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돌아오는군요.

하이퍼버닝도 무사히 마치고,
이벤트 보상도 알차게 쓴 덕에
스펙까지 만족스럽게 올린 뒤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무거운 글을(..)
또 하나 남기려고 왔습니다.


(*읽은 적 없는 분들은
한번은 훑어보고 오세요.)

지난 게시글에서 우리는
메이플스토리의 서사 구조가
영지주의를 뒤집어 차용하면서,
그 신도들의 본질주의에 반발하며 
운명론과 결정론을 부정하고,
실존주의를 답으로 냄을 알았죠.

이는 당연하게도 톨킨 작가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RPG에
근본적인 영향을 준 게 원인입니다.
톨킨 작가부터가 카톨릭 신자이고,
영지주의를 비롯해 온갖 신화나
전설을 차용한 점도 영향이 있겠죠.
영지주의가 카톨릭에서 파생했음을
지난 게시글에서도 설명한 바 있고요.

하지만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죠.
'왜 영지주의를 뒤집었는가?'라는 점!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발록.
그와 간달프는 본디 영지주의에서의
아이온에 해당하는 마이어 출신이다.)

데미우르고스는 거짓세계를 만들고
인간에게 내재된 신성을 억눌러
진정한 천상으로의 승천을 막습니다.
진실된 구원을 방해하는 거죠.
즉, 판타지 서사의 마왕입니다.

하지만 검은 마법사를 비롯해,
제른 다르모어마저도 이와 반대로
유저 측을 도우려 했습니다.
본질주의의 사명을 명받았음에도
마음 깊이 실존주의를 따랐으니까요.

저는 이를 [포용과 편향]과 함께
[공존과 차별]의 개념을 개인적으로
제시하면서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전에도 경고했지만 철학용어 아님.)



영지주의에 충실한 악의 세력은
본질주의자가 되어 [편향]을 따라
[차별]을 빚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우주의 근원적인 앎에 다다르면
스스로가 구원받는다고 맹신했죠.

이러한 존재들의 대표자인
군단장은 말할 것도 없을 뿐더러,
사도는 예수의 열두 제자를 인용하나
기독교적 포용은 외면한 이들입니다.
거짓세계를 관리해야 할 자들이
거꾸로 이를 파괴하려고 했죠.

네, 이들도 역할이 뒤집혔습니다.
군단장과 사도는 영지주의에서의
집정관에 해당하는 이들이었는데,
데미우르고스를 따라야 함에도
자신만의 꿍꿍이에만 골몰했고,
진리에 따른 구원을 막을 놈들이
제 손으로 구원을 바랐습니다.



당연하게도 그에 맞선 대적자는
실존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며
[포용]을 따르고 [공존]을 취했죠.
약자라고 해서 등지지 않았고,
동료들은 끝까지 믿었습니다.

심지어 적대한 존재의 실존마저
존중하는 선의를 베풀었죠.
선이 작다 하여 실천을 마다하지 않았고,
악이 작다 하여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이걸 목마른 사람한테 고구마만
먹이는 거라던 유저가 많았지만!)

이러한 '둘의 관계'는 이 게임은 물론,
<엘든링>과 <원신>에도 대입하여
그 서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엘든링의 황금률은 찬란하게 빛나는
영원한 번영을 찬미하였지만,
실상은 마모되어 그 영광은 저물고
내부는 썩어문드러진 오물로 가득했죠.

주인공을 비롯한 빛바랜 자들은
실낱같은 황금률의 인도를 따랐으나
결말에서는 대체로 다른 규율을
새 질서로 삼고 시대는 변화합니다.

원신의 별하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답게 별이 수놓은 밤하늘은
사실 진정한 세계를 감추는 벽이며,
오로지 보름달만 뜨는 거짓이고,
그 아래의 존재자들은 각자의 운명이
거짓 하늘에 새겨져 감시당합니다.


(개인적으로 정리한 티바트 서사의 
관념끼리의 관계를 정리한 표입니다.)

