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도록 폰으로 보시길 권장합니다.)

20주년의 기념 이벤트까지 치르며
결국 나름의 성인식까지 거친
국산 MMORPG 메이플스토리..

그런데 제목에 굳이 ‘스토리’를
넣은 것 치고는 서사가 부실하죠.
성인식까지 치른 게임이라기에는
총체적인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비단 서사의 내용뿐만 아니라
연출에서도 실망감이 많이 들며,
특히 인물의 캐릭터 기획은
납득 안 되는 경우가 많죠.
성격의 설정이 빈약하니까요.



게다가 문예 감성 자극하던
양질의 옛 문장은 온데간데없고,
‘뭐.이.악.’, ‘힘.줘.똥.’ 등
조악해서 읽기 힘든 수준의 
문장을 보면 괴로울 정도..
(*수정된 거 알고 있음.)

저는 특히 모험가 필수 퀘스트의 
테스의 기획을 최악으로 봅니다.
인물 하나에 캐릭터를 거의
다섯 명 정도는 넣은 듯한 난잡함은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

그러나, 제가 할 얘기는
앞서 언급한 서사의 살점보다는
그 안의 뼈대에 대한 얘기이며,
지금에 이르도록 저열할 뿐인
메이플스토리의 서사에도
분명하게 놓인 중요한 그것,
‘설탕 다섯 스푼’의 얘기를
진득하게 푸는 해설문입니다.

(시간의 신전 BGM의
1시간 반복 영상입니다.
틀고 보면 좋겠죠?)

짧게 즐긴 유저일수록
믿기 어려운 얘기일 테지만,
메이플스토리의 서사에는
매우 일관되게 지켜진 사유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잘 지켜졌는데,
현재의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기획하고 따른다는 점만은
아주 확실해 보입니다.

단지, 질과 양이 모두 저열한 서사로
그걸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기에
욕을 배 부르도록 먹는 것뿐이죠.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 게임의 끔찍해진 상품 환경,
특히 큐브로 인한 폐해를 못 견뎌
제가 루미너스 출시 직후에
뒤도 안 돌아보고 그만뒀다가,
아델 출시 시기에 와서야 복귀하고
이후로 이벤트 시기마다 찍먹만 하는,
아주 가벼이 게임하는 유저임을
미리 밝히고 들어가는 바입니다.
(*하이퍼버닝도 이번이 처음.)

굳이 따지자면 빅뱅 패치 이후보다
이전의 게임 플레이 시간이
월등히 긴 중고 뉴비인 건데,
때문에 스토리 구획의 구분은 고사하고,
순서나 추후 변경점을 많이 모르기에
내용에 오류가 있더라도 용서해주시고
문제가 될 부분은 너그러이 짚어주시길..



그리고 하나만 더,
되도록 달달하고 따뜻한 음료를,
취향이 맞다면 설탕을 듬뿍 넣어 
아주 달달한 아메리카노까지
한 잔 즐기면서 이 글을 읽으면
더욱 좋을 거라 감히 권합니다.

자, 먼저 제목에도 쓴
‘설탕 다섯 스푼’의 서사..
이 얘기부터 해봅시다.
제가 쓴 장문의 해설문에서
저게 끝까지 계속 등장하거든요.



이제는 고전이 된 만화인
우라사와 나오키 작가의 스릴러 명작
<몬스터(1994)>를 들은 바 있을 겁니다.
(*강구한 성우님의 룽게 경감이
‘나는 범인이다..’ 밈으로 유명함.)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꼭 한번은 보길 바랄 만큼
[탄생과 죽음]이라는 주제에서
많은 메시지를 건네는 만화인데,
우리는 그 중 롯소라는
이탈리아 출신의 식당주인의
과거사 얘기를 살펴봅니다.

롯소는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
청소년 시기부터 범죄에 몸담고
이른 나이에 살인까지 저지르며
결국 살인청부를 업으로 삼았죠.

그러나 그의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각종 암살 사건, 폭살 사건 등에
주요 용의자로서 수사권에 포착돼도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만 처분됐습니다.



한마디로, 롯소는 최고 실력의
일류 살인청부업자였죠.

공교롭게도 그는 사람을 죽일 때마다
점점 감정이 메말라 인간성을 잃었고,
마치 건조한 나무나 돌처럼
살았으나 죽은 듯한 사람이 됐습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의뢰를 받고
카페의 어느 남성에게 총구를 겨눠
암살을 하려다가 모든 게 뒤바뀌었죠.



감정이 메마른 롯소였으나,
유일한 낙인 쓰디쓴 커피에 
설탕 다섯 스푼을 넣어 마시는
습관만은 놓지 못했습니다.

그걸 마실 때만큼은 롯소도
조악한 커피 매니아가 되어,
만면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죠.

헌데, 하필 지금 쏘려는 암살 대상이
카페에서 마치 자신처럼 커피에 
설탕을 다섯 스푼 넣고 있었습니다.



“난 몇 명째가 될지 알 수 없는
그 누군가에게 총구를 겨눴지.
그 누군가는 커피를 앞에 놓고 있었어.
그리고 설탕을 넣기 시작했지.

한 스푼, 두 스푼, 세 스푼, 네 스푼.. 

그리고 다섯 번째
설탕을 터는 순간,
내가 늘 마시던 커피의 맛이
입 안에 번져왔어.

그 누군가는 그걸 
맛있게 마시기 시작했지.
..그래서 난 총을 내려놨어.”



위 사건을 계기로 롯소는
살인청부업을 완전히 청산하고
어느 촌동네에 식당을 차려,
동네의 사람 좋은 식당 주인이 됐죠.

물론 설탕 듬뿍 넣은 커피도
매일같이 즐기고 있었고요.

대체 그는 무슨 생각이 든 것일까?

단순히 그 의뢰 대상으로부터,
그들 역시 자신과 다를 바 없이
설탕 다섯 스푼의 커피를 즐기는
똑같은 인간이란 감상을 받았기에?

나아가, 살인을 더 거듭했다가는
설탕을 가득 넣은 커피로조차
‘나다운 나’를 지탱할 수 
없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정체를 감추고
평범한 식당 주인이 된 롯소에게 
여주인공 안나 리베르트가
아르바이트 고용을 위장 삼아
다른 목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안나는 자신의 양부모를 죽인
어느 살인마를 죽일 심산이었고,
일류 살인청부업자인 롯소에 대해
법학 대학교의 연구를 통해서
관련 정보를 접한 법대생이었습니다.

