 하였다.

 



 

명량 해협은 일본군의 패잔선과 시체들로 뒤덮였고 이를 바라보는 대제독의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로써 이순신은 그에게 주어진 구국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내었다. 


조국을 침략한 왜적들은 이제 곧 물러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병참의 지원 없는 북진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평양 철수를 통해 고니시 유키나가가 경험했던 일이다.

 

명량대첩! 이것은 확실히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대첩 중의 대첩이었다. 이 대첩을 통해 조선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고, 반면에 그 동안 승승장구하던 왜군들은 스스로 남쪽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혹자는 조.일 7년 전쟁의 3대 대첩으로 여러 전투를 꼽고 있지만, 그 어떤 대첩도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은 이 명량대첩과 비교될 수가 없다.

 

나는 조선 해군의 역사를 그리면서 명량 해전을 끝으로 장식하였다.

 

사실 조.일 7년 전쟁 중 명량 해전 이후 진정한 해전은 없었다. 명량 해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하여 일본군의 수륙 병진책은 무너졌고, 서울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일본군은 명량 해전 4-5일 후, 서울에서 불과 200리 떨어진 직산과 보은 지방에서 남해안으로 총퇴각하였다(1597년 9월 20일경).

 

더욱이 불가사의한 것은 이 대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의 손실이 단 한 척도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측이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데 비하여 우리측 희생자는 불과 34명이었다. 

 

물론 이 해전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모두 명량 해전에서의 참패 쇼크로 인하여 일본의 대추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이미 조선에 들어와 있던 왜군들이 다시 제 나라로 되돌아가기 위한 몸부림 이었으므로 결국 독안에 든 쥐를 잡기 위한 소탕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때때로 왜군의 발악적인 저항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있었고, 또 비열한 왕 이연(선조)이 구걸하여 끌어들인 무능한 명군들이 거드름 피우며 건방지게 전쟁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었으나, 그 모든 것도 역시 명량 해전 이후 조선 정복의 야욕을 포기하고 퇴각하려는 일본군의 탈출 기도와 그들을 일망타진하려는 조선군의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혹자는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제독이 전사했다고도 하고 전사를 가장한 자살이라고도 하며, 또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고도 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의 생사 여부는 그의 신비스러운 제독으로서의 역량을 살피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명량 해전을 통해 이순신은 제독으로서의 역량을 훌륭히 발휘하였고, 또 조국을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해 내었다. 그 이후에 일어났던 사건들은 모두 명량 해전의 영향일 뿐이다. 

 

나는 노량 해전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노량 해전 역시 조선을 탈출하려는 왜군들에 대한 소탕전이었지, 결코 적을 격파하고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해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넬슨을 이순신에 비교하기도 하나, 이 따위 망발은 진정한 제독 이순신을 모욕하는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제독도 스스로 배와 무기를 제조하고, 군병들을 모아 훈련시키고, 나아가 손수 농사를 지어 군량미까지 조달하면서 싸워 한 나라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대함대를 전멸시킨 예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단히 잘 쓰여진 원본에 약간의 손질을 가할려 하니 민망합니다. 그러나 빠진 것도 있고 스토리의 전개상 첨부해야 할 것이 있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몇자 적어 봅니다. 

 

이 긴 글을 누가 제대로 읽겠습니까만 역사란 제대로 알려져야 하지 않을까요? 군대를 다녀 오지 못한 이의 무지의 소치입니다.

 

1. 이순신제독이 왜 백의종군하게 되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이순신 제독은 조선정부에 항명을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왕의 교지를 어겼습니다.

 

충무공전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에 관한 기록을 집대성한 기록물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가토가 대군을 이끌고 온다고 하니 수군은 부산포로 진격해서 적의 수군을 무찌르도록 하라” 라고 선조의 교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역사서 조선역수군사(朝鮮役水軍史)에는 “그러나 이순신은 일본군의 속임수를 두려워 하여 출격하지 않았다.권율은 이순신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죄를 주어 조정에 보고했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발칙하게 왕의 신하인 이순신 제독은 왕의 명령을 그냥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무슨 배짱으로 어렵게 무과에 급제해 장군이 되고서도 그냥 일반 보병으로 강등되어 백의종군하게 됩니다. 그 시대에서는 더구나 전쟁중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 입니다.

