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플스토리는 전체이용가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캐릭터들과 몬스터들을 보유하고 있는 게임이지만

사실 이 게임의 스토리가 담고있는 세계관이나 다루고 있는 철학은 현실에서도 "너무 무겁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1. 운명

메이플스토리에서의 운명은 "운명적 사랑"과 같은 긍정적인 분위기를 품고 있다기보다는 삭막하고 쓸쓸한 느낌에 가깝다.

어떠한 형태의 이야기든지 어떠한 형태로 표현되든지를 막론하고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매우 흥미로운 요소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아니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인과에 따라 정해져있는지는, 신이라 불릴만한 존재거나

그것에 관한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는 SF소설에서 등장하는 양자컴퓨터가 아닌 이상 알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깝다고 해야할지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메이플스토리 세계관 내에서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세계의 모든 사건이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떠한 시각으로 보는 지에 따라 악몽이 될지도, 도피처가 될 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행복과 자애만이 존재하는 빛의 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한 마법사에게

"이 세계의  삼라만상 모든 것들에는 한계가 있고 인과는 정해져있다"라는 사실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고

어린 나이에 비밀 저항군에 가입한 청년 눈 앞에서 한 소녀가 폭사하는걸 지켜보며 평생의 트라우마를 겪은 한 레지스탕스에게는

'네 잘못이 아니다. 모든 것은 정해져있다.'라 속삭이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격려일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세계에 균형을 강제하는 법칙이 있고 모든 인과는 고정되어 있다하더라도 생명체에겐 자유의지가 있다.

자기 자신만의 생각이 있고, 그 생각이 이끌어내는 행동이 있으며, 그 행동이 불러올 어쩌면 운명마저 비틀 인과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 초월자

초월자는 평범한 생명체라면 존재 자체도 알기 힘든 오버시어로부터 각각의 권능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하지만 그런 초월자들도 결국 오버시어의 도구일 뿐이며, 세계에 법칙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다른 생명체들이나 초월자나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반항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평범한 생명체가 자신의 운명이 정해진대로 흘러가는 것을 모르는 무지를 가진 노예라면

초월자는 자신이 오버시어의 노예이며 이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노예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채 살아가는 노예와 자신이 노예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자각하는 노예,

굳이 따진다면 전자가 조금은 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닐까.


3. 시스템

메이플 스토리 세계관 내 세계의 시스템을 간단하게 요약해본다면 인과는 정해져있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에르다로 이루어져있으며 초월자들은 그런 에르다와 밀접한 권능을 하사받았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숟가락은 없다'라는 대사가 품고 있는 철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매트릭스는 일종의 코드로 이루어진 세계이며,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물리법칙에 따라 이 세계는 달라진다.

내가 눈앞에 있는 숟가락을 "철로 이루어져 딱딱하고 쉽게 휘지 않는다."라고 귿게 믿는다면 숟가락은 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눈앞에 보이는 숟가락은 코드로 이루어진 형태에 불과하고 다른 모든 물질을 또한 코드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내가 '숟가락은 없다'라고 믿는다면 숟가락은 본래의 형태를 잃고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설이 이와 관련이 있다. 사람은 시스템에 의해 짜여지는 일종의 프로그램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일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궁핍이 가져오는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어떠한 형태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이는 고통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은 사람으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메이플스토리의 에르다는 주로 매트릭스와 유사한 형태로 표현된다. 물질이나 어떠한 법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것에는 에르다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만으로도 캐릭터의 사고 방식은 달라진다.

에르다를 이용해 중력을 조종했던 리버스 시티의 티보이와도 같이.


4. 대적자


대적자는 초월자와 유사한 위치의 존재다. 정확하게 말하면 초월자와 다른 평범한 생명체 가운데에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초월자가 고정시킨 운명을 깨트릴 수 있지만 그 행동에는 오롯이 대적자 자신만이 아닌 다른 많은 생명체들의 염원이 요구되는 수동적인 존재이기도 하면서

많은 생명체들의 염원이 모이기만 한다면, 그들은 오버시어와 유사한 방식으로 초월자가 고정시킨 운명마저도 깨트릴 수 있다.

초월자마저도 이길 수 있긴 하나, 현재까지는 그 승리가 정말로 승리인지는 알 수 없다.

최신 스토리를 기준으로, 

메이플 아일랜드의 한 아이가 봉인석을 품으면서 대적자가 된 것은 검은 마법사가 만든 원인에 대한 결과이고

그에게 많은 생명체들이 염원을 모으며 초월자를 물리칠 수 있게 해준 것은 또다른 초월자의 부하가 스스로 꺼지길 원하는 생명체에 관한 사실을 알려준 것이 원인이 되어 만들어낸 결과다.

신이 내려준 힘도 잃고 다른 평범한 생명체들과 어떠한 특별한 점도 없는 존재로 돌아온 우리가,

신을 상대로 승리를, 혹은 진짜 자유의지를 얻기 위해서,

어떠한 것이 필요하고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앞으로의 스토리가 풀러내야 할 길고 무거운 숙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