안나가 롯소에게 정체를 들켜
그가 안나를 추궁하고서야
결국 진짜 목적을 밝혔죠.

“(살인기술을) 가르쳐달랄까.. 했어요.”

그러나 안나 역시 롯소가 
진짜로 새출발한 것임을 알고는
그의 정체에 대해 묵인하며
무언의 거절 의사를 받아들였죠.

그녀의 사정을 안 롯소도
마냥 거절만 하기는 힘들었는지
넌지시 이렇게 조언을 건넵니다.

“살인을 하는 법 따위는 간단해.”



“..’설탕 맛’을 잊어버리면 돼.”

즉, 인간다움은 물론이요,
‘나다움’조차 내던져야 한다는 소리..
‘나’의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한계선,
‘나’를 규정해주는 특별한 이정표를
버려야만 한다는, 사뭇 비정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따스한 조언이었죠.
(롯소는 안나가 살인하지 않을 것을 바랐고,
또 이를 지킬 것임을 이미 짐작했기에.)

자, 그럼 우리 게임의 얘기로 돌아오죠.

제게 있어, 롯소의 설탕 다섯 스푼은
메이플스토리의 서사 곳곳에도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특히나 메인 서사의 빌런 집단과
결착을 지을 때마다 등장했습니다.

‘나다운 나’, ‘특별한 나’,
그리고 ‘나로서의 나’..

그리고 서양 철학의 개념 중에는 
이를 간단하게 짚는 것이 있습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뿌리로 여겨지는 키에르케고르.)

바로 ‘실존’이죠.

메이플스토리의 서사 배경은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색채가
그 뼈대로 자리잡습니다.

형이상학적 이원론이라 함은
우리가 실체로 포착하지 못하는,
감각과 인지 너머의 모든 것인
‘형이상’의 구조를 양극으로 본
철학사의 거대한 흐름입니다.

[빛과 어둠], [영원과 마모],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삶과 죽음], [옳음과 그름],
그리고 [창조와 소멸]까지..

네, 메이플스토리는 물론이요,
모든 판타지적 배경을 가진
문화 창작물에서 흔히 봤죠?

그리고 앞서 언급한 실존,
곧 우리의 ‘설탕 다섯 스푼’ 또한
그런 이원론의 한 축을 가졌습니다.

바로 [본질과 실존]의 관계,
이것이야말로 메이플스토리의
서사 속 중심축을 담당합니다.

위 두 개념을 쉽게 풀자면,
[본질]은 '나를 출발시킨 것'이고,
[실존]은 ‘방황 끝에 내가 선택할 나'이죠.
서로 반립하는 개념이면서
동시에 공존하던 개념들입니다.

보다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겠네요.


(<아테네 학당>의 파르메니데스.)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말을 남기며 명제를 통해서
이원론 철학의 시작을 알렸죠.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단순하게 동어 반복을 하여
한 쌍의 문장을 꾸민 것 같으나,
위 문장은 [존재와 부존재]의 반립을
동시에 고정불변의 것으로 봅니다.

있는 것은 그저 있을 뿐이고
없는 것은 그저 없을 따름이기에,
있는 것이 없게 되거나
없는 것이 있게 되는 일은,
즉 엄밀한 의미에서의
‘변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어제 발을 담근 강물은
오늘 발을 담글 강물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본 셈이죠.
(헤라클레이토스 : 시발!)

이런 사유를 이어서 플라톤이
제시한 게 그 유명한 이데아론입니다.
그는 인간의 한미한 인지 너머의
[본질]의 세계를 이데아로 봤으며,
모든 존재자를 품은 현실, 물질계는
그저 본질을 어렴풋이 투영하여
허황된 [실존]의 세계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이런 사유는 훗날
모든 존재를 출발시킨 개념인
[본질]이야말로 궁극의 목표이고,
반대로 그 끝의 [실존]은 흔해빠지고
그저 저열한 것에 불과하다는
차별적인 사유로 이어졌죠.

네, ‘설탕 다섯 스푼’은 서양 철학사에서 
무려 2천 년을 외면받았습니다.

흔히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서양 철학사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며 본질주의를 들이받고
실존주의의 싹을 틔울 때까지,
현실을 ‘거짓의 세계’로 봤습니다.

그저 본질의 이름만이
계속 모습을 달리했을 뿐이죠.



고대 그리스로부터 출발하여
타락을 뿌리치고 구원으로 향하던
기독교 철학의 ‘로고스(진리의 말씀)’..

인간의 이성은 신으로부터의 선물이고,
따라서 온 세상을 수학적으로 명확히 
표현하겠다던 데카르트의 ‘본유관념’..

그리고 인간의 감각은 어떤 대상도
있는 그대로 인지할 수 없기에
대상의 진정한 모습과 정보를
온전히 알 수 없다는 칸트의 ‘물자체’..

위 셋은 모두 본질의 다른 이름입니다.
시대나 학자에 따라 그 개념 구상이
약간씩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죠.

이 가운데에 설탕 다섯 스푼은
어디에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실존]은 탐구의 가치가 없었으니까요.

게임 외적인 얘기가 길었지만,
이런 사유는 메이플스토리에서도
거의 초창기부터 존재했습니다.

다만, 최초에는 양상이 좀 달랐죠.
두가지 서로 반대되는 관념을
대립의 구도로 삼는 서사가
초창기에는 지금의 것과 달랐습니다.



그 옛날 빅뱅 패치는 고사하고,
심지어 시간의 신전 지역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당시의 최종보스로 존재하던
자쿰과 혼테일이 그 주인공들이죠.

이 둘에게 부여된 이원론적 관념은 
바로 [탄생과 죽음]으로, 두 보스는 
모두 죽음을 대변했습니다.

자쿰은 엘나스의 죽음의 나무로부터
인근 주민들의 신앙을 통해 부활했고,
혼테일은 비열하게 나인스피릿을 배신하여
그를 사살해 위상을 탈취했지만
당시에 입은 상해를 치유하고자
세계수가 남긴 걸로 추정되는
생명의 동굴에 은거하고 있었죠.

네, 초창기의 메이플스토리는
[탄생과 죽음]의 관계를 다루는 게
본래의 이원론적 서사였습니다.
보다 직관적으로는 [생성과 소멸]의
이원론이 자리잡았다고도 할 수 있죠.



그러나 시간의 신전에서부터
점차 논의는 확장됐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사에
[본질과 실존]이 담기기 시작하죠.

이 게임의 초월자와 오버시어는
각각 생명, 시간, 그리고 빛을
관장하는 신적 존재들이며,
위 세 관념은 다시 세부적으로
아래와 같은 이원론을 구성합니다.