 

전쟁중이고 급해서 그렇지 평상시 같으면 아마 육시의 참형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냥 살려 두겠어요. 왕의 체면도 있는데..

 

이래서 장군 사후에 자살설과 은둔설이 나돌게 됩니다. 어차피 왕 손에 죽을 것인데 그냥 장렬히 죽자, 아니다, 그래도 목숨은 보전해야 하니 어디 도망가서 조용히 죽치고 살아보자..

 

어느것이 사실 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2. 이순신 제독은 이상하게 꼭 전투만 하면 왜군을 박살내게 됩니다. 한번도 진 적이 없으니 과히 신기한 일입니다. 위에서 다룬 명량해전 역사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전투에서 이길 수 밖에 없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냥 앉아서 이긴 것이 아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이런 전략과 전술이 있었습니다. 이긴 전투 이야기니 진 전투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물론 그 주인공은 원균장군입니다.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부산포를 공격하란 것과 같이 밑고 끝도 없이 칠천량에 가서 전쟁좀 해봐라 하고 원균에게 명령 합니다. 지엄하신 왕의 교지를 붙잡고 부들부들 떨었을 원균..

 

그러나 300여척의 전함을 이끌고 전쟁터인 바다로 갑니다. 그당시 바다라고 해 봐야 연안이고 또 배들이 지금의 해군이 가진 가장 작은배인 500톤 정도의 참수리급 고속정 정도 크기라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연안에서 치고 받고 싸우고, 아니지, 함포도 쏘고 간간히 화살도 날리고 하는 전투 였습니다.

 

거제도 앞바다의 좁은 포구에 정박했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기습공격을 받자 배를 버리고 육지로 줄행랑을 칩니다. 그때 매복하고 있던 외군 육군이 원균을 비롯한 조선 수군을 그냥 섬멸해 버립니다. 애고,애고,,

 

일본은 수군과 육군의 공동연합작전, 조선 수군은 수군단독작전, 정보에서도 전술에서도 사기에서도 여지없이 밀렸던 전투가 바로 칠천량해전 이었습니다.

 

정한위략(征漢偉略) 일본 역사서에 따르면 이당시 조선수군의 피해가 격파 236척, 목벤자 수천, 물에 빠져 죽은자 카운트 불능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원통해라..

 

이로서 12척만 남게된 조선 수군은 전멸당했고 수군이 아예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마지못해 전투에 임했던 원균 장군만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억지로 일 시키면 일생긴다니까요!!!

 

그런데 이 전투로 인해 일본은 기새등등해 지게 됩니다. 참패를 거듭하던 전투에서 매번 깨지니 새로운 전투시스템을 만들어 내니 수군과 육군의 연합작전이요 이 전투로 인해 해상권이 고만 일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보급이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진행된다는 일본으로서는 반가운 소식 이었지요.

 

세월이 서너백년은 지나 6.25전쟁당시 북한은 전쟁패인의 요인을 분석하던중 해상장악능력, 즉 보급품이 일본에서 부산으로 아무런 제제없이 들어온 것이 패인의 결정적 요인이라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상어급.유고급 로미오급이니 하는 조막만한 잠수함들을 떼거지로 도입,만들게 되는 단서를 제공하게 되는데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보급이 제일 중요하지요.먹고 싸고 쏘고 찌르고 해야 하니깐..

 

이로서 한반도의 서해 진출로가 그냥 뻥 뚫리게 되니 선조임금 발등에 불이 떨어지게 됩니다. 앉으나 서나 한숨만 쉬게 되는데 체면 불구하고 이순신제독에게 구원의 콜을 보내게 됩니다. 교지를 내려서 내가 왕인데 니한테 어찌 미안하다 하니. 그래도 미안하다 하니 그냥 나가서 좀 싸워달라. 종묘사직이 작살나게 생겼다.....