[자유]의 바람은 [구속]에 얽매였고,
[불변]의 바위는 [마모]하며 무너졌고,
[영원]의 번개는 [찰나]에 번민했으며,
[지혜]의 풀은 [무지]에 묶인 모순이었죠.

최근의 출시 지역인 폰타인은
[정의]롭고 순수한 물의 나라이나,
그 안에는 신분의 차별이 자행됐고
법률의 최고심판관마저 [부정]을 저질러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의심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런 의심이 곧
실존주의적 사유로 연결되죠.
지금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메이플스토리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뒤집혀 있던 것은 물론,
그 모순이 빚는 역설에 몸부림칩니다.
검은 마법사의 [빛과 어둠]이 그랬고,
제른 다르모어의 [삶과 죽음]도 같았죠.

하지만 재미있게도, 메이플스토리는
또 하나의 특정 신앙을 채용하면서
뒤집힌 영지주의에의 답안을 냈습니다.

그 신앙이 실존주의로 향하는
가교 역할을 맡고 있었죠.
뭔지 짐작이 되십니까?

냅다 스크롤 내리기 전에
고민하는 척이라도 좀 해보시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로 불교입니다.
아케인리버의 고통의 미궁에서
굉장히 노골적으로 묘사됐죠.

아, 별로 공감이 안 되시나요?

불상도 없었고, 불경을 읊지도 않아서
어떤 불교의 인용도 없었는데
필자가 드디어 미친 놈이 됐다고
속으로 욕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승려 노이의 청원을 따라
황금사원을 구원한 이야기라도
먼저 해야 했으려나요?

그래도 여러분을 꿋꿋이 설득해보죠.
먼저, 이 대사는 어떠신가요?



고통의 미궁에 불시착하면서
멜랑이 우리에게 건넨 문장이죠.

"기억하세요. 모든 길은 당신의
가슴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위 대사는 제게 불교의
마음챙김, 곧 사띠(स्मृति)를
암시한 문장이었습니다.

'알아차림'이나 '평화'로도 번역되는데,
가장 잘 알려진 건 '마음챙김'입니다.
고요하고 초연한 마음가짐으로
인식 대상을 수용함을 의미하죠.

마치 잔잔한 물결처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수면 아래의
진리를 엿보기 위한 수행법입니다.

혹은, 고따마 싯다르타의 임종 당시,
그는 제자들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겨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의지하라'라고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기도 했죠.

지역명부터가 '고통의 미궁'인 점은
당연히 불교의 윤회를 암시합니다.


(전설의 록 밴드 너바나의 이름은
열반을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

여기서 우리가 벗어난 일은
흔히 열반(निर्वाण, 니르바나)이나
해탈(मोक्ष, 모크샤)을 암시할 테죠.
불교에서의 열반은 대체로
윤회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합니다.
고통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거죠.

자, 어떠십니까? 
이제는 설득력이 좀 있나요?
아직은 아니시려나요.

저는 이 지역의 담당 빌런이
하필 힐라인 점도 제작진의
절묘한 배치라고 봅니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영원, 불변, 
그리고 시들지 않는 젊음을 바랐는데,
이는 죄다 불교에서 부정당합니다.

불교의 기초교리인 삼법인은
세상 모든 게 고통뿐이라는 일체개고,
'나'라고 할 만한 자는 없다는 제법무아,
그리고 모든 것은 변한다는 제행무상을
세상을 이해하는 틀로서 제시합니다.

특히 삼법인 중에서 일체개고는
본래 둑카(दुःख)라고 하는데,
이것은 부조리를 의미하지만
동양에서는 고대 중국의 번역가들이,
서양에서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둑카를 고통으로 오역하는 바람에
허무주의를 자극하기도 했죠.

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데,
제가 믿고 따르는 설은 이겁니다.

둑카라 함은 본디 부조리로, 원래 
'기대한 뜻대로 되지 않음' 정도인데,
이걸 고통으로 오역하는 바람에
세상만사를 괴로운 것으로 보아
중생들에게 오해를 빚었다는 것이죠.