생명은 [삶과 죽음]에 구별을 두고 
때문에 [성장과 노화]를 품었으며,
시간은 [순행과 역행]을 이루고
[편행성과 순환성]을 갖췄죠.
마지막으로 빛의 경우는
그 자체로 [빛과 어둠]에,
[창조와 소멸]을 구성합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메이플스토리는 이원론의
보다 구체적인 틀을 가시화하고자
하나의 특정 신앙까지 채용하죠.



바로 신성한 지식을 따르는
기독교의 이단분파 영지주의..
흔히 오컬트주의의 뿌리로도
여겨지는 민간신앙입니다.

앞서 언급한 플라톤의 철학은
본질주의의 씨앗을 싹틔웠고,
그 다음 주자는 기독교 철학이었으며,
영지주의는 기독교에서 파생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름은 달랐으나
결국 [본질]을 탐구한 사유의
모임으로 이뤄진 흐름이었죠.

이는 메이플스토리와도 연관 깊은데,
관련 해설 게시글이 너무 드물어서
솔직히 좀 많이 놀랐습니다.



굳이 꼽자면 둘 정도의
게시글을 찾을 수 있었죠.

게임 설정을 파는 사람은 항상 적다지만,
우리나라는 기독교의 교세도 큰데
너무나 적대적인 게임 운영 때문인지
그 정체를 알고도 관련 내용을
다루는 게시글이 거의 없더군요.
다들 밸런스 패치나 컨텐츠 운영에
신경을 곤두세우기에 바쁜 건지..

하여튼 영지주의는 간단히 얘기해서,
플라톤의 주저인 <티마이오스>에서
핵심 개념용어를 빌렸음에도,
기독교와 결코 공유될 수 없는 사유를
교리로 삼는 바람에 이단이 됐습니다.

바로 [포용과 편향],
그리고 [공존과 차별] 중
오로지 후자만 채용한 것이죠.
(*이건 임의로 구성한 것이니,
철학용어로 오해하지 말 것.)

네, 영지주의는 ‘편향’과 
‘차별’의 신앙입니다.
포용 정신이 중요한 기독교에
이는 아주 치명적이었죠.

여기서의 [편향]은 본질로의 회귀,
혹은 온갖 훌륭하고 탁월한 것을
편취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에 따라 저열하고 미천한 것에
손사레 치며 [차별]을 빚고 말았죠.

반대로 [포용]은 저열하고 미천한 걸
저버리지 않고 함께 수용하면서
[공존]을 내세운 셈이 됩니다.

서기 2세기 경, 로마 기독교의
주교(당시의 교황) 선출에서
발렌티누스라는 교인이 낙선했는데,
그는 실의에 빠져 교계에서 빠져나와
영지주의를 창업하며 독립했습니다.

영지주의의 세계관은 대략 이렇습니다.


(*메이플스토리와 많이 겹치니, 
숨은 그림 한번 찾아보시죠.)

우주의 시작과 함께,
태초의 창세신 모나드로부터
세상을 구성하는 아이온들이
‘심연’부터 시작하여 한 쌍씩
발출(출현)하며 교리를 시작합니다.

이들은 곧 영원함과 온전함을
그 성질로 삼은 신적 존재들입니다.
세상의 개념적 권능 또한 지녔죠.
그 자체로 하나의 법칙을 이룹니다.

그리고 아이온 중 지혜의 아이온,
여성 소피아가 문제를 일으키죠.

모나드와 아이온이 머무는
진실된 천상계 플레로마로부터,
지혜의 아이온 소피아는
모나드의 모방을 시도했습니다.
스스로도 자식을 낳으면서
세상을 창조하고팠으니까요.

그렇게 데미우르고스를 낳았으나
아쉽게도 그는 불완전했습니다.
때문에 수치를 느낀 소피아는
데미우르고스를 구름에 숨겼죠.
자식의 존재를 감춘 겁니다.

문제는, 데미우르고스가 눈뜨자
곁에는 다른 누구도 없었고,
그래서 본인을 창세신이라 착각하며 
거짓된 지상계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데미우르고스도 따지고 보면
천상계 플레로마의 신성을 타고나
그 신성성이 지상계에 퍼져
인간에게 내재되긴 했지만,
그의 불완전함이 원인이 되어
인간들도 역시 신성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고난에 빠집니다.

결국 플레로마는 참된 천상이,
하늘 아래 안주한 인간 세상은
거짓된 지상이 되었으며,
인간은 어렴풋이 신성성을
타고났으면서도 불완전하여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내재한 신성으로써
타락한 육신을 버려야 했습니다.
(*이게 영지주의의 구원관.)

[천상과 지상], [참과 거짓],
[구원과 타락], 그리고 결국
인간을 옭아맨 [영혼과 육신]..

데미우르고스라는 거짓신은
마치 모나드가 아이온을
여럿 발출시킨 것처럼
지상계의 인간을 속여 넘길(!)
집정관 여섯(혹은 일곱)을 두었죠.

네, 인간의 구원을 막은 겁니다.
거짓세계인 지상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말이죠.



때문에 ‘얄다바오트(반역자)’가
그의 이명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창세신 모나드의 뜻에
반하는 반역 행위니까요.

물론 플레로마는 이 세태를
좌시하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소피아 역시 책임감을 느껴서
인간을 도울 쌍둥이 신령까지
지상계로 강림시켜 파견했죠.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선택받은 소수'라 여겨
자신에게 내재한 신성성을
깨우치는 지식을 영지라 불렀으며,
‘선택받지 못한 다수'는 결국
무슨 수를 쓰더라도 구원에는
이를 수 없다는 차별을 따랐습니다.

그야, 아이온들께서 보낸 도움으로
선택받은 자신들은 구원이 예정됐는데,
그렇지 못한 이들은 본질에 신성이 없어
구원도 못 받고 천상에 가지 못하기에
관심 따위를 줄 이유가 없으니까요.

자, 이상의 내용이 영지주의의
기본적인 교리 속 서사입니다.

너무나도 매력적인 서사 덕에
현대에 이르도록 판타지 장르의
문화 창작물들이 자주 빌려 쓰죠.

창작물의 범주를 게임으로 한정해
비교적 최근 출시된 사례만 보자면
<엘든링>과 <원신>이 있죠.



엘든링은 세계의 법칙을 재정립하여
이전의 거짓된 황금률을 부수고
결말에서 새 시대의 법칙을 구축합니다.
(누가 많이 겹쳐 보이죠?)