 



 

여기서 장군이 존경을 받고 광화문 앞에 긴 칼 차고 계실 이유가 명백해 집니다. 뭘 주고 싸우라 해야지. 당장 내혼자 끼니 떼울 식량도 없는데. 왕이면 다야, 이래도 될 것을 아무런 불평없이 무기를 모으고 식량을 모으고 군사를 모아 수군을 만드는 장면은 이미 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눈물겨운 일 이지만 행운도 좀 따라 주었지요.

 

그런데 이 정세파악이 느리고 정보전에 어두운 전하께서는 잘하고 있는 이순신제독을 또한번 흔들어 줍니다. 그것도 추석 저녁 여명에 배도 없고 군인도 턱없이 부족한 수군을 권율이 이끄는 육군의 지원병력으로 돌리라는 겁니다. 

 



 

그날, 그때 한심해서 나온 노래가 여기 있으니 한번 들어 보시라. 그 유명한 한산도가.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 어루만지며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다시 시름을 더하네”

 



난중일기

 

그런데 여기서 다시 장군의 위대함이 돋보입니다. 잘 보면 장계고 건의요 잘못 보면 항명인데 “지금 신(臣)에게는 아직 전선(배) 12척이 남이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수군을 폐지하면 이는 적이 바라는 바로, 적은 호남을 거쳐 쉽게 한강까지 진격할 것입니다. 오직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비록 전선이 적으나 신이 아직 살아 있으므로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요런 문장을 올리게 됩니다. 

 

갈곳 없는 선조도 그래 니 알아서 함 잘 싸워봐라. 하고는 그냥 인정해 줍니다. 이런걸 풍전등화라 하지요. 

 

3. 이래서 명량해전으로 바로 넘어 갑니다. 준비 과정은 위에 충분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적에게 몇겹으로 둘러싸여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군사들 모두 사색이 되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나머지 배들도 겁을 먹고 진격하지 못했다.”(난중일기)

 

해전에 임하는 장군의 입술도 타 들어 갑니다. 급히 모아 만든 수군은 오합지졸이고 전투에서 살아 남은 패잔병 들이라 잘못 덤볐다가는 어떻게 죽는지 지금껏 눈으로 뻔히 보아 왔는데 화살이 등짝을 찌르고 칼로 목이 날아가고 잘해야 물에 빠져 죽는데 고기밥되지..왜 겁이 안 났겟습니까? 여기서 도망치면 바로 등 뒤에서 동료들이 화살 쏠 터인데 튀지도 못하고 부하도 전전긍긍, 장군도 안절부절..

 

여기서 위대한 장군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 하나, 그것은 바로 지형지세를 적절히 이용하는 전략과 전술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이 전투에서 이겨야 해상장악을 하고 그래야 조선백성들이 산다는 절대 명제가 있었습니다. 전하 생각은 별로 없는듯 합니다.

 

먼저 지피지기-1. 그것은 다름아닌 전함의 차이입니다. 일본배는 섬이니 장거리 항해를 목적으로 지금의 전투함처럼 배 밑바닷이 ㅅ 자 형태입니다. 암초에 억수로 잘 걸립니다. 대신에 파도에는 강하지요. 그러나 방향전환에 시간이 걸립니다. 물론 이 약점은 학익진이라는 고난이도 하이테크놀러지 기술을 이용한 다음해전에 써 먹게 됩니다.

 



외군의 안택선

 



조선의 판옥선

 

두 번째가 전함의 강도입니다. 일본전함은 주로 안택선이었습니다. 못으로 나무를 이어 만든 배입니다. 해수가 들어 가면 철이 녹슬고 나무도 썩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의 배는 전부 판옥선 이었습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참나무 못으로 마감처리해 물에 들어가면 나무가 좀 불어 나니 더 튼튼해 지지요. 이 작은 2% 차이,배 만드는 기술의 차이가 엄청난 전력상의 이득을 가지게 됩니다.