(*굳이 경고하건데, 저는 살면서
어떤 식으로도 철학이나 종교학,
혹은 신학을 전공한 바 없습니다.
위 내용이 틀리더라도 책임을 못 지니
정확한 교리 해설은 전문서적이나
연구논문을 직접 찾길 바랍니다.)

그런 고통의 굴레 속에
우릴 빠뜨린 미궁에서
우리는 일체개고를 맛봅니다.
마치 거듭되는 윤회 속에서
고통을 벗지 못하는 것처럼,
힐라가 빚은 환상에 시달렸죠.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바위를 굴려 
산에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
하지만 바위는 산 정상에서 굴러 떨어진다.)

영원할 것만 같던 고통이
가득 메운 미궁 속에서
대적자의 정신은 점점
피폐해지고 망가졌습니다.

고통으로 보지 않아도 될 허상에
온통 괴롭다는 심상에만 사로잡혀
스스로의 정신을 갉아먹었죠.

오르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마음챙김으로써 그 모든 일이
영원하지 않다는 제행무상을
깨우치고 있었다면, 대적자는
우리가 본 결말보다는 쉽게
힐라의 함정을 간파했을 겁니다.
멜랑도 그래서 미리 조언한 거고요.

그나저나 하필 함정의 방식이 
쓸데없이 반복적이던 점으로
유저들로부터 혹평을 받은 듯한데,
이걸 멋지게 변주한 것이 바로
<샤레니안의 기사>였습니다.



네, 차원의 도서관 에피소드요.
이쪽은 또 호평일색이더군요.

여기까지만 읽고도 당신이 만약
*샤렌 4세가 켈라드에게 건넨 시를 
떠올리셨다면, 감이 좋은 겁니다.
(*켈라드가 샤렌 4세에게 답한 거랍니다.)

"꽃잎은 흩날려 떨어지기에 
아름다운 법입니다.
사람도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영원을 말하는 자와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하늘 아래에 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틀림없이 거짓말쟁이입니다."

위 시에서는 불교의 제행무상이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영원히 고정된 채로 불변하는 건
세상 어디에도, 어느 때에도 없죠.

고따마 싯다르타도 생전에
자신의 가르침마저 언젠가
변하게 마련일 거라고 했습니다.



즉, 켈라드는 본인부터가 이미
제행무상의 원리를 깨우쳤음에도
이제까지의 삶에서 빚은 애착에
자신이 얽매였음을 몰랐습니다.

이것이 씨앗이 되어 켈라드는 샤레니안의 
멸망일이 거듭되는 환상에 갇혔죠.
에레고스 듀나미스의 환상에 빠지며
멸망이 거듭되는 지옥을 떠돌아
끝없는 고통의 굴레에 갇힌 겁니다.

샤레니안 멸망일의 윤회는
그렇게 켈라드와 다섯 기사의
정신을 단 반나절 만에 파괴했죠.

'영원'한 충정을 입에 담은 대가로
빛을 등진 거짓 주인에게 충성하며 
세상을 불태울 검은 마법사의
친위대로 임명된 겁니다.



악의를 품기는커녕 선의로써
충정을 바치는 이조차도
[편향]에 빠지면 예외없이
메이플스토리의 본질주의를 따라
뒤집힌 영지주의를 맹신하는 거죠.

아, 근데 여러분은 아직
납득 못할 점이 있겠습니다.

불교가 등장하는 것까지야
이제까지의 설명으로 알겠는데,
왜 그게 실존주의로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냐는 거죠.

아까 제가 둑카를 설명하며
이를 서양에 고통으로 소개했다던
쇼펜하우어를 기억하시나요?
그는 자신의 철학에 불교적 사유를
상당히 강하게 입혔습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주저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아주 유명한 철학자이기도 한데,
그가 실존주의의 뿌리라는 점은
철학에 관심이 없다면 모르셨을 테죠.