결말이 상당히 많긴 하지만,
정설 결말로 여겨지는
일명 ‘별의 세기’ 결말에서는
'의지'로부터의 운명론을 부정하고
각 존재자가 직접 운명을 개척하는
차가운 달의 규율을 퍼뜨립니다.

위 결말을 채택할 경우,
이제까지 죽는 순간마다
황금나무로부터 영혼이 회귀하여
억지로 재탄하던 존재자들은
‘스스로’라는 구속에 묶인 채
고정적인 윤회에 시달렸으나,
결말 이후로는 *환혼의 힘 아래
운명을 직접 개척하게 됩니다.

(*필자가 틀렸을 수 있음.
죽음 이후 그 영혼을 세계에
다시 투영하는 힘을 지칭하는데,
달의 규율이라서 묶어 추정한 것.
엘든링 설정덕후들의 제보 요망.)


(??? : 이 더러운 부패똥꾸릉내 년아!)

그 과정에서 만난 데미갓들은
영지주의의 집정관 체계를 비틀어
서로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 혼돈,
파쇄 전쟁으로 빚은 참상의
주역이자 희생자로 등장합니다.

또한, 영지주의의 아이온을 투영하여 
각자의 규율을 관장하는 외부신들은
틈새의 땅을 침공한 침략자들이었죠.

엘든링에서 황금은 불역이 아니고,
태양은 영원한 은혜가 아니며,
불변하는 영광은 허상에 지나지 않죠.
황금의 일족이거나 그 혈통인
데미갓들의 말로도 다르지 않았고,
침략자인 외부신들은 격퇴당했습니다.



원신의 경우는 보다 직설적입니다.
현재의 ‘티파트 편’은 아예
‘뒤집힌 하늘’ 아래의 거짓이며,
일곱국가의 집정관들은 심지어
기존의 본질주의를 거부하면서
실존주의와 맞닿은 결말을 택합니다.

네, 영지주의를 정면에서
뒤집고 모독하는 서사입니다.

[구속]된 [자유]의 바람은
백성의 고난을 덜기로 했고,
[마모]하는 [불변]의 바위는
백성이 스스로 물고기를 낚게 하며,
[찰나]에 번민하는 [영원]의 번개는
스스로의 고난을 내려놓으며
시간 초월의 여정에 올라섭니다.
그 등 뒤에는 백성의 염원을 싣고서요.

본래의 영지주의와는 다르게,
선택받은 소수에 차등을 주지 않고
선택받지 못한 다수에겐 온정을 베풀죠.

허나, 네번째 여정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세계수는 대륙 중앙에 자리하여
티바트 전 대륙의 기억을 품기에,
[기억과 망각]으로부터 수메르 서사는
존재론에의 전환점을 제시합니다.

그렇게 세계수 아래 모든 존재자는
꿈을 돌려받음과 동시에,
각자가 갈망을 허락받으며
서로의 존재를 지탱할 [실존]을
다시금 꿈꾸게 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지]를 저지르며
모순된 [지혜]가 낸 결론은,
세계수 아래 모든 존재자가
서로의 존재를 지탱해주는
불교의 *혜업으로 결론을 맺죠.

(*지혜로운 업. 중생들이 서로에게
공덕을 베풀고 받는 불교적 지혜.
공동체주의와 일맥상통함.)

가장 최근에 출시된 폰타인은
[부정]함의 난류를 품은 수면 위로 
무결한 [정의]로움을 세우기 위해
대홍수로써 기독교적 침례를 
심판의 의식으로 삼았죠.

그 끝에 ‘정해진 운명’은 거부되며
종말을 예언하던 결말은 역전됩니다.
피상적으로는 정의의 심판으로
모두를 파멸로 이끌 비극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모두를 품는 혜업이
다시 서사의 결말이 됐습니다.

네, 엘든링과 원신은 모두
영지주의가 따르던 본질주의와
그 본질로부터의 운명을 거부해,
각 존재자가 실존을 되찾는
실존주의적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정해진 운명이란 건 없습니다.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것이며,
모든 존재자가 삶을 직접 일굽니다.

물론 이는 불안한 여정입니다.
어떻게 끝날지 누구도 모릅니다.
끝을 모르기에 후회를 남기지 않고자
언제나 최선을 다 해야만 합니다.

위 사유는 비단 게임뿐만 아니라,
온갖 판타지 창작물도 똑같죠.
저런 이원론적 서사 구도가 
창작물에 보편적으로 담겼습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나
<해리포터> 시리즈도 그랬죠.



프로도가 반지의 무게를 못 이겨
샤이어조차 떠올리지 못할 때,
샘은 프로도에게 물었습니다.

“샤이어가 기억나세요, 프로도 나으리?
곧 봄이 온다고요. 과수원에 꽃이 피고,
새들은 개암나무에 둥지를 틀겠죠.
햇빛은 여름 보리를 파종할 거에요.
그리고 햇딸기를 크림과 곁들이겠죠.
딸기 맛은 기억하시나요?”

그럼에도 프로도가 샤이어의
산내음과 새소리를 기억 못하자,
샘은 결단을 내립니다.
여기서 '그 명대사'가 나오죠.

“그럼 잠시 전부 잊도록 하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자 어서요, 프로도 나으리.
반지를 대신 옮길 수는 없지만
당신이라면 내가 옮겨줄 수 있어요!”

그렇게 반지의 파괴 임무를 완수하고
마그마가 흐르는 산비탈에 누워,
샘과 프로도는 고향을 떠올립니다.

샤이어의 들과 강, 축제의 불꽃놀이,
그리고 짝사랑하던 여인의 춤사위,
그녀에게 전하지 못한 고백까지도.

“너와 함께 있어 다행이야, 샘.
모든 것이 끝난 이곳에 말이지.”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다 해도,
그 미약할 뿐인 희망으로써
사우론이라는 거악을 물리쳤습니다.



해리포터 시리즈도 마찬가지,
샘과 프로도에게 샤이어가 있다면
해리에게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죠.

폭력과 정복으로 모든 걸
삼키려는 절대악에 맞서서,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며
그 절대악에 파멸을 선사한 건
다름 아닌 해리의 어머니,
릴리 포터의 모성애였습니다.

그녀의 단 한 번의 선택이
고대의 보호마법을 해리의
혈통에 심어 그를 지켰고,
해리를 학대하던 더즐리 일가의
프리벳 거리의 집에까지 전해져
시리즈 내내 큰 역할을 했죠.

이는 결말에서도 아주 중요했습니다.