 

전함의 크기는 공히 약 30미터 정도, 구조는 2층구조로 같았다고 봅니다.

 

그다음이 바로 전투의 방법, 일본은 신무기인 조총과 칼,화살이 주 무기였다면 우리 수군은 함포와 화살, 그리고 칼 이었습니다. 이당시 일본의 함선은 약해서 함포를 설치할 수 없었지요. 원거리에서 자탄 300개 날려 보세요, 초토화 됩니다. 일본 수군의 불행은 바로 우리수군이 가진 함포가 그당시로는 세계 최고였다는 겁니다.

 

그럼 한배에 타는 승선 인원은? 2층으로 된 배에 노는 1층에 전투원은 2층에 탑니다. 노가 한 90개 되니 노꾼만 120명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갑판에서 전투하는 인원 200명 잡으면 한 배에 300여명이 복닥거렸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여기에 하나 더하면 바로 울돌목의 지형지세입니다. 그것은 이미 위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요당시 한 판 붙었던 외군들의 해군기지입니다. 그들 기지도 당시 전투를 치렀던 곳과 거의 흡사한 구조, 즉 조류가 빠르고 암초가 많은 지역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수리조사까지 하고 왜 졌을까? 

 

울돌목은 배가 통과할 수 있는 버니가 거의 200여미터가 안됩니다. 조금만 벗어나도 바로 암초와 키스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암초는 포옹도 좋아해서 좀처럼 안 놓아 주지요. 

 

여기에 쇠사슬을 가로로 넣어 두었습니다. 물론 명량해전 당시 엄청난 피난민들이 근처에 있었고 운동회처럼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하고 고래고래 응원을 하며 왜군들 기를 죽인 청각적 효과도 있었고 13척으로 뭘하니 하는 왜군들의 자만도 있었습니다. 

 

좁은 해협으로 대군이 기세등등하게 들어오니 바로 쇠사슬을 들어 앞에 배를 멈추니 줄줄이 들이 받아 오도가도 못하고 그때 장군이 탄 배 한척 유유히 함포를 장전한 다음 “니 마음대로 한번 쏴 보세요” 했겠지요. 요런걸 줄줄이 낙엽이 시루루 떨어 진다는 표현으로 전술상 이길 수밖에 없는 전투였다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조류가 엄청난 역할을 했고 또 배 한척으로 한번 쏠때 마다 외군들 배가 나자빠 지니 옆에서 구경하던 다른 배들이 몸이 달았지요.

 

어, 이거 되네. 우린 언제 공격하나, 몸도 뻐근하니 활도 함 쏴야 하고 함포 기름칠 입바이? 되 있는데 한번 쏴줘야 하는거 아녀? 우린 손가락만 빠나? 

 

이런데 총공격 하라 하니 그야말로 신나게 전투를 했습니다. 

 

이날 맞짱뜬 숫자를 요리조리 계산해 보니 133(왜군) 對 13 (조선수군) 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아울러 조선군의 피해는 간단히 장군이 탄 배에서만 난중일기에 쓴 것을 보면 전사 2명, 부상자 3명, 합쳐서 5명,(이름도 다 적어 놨습니다) 남은 12척 대충 두드려 보면 전사자 30명 정도, 부상자 40명 정도로 100여명에 못미칩니다.

 

그런데 왜군은 격침 31척, 파손,도주 90척, 전사 최소 3,500여명, 부상 4,500여명(요건 파손당한 배에서 어림짐작, 날린 화살수, 퍼부은 함포수로 계산, 물론 전사자도 있겠지요) 합이 8,000여명 정도 됩니다.

 

요런 것을 우리는 통쾌한 승리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충무공이란 칭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1905년 러시아 함대를 괘멸시킨 일본 영웅 도고(東高) 가라사데 “나를 영국의 넬슨 제독과 비교해도 좋다. 그러나 조선의 이순신장군과는 견줄 수가 없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순신 장군과는 맞짱상대가 안된다” 라는 제법 씰만한 말 한마디를 남겼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