위 내용을 천천히 풀어볼게요.

쇼펜하우어는 세상의 본질인
우주의 [의지]를 제시하면서
이로부터 현상계에 투영된
온갖 존재자를 [표상]이라 부릅니다.

문제는, 우주의 의지가
표상에게도 다소 반영됐으나,
온전히 반영되지 않은 탓으로
결핍이 생겨서 욕망을 품는 점이죠.

이 욕망의 성질은 아주 무서워서,
욕망을 충족하지 못하면 절망하고
충족한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만족감을 잊고 권태에 빠집니다.

즉, 고통의 굴레가 완성되는 거죠.
불교의 사유와 비슷하지 않나요? 

그래서 그는 이를 해결하고자
연민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려 했으며,
또한 음악 등의 심미적 체험으로
고통을 잊으라고 권했습니다.

물론 그런 노력을 하더라도
욕망은 쉽게 거듭하여 돌아오기에,
금욕을 실천하는 것도 중시했죠.

그런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받은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 철학에
반발하며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프리드리히 니체는 본질주의 전체를
'신은 죽었다'라면서 비난하여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펼쳤습니다.



덧붙여, 니체도 역시 불교에서
영향을 강하게 받은 탓에
반복적인 고통의 굴레인 '영원회귀',
이를 극복하는 사람인 '*위버멘쉬',
그리고 이런 극복을 위한 동력인
'힘의 의지' 등을 설파했죠.

(*옛 번역으로는 '초인'이 많은데,
최근에는 그냥 '극복한 자' 정도임.)

즉, 불교에 깊이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이
세상을 이루며 그 간극이 빚는
고통을 설파하는 염세주의자였고,
그로부터 실존주의의 씨앗이 뻗어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에게서
싹을 틔운 뒤, 20세기 초엽을
강타한 현대철학의 장남인
실존주의 철학이 유행한 겁니다.



이걸 표로 요약하면 대략 
위와 같은 구조가 되겠죠.

참고로, 실존주의 철학은
20세기 중엽까지 유행했고
사실 지금도 인기가 있지만,
한참 유행하던 시기에 
언어의 문화적 원리에 착안하여
'구조'에 집중한 구조주의 철학이
그 사유를 비판하며 세가 꺾입니다.

지난 게시글에서 빌려 쓴
이항대립의 개념도 사실
구조주의의 핵심 개념이죠.
기회가 된다면 이 얘기도
나중에 다뤄보도록 할게요.
(보러 오실 생각이 있다면..)

자, 그럼 정리해볼까요?

영지주의가 뒤집힌 채로
채용되면서 본질주의가 부정되자,
실제 서양 철학사의 양상대로
메이플스토리의 서사에도
불교적 사유가 담기면서
우리는 실존주의의 뿌리가
짚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고통의 미궁의 위치가 하필 
종점인 테레브리스 중반부였고,
최후까지 검은 마법사를 지키던
듄켈(켈라드) 역시 불교적 절망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감안하면
이는 의도적인 배치로 보입니다.

너무나 멀리 떨어져 원대하지만
손에 닿지 않는 [본질로의 편향],
그리고 이런 절망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삶의 의미와
주체적 선택을 담은 [실존에의 포용],
마지막으로 이 둘의 관계 사이에
자리한 불교는 가교 역할을 했죠.

즉, 메이플스토리의 작가진 중
아마 실제 서양 철학사를
서사에 반영하는 직원이
계신 걸로 추정되네요.



아케인리버의 맵 구성도
잘 보면 특정한 사유의 흐름을
일관되게 따르고 있었거든요.
뭐,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말이죠.

오늘은 이만하면 제가
할 얘기는 얼추 다 했습니다.
궁금하신 점이나 따로
할 말은 댓글을 남겨주세요.

현재로서는 루시드와 
[현실과 꿈]의 역전 관계를
정신분석학 개념을 빌려서
해설하는 글을 준비 중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아케인리버의
맵 구성 해설도 준비 중이고요.

그럼 라-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