볼드모트는 4권의 트리위저드 시합에서
해리를 구속하여 그 피를 탈취했고,
이를 통해 부활하며 승리를 외칩니다.
릴리의 보호마법을 파훼했다고 믿었죠.

해리는 유일한 약점을 놓쳤다며
이를 걱정하고 염려했지만,
조력자인 덤블도어는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역전승을 예감하죠.

네, 볼드모트의 어리석은 선택은
릴리의 보호마법의 울타리 안에
스스로 발 들이는 짓에 불과했습니다.
대상에게 해를 입히는 개념 자체가
원천적으로 통제되는 마법이었죠.

그렇게 7권에 이르러 볼드모트는
릴리 포터가 남긴 함정에 넘어가,
단순한 무장해제 마법주문에 당하며
자신이 날린 살인 마법에 사살됩니다.


(??? : 우리 가여운 토미.. 
좋은 물건도 제 주인이 써야
밥값을 하는 거란다.ㅎㅎ)

재미있게도 릴리를 사랑한
스네이프의 지원과, 뜻하지 않은
'작은' 실수까지 겹친 탓에
무적의 딱총나무 지팡이의 소유권마저
해리에게 넘어간 탓도 있었고요.
(*볼드모트는 위 사실을 모른 채로
딱총나무 지팡이를 사용했음.)

만약 릴리 포터의 다정다감함이
스네이프에게 닿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의 한가닥 남은 인간됨을
지탱해주지 못하고 있었다면
이 소설의 결말은 어떻게 흘렀을까..?

네, 판타지 장르의 창작물에는
굳이 영지주의가 아니더라도
선택됐다고 믿던 소수의 오만이
저열하다고 여긴 다수의 반기에
파멸하는 서사가 널리 차용됐죠.

이건 메이플스토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내 곁의 ‘너’와 함께하는 여정,
동반자들과의 군상극을 채택했죠.
함께 본질로의 편향된 착각에 맞섭니다.
(이런 중요한 요소를 제작진이 
더럽게 못 살려서 문제지.)

때문에, 적대세력이 품은 [편향]은
오히려 우리에게 실존의 [포용]을
보다 명확히 드러내는 거울이었죠.

적대세력 간부 중 일부가 
묘하게 특정 기물에 집착한 것을
서사에 관심있던 분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실 겁니다.



대표적인 최근 예시로는
카링의 커다랗고 파란 단추겠죠.

그녀는 본디 대적자로서
신의 창을 품을 자격이 됐으나,
마음을 잃었다고 묘사됩니다.

알고 보니, 선발에서 낙선하고는
그 실의를 이기지 못한 바람에
동료를 도구처럼 써먹고 버려,
스스로의 이상에 희생시킨 끝에
편향을 품고 만 탓입니다.

그녀의 대사들을 먼저 훑어봅시다.

"쓸모없는 실패작 같으니."

이는 얌얌 아일랜드에서
에르다를 선별하는 방식으로
위협이 될 만한 존재를
입맛에 맞게 재탄시킨 실험에서,
카링이 나약하게 태어난
피실험체들에 던진 말입니다.
대놓고 차별성이 담겼네요.

"내가 졌다고? 그럴 리 없어.
다르모어 님께 선택받은 자,
그분의 위업을 위해 존재하는
사도 중의 하나.
누구보다 완벽한 연구를 해낸 내가..!"

본인이 '선택받은 소수'라는 사유,
이로써 구원이 약속됐다고
철썩같이 믿는 영지주의적 광신,
게다가 온갖 탁월한 것의 편취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던 모습까지 보이네요.

편향, 차별, 그리고 착각(광신).

카링은 영지주의적 광신에 빠져
오만한 착각에 심취하고 만
적대세력의 교과서적 표상입니다.

보스전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인물 기획에 대해서는 확실히
세심하게 신경을 쓴 것 같네요.
이는 그녀의 말로를 보면
더욱 확신이 서게 됩니다.



"다르모어도.. 글쎄,
자기 부하를 장기말로 쓴 건
비슷한 것 같지만, 적어도
공정한 척 행세하진 않으니까
나름 양반인 건가?"

"보라고, 도철의 힘을 회수하지
못했을 때부터 카링은 버림패였을 걸?"

일련의 사태 이후,
배신한 십이지 영감의 대사입니다.
카링도 검은 마법사의 군단장들처럼
버림패로 이용당하다 버려졌다네요.

그녀가 막 봉인에서 풀려나,
사흉의 회수를 위해 해결사 동료를
버림패로 써먹던 시절의 대사도 보죠.

"수단일 뿐이었는데..
그랬을 텐데.."

1년이나 동고동락한 탓에
인간성을 되찾던 카링은
자신을 위해주던 해결사들이
마음의 눈에 밟히고 있었습니다.



"아닌가.. 그 단추..
그걸 보지 않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으면..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을 텐데.."

"아, 이거였나.. 내가 놓친 빛이, 바로.."

성불을 하는 순간이 와서야
카링은 겨우 스스로 깨닫습니다.
해결사 동료들에게 받은 온정에
그녀 역시 감화되고 있었음을요.

커다랗고 파란 단추와 더불어
그녀가 죽을 때까지 입던
덩치 큰 해결사의 저고리는 카링만의 
특별한 '설탕 다섯 스푼'이었습니다.



그리고 초월자이면서 검은 마법사의
행보에 동조하며 합일한 타나에게는
쟝이라는 어수룩한 청년의 포옹이 있죠.

[창조와 소멸]의 권능을 품어
파괴와 재구성이 반복되며
미쳐가던 타나의 폭주는,
고작 포옹 하나 따위만으로
잔잔한 물결처럼 가라앉곤 했죠.

네, 편향됐다는 인지조차 못한 채로
그저 원대한 꿈을 품은 저들도
저마다의 ‘설탕 다섯 스푼'을 가졌습니다.
단지 그걸 눈 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아
눈 뜬 장님 행세를 했을 따름이죠.

어쨋든 이 '설탕 다섯 스푼'은
‘나'를 보듬는 온정의 상징이자
자기존재감을 지탱하는 [실존]입니다.
저런 지탱이 사라진 끝에
스스로를 무너뜨린 사례도 있죠.

가령, 반레온은 사랑하던 반려를
끝까지 잊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배반의 심상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본질도, 실존도 모두 내려놓은 채로
자멸과도 같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를 찌른 칼은 우리가 내질렀으나,
허무와 절망에만 사로잡힌 채
마굴이 된 성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기만을 기다렸기에
묘하게도 칼잡이는 그 자신이었죠.

아직 이피아의 목소리가 들릴 때,
그녀의 수집서인 플라워북에서
그리움 너머의 온정을 포착하여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을 때에,
우리가 그런 때에 도착했더라면 
과연 그 결말은 어땠을까?

(*아직 생존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 분 아직 살아계신 거였나요..?
누가 댓글로 정확히 좀 알려주셔요..)



거짓된 꿈과 환상으로부터 
행복을 바라고 있던 루시드도
못지 않게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꿈과 환상이라 함은 대체로
‘거짓된 세계’로만 치부되지만,
힌두교의 베단타 철학에서는
꿈과 환상을 진실된 본질(천상계)과
거짓된 실존(현실, 지상계) 사이의 
매개적 세계로 보는 편이죠.

힌두교의 입장에서 현실이란
그저 꿈과 환상의 한 표상입니다.
진실된 본질의 세계를 투영해
거울에 맺어놓은 상에 불과하죠.

쉽게 말해, 루시드의 이원론은
[현실과 꿈(환상)]이면서도 동시에
[진실과 거짓]이 되는 셈입니다.

(*내용의 비약이 좀 심한데,
글을 급하게 축약해서 그렇습니다.
추후에 별도의 게시글을 마련할게요.)



진실된 행복을 찾는답시고
거짓된 허상으로 도망쳤으니,
그녀는 그토록 바라던
동경의 대상이 악몽으로
나타나는 꿈을 빚던 걸 테죠.

환상적인 축제의 꿈, 레헬른은
본디 비극적인 파멸의 악몽에
거울로 비친 허상이던 셈으로,
루시드는 진짜 진실을 외면하고자
스스로를 거짓에 유폐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배신자 아카이럼.
그도 역시 실존을 등진 사람이죠.
다만, 그는 좀 특별합니다.

아카이럼은 이 게임의 서사에서
영지주의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아카이럼은 윌에게도 있던
심안의 상징을 이마에 새긴 데다가
본래의 형상도 간사한 뱀이었는데,
영지주의를 창시한 발렌티누스도
죽은 뒤에조차 비난 섞인 모욕과
악명뿐인 평판을 받을 때마다
줄곧 간사한 뱀으로 비유당했죠.



아카이럼이 새긴 심안은 대체로
세번째 눈을 그림으로써
진정한 지혜의 눈을 떴다는
표지로서 사용되는 편입니다.

영지주의의 교리, 기억하시나요?
다시 한번만 되짚어봅시다.

영지주의자는 거짓된 현실로부터
내 안에 내재한 신성성을 깨우쳐,
참된 천상계로의 귀환을 꿈꿉니다.
영지주의라는 이름부터가
‘영험한 지식(靈智)의 사상’이죠.

더욱 재미있는 점은,
그런 지식의 깨우침에는
‘선택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따로 있다는 선민의식입니다.

네, 영지주의는 편향에 따른
차별주의적 종교입니다.
구원의 앞에 [선택받은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가 있죠.

그런 탓으로, 현대 창작물에서
다시 채용된 영지주의의 특징은
바로 ‘비틀려 차용’된단 점입니다.

엘든링의 마모되어 망가진 황금률,
원신의 뒤집힌 거짓의 별하늘 등은
본디 영지주의에서는 구원이자,
진리이자, 선함의 본거지입니다.
당연히도 게임 내에서는 아니었고요.


(영지주의의 아브락사스.
분파마다 맡는 역할이 매우 다양함.
게임 내에서는 사망한 채로 등장.)

영지주의자는 우리의 세상더러
거짓된 세상이라고 멸시했으나,
실상은 내재한 신성을 깨우친 끝에
영지주의자가 다다랐어야 할
[본질]이야말로 거짓이었습니다.

우리가 본 모든 '역전'은
위와 같은 모순이 빚었습니다.

위 내용을 이 게임의 데미우르고스,
검은 마법사와 제른 다르모어에게
대입해서 생각하면 결과가 재밌습니다.

두 인물 모두 데미우르고스가
거짓된 지상계의 하늘을 막아서
인간의 구원을 막고자 한 것과 달리,
지상계의 거짓됨에 함께 분노하고
구원을 직접 찾아주려고 합니다.
본래 영지주의에서 맡았을 역할에
등돌리고 오히려 이에 반발합니다.

그래서 두 메인빌런들은
피상적으로는 우리와 적대했으나,
내면적으로는 동지인 셈입니다.
방식이 좀 남다르게 거칠(..) 뿐이죠.

좀더 상세하게 따져봅시다.



“궁극의 빛은 궁극의 
어둠에서만 찾을 수 있다.”

검은 마법사가 윌에게
말했다는 문구입니다.
이항대립을 직접 거론하네요.
에스페라에서 들었던가요?

빛과 어둠의 개념은
결국 상대적인 것이기에
서로의 존재가 필수입니다.
*대립하지만 공존합니다.
(*이항대립)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은 서로를
결코 직접 바라보지 못하나,
언제나 서로를 등지며 붙어있죠.

서로의 차이가 있기에
각자의 의미를 갖는 것인데,
이 중 하나를 편취하려 하니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요.

그림자가 서린 곳이라야
비로소 빛이 들 수 있기에,
마찬가지로 빛이 든 곳에는
그림자가 짐을 예감하는 법입니다.


(*보스의 공격 패턴에 사슬을
매우 자주 활용하고 있었다.
속박을 형상화한 패턴이기 때문.)

그렇다면 검은 마법사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나
서사 결말까지의 경위도
단번에 해명이 가능합니다.

그는 ‘법칙(규율)'을 재정립하여
운명의 부조리로부터 탈피하고,
이항대립으로부터 이탈하여
온전함을 품고자 하기 때문이죠.

하얀 마법사이던 시절의 그도
역시 편향에 빠진 존재였으나,
이항대립적인 진실을 안 후로는
빛을 바라던 초월자임에도
오버시어 등 차상위 존재로부터의
'구속시키는 운명'을 저주했습니다.

빛만을 바라야 했을 터인데
그런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란, 
어둠을 함께 품어야 하는 법칙이
구속하는 족쇄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에게 부조리이며,
곧 부당한 책임의 전가입니다.

추구하는 길이 빛임에도
따라오는 길에는 언제나
어둠이 서려야만 하는 모순이
그의 존재를 역설에 가둡니다.



제른 다르모어의 야심 역시
어렵지 않게 예상 가능합니다.
그는 생명의 초월자이면서
인명을 경시하다 못해 멸시하는
모순적인 행보를 보였죠?

그의 진의를 엿볼 수 있는 건
차원의 도서관 에피소드에서입니다.

<세피로트의 정원사> 속 아샤는
오로지 귀중한 생명을 중시하며
한결같이 신의 약속을 믿고 따르기에,
그야말로 '생명'의 충복입니다.
이보다 완벽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초월자의 '시험' 앞에서
누구보다도 순결하게 생명에의
신앙을 바치는 심복이라니.
심지어 주체성까지 간직하여
광신에 빠지지도 않은 그 탁월함..

제른 다르모어는 오롯이
'생명'에 치중한 존재들과
함께 동행하고자 합니다.


(그녀 역시 본질로의 편향보다는
실존에 치우친 사유를 가졌다.)

그러나 동시에 함정입니다.
그녀의 앞에 놓인 부조리들,
생명을 경시하며 서로에게
희생을 떠넘기던 족속들의
저열한 치부가 있어서야 비로소
아샤의 존재가 빛날 수 있었죠.

죽음이 서린 끝에야 빛난
탄생(생명)의 충복이, 아샤에 대해
가져야 할 올바른 시각이겠죠.

이전까지의 그녀는 그저
평범한 정원사의 한명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네, 검은 마법사와 제른 다르모어는
그 자체로 온전한 관념의
무결한 실현을 바랄 수밖에 없던
[편향]을 본질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항대립적인 모순,
즉 빛에는 어둠이 뒤따르고
생명에는 죽음이 서리는 법칙이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죠.

검은 마법사와 제른 다르모어에게
이 불가사의한 모순의 법칙은
오버시어와 창세신의 불장난입니다.

이러한 [본질]로부터의 모순에,
두 인물은 부조리한 법칙을
억지로 떠넘겨 받은 상태로
정해진 운명을 따라야 했습니다.



이에 따라 차근차근
*결정론적인 행보를 밟는 게,
그들 앞에 놓인 선로였죠.

(*특정한 근거 등에 따라서
미래가 미리 결정됐다고 보는 이론.)

이런 운명이 그들은 저주스럽습니다.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습니다.
길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심한 거죠.


('나로서의 나'를 원하는 모습.
그럼에도 쟝의 포옹을 잃은 그녀는
결국 파멸로의 행보를 걸었다.)

'이항대립적인 족쇄를 채우고는,
정해진 운명이나 결정된 미래로
나는 물론이요, 인간과 같은
지성체 모두를 구속하겠다면,
아예 근간에서부터 모든 걸
뒤집어 엎어주고야 말겠다.'

이는 타나마저도 동조해서
그녀가 검은 마법사와 합일해,
구세계의 파멸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본질]로 인해 구속됐다면
[실존]으로써 자유를 되찾겠다는
거대한 반역을 욕망한 거죠.



"길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나?
그대는 결국 대적자의 힘을
끌어내지 못한 채 사라진다.
그것이 정해진 운명, 결정된 미래."

검은 마법사가 최후의 결전에서
건넨 대사의 일부입니다.

노골적인 도발 같겠지만
그의 삶과 선택을 감안하면
실은 스스로에게 던진 조소이며,
무의식적인 도움의 요청입니다.
운명론과 결정론을 들먹이며
자신에게도 채워진 족쇄를
드러내는 대사이기도 하죠.

꿈이 원대할수록 절망이 컸기에
꿈이 미약한 이들로부터
오히려 희망을 찾습니다.

네, 모순과 역설의 시련에
본질을 따라야 했던 초월자는,
설탕 다섯 스푼만으로도
스스로를 지탱하는 실존에서
뒤집힌 답을 이끌어냅니다.

나무의 뿌리가 나뭇가지에게
꽃을 피우고 씨앗을 퍼뜨림이
가능한지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최종보스로서의 그를 
물리친 뒤, 하얀 마법사의 대사는?



"운명의 길을 누군가가
정해줬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새긴 신념..
그렇게 만들어진 영혼..

그건 누군가의 간섭으로 흔들리지도,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경험하면서
만들어지는 결정체이지요."

어둠으로도 꺾인 하얀 마법사가
결국 설탕 다섯 스푼의 이야기를
직접 꺼내주시네요, 고맙게도.

[본질]이 존재를 출발시키며
앞선 때에 정해진 씨앗이라면,
[실존]인 설탕 다섯 스푼은
다른 존재자가 아닌 자신이
직접 정하는 나뭇잎입니다.



단풍잎처럼 낙엽이 된 뒤,
바람을 타고 정처없지만
자유로이 떠돌게 될 테죠.

특히나 남의 눈치 따위에
경도되어 정한 인생의 지표는,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본래적인 삶을 자아냅니다.
(*독일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자.)

'스스로 정해서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어나가는 이정표,
나만의 특별한 설탕 다섯 스푼.'

이 개념을 계속 떠든 이유입니다.
[본질]에 반립하는 [실존]..

실존이 직접 정하는 것이라면,
본질은 당연히 그 반대겠죠?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장 폴 사르트르)

네, [본질]이란 철학개념은
결국 시작이 정해진 만큼,
그 경위 또한 결정된 셈이고,
따라서 운명이나 미래가
미리 결정된다는 믿음을 낳습니다.

앞서 본 운명론과 결정론이죠.

*존재자마다 삶의 목적이
미리 특정됐다고 믿거나,
**일정한 조건만 만족된다면
미래는 예측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목적론적 운명론)
(**결정론, 종류가 허벌나게 많음.)

우리에게 신나게 줘터진 후에
검은 마법사의 대사에서는,
위 내용을 부정해버리면서 
운명론이나 결정론, 그리고 [본질]을 
함께 부정해버린 셈이 되는 거죠.

단지, 검은 마법사의 경우는
신세계의 구축을 통해
(심지어 스스로 소멸까지 하면서)
법칙 자체를 재구성하려 했다면,
제른 다르모어의 경우는
세계 안의 존재자들의 갈망을
편향으로 몰아붙이는 방법을
선택했을 따름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겪은 서사는
한편으로 '선발전'이었습니다.

검은 마법사가 군단장을,
제른 다르모어가 사도들을
도구로서 써먹었다는 묘사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우시던가요?

이제는 시각을 좀 바꿔봅시다.


("열세 개의 별 아래, 진실된 세계를!"

다르모어의 사도들은 누가 봐도
예수와 열두 사도를 차용했다.
동시에 영지주의 속 집정관이기에
단체 구호는 세계를 거짓으로 봤다.)

'군단장과 사도는 모두
선발전을 위한 거름망이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설명이
훨씬 쉽게 이뤄집니다.

영지주의자들처럼 그들은
스스로를 '선택된 소수'로 보아
[편향]을 이룬 결말 따위나
미리 음미한 바보들이었습니다.
(운명론이나 결정론에 충실한 탓.)

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부터
승리감에 도취된 경우도 많았죠.

불안한 방황 속에서도
실존을 놓지 않은 인물만이
'대적자'로 선발되는 것도,
또 그보다 더한 과정을 버틴 끝에
신의 창을 품는 것도 모두
설계라면 설계가 됩니다.

아샤의 앞에 있던 죽음처럼
대적자의 앞에 놓인 [편향]은,
앞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포용]을 비출 거울이 되며
선발을 위한 거름망입니다.

대적자가 본질을 넘어설
실존을 담을 그릇이라면,
군단장과 사도는 이를 위해
포용을 비출 편향의 그릇이죠.



그래서 소멸을 앞둔 카링은
나지막이 속삭인 겁니다.

"너는 어떻게.. 
무엇도 잃지 않은 채로..
그렇게.. 빛날 수가.."

이는 그녀가 거울 역할이 되어,
대적자의 실존을 포기하지 않는
결의를 비추고 있던 탓입니다.

한편, 위 대사를 볼 때면
그녀가 상자 속 파란 단추를 보며
고된 마음을 추스리려 할 때,
다르모어가 개입하지 않은
다른 세계선이 선명해지더군요.

신직업으로 출시되어 개처럼
일일 퀘스트 지옥을 윤회하는..
해결사 동료들을 소모품처럼
희생시킨 일에 대해 속죄하며
위령제를 올리는 모습이 말이죠.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합시다.
아래는 검은 마법사가 소멸하며
우리와 나눈 대화입니다.



먼저, 대적자의 대사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숨을 걸 각오가 아니라,
살아가려는.. 마음."

오글거리게만 느껴질 대사지만,
대적자가 창세의 알 앞에서
내뱉은 저 대사도 실존주의의
사유가 잘 담긴 듯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이 삶의 태도를
다루는 사상인 만큼,
그 전제 조건은 '삶'이니까요.

"당신이 타나의 목숨을
빼앗길 거부한 순간,
운명의 축은 이미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의 우리가 내린 선택에서
타나는 쟝의 이름을 속삭였고,
때문에 다른 이의 실존마저
존중한 대적자는 생사여탈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모라스의 늪에서처럼 그녀를 
자유로이 놔줄 심산이었겠죠.

자, 진짜 마지막입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의 무엇이 운명을,
그 단단한 사슬을 부순 겁니까?"

이에 대적자의 대답은
바로 '분노'였습니다.


(실존주의 문학 작품으로
노벨상까지 수상한 알베르 까뮈.)

이 분노를 실존주의 철학의
용어로 옮기자면 '반항'이겠죠.

네, 실존주의는 반항의 철학입니다.
'나'에게 쏟아진 불화와 부조리에
마냥 순종적으로 굴지 않죠.
부당한 처우나 환경에 아래 턱부터
들이받고 보는 철학입니다.

모든 존재자는 세상에 던져지나,
사유를 품는 존재자, 즉 현존재는
미완으로부터 완성으로 나아가려고
분투를 멈추지 않으며, 미래를 향해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기투합니다.

(*던지다, 피투의 반댓말.
세상에 내던져짐을 실존주의는
피투라고 자주 표현함.)

세상 속에 우연히 맺힌 존재자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실존,
각자의 '설탕 다섯 스푼'이
이 단풍잎의 서사를 담은
이원론적 판타지 세계에서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한
열쇠라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자, 설탕 한가득인 커피는
진작에 다 드셨겠네요.
상당히 장황한 글이었지만,
하고픈 얘기는 간단합니다.

메이플스토리의 서사에도
본질주의와 실존주의를 두어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뼈대가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영지주의를
뒤집어 채용하는 방식으로
[편향된 본질로의 착각] 앞에
[포용하는 실존의 시련]을
그린 것이 우리가 이제까지
겪은 단풍잎의 서사입니다.

그런 만큼 실존의 개념이,
즉 ‘설탕 다섯 스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습니다.
메이플스토리에서는 모험가의
여정을 출발시킨 '단풍잎'이
그들의 설탕 다섯 스푼인 셈이죠.

‘나다운 나'가 있어야 비로소
‘내가 거니는 세계’가 있고,
‘내가 탐구하는 진리'를 두어
이를 위한 ‘내가 모험하는 여정'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필 그 매체가 비디오 게임의
전통적 장르의 대표인 RPG인 점도
제게는 의미심장했습니다.



RPG의 유래는 미니어쳐 워게임,
즉 유럽의 근대 말기에 군사용으로
장기말을 활용한 작전구상도에서
복잡한 요소를 간소화한 뒤,
참여자가 움직일 장기말마다의
인물 설정과 성장요소를 덧씌운
‘*역할 수행 게임'이었으니까요.
(*Roll Playing Game.)

군사용 지도 위로 사람은
사람이 아닌 편성부대였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HP, 즉
생명력 개념인 'Health Point'도
원래 'Hit Point'가 유래입니다.

네, 부대의 피격 내구도 말이죠.
각 편성부대가 공격을 당할 때,
얼마나 버틸지 알아야 했거든요.

그런 미니어쳐 워게임에서
각 개체마다로 눈을 돌려
개인에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곧장 판타지적 서사를 엮어
‘세계 속의 나’를 구상한 게
바로 RPG의 유래였습니다.

원대한 본질의 틈으로부터
명확한 실존을 잡는 이야기,
한때는 그런 설탕 다섯 스푼이
제게는 이 RPG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만의 존재감을 지탱해주거나
살아 숨쉰다는 실감을 안기는 무언가,
당신만의 실존을 품고 계신가요?

롯소의 조언을 살짝 비틀어
이만 마무리 인사를 합니다.

"사람이 '나로서' 사는 법은 간단해.
설탕 맛만 기억하면 돼."

이 게시글로 같은 추억을
향유한 분들은 자기존재감을,
그렇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각자 '나'만의 이정표를 찾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길 바라며,
장황한 커피 권장문을 마칩니다.



그럼 라-멘.

p.s. 자유게시판은 글 리젠이 너무 빨라
이런 글은 생존할 수가 없더군요..(쥬륵..)
워낙 길어서 여기에 두면
다른 누군가라도 읽을 것 같아
이렇게 남겨둡니다..